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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거친호흡 몰아쉬며 ^^ 굽이치는 산맥넘어 손의 자유, 발의 자유, 정신의 자유를 찾는다. 기억은 희미해지기에 이곳에 기록을 남긴다
문화문학음악

오리 이원익 충현박물관

by 한국의산천 2007. 5. 10.

청백리 이원익 유적지 돌아보기   

 

가끔 답사를 가봤지만 번번히 문이 닫혀있는 충현 박물관(사설박물관입니다)을 오늘도 출근 길에 혹시나 하며  들려 보았습니다. 마침 문이 열려 있기에 입장료(3,000원)를 내고 들어갔습니다.  

 

입구 정원에는 모란이 커다란 꽃잎을 한창 피고 진 흔적이 보여 못내 아쉬웠습니다. 

 

오리 이원익 유적지  

[답사일 2007. 5. 10 (목)  한국의산천 우관동 ]

 

지금은 KTX 고속철이 있는 광명시 역사 앞쪽 서독산, 예전의 오리동 구름산 아래는 오리 이원익 선생이 하사 받은 옛 집, 묘소, 신도비, 영정등이 남아있고 박물관과 기념관이 자리하고 있다.

 

 

▲ 충현박물관ⓒ 2007 한국의산천   

이원익 선생이 선조임금으로 부터 하사 받은 집 내부와 사설 박물관인 충현관을 돌아보았습니다.

 

충현박물관(관장 함금자) 경기도 광명시   

 

조선 시대 3대 임금에 걸쳐 영의정을 지낸 오리(梧里) 이원익(李元翼-1547~1634)과 그 후손의 삶의 자취를 그대로 보존해놓은 곳이다.

 

박물관 전시실은 1층과 2층으로 구성되어 있다. 2층은 영정과 친필 등 이원익과 관련된 자료가 전시되어 있고, 1층에는 종가에서 사용했던 제기와 민속생활품을 중심으로 전시되어 있다. 400여년 전의 유물로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사대부집안의 각종 자료가 있는 것이 특징이다.

 

우리에게 청백리 ‘오리 대감’으로 더 잘 알려진 문충공 이원익(李元翼·1547∼1634)은 임진왜란을 전후한 격동기에 선조 등 3명의 임금을 섬긴 명신(名臣)으로 청렴함과 바른 처신으로 당대의 존경을 한몸에 받았던 청백리 선비이다.

   

  

▲ 충현관 (사설 박물관) ⓒ 2007 한국의산천 

 

청백리 (淸白吏) 란?
관직수행 능력과 청렴, 근검, 도덕, 경효, 인의 등의 덕목을 겸비한 조선시대의 이상적인 관료상으로, 임금의 재가를 얻어 의정부에서 뽑아 관직자에게 주어진 호칭이다. 


청백리가 되면 후손들에게 선조의 음덕을 입어 벼슬길에 나갈 수 있는 특전도 주어졌다.

총 219명이 배출되었으며, 대표적 인물로는 맹사성,황희,이현보,이황,이원익,김장생,이항복 등이 있다.  

    

 

▲ 인조대왕의 관감당 하사 교서 원본 (클릭하면 확대 됩니다) ⓒ 2007 한국의산천  

 

 

▲ 교서 해설문 ⓒ 2007 한국의산천 

 

이원익은 황희 맹사성과 함께 조선의 3대 청백리로 꼽혔을 만큼 청렴결백한 관리로 잘 알려져 있다.

그의 청렴함이 드러난 일화는 '조선실록'에도 기록돼 있다.   

 

관감당은 이원익이 은퇴한 후 인조가 사액과 함께 하사했으나 이원익이 네 차례에 걸쳐 받기를 사양했다는 5칸짜리 집이다. 계속된 사양에 인조가 "내가 이 일을 하는 것은 신민이 보고 느끼도록 하려는 것이니, 경은 굳이 사양하지 말고 거기에 살라"라고 하자 이원익이 더 이상 사양할 수 없어서 들어가 살았다고 한다. 

 

인조 9년(1623년) 정월 10일, 임금이 승지 강홍중을 보내어 이원익을 문안한 뒤 "그가 사는 집이 어떠한가"라고 물었다. 강홍중은 "두 칸 초가가 겨우 무릎을 들일 수 있는데 낮고 좁아서 모양을 이루지 못하며 무너지고 허술하여 비바람을 가리지 못합니다"라고 아뢰었다.   

 

이 말을 들은 임금은 "재상이 된 지 40년인데 두어 칸 초가는 비바람을 가리지 못하니, 청렴하고 결백하며 가난에 만족하는 것은 고금에 없는 것이다. 내가 평생에 존경하고 사모하는 것은 그 공로와 덕행뿐이 아니다. 이공(李公)의 청렴하고 간결함은 모든 관료가 스승삼아 본받을 바이다"라고 했다. 그리고 5칸짜리 집 한 채를 이원익에게 하사했다. 하지만 이원익은 "신을 위해 집을 지으니, 이것도 백성의 원망을 받는 한 가지"라며 수차례에 걸쳐 받기를 사양했다고 '조선실록'은 전하고 있다.    

 

 

▲ 관감당 (觀感堂) 출입문  ⓒ 2007 한국의산천 

 

 

▲ 관감당 전경 ⓒ 2007 한국의산천 

 

관감당 (觀感堂)  

내가 이 일을 하는 것은 신민이 보고 느끼도록 하려는 것이니, 경은 굳이 사양하지 말고 거기에 살라 -인조- 

 

이원익 선생이 남긴 유서

 

 

 ▲ 유서(遺書) ⓒ 2007 한국의산천 

 

오리 이원익은 죽음을 앞두고 남긴 유서에서도 후손에게 검소함에 대한 당부를 남기고 돌아가셨다.

 
크기 : 86.5× 72.5㎝
1630년(인조 8) 아들 이의전(李義傳) 등에게 남긴 유서이다. 크게 6개의 항목에 걸쳐 작성된 것으로 내용은 주로 장례를 검소하게 치를 것, 우리나라의 미풍양속인 묘막을 준수할 것, 무당의 행사를 하지 말 것, 풍수설에 현혹되지 말 것, 제물을 사치스럽게 하지 말 것, 익녕군 묘소에 대한 제사 원칙 등이다. 17세기 사대부 집안의 제사 및 장례 풍습을 이해하는데 귀중한 자료이다.

 

 

오리 이원익이 연풍현의 수령으로 부임하는 손자 수약(守約)에게 써준 글 ⓒ 2007 한국의산천 


너희 아버지는 전후 고을을 맡을때마다 청렴과 간명으로 백성을 보호한다고 알려졌었다. 너는 네 아버지의 아들이니 마땅히 마음에 새겨 집안의 명성을 떨어트리지 말라. 

 

1. 세상을 다스리는데에는 백성을 사랑하는것보다 더한것은 없다. 몸을 닦는데는 욕심을 적게 하는것보다 더한것이 없다.
2. 천하를 실정을 안후에 천하를 다스릴수있다.
3. 일에 다다라서는 포악함과 성냄을 경계하고 서서히 일의 실정을 파악하라
4. 사람을 다스림에 있어서 상벌이 있을 수가 없으니, 착한자에게는 상을 주라, 상을 주었으니 오랫동안 잊지말아야 한다. 악한자는 벌을 주어야 한다. 벌을 주었으니 시일이 지나면 (나쁜일에 대해서) 꼭 생각치 말라.
5. 한 이익을 일으키는것이 한폐단을 제거하는것만 못하고, 한일을 내는것이 한일을 더는것만 못하다.
6. 읍중에 일이 있거든 노련한 관리와 연로한 인민에게 널리 물어서 인정에 합하기를 힘써야 하고, 남에게 거만을 부리고 스스로 민심을 떠니게 해서는 안된다.
7. 백성은 마땅히 어루만져 돌봐야 하며, 관속을 대하는것도 각박하게 해서는 안된다.
8. 모든일은 때에 따라 마음을 다해야 한다.    

 

 

▲ 관감당 사액 ⓒ 2007 한국의산천 

관감당의 뜻은 오리 이원익이 살아온 일생이 모든 사람에게 귀감이 된다 하여 백성에게 보고 느껴야할 것이라는 뜻으로 받은 사액이다. 

 

 

▲ 관감당 ⓒ 2007 한국의산천   

 

 

▲ 탐금암 ⓒ 2007 한국의산천 

 

탄금암
관감당 앞에는 이원익 생전에도 있었던 약 400년 수령의 측백나무와 탄금암(彈琴岩)이라는 한자가 새겨진 바위가 있다. 측백나무 밑자락에 놓인 평평한 생김새의 탄금암은 이원익이 살아 있을 때 그곳에서 거문고를 타던 곳이라 하여 이름을 탄금암이라 지었다고 한다. 

 


 

▲ 종택 (현재는 수리중이다)ⓒ 2007 한국의산천 

 

종택 

문 오른쪽에는 이승규, 이종민, 이장호 등 이 교수의 3대 직계손의 문패가 달린 종택이 버티고 있다. 이 집은 1960년대 말 이 교수가 거처를 다른 곳으로 옮길 때까지 이원익의 후손이 대대로 거주하던 곳이다. ㄱ자 형의 안채와 ㅁ자 형의 행랑채가 배치되고, 그 옆에는 ―자형 사랑채가 달린 형태다. 종택은 20세기 초 경기 지역 상류 주택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도 중요한 사료적 가치가 있다. 1917년에 완성된 안채는 가구의 짜임이나 기둥의 이음 등이 매우 정교하다.  현재는 보수중이다.

  

   

▲ 오리영우 ⓒ 2007 한국의산천 

 

 

이원익의 영정을 봉안한 오리영우 ⓒ 2007 한국의산천  

 

 

보물 제1435호 호성공신도상 이원익 영정 ( 167×89㎝ )   ⓒ 2007 한국의산천

 

1604년(선조 37) 이원익 임진왜란 때 선조를 호종하여 피난했던 공적이 인정되어 호성공신으로 녹훈되었을 때 그려진 영정이다.

이원익은 선무공신(宣武功臣)까지 추대되었으나 극력 사양하고 스스로 호종공신만 인정하였다. 공신에게는 훈호(勳號)와 녹훈교서(錄勳敎書)가 내려지고, 화상(畵像)을 그려 내려준다. 아쉽게도 녹훈교서는 종가에 남아있지 않다.

이 초상화는 17세기 초반 공신도상의 전형을 잘 보여주는 영정이다. 2005년 7월 5일자로 국가문화재 보물 제1435호로 지정되었다

 

 

▲조선 후기에 그려진 것으로 정장관복을 입고 있는 모습.ⓒ2007 한국의산천 

  

조선 선조, 광해군, 인조 3대에 걸쳐 영의정을 지낸 오리 이원익은 태종 5대손이다. 왕족은 4대까지 과거시험을 보지 못하게 하던 당시 법규로 인해 가문에서 처음으로 과거시험에 응시, 합격해 벼슬길에 오른 인물이다. 그는 선조 때 청백리에 뽑혔으며 문장이 뛰어나고 성품이 원만해 정적에게도 존경을 받은 인물이다.

 

생애
명종2년 (1547년) 태어나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선조 2년(1569년) 22세에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정자를 제수 받았다. 이후 군기 시판관,사간,교리,호조참의,안주목사,예조판서,우의정을 지냈으며, 선조,광해군,인조에 걸쳐 6번이나 영의정을 지냈다.

인조 12년(1634년) 향년 88세로 사망하였으며, 사망 후에는 인조의 묘정에 배향되고 문충(文忠) 이란 시호를 받았다. 

 

선조 6년(1573년) 성절사의 질정관으로 명나라에가서 이름을 떨쳤으며 선조 20년 안주목사로 재임하면서 약곡 1만 여석으로 기민을 구호하였다. 

선조 25년(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평안도 도 순찰사,제도도체찰사가 되어 왜군과 맞서 싸워 많은 공을 세웠다. 그공으로 선조 37년 호성공신으로 완평부원군에 봉해졌다. 

 

1608년 대동법을 시행토록하여 백성들의 조세부담을 줄였고 상공업의 발달을 촉진시켜 국가경제를 윤택하게 하였으며 군병 방수제도를 개혁하여 농민들의 신역(身役)을 크게 경감했다.

선조때 청백리에 녹선되었으며 광해군때 대비폐위론을 반대하다가 홍천으로 유배되었으며 1623년 인조반정으로 사면되면서 재차 영의정에 올라 민심수습에 큰공을 세웠다.  

 

이원익이 세상을 떠난 후 효종 9년(1658년), 그의 숭고한 뜻을 기리고자 현재의 경기 광명시 소하2동에 그를 배향하는 삼현사를 세웠다. 이후 삼현사는 충현사(忠賢祠)로 불리다가 숙종 2년(1676년)에 임금이 직접 충현서원(忠賢書院)이라고 이름지어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 박물관에 보관되어있는 편액 ⓒ 2007 한국의산천   

이원익이 세상을 떠난 후 효종 9년(1658년), 그의 숭고한 뜻을 기리고자 현재의 경기 광명시 소하2동에 그를 배향하는 삼현사를 세웠다. 이후 삼현사는 충현사(忠賢祠)로 불리다가 숙종 2년(1676년)에 임금이 직접 충현서원(忠賢書院)이라고 이름지어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 박물관에 전시 된 교지 ⓒ 2007 한국의산천 

 

 

 ▲ 시권(試卷) ⓒ 2007 한국의산천   

조선시대 과거시험을 볼 때 답을 적어내는 답안지.

 

 

 ⓒ 2007 한국의산천   

 

 

ⓒ 2007 한국의산천 

 

 

▲ 오리 이원익 선생의 영정 ⓒ 2007 한국의산천 

 

 

ⓒ 2007 한국의산천 

 

 

▲ 전시된 생활용품 ⓒ 2007 한국의산천 

 

 

▲ 전시된 생활용품 ⓒ 2007 한국의산천 

 

영당말 

마을 내에는 이원익의 향훈이 곳곳에 스며 있는데 소하동 1086에는 이원익이 40여년간 정승을 지내는 동안 초가집 생활을 영위하자 그의 검소함에 임금이 감동하여 지어준 관감정이 있다. 


조선조 선조,광해군,인조 때 영의정을 지내고 청백리에 녹선된 오리 이원익의 영정(크기 171 93cm)을 모신 영당이 있는 마을이므로 <영당말>이라고 부른다. 이원익의 영정은 이곳 영당말에 오랫동안 모셔 왔으나 1970년대 말에 일시 도난을 당한 일이 있었다. 그러나 도적들이 영정을 영당 밖에 버리고 도주한 후 도난이 염려 되어 이원익의 13세종손이 이승규( 前 연세대 의대 교수)가 보관하고 있다.

 

이 곳에 처음으로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조선 전기로 알려지고 있다.즉 태종의 손자인 익녕군의 묘를 마을 뒤(소하동 산 137)에 쓴 후 그 의 후손들(전주 이씨 익녕군파)이 묘하에 모여 살면서 였다는 것이다.
 
해방 직후까지만 해도 영당말에는 전주 이씨 익녕군파만 살아 인근에서는 <이씨촌>으로도 불렀으며 영당말을 작은말(오리동과 통칭해 부르기도 한다. 마을 서쪾은 영당말에 살던 익녕군 후손들이 분가하면서 정착하기 시작한 곳으로 영당 뒤에 있다 하여 <뒷골>이라고 칭하며, 영당말은 조선시대에는 시흥군 서면 소하리로 1914년 그대로 명칭이 이어 오다가 1964년 시흥군 서면 소하 4리로 된후 1981년 광명시 소하동으로 개칭되었다. 
  

 

ⓒ 2007 한국의산천 

 

 

ⓒ 2007 한국의산천 

 

 

ⓒ 2007 한국의산천 

 

 

▲ 충원서원 ⓒ 2007 한국의산천    

강감찬,서견, 이원익등 삼현을 제사한 충현서원지(기념물 제80호)

 

 

▲ 충원서원지 ⓒ 2007 한국의산천 

 

 

▲ 충현서원지 ⓒ 2007 한국의산천 

 

 

▲ 충현 서원지 ⓒ 2007 한국의산천 

 

 

 삼상대(三相臺)ⓒ 2007 한국의산천  
 
충현서원지 일대에 있었던 표석으로 오리(梧里) 이원익(李元翼, 1547~1634) 선생과 관련 있는 유적으로 보인다. 삼상(三相)은 일반적으로 우의정, 좌의정, 영의정의 삼정승(三政丞)을 모두 일컬을 때 쓰는 용어이다. 이것으로 미루어보아, 이원익 선생이 삼정승을 두루 거쳤으며 많은 치적이 있었으므로 이를 기리기 위해 후손 및 문인에 의해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 삼상대 표석 ⓒ 2007 한국의산천 

 

 

▲ 풍욕대(風浴坮)  ⓒ 2007 한국의산천  
 
풍욕대는 “바람에 목욕한다”는 시적인 이름을 가진 정자이다. 실제로 풍욕대라는 이름은 <논어(論語)> <선진(先進)>편에 “浴乎沂, 風乎舞雩, 詠而歸 (기수에서 목욕하고 무우에서 바람쐬고 노래하면서 돌아오겠습니다.)”라는 귀절에서 유래한 것이다.

이곳은 여름철 구름산 <雲山, 雲陰山> 너머 서해에 불어오는 해풍으로 매우 시원한 곳이다. 언제 누가 건립하였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 풍욕대 표석 ⓒ 2007 한국의산천 

 

 

 삼상대(三相臺)ⓒ 2007 한국의산천 

  

 

 삼상대(三相臺)ⓒ 2007 한국의산천 

  

 

▲ 종택 담장 ⓒ 2007 한국의산천 

 

  

▲ 초하의 종택 풍경 ⓒ 2007 한국의산천 

 

  

▲ 충현사 사액 ⓒ 2007 한국의산천 

 

 

이원익 선생 기념관 ⓒ 2007 한국의산천  
충렬박물관에서 약 500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기념관(입장료 성인 500원)

 

참고: 청백리 맹사성, 맹사성 고택(맹씨행단) 돌아보기  http://blog.daum.net/koreasan/11226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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