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스트의 '가지않은 길'은 잘 알려졌지만
프로스트의 '가야 할 길'은 그리 널리 알려져 있지 않은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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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 한국의산천. 아름다운 숲으로 선정된 봉곡사 송림 길(이미지 클릭, 확대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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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오는 저녁 숲 가에 서서
로버트 프로스트(Robert Frost)
여기 이 숲이 누구의 것인지 나는 알 것도 같다.
그의 집이 마을에 있음으로
여기 멈추어 눈이 가득한 그의 숲을 보고 있는 나를
그는 볼 수 없을 것이라.
나의 작은 말은
이 해의 가장 어두운 저녁에
숲과 얼어붙은 호수 사이엔
농가가 없음에도 멈추어 선 것을
이상히 여길 것이다.
그는 말 방울을 흔들어
잘못된 것이라도 있는가 묻는다.
단 하나의 다른 소리는 쓸어가는 바람과
솜털같은 눈송이뿐
숲은 우아하고 어둡고 깊다
하지만 나는 지켜야 할 약속이 있고
내가 잠들기 전에 가야할 먼길이 있다.
이것이 누구의 숲인지 알 것도 하구나.
물론 그의 집은 마을에 있지만
그는 내가 여기에 서서 눈이 가득 쌓이는
숲을 보고 있음을 알지 못하리.
내 작은 말은 이상하게 생각하리라.
농가도 없는 한적한 숲과 얼어붙은 호수 사이에서
한 해 중에도 가장 어두운 이 저녁에
홀로 서 있음을.
내 작은 말은 방울을 흔들어
무슨 잘못이라도 있는지를 묻는다.
들리는 소리라고는 다만 스쳐 지나가는
스산한 바람소리와 솜털 같은 눈송이의 흩날리는 소리뿐.
아름답고 어둠이 짙게 깔린 아늑한 숲 속
그러나
내게는 지켜야할 약속이 있노라.
내가 잠들기 전에 가야 할 먼길이 있다.
내가 잠들기 전에 가야 할 먼길이 있다.
ⓒ2006 한국의산천. 봄
[숲이 희망이다] 숲에서 태어난 詩(서양)
숲은 생명이다. 인간보다 훨씬 오래 살고 먹을거리를 베풀어줄 뿐 아니라 하늘에 맞닿도록 높디높다. 그래서 신성한
것으로 숭배된다. 단군은 신단수로 내려왔고, 부처는 보리수나무 아래서 도를 깨쳤다.
그리스신화에서 시(詩)의 신 뮤즈가 헬리콘산의 깊은
숲 속에 사는 것으로 설정된 것도, 그 산의 히포크레네라는 샘물을 마시면 시적 영감과 지혜를 얻게 된다고 믿는 것도, 마찬가지 맥락에서다.
뮤즈는 숲속에서 시인을 부른다.
‘봄이 온다네/할미새는 첫
번째 푸른 숲에 내려앉아/ 날이 새기를 기다린다네/시인이여, 비파를 들고, 입 맞추어다오’(뮈세, ‘5월의 밤’). 모진 겨울을
이겨낸 숲이 어느 새 여린 연두색을 떠올리기 시작할 때, 그 ‘첫 번째 푸른 숲’에서 ‘시의 연인’은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숲은 동시에 소멸과 죽음을 상징하기도 한다. 예컨대,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로 널리 알려진 구르몽의 ‘낙엽’은 이렇게 끝난다. ‘우리도 언젠가는 가련한 낙엽이리라/가까이 오라, 벌써 밤이 되었다. 바람이 몸에 스민다.’ 가을의 우수와 정취로 주로 기억되는 작품이지만, 그 말미는 이렇게 ‘인생의 밤’에 어느덧 도달하고야만 덧없음을 노래하는 것이다.
고티에의 ‘지다 남은 나뭇잎’도 비슷하다. ‘산새는 날아가고 나뭇잎 지고/사랑마저 시들었네, 겨울인 것을/새야 새야 작은 새야 오는 봄에는/나의 무덤가에 날아와 울라.’ 마지막 잎새가 떨어지는 장면을 ‘작은 새’가 날아가는 모습으로 반전시킨다. 그러니 어느 이른 봄 내 무덤가에 남아 서걱거릴 낙엽은, 나를 위해 울어줄 작은 새가 될 수 있다. 생명이 죽음으로, 다시 생명으로 이어지는 상상력의 흐름은 윤회까지를 연상케 한다.
널리 알려진 로버트 프로스트의 시 ‘눈 오는 밤 숲에 머물어’를 보자. ‘숲은 아름답고, 어둡고, 깊어/그러나 나는 지켜야 할 약속이 있네/잠들기 전에 가야 할 길이 멀다/잠들기 전에 가야 할 길이 멀다.’
시인은 한겨울 밤 눈 내리는 깊은 숲을 가다가 아름다움에 취해 말에서 내린다. 꽝꽝 얼어붙은 호수 위로 말방울소리만 통통거리며 뛰어다닌다. 그 작고 영롱한 소리를 통해 고요는 완성된다. 그 아름다운 시공간이야말로 우리 삶의 가장 내밀한 순간이며, 시인은 그곳에 머물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그 머뭄은 영원한 것이 되어도 좋겠다. 그래서 숲은 ‘아름답기’만 한 것이 아니라, ‘어둡고 깊기’도 하다. 이 작품에서 ‘숲’은 지극한 아름다움이지만 동시에 죽음을 상징한다는 해석은 여기에 근거를 두고 있다. 물론 ‘잠들기 전에 가야 할 길’이 있으므로 다시 세속을 향해 발길을 돌리게 되지만, ‘가야 할 길’이 있음을 두번이나 강조하여야 할 만큼 ‘잠들고 싶은’ 충동은 강력하다.
이렇게 시 속에서 숲은 생명이기도 하고, 죽음이기도 하다. 이는 물론 모순이지만, 의미 있는 모순이다. 우리네 삶
자체가 죽음과 둘로 뗄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삶이란 죽음에 의해 완결되며, 죽음을 직면해서만 우리는 삶의 의미를 성찰할 수 있다.
10원짜리 하나에도 벌벌 떨며 평생을 살아온 ‘김밥할머니’가 늙마에 장학금을 쾌척하는 미담도 여기에서 출발한다. 어차피 빈손으로 가는 길에, 그
무거운 돈을 싸 짊어지고 가서 뭣할 것인가. 지폐란 숲을 베어 만든 종이에 숫자 몇 개 써넣은 물건에 불과한 것을. 할머니는 그 지폐를
숲(가난한 ‘인간 묘목’들)에 되돌리기로 결심한다. 죽음에 직면함으로써 삶의 의미에 직면한 것이다. 할머니뿐이랴. 삶의 아름다움과 의미를
절감하는 자는 시한부 환자들이 아닌가.
김밥할머니의 마음자리는 투르게네프의 시구에서도 발견된다. ‘오오 천 년의 거목이여, 들었는가.
죽음을 앞둔 지렁이가 너의 뿌리 밑을 기어 다니면서 그대를 가리켜 ‘나의 나무’라고 부르는 것을!’(‘나의 나무들’) ‘지렁이’란 물론 나무의
‘소유주’로 되어 있는 어떤 인간을 가리킨다.
숲은 시를 통해 삶과 죽음의 의미를 가르친다. 그러나 현대 독자들은 더 이상 눈 내리는 숲의 서정을 경험하지 못하게
되었다고, 도정일은 말한다. 이 시대의 눈은 산성 눈이기 때문이다. 산성 눈을 맞으면서 신성함과 경건함을 느낄 사람은 없다. 모두들 총총걸음으로
숲을 떠나 대피한다. 시의 위기, 숲의 위기, 인간의 위기다.
하지만 생각해보자. 도정일의 평론집(‘시인은 숲으로 가지 못한다’)도
나무를 베어 만든 종이를 통해 세상에 알려졌다. 프로스트의 시도, 이 귀한 숲 시리즈를 싣는 경향신문도, 숲을 해치고서야 독자들에게 전달된다.
그 아름다운 것들을 ‘시체’로 만들고서야, 진리와 가치와 아름다움을 새길 수밖에 없다는 아이러니. 어디 책만 그러하랴. 모든 생명체는 숲을,
자연을 일정부분 해치고서야 생존할 수 있는 것을.
결국 중요한 것은 마음자리가 아닐까. 옛 사람들이라 해서 숲을 베지 않고 산 것은
아니다. 하지만 필요한 만큼만 어쩔 수 없이 베었으며, 베기 전에 미안함을 느꼈다. 소나무에게 세 번 절하고 베는 마음자리다. 이제 세 번
절하는 사람들은 사라지고, 빨리 많이 베어 많은 돈을 벌려는 자들뿐이다. ‘아낌없이 주는 나무’는 이제 아낌없이 약탈해가는 자들에게 인내를
잃어버렸다. 더 이상 인류에게 주어진 시간이 많지 않음을 산성 눈은 말해준다. 〈한만수/ 문학평론가·동국대 교수〉
ⓒ2006 한국의산천. 280년생 느티나무 (둘레 4.3m 높이 21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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