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거친호흡 몰아쉬며 ^^ 굽이치는 산맥넘어 손의 자유, 발의 자유, 정신의 자유를 찾는다. 기억은 희미해지기에 이곳에 기록을 남긴다
MTB등산여행

이매창과 선계폭포

by 한국의산천 2006. 7. 21.

다시 가고 싶은 곳 변산의 개암사 월명암, 그리고 우동리...

 

지금 그곳 우동리 선계폭포에는? 

 

 

 

[ 답사일 2005.7월2~3일   한국의산천   ] 

 

선계폭포: 신선들의 세상이라 선계폭포인가?   

 

세월은 가도 아픔은 남아... 이매창의 못다한 사랑.

 

 

▲ 비 오는 날에만 물줄기가 생기는 선계폭포의 위용 ⓒ2005 한국의산천    

보안면 우신마을에서 북쪽으로 1km 지점에 변산 4대 사찰중 하나였던 선계사가 있었던 선계안 분지가 있다. 비가오면 분지에서 물이 흘러 선계바위에서 물이 떨어져 폭포를이루니 이것이 바로 선계폭포이다.
이 폭포는 이성계가 성계골에 머물면서 도를 닦고 수련을 하였다는 설에 의하여 성계폭포라 부르는 이도 있으나 정확한 근거는 없습니다. 주변 호수의 맑은물과 경관이 수려하며 반계 유형원선생의 유적지 및 부안김씨 종중 고문서가 있다.(부안군청 참고) 

 

선계폭포

이곳은 문학에도 박식한 기생 이매창과 홍길동의 작자 허균이 서로의 교분을 두텁게 하던 장소로 홍길동전이 이곳 정사암 터에서 변산을 무대로 삼아 집필하였다고 하며 홍길동에서 나온 이상향 율도국이 낚시로 유명한 위도라는 설도 있다. 그리고 이곳의 약수는 남성의 기를 일으키는 효험이 있다고 하며 많은 사람이 찾아오는곳이기도 하다.

 

산중턱 반계 유형원의 유적지에서도 비스듬히 바라보면 잘 보인다.

 

전북 부안군 보안면 우동리는 조선 후기 실학의 선구자로 일컬어지는 교산 허균과 반계 유형원이 반세기 시차를 두고 살면서 ‘홍길동전’과 ‘반계수록’ 26권을 저술했던 명소다. 

허균은 소설로, 유형원은 논리로 당시 사회의 모순과 아픔에 대한 해결책을 만들면서 우리나라 실학을 태동시켰다.

지금도 중수정사암기(重修靜思菴記)에서 허균이 묘사한 것처럼 ‘선계폭포 아래로 시냇물이 바다로 흐르는’ 등 자연환경이 그대로다. 

허균이 우동리를 떠난 지 41년 뒤, 반계 유형원은 1652년부터 당시 사회가 안고 있는 모순을 개혁하고 부국부민을 바탕으로 한 이상적인 국가 건설의 이론서인 ‘반계수록’을 썼다. 이들의 개혁사상은 성호 이익, 다산 정약용에게 이어짐으로써 이후 근세 우리나라의 정신적 기틀을 마련했다.

 

 

 

▲ 전북 부안 우동리의 선계폭포 ⓒ2005 한국의산천  

 

매창(梅窓)과 촌은(村隱) 유희경과 허균의 이야기

  
부안읍의 진산인 성황산에 있는 서림 공원 입구에 조선 중기의 여류 시인 매창(梅窓)의 시비가 있다. 
시비공원은 읍내 매창이 뜸 "매창공원"으로 새단장을 하였다.

 


 

▲ 부안읍내 매창공원에 안에 서있는 매창시비

 

 이화우 흩날릴 제 울며 잡고 이별한 님
 추풍낙엽에 저도 날 생각는가
 천 리에 외로운 꿈만 오락가락 하노매
          

이화우(梨花雨)에서 추풍낙엽으로 이어지는 시간적 이별이 일순간 천리 공간을 뛰어넘어 그리운 임에게로 향하고 있다. 매창이 유희경과 이별하고 지은 이 시조는 <가곡원류>에 실려 전하는데 이별가로서 이보다 더한 절창(絶唱)이 또 없을 듯하다.
  

허난설헌과 함께 조선시대 대표적인 여류 시인으로 평가받는 매창은 1573년(선조 6년) 부안현의 아전이던 이탕종(李湯從)의 서녀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해가 계유년이었기에 계생(癸生), 또는 계랑(癸娘)이라 하였으며, 향금(香今)이라는 이름도 있었다.
  

계생은 아버지에게서 한문을 배웠으며, 시문과 거문고를 익히며 기생이 되었는데, 이로 보아 어머니가 기생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기생이 되어 그는 천향(天香)이라는 자(字)와 매창(梅窓)이라는 호(號)를 갖게 되었다. 조선시대 여성들에게는 이름이 없었다. 당호(堂號)를 가진 귀족 여성, 이름만 있는 기생들이 있었다. 이러한 시대에 이름, 자, 호까지 지니며 살았던 것이다.  
신분이 기생이었던 그에게 술에 취한 손님들이 덤벼들기 마련이었다. 그러나 매창은 아무에게나 몸을 맡기지 않았으며, 시를 지어 무색하게 하기도 하였다. 다음 '贈醉客(취한 손님에게 드림)'이라는 제목의 오언절구는 이러한 경우를 당해 쓴 시이다.

 

醉客執羅衫
(취한 손님이 명주저고리 옷자락을 잡으니)
羅衫隨手裂
(손길을 따라 명주저고리 소리를 내며 찢어졌어라)
不惜一羅衫
(명주저고리 하나쯤이야 아까울게 없지만)
但恐恩情絶
(임이 주신 은정까지도 찢어졌을까 그게 두려워라)
            - 허경진 역 -
    

 

▲ 큰비가 오는 날에만 볼수있는 선계폭포의 장엄한 물줄기 ⓒ2005 한국의산천  

 

지봉 이수광은 매창의 이러한 모습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계랑은 부안의 천한 기생인데, 스스로 매창이라 호를 지었다. 언젠가 지나가던 나그네가 그의 소문을 듣고는, 시를 지어서 집적대었다. 계랑이 곧 그 운을 받아서 응답하였다.

平生 學食東家
(떠돌며 밥얻어 먹기를 평생 부끄럽게 여기고)  
獨愛寒梅映月斜
(차가운 매화가지에 비치는 달을 홀로 사랑했었지)
時人不識幽閑意
(고요히 살려는 나의 뜻 세상사람들은 알지 못하고
指點行人枉自多
(제멋대로 손가락질하며 잘못 알고 있어라)

라고 했더니, 그 사람은 서운해 하면서 가버렸다. 계랑은 평소에 거문고와 시에 뛰어났으므로 죽을 때에도 거문고를 함께 묻었다고 한다.

   

매창은 1590년 무렵 부안을 찾아온 시인 촌은 유희경과 만나 사귀었다. 매창도 유희경을 처음 만났을 때 시인으로 이름이 높던 그를 이미 알고 있었던 듯하다. <촌은집>에 이런 기록이 있다.

그가 젊었을 때 부안에 놀러갔었는데, 그 고을에 계생이라는 이름난 기생이 있었다. 계생은 그가 서울에서 이름난 시인이라는 말을 듣고는 '유희경과 백대붕 가운데 어느 분이십니까?'라고 물었다. 그와 백대붕의 이름이 먼 곳까지도 알려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그때까지 기생을 가까이 하지 않았지만 이 때 비로소 파계하였다. 그리고 서로 풍류로써 즐겼는데 매창도 시를 잘 지어 '매창집'을 남겼다. 
 

 

 

▲  전북 부안 우동 저수지 ⓒ2005 한국의산천  

 

유희경은 매창을 처음 만난 날 그에게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曾聞南國癸娘名
남국의 계랑 이름 일찍이 알려져서
詩韻歌詞動洛城
글 재주 노래 솜씨 서울에까지 울렸어라
今日相看眞面目
오늘에사 참모습을 대하고 보니
却疑神女下三淸
선녀가 떨쳐입고 내려온 듯하여라
                 <贈癸娘  허경진 역>
     

 

 

40대 중반의 대시인 유희경과의 사랑은 18세의 매창으로 하여금 그의 시세계를 한 차원 높은 곳으로 끌어 올리게 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 무렵 그들이 사랑을 주고받은 많은 시들이 전한다. 이 고장 출신의 시인 신석정은 이매창, 유희경, 직소폭포를 가리켜 부안삼절(扶安三絶)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유희경이 서울로 돌아가고 이어 임진왜란이 일어나 이들의 재회는 기약이 없게 되었다. 유희경은 전쟁을 맞아 의병을 일으키는 등 바쁜 틈에 매창을 다시 만날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비록 짧은 기간이었지만 진정 마음이 통했던 연인을 떠나보낸 매창은 깊은 마음의 상처를 받았다. 이후 쓰인 그의 시들은 님에 대한 그리움을 넘어서 서러움과 한(恨)을 드러내고 있다.

 

春冷補寒衣
봄날이 차서 엷은 옷을 꿰매는데
紗窓日照時
사창에는 햇빛이 비치고 있네
低頭信手處
머리 숙여 손길 가는 대로 맡긴 채
珠淚滴針絲
구슬같은 눈물이 실과 바늘 적시누나
          ' 自恨, 허경진 역'

 

유희경 역시 매창을 그리워하기는 마찬가지였다. 
 
娘家在浪州
그대의 집은 부안에 있고
我家住京口
나의 집은 서울에 있어
相思不相見
그리움 사무쳐도 서로 못보고
腸斷梧桐雨
오동나무에 비뿌릴 젠 애가 끊겨라
           '懷癸娘,  허경진 역'

  

 

1607년 유희경을 다시 만난 기록이 있지만 매창은 그와 헤어진 뒤 10여년을 마음의 정을 주는 사람이 없이 유희경을 그리며 살았다. 그가 마음을 준 두 번째 남자는 이웃 고을 김제에 군수로 내려온 이귀(李貴)였다. 그는 명문 집안 출신으로 글재주까지 뛰어났는데 매창이 그에게 마음이 끌렸음을 보여주는 허균(1569~1618)의 기록이 있다.
  

허균은 1601년 6월 충청도와 전라도의 세금을 거둬들이는 해운판관이 되어 호남에 내려와 부안에 들렀다. 매창이 허균을 만났을 때 이귀는 이미 파직되어 김제를 떠난 지 서너 달 뒤였다.

 

신축년(1601) 7월 임자(23일). 부안에 이르렀다.  비가 몹시 내렸으므로, 객사에 머물렀다. 고홍달이 와서 뵈었다. 기생 계생은 이귀의 정인이었는데, 거문고를 끼고 와서 시를 읊었다. 얼굴이 비록 아름답지는 못했지만, 재주와 정취가 있어서, 함께 얘기를 나눌만 하였다. 하루 종일 술을 나누어 마시며, 서로 시를 주고받았다. 저녁이 되자 자기의 조카딸을 나의 침실로 보내주었으니, 경원하며 꺼리었기 때문이었다.
    --- 허균의 <조관기행> 가운데

  

허균은 여자 관계에 있어서도 유교의 굴레를 벗어 던진 사람이었다. 허균은 일찍이 '남녀의 정욕은 본능이고, 예법에 따라 행하는 것은 성인이다. 나는 본능을 좇고 감히 성인을 따르지 아니하리라.' 라고 하였고, 여행할 때마다 잠자리를 같이 한 기생들의 이름을 그의 기행문에 버젓이 적어놓기도 하였다. 부안에 오기 전인 1599년 황해도사(종5품)로 있을 때만 해도 서울에서 창기들을 데려다 놀면서 물의를 일으켜 사헌부의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던 것이다.
  그러한 그가 매창과 잠자리를 같이 하지 않고 정신적인 교감만 가진 것은 비록 천한 기생이지만 똑같은 인간으로서 대우를 하였고 더구나 매창의 시를 좋아하였기 때문이었다. 

 

허균은 다음과 같이 매창을 보았다.
 
계생은 부안의 기생이라. 시에 밝고 글을 알고 노래와 거문고를 잘 한다. 그러나 절개가 굳어서 색을 좋아하지 않는다. 내가 그 재주를 사랑하고 정의가 막역하여 농을 할 정도로 서로 터놓고 얘기도 하지만 지나치지 아니하였으므로 오래도록 우정이 가시지 아니하였다.

  

허균은 이 해 12월 형조정랑이 되어 서울로 올라왔고, 이듬해에 병조정랑, 사복시정 등을 지냈으며, 1604년 수안 군수로 있던 중 파직당했다. 당시 수안의 악명 높은 토호 이방헌이란 자를 치죄하자 그의 아들이 황해 감사에 뇌물을 써서 감사가 허균을 추궁토록 했던 것이다. 1606년에 의홍위대호군(종3품 임시벼슬)이 되어 중국 사신을 접대하였다. 이듬해 삼척부사에 부임하였으나 부처를 섬긴다는 이유로 사헌부의 탄핵을 받아 또다시 파직당했다. 허균은 불경을 읽는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고 오히려 떳떳하게 내세웠다. 다음은 파직의 소식을 듣고 쓴 시이다.

 

  오랫동안 불경을 읽어 온 것은
  내 마음 머물 곳 없었음이어라.
  여지껏 아내를 내버리지 못했거든
  고기를 금하기는 더욱 어려웠어라.
  내 분수 벼슬과는 이미 멀어졌으니
  파면장이 왔다고 내 어찌 근심할 건가.
  인생은 또한 천명에 따라 사는 것
  돌아가 부처 섬길 꿈이나 꾸리라.
               <문파관작(聞破官作)>

  

파직에 이어 허균은 홍문관 월과(月課)에서 아홉 번을 연이어 장원을 하였는데 이 덕으로 12월에 정3품 공주 목사가 되었다. 그러나 그를 아끼던 선조가 죽고 1608년 광해군이 즉위하자 충청도 암행어사의 장계에 의해 8월에 다시 공주목사에서 파직되었다. 성품이 경박하고 무절제하다는 죄였다. 파직당한 허균은 부안 우반동에 있는 정사암에 와서 쉬었다.

  

부안현 바닷가에 변산이 있고, 산 남쪽에 우반(愚磻)이라는 골짜기가 있다. 그곳 출신인 부사 김청(金淸)이 그 중 아름다운 곳을 골라 암자를 짓고는 정사암(靜思菴)이라고 이름지었다. 늘그막에 즐기며 쉴 곳을 마련해 둔 것이다.
나는 일찍이 왕명을 받고 호남을 다니며 정사암의 아름다운 경치는 실컷 들었지만, 여지껏 구경해 본 적은 없었다. 나는 평소부터 영화와 이욕을 즐기지 않았는지라 늘 자연으로 돌아가고픈 마음이 있었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었다.
  

올해에 공주목사에서 파직되어 남쪽으로 돌아갈 뜻을 정하고, 장차 우반이란 곳에 묻혀 살려고 하였다. 그러자 진사에 급제한 김공의 아들이 나에게 말했다. "저의 아버지께서 지으신 정사암이 너무 외따로 있어, 제가 지키기 어렵습니다. 공께서 다시 수리하시고 지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나는 이 말을 듣고 기뻤다. 즉시 고달부와 이재영 등을 데리고, 말고삐를 가즈런히 하여 그곳에 가보았다. 포구에서 비스듬히 나있는 작은 길을 따라서 골짜기에 들어가자 시냇물이 구슬 부딪히는 소리를 내며 졸졸 흘러 우거진 풀덤불 속으로 쏟아졌다. 시내를 따라 몇 리 들어갔더니 산이 열리고 넓은 들판이 펼쳐졌다. 좌우로 가파른 봉우리들이 마치 학이 나는 것처럼 치솟았고, 동쪽 등성이론 수많은 소나무와 전나무들이 하늘을 찌를 듯 서있었다.
              --중략--

시냇물을 따라 동쪽으로 걸어 올라가다가, 늙은 당나무를 지나서 정사암에 이르렀다. 암자는 겨우 네 칸 남짓 되었는데, 낭떠러지 바위 위에 지어졌다. 앞으로는 맑은 연못이 내려다 보였고, 세 봉우리가 우뚝 마주 서 있었다. 폭포가 푸른 바위벽 아래로 깊숙하게 쏟아지는데, 마치 흰 무지개가 뻗은 것 같았다.
             --하략--
                    <중수정사암기(重修靜思菴記)>

 

 

▲ 우동제 옆의 굴바위 (옥녀봉, 용각봉 등산로입구)ⓒ2005 한국의산천    

 

매창은 허균을 다시 만나 함께 노닐며 그의 영향을 받아 참선을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허균은 12월에 정3품 승문원 판교의 교지를 받고 다시 서울로 올라갔다.
 이 무렵 매창과 가깝게 지낸 사또가 있었는데 그가 떠난 후 고을 사람들은 그를 기리는 비석을 세웠다. 매창이 그를 그리며 비석 옆에서 거문고를 뜯으며 <산자고>(山  )의 노래를 불렀는데 이를 두고 '매창이 눈물을 흘리며 허균을 원망했다'는 소문이 났다. 다음은 이 소식을 접한 허균이 매창에게 보낸 편지이다. 

 

계랑에게
계랑이 달을 보면서 거문고를 뜯으며 '산자고새'의 노래를 불렀다니, 

어찌 그윽하고 한적한 곳에서 부르지 않고 

부윤의 비석 앞에서 불러 남들의 놀림거리가 되셨소. 

석 자 비석 앞에서 시를 더럽혔다니, 이는 낭의 잘못이오. 

그 놀림이 곧 나에게 돌아왔으니 정말 억울하외다. 

요즘도 참선을 하시는지. 그리움이 몹시 사무칩니다.
   기유년(1609) 정월 허균

 

매창을 잊지 못하는 허균은 또 편지를 보냈다. 다음 편지에서 매창에 대해 연인이 아닌 진정한 친구로서의 우정을 간직한 허균의 마음을 엿볼 수 있다.

 

계랑에게
 봉래산의 가을빛이 한창 짙어가니, 돌아가고픈 생각이 문득문득 난다오. 내가 자연으로 돌아가겠단 약속을 저버렸다고 계랑은 반드시 웃을 거외다. 우리가 처음 만난 당시에 만약 조금치라도 다른 생각이 있었더라면, 나와 그대의 사귐이 어찌 10년 동안이나 친하게 이어질 수 있었겠소. 이젠 진회해(秦淮海)를 아시는지. 선관(禪觀)을 지니는 것이 몸과 마음에 유익하다오. 언제라야 이 마음을 다 털어 놓을 수 있으리까. 편지 종이를 대할 때마다 서글퍼진다오. 기유년(1609) 9월 허균  

 

 

 

이듬해(1610) 여름 허균은 매창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허균은 이를 슬퍼하며 두 편의 시를 지었다. 다음은 그 중 하나이다.

 

哀桂娘(매창의 죽음을 슬퍼하며)

 

妙句土甚擒錦
아름다운 글귀는 비단을 펴는 듯하고
淸歌解駐雲
맑은 노래는 머문 구름도 풀어 헤치네
兪桃來下界
복숭아를 훔쳐서 인간세계로 내려오더니
藥去人群
불사약을 훔쳐서 인간무리를 두고 떠났네
燈暗芙蓉帳
부용꽃 수놓은 휘장엔 등불이 어둡기만 하고
香殘翡翠裙
비취색 치마엔 향내 아직 남아있는데
明年小挑發
이듬해 작은 복사꽃 필 때쯤이면
誰過薛濤墳
누가 설도의 무덤을 찾으리

 

매창은 부안읍 남쪽에 있는 봉덕리 공동묘지에 그와 동고동락했던 거문고와 함께 묻혔다. 그 뒤 지금까지 사람들은 이곳을 매창이뜸이라고 부른다.(지금의 매창공원)   

 

 

▲ 내소사와는 달리 절같이(?) 조용한 능가산 개암사

 

그가 죽은 후 45년 후(1655)에 그의 무덤 앞에 비석이 세워졌고, 그로부터 다시 13년 후에 그가 지은 수 백편의 시들 중 고을 사람들에 의해 전해 외던 시 58편을 부안 고을 아전들이 모아 목판에 새겨 '매창집'을 개암사에서 간행하였다. 당시 세계 어느 나라를 둘러보아도 한 여인의 시집이 이러한 단행본으로 나온 예는 없다. 시집이 나오자 하도 사람들이 이 시집을 찍어달라고 하여 개암사의 재원이 바닥나기도 했다고 전한다.

 

 

 

선계폭포 상단   ⓒ2005 한국의산천  

 

 

 

▲ 선계폭포 하단 ⓒ2005 한국의산천

엄청남 물소리와 물보라로 인하여 더 이상 가까이 접근 할수가 없다

 

 

 

▲ 반계 유형원 선생 유허지 올라가는 길  ⓒ2005 한국의산천  

 

 

ⓒ2005 한국의산천  

반계 유형원 유적지는 큰길에서 산비탈을 약 20분정도 걸어올라가야 한다.  돌보는이가 없어서인지 건물은 잡초더미속에 방치되어있었다. 여기서 바라보는 경치는 그야말로 거칠것이 없는 일망무제다.

 

 

 

▲ 반계유형원 유적지(부안 보안면 우동)에서 본 곰소만. ⓒ2005 한국의산천   

 

부안 보안면 우동"실학의 메카 반계골"

 

실학의 선구자 유형원(효종,현종1622~1673)님. 다산 정약용과 더불어 실학에 있어 빠뜨릴 수 없는 실학의 아버지인 그의 집터 및 그를 기리는 비가 있는 곳. 원래 우동이란 이름은 우반동에서
비롯되었으나 일제 때 우동으로 바뀌었다. 

저서로는 토지, 군대 및 국정 전반에 관한 문제를 서술한 '반계수록'(전26권)이 있으며 이것은 훗날 실학사에 큰 영향을 주었다. 생가 터는 지리학상으로 명당으로 손꼽히는 명당터이다.  

 

 

▲ 안내문 ⓒ2005 한국의산천  

 

▲ ⓒ2005 한국의산천  

 

▲ ⓒ2005 한국의산천  

 

ⓒ2005 한국의산천  

 

 

▲ 전북 부안 우동리의 선계폭포 ⓒ2005 한국의산천   

 

 

 

▲ 반계선생의 유적지 주변은 산불로 인해 다 타버렸지만 이 가옥은 그대로인것이 신기하다. 

다음 페이지는 매창이 힘들고 어려운 삶을 살아가며 찾았던 개암사 소개   

 

주변 둘러볼 곳 

 

변산반도 

전북 부안군에 있는 국립공원으로, 면적이 157 ㎢에 달하고, 변산면9邊山面), 하서면9下西面), 상서면9上西面), 진서면9鎭西面)에 걸쳐 있다. 변산반도 서부의 변산산괴9邊山山塊)를 중심으로 1971년 12월에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었고, 88년 6월 11일에 국립공원으로 승격하였다. 

변산의 경치는 일찍이 한국 8경의 하나로 꼽혀 왔고, 10승지(勝地)의 하나인 반도 중앙의 변산(邊山)을 중심으로 내륙쪽의 내변산9內邊山)과 바다쪽의 외변산으로 나누어진다. 즉 산의 변산과 바다의 변산으로 나누어지는 셈이다. 변산은 방가산, 영주산, 봉래산 등의 이름도 가졌다. 

 

내변산은 300∼400 m의 산지가 이루는 울창한 수림의 산악미·계곡미가 일품으로, 실상사지(實相寺址) 등 유적과 울금바위, 선계폭포9仙溪瀑布), 가마쏘(釜棲) 등 경승지가 있다. 

외변산은 주로 암석해안의 해식애(海蝕崖)와 모래 해안의 백사청송9白砂靑松) 등 해안 경치가 일품이다. 층암절벽의 채석강과 적벽강. 내소사, 개암사, 유천 도요지 등의 명소를 들를 만하다. 부안(扶安)은 백제 때는 개화현(皆火縣)이었다. 신라 35대 경덕왕 16년(697)에 부령(扶寧) 또는 계발현(戒發縣)으로 고쳐 고부군(古阜郡)에 넣었다. 

 

'택리지'에 따르면, '변산의 바깥은 소금 굽고 고기잡이에 알맞고, 산중에는 기름진 밭이 많아 농사를 짓기에 알맞다'고 적혀 있다. ·격포진(格浦鎭) 터 변산면 격포리에 있는 조선시대의 진(鎭)터. 별장(別將)을 두었다가 헌종 8년(1873)에 혁파. 고종 10년(1873)에 다시 진 설치. ·닭이봉(계봉.鷄峰) 격포항 서쪽에 있는 봉우리. 바로 밑에는 퇴적암의 절벽이 마치 책을 겹겹이 포개 놓은 듯. 금계포란형(金鷄包卵形)이 있다고 전한다. · 

 

계화도(界火島)간척지 변산반도 북쪽 부분. 예부터 인근 어민들의 생활 터전. 한눈에 조망이 가능한 전망대인 계화정(界火亭)이 있다. ·위도(蝟島) 띄뱃놀이로 유명. 곰소에서 건너는 섬. 민속굿인 위도 띄뱃굿 전승. 풍어 기원의 대동(大同)굿이 유명.

 

개암사(開岩寺) 

상서면 감교리(甘橋里) 소재하는데, 고려 숙종(肅宗) 때에 창건한 절이다. 조선 초기에 건립된 대웅전(大雄殿:보물 292), 동종(지방유형문화재 126) 등이 있다. 북동쪽 산봉우리의 울금바위 유명하다. 울금바위 안엔 3개의 굴이 있다. '원효방'이라고 이름붙은 가장 큰 굴 안에는 석간수(옥천)가 흘러나오는데, 여기서 원효대사가 수도했다고 한다. ·

 

내소사(來蘇寺) 

변산면 석포리(石浦里)에 있는, 단아하고 고적한 절이다. 대웅전과 삼층석탑 등 중후한 건조물. 신라 27대 선덕여왕 때 창건. 중국 당나라 고종 때 무장이던 소정방이 신라와 연합으로 백제를 공격하면서 이 곳에 들러 '소래사(蘇來寺)'로 했던 것을 '내소사(來蘇寺)'로 고쳤다고 한다. 

대웅보전(大雄寶殿:보물 291), 고려동종(高麗銅鐘:보물 277), 법화경절본사본(法華經折本寫本:보물 278), 내소사 삼층석탑(지방유형문화재 124), 내소사 선실당과 요사(지방유형문화재 125) 등이 있다. 진입로와 경내의 전나무숲이 훌륭하다. 근처에 직소폭포가 있다. ·

 

직소폭포(直沼瀑布) 

변산팔경의 하나. 직소폭포와 중계계곡의 선경(仙境)을 보지 않고, 변산을 말할 수 없다'고 할 정도로 변산에서 첫째로 꼽는 명소. ·

 

월명암(月明庵) 

변산면 중계리(中溪里)의 낙조대(落照臺) 정상부에 가까운 동사면에 6.25전쟁 때 병화를 입은 것을 중건한 신라시대 창건의 월명암(月明庵)이 있다. 그 뒷산인 낙조대(448 m)는 황해로 떨어지는 해를 바라보는 경관이 훌륭하다. ·

 

하도 (하섬.荷島) 

3만여 평의 작은 섬. 주민 10여 명. 달마다 사리 때 육지와 연결되는데, 조개껍데기 백사장으로 유명하다. 2벽여 종의 각종 식물이 서식한다. ·고사포 해수욕장과 변산 해수욕장 하섬으로 건너는 나루. 그 앞에 원불교(원광대) 임해 수련장이 있다. 

백사장 뒤로는 소나무 숲이 울창하다. 주위에 변산, 상록, 격포 해수욕장 등이 있다. 변산 해수욕장은 호남에서 가장 오랜 해수욕장이다. 근처에 적벽강, 채석강 등의 절경이 있다.

 

채석강(彩石江)과 적벽강(赤壁江)

'채석강'은 중국의 이태백이 술에 취해 시를 남고 물 속의 달을 따려다가 물에 빠져 죽은 채석강과 흡사하다 하여 붙여진 이름. 해안의 층암절벽이 마치 수만 권의 책을 쌓아 놓은 듯. 바닷물이 썰물에 밀려 나가고 난 뒤의 암반층이 볼 만하다. 적벽강은 지방 기념물 제29호. 붉은색 암반과 절벽. 중국 송나라 때 시인인 소동파가 노닐었다는 '적벽강'에서 따온 이름이다.

 

 

▲ 지도를 클릭하시면 확대됩니다. ⓒ2005 한국의산천    

 

 

▲ 변산 일대 명산 지도 (클릭하시면 상세히 크게 확대됩니다)

 

클릭 ■☞ 이매창,개암사

 

클릭 ■☞ 이매창의 못다이룬 사랑

 

 

'MTB등산여행'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방태산과 조경동 아침가리  (0) 2006.07.26
도봉산 여성봉  (0) 2006.07.23
큰 물을 어우르는 여강  (0) 2006.07.19
비온 후 선유도 아침풍경  (0) 2006.07.17
아름다운 해변 구봉도  (0) 2006.07.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