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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거친호흡 몰아쉬며 ^^ 굽이치는 산맥넘어 손의 자유, 발의 자유, 정신의 자유를 찾는다. 기억은 희미해지기에 이곳에 기록을 남긴다
문화문학음악

남한산성

by 한국의산천 2007. 5. 20.

민족의 자존심과 백성을 위한 성군의 굴복 통한의 역사가 서려있는 남한산성    

 

답사 2007년 5월 20일(일요일). 한국의산천

답사코스 : 석촌동 백제초기적석총 - 삼전도 碑 -남한산성     

 

▲ 산성과 신록 ⓒ 2007 한국의산천 

 

370년 전 남한산성의 그 겨울은 매우 추웠습니다.1637년 1월 30일 조선왕 인조(仁祖)는 성문을 열고 세자와 백관(百官) 등 500여명과 함께 삼전도(三田渡)를 향해 나아갔습니다. 

 

청(淸) 태종 홍타이치의 20만 대군에 포위된 지 45일 만이었다. 삼전도(現 송파)에는 청나라 병사들이 벌써 수항단(受降壇)을 높이 쌓아 놓고 거기서 인조는 평민의 옷을 입고, 황옥(黃屋)을 깔고 앉은 청 태종에게 삼배구고두례(三拜九叩頭禮: 세 번 절하면서 그때마다 세 번씩 머리를 땅에 조아리는 것)를 하며 항복해야했다. 그러나 청 태종의 트집으로, 인조는 피투성이가 될 정도로 몇십번 머리를 땅에 부딪쳐야했다. 그렇게 항복의 예(禮)를 올렸습니다. 

 

또한 청태종은 자신의 승전을 기념하는 비를 세우라고 조선에 명하게 되고 비석은 당시 대제학이던 이경석이 비문을 짓고 참판 오준이 글자를 썼으며 참판 여이징이 전자(한자 서체의 하나)를 새겼다 

조선 왕조가 창업한 지 246년, 임금이 적장 앞에 나가 머리를 조아린 일은 이것이 처음이었습니다. 그러나 나라가 패(敗)하면 치욕만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이 병자호란(丙子胡亂)때 60여만명의 남녀가 만주로 끌려갔다는 기록이 남아있습니다.    

이것뿐만이 아니라 두 아들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은 인질로 청에 끌려갔고, (후에 고향으로 돌아온) 환향녀는 이혼문제를 낳았다.    

 

환향녀( 還:돌아올 환, 鄕:시골향 女 : 고향으로 돌아온 여성 - 후에는 화냥녀로 구개음화되었다)

 

▲ 남한산성 성벽  ⓒ 2007 한국의산천 

 

삼전도의 비극을 놓고 훗날 두고두고 이런저런 말이 오갔습니다만, 항복밖에 달리 길이 없었습니다. 20만 대군에 둘러쌓인 성 안에는 1만 3000명의 병사와 40일분의 양식밖에 없었습니다. 그 병사들마저 배를 주리고 추위에 떨며 몸으로 새벽 서리를 받아내야 했습니다.

그뿐입니까. 성밖에선 청병(淸兵)들이 어미는 진중(陣中)에 붙잡아 두고, 그 어미 앞에서 갓난아이를 언 땅에 굴려 죽이는 짐승 같은 짓을 심심풀이로 해대고 있었으니 말입니다. 항복 하지 않을 수 없었었던 오늘에도 잊지 말아야 할 역사적 사실입니다.

 

서울을 지키는 외곽에 4대 요새가 있었다. 북쪽의 개성, 남쪽의 수원, 서쪽의 강화, 동쪽의 광주였다. 동쪽의 광주에는 남한산성이 있었다. 

 

서울에서 동남쪽으로 24 km, 성남시에서 북동쪽으로 6km 떨어져 있는 남한산에 위치하고 있으며, 길이는 9.05km, 높이는 7.3m 이다.

원래 2천여년 전, 고구려 동명왕의 아들 백제의 시조 온조왕 때 쌓은 토성이었으나, 이를 신라 문무왕 때 다시 쌓아 '주장성'을 만들고, 그 옛터를 활용하여 후대에도 여러번 고쳐 쌓다가, 조선조 광해군 때(1621) 본격적으로 축성하였다 한다. 

  

▲ 남한산성 ⓒ 2007 한국의산천

 

석축으로 쌓은 남한산성의 둘레는 약 8km이다. 자연석을 써 큰돌을 아래로, 작은 돌을 위로 쌓았다. 동서남북에 각각 4개의 문과 문루, 8개의 암문을 내었으며 동서남북 4곳에 장대가 있었다.

성 안에는 수어청을 두고 관아과 창고, 행궁을 건립했다. 유사시에 거처할 행궁은 73칸, 하궐 154칸으로, 모두 227칸을 이 때 지었다. 80개의 우물, 45개의 샘을 만들고 광주읍의 행정처도 산성 안으로 옮겼다. 이쯤되면 남한산성의 중요성과 성안이 유치 가능 인구도 짐작해볼 수 있을 것이다.

산성이 축조되고 처음으로 시행(인조 17년, 1639)된 기동 훈련에 참가한 인원만 해도 1만 2,700명이었다. 그러나 지금 성곽에 남아 있는 건물은 불과 몇 안 된다.    

 

동,남문과 서장대, 현절사, 문무관, 장경사, 지수당, 영월정, 침괘정, 이서 장군사당, 숭렬전, 보, 루, 돈대 등이 남아있다. 그 중 4대문과 수어장대, 서문 중간쯤의 일부 성곽은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다.

  

 ▲ 남한산성 올라 가는 길 ⓒ 2007 한국의산천  

 

남한산성(南漢山城)  

성과 성벽 건축물지정종목 : 사적 제13호  
제작시기 : 1395년(태조 4) 건립, 1704년(숙종 30) 중수
소재지 : 경기 광주시 중부면 산성리  

 

 ▲ 남한산성 성벽 ⓒ 2007 한국의산천

 

1636년 12월14일, 수구문을 빠져나온 인조가 이곳 산성에 다다른 시간은 자정이 가까운 때였다. 다음날 새벽, 인조는 강화도로 가려고 길을 나섰다. 그러나 밤새 내린 눈에 산길이 얼어붙어 말이 헛발을 디딜 뿐 더러 길이 미끄러워 왕이 말에서 내려 걸어야 했다.

그러나 몰아치는 눈보라를 뚫지 못하고 되돌아오고 말았으니 그날 밤, 맑게 갠 하늘에서 유성이 떨어졌다고 실록은 기록하고 있다.그날부터였다. 왕이 산성에 갇혔다가 1637년 1월30일, 삼전도로 내려가 칸에게 치욕적인 삼배구고두례(三拜九叩頭禮)를 하며 항복을 했다. 

 

그 47일 동안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무수히 많은 일들이 일어났고 대신들 사이에는 극과 극을 달리는 수많은 말들이 오가며 첨예한 대립을 이어나가야 했다. 그러던 1월18일, 청음(淸陰) 김상헌이 지천(遲川) 최명길(1586~1647)이 지니고 있던 국서(國書)를 찢어버리는 일이 생기고 말았다.  

 

▲ 송파구 석촌동 삼전도비 곁에 세워놓은 인조의 항복 장면.  ⓒ 2007 한국의산천

 

눈이 많이 내렸다는 그날, 김상헌이 찢어야 했던 국서의 내용은 참담했다. 칸은 1월16일, 성 안의 사람들이 모두 볼 수 있도록 깃발에 무조건 항복하라는 초항(招降)이라는 글을 써서 흔들지 않았던가. 그 다음날, “대청국(大淸國)의 관온 인성 황제(寬溫仁聖皇帝)는 조선 국왕에게 조유(詔諭)한다”는 글을 보냈으니 조유는 ‘타일러 이른다’는 말이 아닌가. 그럼에도 최명길은 “조선 국왕은 삼가 대청국 관온 인성 황제에게 글을 올립니다”라는 제목의 글을 지었으며 칸을 폐하(陛下)라고까지 불렀으니 김상헌은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한 것이다.

 

더구나 처음에는 칸을 폐하라고 부르지 않았지만 청국에서 요구하므로 다시 폐하라는 말을 덧대어 가져간 것이다. 그 말을 들은 김상헌을 위시한 척화파들의 자존(自存)은 어떠했을까.

국서를 찢었건만 결국 최명길은 그것을 들고 칸에게 나아갔으며 1월19일, 동계(桐溪) 정온(1569~1641)은 최명길이 나라를 팔아먹었다는 차자를 올렸다. 그 내용은 최명길이 칸에게 조선의 국왕을 신(臣)이라고 했으니 그것은 결국 칸을 군(君)으로 인정한다는 것이며 이는 항복문서나 다름없는 것이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아직 신이라고 하기 전까지는 군신의 관계가 아닌 대등한 관계였지만 그 한 글자 때문에 군신의 관계가 성립되었으니 정온은 그 말을 듣고 간담이 다 떨어져 목이 메어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고 하고 있다.  

 


  ▲ 남한산성 남문 ⓒ 2007 한국의산천

 

남한산성은 경기도 광주군 중부면 산성리에 있는 조선시대의 산성으로서 <광주군지>에는 8km 정도라고 기술되어 있으며 1:5,000 지형도를 기본으로 한 GIS측정 결과 산성의 둘레는 옹성을 포함하여 10,841.5m로 확인되었다.

<남한지>에서는 성벽 안의 5옹성과, 16개의 암문, 125개소의 군포, 4개소의 장대가 있다

 

그중 원성은 대부분 인조 2년(1624)부터 인조 4년(1626)까지 축성된 것으로 전체 둘레는 7,545m이고, 성 내부의 면적은 2,216,637㎡(643,307평)이다.

 

     

▲ 수어장대 (남문에서 약1km 걸으면 나온다)ⓒ 2007 한국의산천 


 
북한산성과 함께 도성(都城)을 지키던 서울남부의 산성으로써 지금은 동, 서, 남문루와 장대(將臺), 돈대(墩臺), 암문(暗門), 우물, 보(堡), 누(壘) 등의 방어시설과 관해(官力 : 관청), 군사훈련시설 등이 남아 있다. 

 

대외적으로는 후금의 위협이 커지고 대내적으로는 이괄(李适)의 난 등으로 어려웠던 조선 인조대에 남한산성은 현재의 모습으로 대대적인 개수를 하였다. 이 때의 공사는 각성(覺性)을 도총섭(都摠攝)으로 삼아 팔도의 승군을 동원하여 진행되었다. 승군의 사역과 보호를 위하여 장경사(長慶寺)를 비롯한 7개의 사찰이 새로 건립되었으나 현존하는 사찰은 장경사뿐이다. 그 뒤 순조 때에 이르기까지 각종의 시설이 정비되었다.


 
이후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 인조가 이곳으로 피란하였는데, 이 때 수어사인 이시백(李時白)은 서성을, 총융대장 이서는 북성, 호위대장(扈衛大將) 구굉(具宏)은 남성, 도감대장(都監大將) 신경진(申景所)은 동성 망월대, 원두표(元斗杓)는 북문을 지켰다. 그러나 강화가 함락되며...   


 
 
  
▲  ⓒ 2007 한국의산천
남한산성 건축물의 구조 및 형태  
 
남한산성의 성곽은 기본적으로 원성과 외성으로 구분된다.
원성은 인조 2년(1624)에 수축한 남한산성의 영역으로서 하나의 폐곡선으로 연결될 수 있는 본성을 의미한다. 이외에 외성으로는 동쪽에 봉암성과 한봉성이 있고, 남쪽에 신남성이 있는데 이곳에는 동·서 두 개의 돈대가 구축되어 있다.
원성의 성벽은 사각추형으로 정연하게 다듬은 성돌을 사용하였다. 남벽과 북벽의 일부가 훼손된 채로 있다.  

   

 ▲ 수어장대 (守禦將臺) ⓒ 2007 한국의산천

 

수어장대 (守禦將臺)

 

경기도 광주시 중부면 산성리 815-1 남한산성 안에 있는 조선 후기의 목조건물.
지정번호  경기유형문화재 제1호
지정연도  1972년 5월 4일 
시대  조선 후기
면적  1층 면적 105.08㎡, 2층 면적 43.29㎡.
분류  성곽 건축 
   
1972년 5월 4일 경기도유형문화재 제1호로 지정되었다. 크기는 1층 면적 105.08㎡, 2층 면적 43.29㎡이다. 1624년(인조 2) 남한산성을 축조할 때 지은 4개의 수어장대 가운데 유일하게 남아 있는 중요한 건물이며, 수어청의 장관(將官)들이 군사를 지휘하던 곳이다.

 

하부 구조는 자연석을 허튼층으로 쌓은 낮은 축대 위에 한 단 높여 다듬은 돌로 기단을 마련하고, 맨 바깥 둘레에는 8모뿔대 주춧돌을 세우고 안두리기둥 밑에는 그보다 낮은 반구형(半球形)의 주춧돌을 받쳤다.  

 

기둥은 모두 민흘림 둥근 기둥이고, 1층은 초익공, 2층은 2익공으로 되어 있다. 가구(架構)는 5량가(五樑架)로서 고주(高柱) 위에 대들보를 건너지르고 그 위에 동자기둥을 세워 마루보를 받쳤다. 지붕마루는 모두 양성바름을 하였고 기와골 끝에는 막새를 사용하였다. 위층으로 오르는 계단은 아래층 내진의 북동쪽 칸에 설치되어 있으며, 단청은 모로단청이다.

 

바깥 정면에 ‘守禦將臺’라고 쓴 현판이 걸려 있다 안쪽에 걸려있던  <무망루(無忘樓)>라고 쓴 현판은 바로 옆에 누각을 새로지어 걸어 놓았다.  

 

▲ 무망루(無忘樓) 현판 ⓒ 2007 한국의산천 

 

수어장대 안쪽에는 걸려있던 <무망루> 현판은 수어장대 옆에 다시 누각을 짓고 그곳에 별도로 안치하였다.<무망루>란 병자호란 때 인조가 겪은 시련과 아들 효종이 청나라에 대한 복수로 북쪽 땅을 빼앗으려다 실패하고 죽은 비통함을 잊지 말자는 뜻에서 붙인 이름이다.

 

▲ 전망이 좋은 영춘정 ⓒ 2007 한국의산천

 남한산성 서문 쪽 성가퀴이다. 왼쪽이 성 안이며 오른쪽은 성 밖이다. 인조는 서문을 통해 한강 기슭 삼전도로 향했으며 서문 일대에서 한강 조망이 빼어나다. 

 

 ▲ 수어정대에 오른 가족 ⓒ 2007 한국의산천

 

 

  ▲ 성벽에는 파란 이끼와 담장이 넝쿨이 수를 놓고 있다 . ⓒ 2007 한국의산천

 

1월22일, 강화도가 함락되자 김상용은 스스로 목숨을 끊고 청에게 항거했으며 다음날인 23일 김상용의 아우인 김상헌은 관을 벗고 대궐 문 밖에서 짚을 깔고 엎드려 차라리 적진에 나아가 죽게 해 줄 것을 왕에게 청했다.

이는 청을 섬기느니 오히려 목숨을 끊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 행동이었으며 급기야 28일에 정온은 할복으로, 또 김상헌은 단식 끝에 목을 매어 자살을 시도했지만 둘 모두 목숨을 잃지는 않았다.

그 다음날인 29일, 화친을 배척한 인물을 잡아서 보내라는 청의 끊임없는 요구로 윤집과 오달제가 왕과 이별주를 끝으로 최명길을 따라서 칸에게로 갔다. 그날 최명길은 초구 곧 담비 가죽으로 만든 갖옷을 얻어 입고 칸을 향해 네번 엎드려 절했다고 한다.

  

이윽고 1월30일, 왕은 남염의(藍染衣)를 입고 흰말을 타고는 이곳 서문을 통해 성을 나가야 했다. 삼전도에 다다라 칸에게 삼배구고두례를 행하고 칸과 함께 술을 마셨다. 그런데 술상이 파할 무렵 칸은 두 마리의 개에게 상에 차려져 있던 고기를 베어서 던져 주었다고 하니 그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밭 한 가운데에 우두커니 앉아있던 왕에게 도성으로 돌아가도 좋다는 칸의 명령이 떨어진 것은 해거름이었다. 

 

소파진(所波津)으로 한강을 건넌 왕을 향해 사로잡힌 백성들은 울부짖었다. “우리 임금이시여, 우리 임금이시여. 우리를 버리고 가시나이까(吾君 吾君, 捨我而去乎)?”라고 말이다.  

 

 ▲ 성벽 옆과 성벽 아래로 길이 있다.ⓒ 2007 한국의산천

 

그렇게 병자호란은 끝이 났는가 싶지만 삼학사들의 강개한 절의는 그 후부터 나타난다. 물론 남한산성 안에서 척화를 주창하는 직언(直言)을 서슴지 않았지만 오히려 그 단단한 마음은 청국으로 끌려가 칸 앞에서 더욱 빛났다. 

 

홍익한은 왕이 산성으로 피하던 1636년 12월14일, 서윤(庶尹)의 직책으로 이미 청군이 물밀듯이 진격해 오고 있는 평양의 보산성으로 떠나야 했다. 최명길이 화의에 반대해 척화를 주창한 그를 적진의 임지로 보낸 것이다. 보산성에 머물던 홍익한이 청에 끌려간 것은 1637년 2월12일이다. 2월25일 심양에 다다른 그는 별관에 갇혀서 음식을 전폐했다고 한다. 한번 죽을 목숨인데 어찌 청의 황제가 내린 음식에 입을 댈 수 있느냐고 하면서 말이다.

 

3월5일, 칸이 그를 불렀다. 그러나 청의 황제인 칸 앞에서도 홍익한은 당당했다. 무릎을 꿇지 않고 서 있는 그를 향해 칸이 “네가 왜 무릎을 꿇지 않고 이같이 거만하게 서 있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홍익한은 “이 무릎을 어찌 너에게 꿇을 수 있겠느냐”고 했을 뿐 더러 다시 칸이 무엇 때문에 척화를 주창하여 두 나라 사이에 틈이 생기게 했느냐고 하자 “너는 우리나라와 형제가 되기로 약속을 해 놓고 도리어 황제를 자칭하여 우리를 신하로 삼으려고 하였으니 맹약을 위배한 실수가 과연 너에게 있는 것이냐, 우리에게 있는 것이냐?”라고 했다.  

 그러자 칸은 잠시 말문이 막혔다. 다시 말을 이은 칸이 그토록 척화를 주창하던 사람이 어찌 싸움을 하지 않고 이렇게 잡혀 와 있느냐고 묻자 “내가 잡고 있는 것은 다만 대의(大義)뿐이다. 성패(成敗)와 존망(存亡)은 논할 필요가 없다. 만일 우리나라 신민(臣民)들이 하나같이 나의 뜻과 같았다면 너의 나라는 벌써 망했을 것이다”며 옷을 벗어 던지며 어서 마디마디 저며서 죽이라고 했다. 

 

 ▲ 철쭉과 남한산성 ⓒ 2007 한국의산천

 

윤집과 오달제 또한 그와 다르지 않았다. 4월15일, 심양에 도착한 그들은 도중에 척화를 한 인물들을 더 말해주면 살려 주겠다는 회유와 협박에도 “죽음은 우리가 두려워하는 바가 아니다. 내가 내 머리를 이고 왔으니 자르는 것이 마땅하면 곧 자르고 더 이상 말하지 마라”며 거절했다.

그들은 4월19일, 끝내 청에게 굴복하지 않고 당당하게 심양성 서문 밖 형장에서 이슬로 사라졌으니 어찌 그들을 아름답다고 이야기하지 않을 수 있을까.

 

내가 떠올리는 장면은 남한산성 안에서의 처절한 모습이 아니다. 목숨조차도 두려워하지 않으며 칸 앞에 당당하게 서 있던 삼학사의 가슴 시리도록 아름다운 모습인 것이다. 그것에 명분론과 현실론이라는 잣대를 들이대고 싶지는 않다. 다만 내가 그리워하는 것은 자신에게 주어진 시대를 헤쳐 나가야 했던 지식인들의 강개하면서도 애절한 편린인 것이다.

 

 ▲ 그 옛날의 아름다운 퍼즐 남한산성ⓒ 2007 한국의산천

 

▲ 남한산성으로 올라 가는 길ⓒ 2007 한국의산천 

흔히 남한산성을 위락지 또는 유원지 정도로 생각하지만 남한산성은 우리민족의 자존이고 가슴아픈 사연을 지닌 곳이다.그리고 생각보다 크고, 높고, 가파른 산이다.

 

 

▲ 남문 입구의 비석군. 선정을 베풀었던 이들의 불망비이다.ⓒ 2007 한국의산천 

 

  

▲ 남문 입구의 비석군 안내문ⓒ 2007 한국의산천

 

  ▲ 성문의 완벽한 철갑장치 ⓒ  2007 한국의산천 

 

▲ 산성 아래 산세도  가파르다.ⓒ 2007 한국의산천

 

 ▲ 남문 ⓒ 2007 한국의산천 

  

▲ 성벽을 감씨는 담장이 넝쿨 ⓒ 2007 한국의산천

 

 ▲ 수어장대 ⓒ 2007 한국의산천

 

 

수어장대에서 잠시 휴식 ⓒ 2007 한국의산천

 

병자호란 (丙子胡亂) 1636년(인조 14) 12월∼1637년 1월에 청나라의 제2차 침구(侵寇)로 일어난 조선, 청나라의 싸움. 조선과 후금은 형제지국의 맹약을 하고 양국관계는 일단락되었다. 그러나 1632년 후금은 만주 전역을 석권하고 명나라 북경을 공격하면서, 양국관계를 형제지국에서 군신지의(君臣之義)로 고칠 것과 황금·백금 1만 냥, 전마(戰馬) 3,000필 등 세폐(歲幣)와 정병(精兵) 3만을 요구하였다.

또한 1636년 2월 용골대(龍骨大)·마부태(馬夫太) 등을 보내어 조선의 신사(臣事)를 강요하였으나, 인조는 후금사신의 접견마저 거절하고 8도에 선전유문(宣戰諭文)을 내려, 후금과 결전(決戰)할 의사를 굳혔다. 

 

1636년 4월 후금의 태종은 황제를 칭하고 국호를 청(淸)이라고 고쳤으며, 조선이 강경한 자세를 보이자 왕자·대신·척화론자(斥和論者)를 인질로 보내 사죄하지 않으면 공격하겠다고 위협하였다. 그러나 조선은 주화론자(主和論者)보다는 척화론자가 강하여 청나라의 요구를 계속 묵살하였다. 12월 2일 이런 조선의 도전적 태도에 분개한 청나라 태종은, 청·몽골·한인(漢人)으로 편성한 10만 대군을 스스로 거느리고 수도 선양(瀋陽)을 떠나, 9일 압록강을 건너 쳐들어왔다.


의주부윤 임경업(林慶業)은 백마산성(白馬山城:義州)을 굳게 지켜 청군의 침입에 대비하였으나, 선봉장 마부대는 이 길을 피하여 서울로 진격하였다. 

13일에서야 조정에서는 청나라 군의 침입사실을 알았고, 14일 적은 개성(開城)을 통과하였다. 조정에서는 급히 판윤 김경징(金慶徵)을 검찰사로, 강화유수 장신(張紳)을 주사대장(舟師大將)으로, 심기원(沈器遠)을 유도대장(留都大將)으로 삼아 강화·서울을 수비하게 하였다. 또 원임대신(原任大臣) 윤방(尹昉)과 김상용(金尙容)으로 하여금 종묘사직의 신주(神主)와, 세자비·원손(元孫)·봉림대군(鳳林大君)·인평대군(麟坪大君)을 비롯한 종실(宗室) 등을 강화로 피난하게 하였다.
14일 밤 인조도 강화로 피난하려 하였으나 이미 청나라 군에 의해 길이 막혀, 소현세자(昭顯世子)와 백관을 거느리고 남한산성으로 피하였다.   

 

▲ 성벽을 따라 도는 멋진 산행 길ⓒ 2007 한국의산천

 

인조는 훈련대장 신경진(申景禛) 등에게 성을 굳게 지킬 것을 명하고, 8도에 근왕병(勤王兵)을 모집하도록 격문(檄文)을 발하였으며, 명나라에 급사(急使)를 보내어 지원을 청하였다. 그러나 16일 청나라 선봉군이 남한산성을 포위하였고, 1637년 1월 1일 태종이 도착하여 남한산성 아래 탄천(炭川)에 20만 청나라 군을 집결시켜, 성은 완전히 고립되었다.

 

성내에는 군사 1만 3000명이 절약해야 겨우 50일 정도 지탱할 수 있는 식량이 있었고, 의병과 명나라 원병은 기대할 수 없었으므로 청나라 군과의 결전은 불가능하였다. 또한 성 밖에는 청나라 군이 무고한 백성들을 죽이고 노략질하기를 일삼으며, 어미는 진중(陣中)에 잡아놓고 그 아이들은 추운 길바닥에 버려 거의 모두 굶어죽고 얼어죽었다.

 

특히 병자년은 혹독한 추위가 오래 계속되어, 노숙(露宿)한 장수·군사들은 추위와 굶주림에 기진하여 병들고 얼어죽는 자가 늘어났다. 이러한 상황에서 성내에서는 최명길(崔鳴吉) 등 주화파(主和派)와 김상헌(金相憲) 등 주전파(主戰派) 사이에 논쟁이 거듭되다가, 강화론이 우세하여 마침내 성문을 열고 항복하기로 하였다. 

 

 청나라 태종은 조선의 항복을 받아들이는 조건으로, 우선 인조가 친히 성 밖으로 나와 항복하되, 양국관계를 악화시킨 주모자 2, 3명을 잡아 인도할 것을 요구하였다.

때마침 강화도가 적에게 함락된 소식을 들어, 어쩔 수 없이 최명길 등을 적진에 보내어 항복조건을 교섭하게 하였다.

1월 28일 이에 청군은 용골대,마부대를 보내 다음과 같은 강화조약 조항을 제시하였다.   

 

1.  청나라에게 군신(君臣)의 예(禮)를 지킬 것,
2.  명나라의 연호를 폐하고 관계를 끊으며, 명나라에서 받은 고명(誥命)·책인(册印)을 내놓을 것,
3.  조선 왕의 장자·제2자 및 여러 대신의 자제를 선양에 인질로 보낼 것,
4.  성절(聖節:중국황제의 생일)·정조(正朝)·동지(冬至)·천추(千秋:중국 황후·황태자의 생일)·경조(慶弔) 등의 사절(使節)은 명나라 예에 따를 것,
5.  명나라를 칠 때 출병(出兵)을 요구하면 어기지 말 것,
6.  청나라 군이 돌아갈 때 병선(兵船) 50척을 보낼 것,
7.  내외 제신(諸臣)과 혼연을 맺어 화호(和好)를 굳게 할 것,
8.  성(城)을 신축하거나 성벽을 수축하지 말 것,
9.  기묘년(己卯年:1639)부터 일정한 세폐(歲幣)를 보낼 것 등이다.
 

 

1월 30일 인조는 세자 등 호행(扈行) 500명을 거느리고 성문을 나와, 삼전도(三田渡)에 설치된 수항단(受降壇)에서 태종에게 굴욕적인 항례(降禮)를 한 뒤, 한강을 건너 환도하였다.


청나라는 맹약(盟約)에 따라 소현세자·빈궁(嬪宮)·봉림대군 등을 인질로 하고, 척화의 주모자 홍익한·윤집(尹集)·오달제(吳達濟) 등 삼학사를 잡아, 2월 15일 철군하기 시작하였다. 이로써 조선은 완전히 명나라와는 관계를 끊고 청나라에 복속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관계는 1895년 청,일전쟁에서 청나라가 일본에 패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전후에는 많은 고아들의 수양(收養)문제와, 수만에 이르는(어느 기록에는 50만) 납치당한 이들의 속환(贖還)문제가 대두되었다. 특히 청나라 군은 납치한 양민을 전리품으로 보고, 속가(贖價)를 많이 받을 수 있는 종실,양반의 부녀를 되도록 많이 잡아가려 하였으나, 대부분 잡혀간 이들은 속가를 마련할 수 없는 가난한 사람들이었다.

속가는 싼 경우 1인당 25∼30냥이고 대개 150∼250냥이었고, 신분에 따라서 비싼 경우 1,500냥에 이르렀다. 속환은 개인·국가 모두 그 재원을 마련하는 것이 큰 일이었다. 여기에 순절(殉節)하지 못하고 살아돌아온 것은 조상에 대해 죄가 된다 하여, 속환 사녀(士女)의 이혼문제가 사회·정치문제로 대두하였다. 

 

1645년 10년의 볼모생활 끝에 세자와 봉림대군은 환국하였으나, 세자는 2개월 만에 죽었다. 인조의 뒤를 이은 효종(봉림대군)은 볼모생활의 굴욕을 되새기며, 북벌(北伐)계획을 추진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산성내 주요문화재 

 

1) 남한산성(성곽) : 국가사적 제 57호

2) 수어장대 : 도유형문화재 제 1호 산성 축성 당시 동서남북에 세워진 4개 의장대 중 으뜸가는 장대이며, 또한 유일하게 남은 장대이다. 성곽을 따라 멀리 내다보며 적을 감시하고 주변을 살피기 위해 세워 진 목조건물 2층 집이다.

3) 숭열전 : 도유형문화재 제 2호 백제의 시조 온조왕을 모시는 사당으로 정조 19년(1795)에 숭렬전이라는 편액이 내려 졌다.

4) 청량당 : 도유형문화재 제 3호 남한산성 축성 때 모락을 받고 죽은 이회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세운 사당이다.

5) 현절사 : 도유형문화재 제 4호 병자호란 때 청에 끝까지 항복을 반대한 삼학사, 홍익한, 윤집, 오달제의 넋과 우국충 정을 기리기 위해 세운 사당이다.

6) 장경사 : 도문화재자료 제 15호 남한산성 축성과 유지, 보수를 위해 산성 내에 두었던 9개의 사찰 중 하나로 지금까지 유일하게 남아 있는 절이다.

7) 침괘정 : 도유형문화재 제 5호

8) 연무관 : 도유형문화재 제 6호

9) 지수당 : 도유형문화재 제 14호

10) 망월사 : 도기념물 제 111호

11) 개원사 : 도기념물 제 119호

 

 

 ▲ 산성길을 걷는  아름다운 모습.ⓒ 2007 한국의산천

 

남한산성은 사적 제 57호와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어 있다. 등산을 겸한 봄, 가을의 답사는 성남시를 거치는 남문코스가 좋고, 여름에는 시원한 계곡을 끼고 있는 동문코스가 좋다.

 

 

등산코스

1) 산성종로(로타리) - 북문 - 서문 - 수어장대 - 영춘정 - 남문 - 산성종로(로타리) (5km, 1시간 45분 소요)

2) 산성종로(로타리) - 영월정 - 숭열전 - 수어장대 - 서문 - 국청사 - 산성종로(로타리) (4km, 1시간 20분 소요)

3) 관리사무소 - 현절사 - 벌봉 - 장경사 - 망원사 - 지수당 - 관리사무소 (5km, 1시간 35분 소요)

4) 산성종로(로타리) - 남문 - 남장대터 - 동문 - 개원사 - 산성종로(로타리) (4.5km, 1시간 30분 소요)

5) 관리사무소 - 동문 - 동장대터 - 북문 - 서문 - 수어장대 - 영춘정 - 남문 - 동문 (8km, 3시간 5분 소요)

 

교통안내 

남문 진입로

1 잠실 - 복정 사거리 - 약진로 - 남문 - 산성 로타리

2 경부고속도로 양재 IC - 헌인릉 앞 - 세곡동 - 복정사거리 - 약진로 - 남문 - 산성로 타리

3 분당 - 모란 - 태평사거리 - 시청앞 - 신흥주공 - 남문 - 산성 로타리

4 수원 - 신갈 - 분당 - 모란 - 태평사거리 - 시청앞 - 신흥주공 - 남문 - 산성 로타리

5 안양 - 의왕시 - 분당 - 모란 - 태평사거리 - 시청앞 - 신흥주공 - 남문 - 산성로타리

 

동문 진입로

1 워커힐 - 천호대교 - 길동 - 중부고속도로 상일동IC - 황산 삼거리(국도 43번) - 엄미 리(은고개) - 광지원 - 동문 - 산성 로타리

2 중부고속도로 경안IC(서울, 하남시 국도 43번) - 광지원 - 동문 - 산성 로타리 (지하철) 산성역에서 하차 후 2번출구에서 좌석버스 9번 승차 [버스] 동서울터미널 강변역에서 13-2번 타고 남한산성입구에서 15-1번으로 환승, 종점에서 하차

 

잘 짜여진 단단한 성 남한산성 >>> https://koreasan.tistory.com/15605984

 

잘 짜여진 단단한 성 남한산성

한번도 점령당하지 않고 깨지지 않은 남한산성 [2014 · 5 · 10 · 하늘 파란 토요일] 택리지의 기록처럼 남한산성은 광주, 성남이요 성남하면 남한산성이 떠오르는 곳이다. 그렇다 성의 남쪽에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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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전도碑 상세히 보기 https://koreasan.tistory.com/11550604

 

남한산성 삼전도비 삼배구고

삼전도碑(비)를 찾아서 (석촌동) (현제는 송파 호수 옆으로 이전되었다) 민족의 자존심과 백성을 위한 성군의 굴복 통한의 역사가 서려있는 남한산성 그리고 삼전도 ※ 삼전도(三田渡)는 조선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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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족불욕(知足不辱) 만족할 줄 알면 욕됨이 없고,

지지불태(知止不殆) 그칠 줄 알면 위태롭지 않으니

가이장구(可以長久) 오래도록 편안하다.  - 노자 도덕경에서

 

대한민국 구석구석 즐겁고 행복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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