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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거친호흡 몰아쉬며 ^^ 굽이치는 산맥넘어 손의 자유, 발의 자유, 정신의 자유를 찾는다. 기억은 희미해지기에 이곳에 기록을 남긴다
문화문학음악

목계나루

by 한국의산천 2007. 5. 6.

중원 돌아보기  

답사 2007년 5월 5~6일.날씨 흐림 [한국의산천 ]  

 

강물 따라 떠나는 충주 남한강

역사를 품고 유유히 흐르는 물줄기  

우리 국토의 한가운데라고 말하는 중원(中原) , 중원문화권의 중심을 돌아보겠습니다.

 

우리의 문화유산. 아는 만큼 보이고, 보는 만큼 느끼고 알게 된다. 

알면 곧 참으로 사랑하게 되고, 사랑하면 참으로 보게 되고, 볼 줄 알게 되면 모으게 되니 그것은 한갓 모으는 것은 아니다

(아는 만큼 사랑하게 되고 보인다. 知則爲眞愛 愛則爲眞看 看則畜之而非徒畜也.) 유한준(兪漢雋, 1732 - 1811. 정조 때의 문장가) 

 

답사코스

목계나루터 - 봉황리 마애석불 - 장미산성 - 고구려비 - 중앙탑 - 누암리 고분군 - 창동 5층석탑 - 창동마애불 - 탄금대.

 

목계나루   

 

예로부터 남한강 수운 물류교역의 중심지였으며 내륙항 가운데 가장 큰 규모를 자량했던 남한강 목계나루.    

 

 

▲ 목계나루 碑 ⓒ 2007. 한국의산천

 

목계나루    
여주에서 산척방면으로 38번 자동차 전용도로를 타고 가다가 19번 도로로 접어들기 위해서 오른쪽으로 새로 길게 지어진 목계대교가 지나는 남한강 상류를 보며 목계교를 건너니 오른쪽으로 목계나루터라는 커다란 입석이 서있다. 번창했던 그 예전의 나루 <목계나루터>라는 표석과  그옆에는 이곳 가까운 노은면 출생이신 신경림 시인의 詩 <목계장터> 詩碑가 서있다.  

 

 

▲ 목계나루터 碑ⓒ 2007. 한국의산천

 

남한강의 목계나루는 나라의 세금을 거둬들이는 수곡선이 들어갈 수 있는 남한강 수운의 종점이었다. 곡식 사백 가마니를 실은 배 20여 척이 서로 교차할 수 있었고, 나루 건너편에 세금으로 거둬들인 곡식을 보관하는 가흥창이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사과나무 몇그루만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 강변식당의 샘터ⓒ 2007 한국의산천 

 

 

 

▲ 신경림 시비 (상세히 보시려면 이미지를 클릭하세요.) ⓒ 2007 한국의산천  

 

목계장터 

 

                    신경림

 

하늘은 날더러 구름이 되라 하고
땅은 날더러 바람이 되라 하네
청룡 흑룡 흩어져 비 개인 나루
잡초나 일깨우는 잔바람이 되라네
뱃길이라 서울 사흘 목계 나루에
아흐레 나흘 찾아 박가분 파는
가을볕도 서러운 방물장수 되라네
산은 날더러 들꽃이 되라 하고
강은 날더러 잔돌이 되라 하네
산서리 맵차거든 풀속에 얼굴 묻고
물여울 모질거든 바위 뒤에 붙으라네
민물 새우 끓어넘는 토방 툇마루
석삼년에 한 이레쯤 천치로 변해
짐부리고 앉아 쉬는 떠돌이가 되라네
하늘은 날더러 바람이 되라 하고
산은 날더러 잔돌이 되라 하네

 

 

▲ 신경림 시비 ⓒ 2007 한국의산천   

 

 

▲ 목계장터 시비는 판화가 이철수님의 글씨이다. ⓒ 2007. 한국의산천

 

 

 ▲ 나루터 연혁비 ⓒ 2007. 한국의산천  

 

<정선 아리랑>에 관한 글 참고

 

정선 뗏목의 이동은 정선아리랑을 한강 주변 곳곳에 울려 퍼지게 했다. 정선 아우라지를 출발해 서울의 광나루와 마포나루에 이르는데 보름 남짓 걸리는 한강은 정선아리랑이 흘러가는 거대한 물줄기였다. 

 

정선에서 일천 이백 리 한강 물길을 타고 내려가는 동안 떼꾼들은 적막감을 달래고 무사한 운행을 속으로 빌며 아리랑을 불렀다. 타고난 소리기질을 갖춘 떼꾼의 눈에 보이는 세상은 또 다른 소재가 되어 아리랑 가사로 술술 이어져 나왔다. 강가의 주막에 들러서 거나한 술판을 벌이며 불러대던 소리도 정선아리랑이었다.

“황새여울 된꼬까리 떼 무사히 지났으니 만지산 전산옥이야 술상차려 놓게”라는 가사가 생겨날 정도로 이름난 영월읍 거운리의 만지 전산옥이 머물던 주막에서부터 영월 덕포, 단양 꽃거리, 제천 청풍, 충주의 목계 달천, 여주의 이포, 양평의 양수리, 팔당 광나루 뚝섬 서빙고 노량진 마포 등지는 밤만 되면 정선아리랑이 울려 퍼지던 곳이었다.

 

한 때는 이곳 목계나루에서도 정선에서 내려오는 뗏목의 수가 얼마나 많았는지 먼발치에 뗏목의 모습이라도 보이면 객주 여자들은 언제 배웠는지 정선아리랑을 불러대며 유혹하는 진풍경이 벌어지기도 했다고 전한다.

 

한반도를 동서로 가르는 남한강을 수놓았던 떼꾼과 나루를 중심으로 형성된 경제권은 정선아리랑이 우리나라 수많은 아리랑과 민요에 영향을 준 주인공이요 터전이 되었다.

스스로 넘어 가기에도 벅찰 만큼 느껴지던 고개를 넘기 위해 시름겨워 부르던 정선아리랑은 어느덧 아리랑 아리랑 고개를 잘도 넘어가고 있다.

 

눈이 올라나 비가 올라나 억수장마 질라나
만수산(萬壽山) 검은 구름이 막 모여든다.
명사십리가 아니라면은 해당화는 왜 피며
모춘삼월(暮春三月)이 아니라면은 두견새는 왜 울어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고개로 날 넘겨주게

아리아리랑 스리스리랑 아라리가났네
아리랑 고개고개로 나를 넘겨주게

정선읍내 물레방아는 물살을 안고 도는데
우리 집에 저 멍텅구리는 날 안고 돌줄 왜 몰라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고개로 나를 넘겨주게

 

 

▲ 목계 별신제 , 줄다리기 유래비 ⓒ 2007. 한국의산천 

 

목계교를 건너면 신경림 시비와 나루터 유래비, 별신제 줄다리기 유래비 그리고 몇몇 매운탕집과 수석가게가 있다.

 

가흥창과 별신제,줄다리기

 

가흥창은 충북 중원군 가금면 가흥리 남한강변에 있었던 조선시대의 조창으로 원주의 흥원창, 춘천의 소양강창과 더블어 수참선으로 세곡을 운반하는 참운의 좌수참에 속하여 좌수참창이라고도 하였으며, 1465년(세조11)에 설치되었다.

고려시대에는 덕흥창이라 하다가 조선 건국 초 경원창으로 개칭하였고 세종 때 다시 덕흥창이라 하다가 세조 때 조창 자리를 가흥역 근처로 옮기고 가흥창이라 하였다. 또 각지에서 수집한 세곡을 야적하였던 것을 1521년(중종 16)에야 70 칸 규모의 창고를 지었다.

가흥창의 세곡수납 관할구역은 경상도의 각 읍과 충청도의 충주, 괴산, 보은, 단양, 영춘, 제천, 진천, 황간, 영동, 청풍, 청산 등이었으며, 이들 지역에서 수납된 세곡은 남한강 수로를 통해 260리에 이르는 서울의 용산창으로 운송되었다. 따라서 옆에 위치한 목계나루는 서울과 충주 사이에 충북선 철도가 놓인 1930년대 이전까지 남한강 수운의 중심이었다.

쌀이나 소금 등을 실은 배가 무시로 드나들었고, 배가 들어와 강변장이 설 때면 각지에서 장꾼과 갖가지 놀이패와 들병이들이 왁자하게 몰려 난장을 벌이고 북새를 이루었다. 

 

이렇게 번성하던 곳이니 만큼 한해 뱃길이 무사하고 장이 잘되기를 비는 별신제도 해마다 크게 치러졌으며 그 과정의 줄다리기도 또한 유명하였다.

목계 줄다리기는 줄의 길이가 100여 미터이고 줄꾼이 수백 명이나 될 정도로 규모가 컸고 정월 보름에 시작되어 2월 초순까치 계속되었다. 동편과 서편으로 나뉘어 각각 수줄과 암줄을 준비하여 깃발을 들고 강가 모래밭에서 줄을 당겼다. 이때는 근처 사람들 뿐 아니라 멀리 강릉, 문경, 영월 등지에서도 구경꾼이 구름처럼 모여 들었다고 한다. 이처럼 목계나루가 성황을 누린데는 가흥창이 큰몫을 하였다.
 
 

   

▲ 밤하늘의 달을 벗삼아.ⓒ 2007. 한국의산천

 

혹시나 물안개라도 볼 수 있으려나 하고 5시에 일어났지만 물안개는 피어 오르지 않았으면 날씨가 흐려서 일출도 못보았다. 

  

 

▲ 새벽 여명이 보이는 듯하다가 이내 구름에 휩싸이는 태양.ⓒ 2007. 한국의산천 

 

요즘은 신정일 지은 <다시쓰는 택리지>를 재미 있게 읽고 있습니다. 

1권 후반부에 (344-347쪽)에 "남한강변의 나루들"에서 목계 장터 이야기가 나옵니다. 

 

조선 후기 5대 하항중의 하나였던 목계는 전성기때 호수가 800호 이상 되었던 큰 도회지로서 100요척의 상선이 집결하던 곳이다.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목계는 동해의 생선과 영남 산간지방의 화물이 집산되며, 주민들은 모두 장사를 하여 부자가 된다”고 하였다. 서울에서 소금배나 짐배가 들어오면 아무 때나 장이 섰고, 장이 섰다 하면 사흘에서 이레씩이었다고 한다. 

 

그처럼 번성했던 목계장터는 1920년 후반 서울에서 충주 간 충북선 열차 개통으로 남한강의 수송기능이 완전히 끊어지면서 규모가 크게 작아졌다. 

 

1973년에 목계교가 놓이면서 목계나루의 나룻배도 사라져 목계장터는 쇠퇴의 길로 접어들었다. 오직 목계교회,목계반점,목계슈퍼 등 상호만 남아 그 옛날의 목계나루를 떠올리게 할 뿐이다. -다시쓰는 택리지 중에서 - 

 

 

 

▲ 황포돗배 너머로 새로 지은 목계대교가 보인다 ⓒ 2007. 한국의산천 

 

신라와 고구려를 지난 남한강 물줄기는 장미산성을 크게 휘돌아 흐르며 목계나루로 이어진다. 목계나루는 강물이 말라붙은 갈수기에도 언제나 배가 드나들 수 있는 남한강 수운의 가항종점(可航終点)이었다. 조선 시대에 재정 확보를 위해 거둔 쌀과 베 따위를 보관하는 창고인 가흥창(可興倉)도 이 곳에 있었다.  

 

생선이 있으면 파리가 날아들고 나락이 쌓여 있으면 쥐가 들끓듯이 이곳 가흥참도 예외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선산부사를 지낸 점필재 김종직이 이곳을 지나며 ‘가흥참(可興站)’이라는 시를 남겼는데 경상도 백성들이 세곡을 바치는데 따른 고통과 부패한 가흥참 관리들의 실상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어 읽어 볼 만하다.

우뚝이 솟은 저 계립령은

예로부터 남북의 한계가 되었는데

북인들은 호화로운 생활을 탐하여

남인들의 기름과 피를 달게 여기네

우마차로 험난한 산길을 통해라

들판에는 장정 남자가 전혀 없네

밤이면 강가에서 서로 베고 자노니

아전들은 어찌 그리도 탐획한고

시장에선 생선을 가늘게 회치고

모점에는 술이 뜨물처럼 하얀데

돈 거두어 노는 계집 불러오니

머리꾸미개에 연지를 발랐네.

백성들은 심장을 깎는 듯 괴로운데

아전들은 방자히 취해서 떠들어대며

또 두곡(斗斛)의 여분까지 토색을 하니

조사(漕司)는 의당 부끄러울 일이로다

관에서 부과한 건 십분의 일인데

어찌하여 이분 삼분을 바치게 하나

강물은 스스로 도도히 흘러서

밤낮으로 구름과 아지랑이를 뿜어내는데

배 돛대가 협곡 어귀에 그득히

북쪽에서 내려와 다투어 실어가니

남인들의 얼굴 찡그리고 보는 것을

북인들이 누가 능히 알겠는가.  [출처: 이지누 한강을 걷다]

 

  

▲ 동트기 직전의 남한강 목계나루 ⓒ 2007. 한국의산천

 

강가의 아침은 상쾌하다.

이른 새벽부터 물새 소리에 잠을 깼다. 오리가 이리 저리 나르고 이름 모를 새들도 많은 곳이다.이곳 남한강은 야생 오리들의 천국이다.  강 건너에서 낚시하는 사람이 손을 흔들며 인사를 건네온다.

 

일제 시대까지만 해도 목계나루엔 인천항에서 소금, 건어물, 젖갈류, 생활 필수품 등을 싣고 온 황포돛배가 수십 척씩 붐볐다. 이런 물건들은 내륙 지방인 충청도와 강원도, 그리고 백두대간 너머 경상도의 문경과 상주 각지로 팔려 나갔다.

당시 뱃일하는 인부만도 500여 명이나 되었다 하니, 나루와 이어진 목계장터는 언제나 시끌벅적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젠 모두 옛 일에 불과하다. 위용을 자랑하던 조창은 모두 허물어졌고, 주변엔 주춧돌 몇 개와 깨진 기왓장만이 뒹굴고 있을 뿐이다. 강나루의 흔적마저도 모래를 퍼내고 강 언덕에 축대를 쌓으면서 형편없이 변했다. 또 늘상 인파로 북적거렸을 목계장터는 지금은 매운탕집과 수석 가게들만이 한적한 풍경화를 연출할 뿐이다.

 

목계나루에서 20리쯤 떨어진 노은면 연하리에 태를 묻은 신경림 시인에게 목계나루는 소중한 추억의 장소다. 시인은 광복 이듬해인 초등학교 4학년 때 목계나루 솔밭으로 소풍을 갔다가 목계장터를 보곤 강렬한 인상을 받게 된다. 당시까지만 해도 목계나루는 제법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는 시인의 기억 속에 오랫동안 이어지다가 마침내 ‘목계장터’라는 명시로 열매를 맺는다.  

 

 

▲ 목계교 ⓒ 2007. 한국의산천

 

정약용이 쓴 글 중 한강 가에서 살기 좋은 몇 곳을 꼽은 것이 있다. 청담(淸潭) 이중환이 쓴 <택리지>를 읽고 쓴 발(跋)이 그것이다. 그 자신도 한강에 잇대어 있는 소내(苕川)에 살지만 그곳은 오로지 풍광만이 아름다울 뿐 생활하기에는 적당하지 않은 곳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북한강에서는 춘천의 천포(泉浦)와 지금의 설악면 일대인 미원(迷源), 그리고 남한강에서는 여주의 백애(白厓)와 충주의 목계를 꼽았다. 

 

산이 뒤를 막았는가 하면 앞으로는 여울소리 아름다운 강이 흐르고 큰 배가 닿을 수 있는 마지막 나루터였기에 장터는 언제나 북적거렸으니 그 아니 좋았겠는가.

 

 

▲ 전시된 황포돗배 ⓒ 2007. 한국의산천  

황금기를 이루었던 그 영화의 세월을 간직한 체 뚝 위에 서있는 황포돗배    

 

전해 오는 이야기

 

막흐래기

목계에서 선창벼루를 지나가면 소태면 양촌부락이 나오고 다시 강변을따라 내려가면 <막흐래기>라는 마을이 있으며 그 앞의 강물은 물살이 세기로 유명한 곳인데 소위<막희락탄 (莫喜樂灘)>이다. 

 

옛날 내륙의 삼대하항이라면 경기도 양평, 여주 그리고 목계를 지칭 했었다. 그중 대형선박이 출입할 수 있는 종착항으로 목계나루가 가장 중심을 이루고 있었다고한다.

옛날 충청북도는 물론 경상북도나 강원도 일부까지도 한양에 가려면 충주지방을 거쳐야 했는데 말이나 당나귀 등을 이용한다는 것은 보통사람들은 어렵고 거의가 목계에 와서 배를 타고 갔던 것이다.
사람뿐만 아니라 내륙과 경인지방과의 교역물품도 이곳이 중심이 되고 있었다. 따라서 이곳은 출입하던 배들은 지금 우리들이 보고 있는 나룻배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큰 배였다고 하는데 서울쪽으로 가는 배는 강 가운데를 운행하고 목계쪽으로 오는 배는 강가를 통해하도록 되어 있어서 많은 배들이 규칙적으로 운행되어 장관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큰 문제는 가끔 부딪치는 여울 때문인데 여울을 잘못 운행하다가 큰 사고가 나게 마련이어서 가장 조심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중에서도 막흐래기 앞에 있는 막희라기 여울이 가장 유명했다고 하는데 각 여울마다 끌패라고 해서 배를 끌어 넘겨주고 임금을 받아 먹고 사는 사람들인데 이곳 막흐레기 여울에 있는 끌패들이 제일 많고 벌이도 제일 잘됐다고 한다.

 

막흐래기란 뜻은 한자로 말막자, 기쁠희자, 즐거운락자를 써서 莫喜樂인데 글자대로 풀이한다면 희희낙낙하지 말라는 뜻이 된다. 그러니까 이 여울이 너무도 어려운 장소이니 희희낙낙하다가는 큰일난다는 말이다  그래서 옛날 목계항의<도선별장>은 막흐래기 나루의 사고가 안 나도록 하는데 항시 힘을 기울였다고 한다.  

 

 

▲ 황포돗배가 서있는 곳에서 장미산을 바라보며 ⓒ 2007. 한국의산천

 

목계 나루가 있는 곳에서 바라 보았을 때 서울,여주방면으로 벋은 왼쪽의 (新)목계대교와 오른쪽의 목계교 풍경

 

 

▲ 목계나루 건너 강변의 자갈 ⓒ 2007. 한국의산천   

 

하늘은 날더러 바람이 되라 하고
산은 날더러 잔돌이 되라 하네 -신경림-

 

주변 유적지 둘러보기

 

중앙탑. 중원 탑평리 칠층석탑 http://blog.daum.net/koreasan/11441421
탄금대 http://blog.daum.net/koreasan/11441232
고구려비 http://blog.daum.net/koreasan/11441227
창동 5층석탑 창동 미륵 중원 청명주 http://blog.daum.net/koreasan/11441218
누암리 고분 http://blog.daum.net/koreasan/11441212
장미산성 http://blog.daum.net/koreasan/11441193
봉황리 마애불 http://blog.daum.net/koreasan/114411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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