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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거친호흡 몰아쉬며 ^^ 굽이치는 산맥넘어 손의 자유, 발의 자유, 정신의 자유를 찾는다. 기억은 희미해지기에 이곳에 기록을 남긴다
MTB등산여행

인천의 문화유적

by 한국의산천 2006. 4. 3.

인천의 문화유적 

 

1)계양산성(桂陽山城) 지역 계양구 유형 문화/유적지

 

▲ 계양산성

이 산성은 삼국시대 때 축조된 석성으로 일명 고산성(古山城)으로 불리기도 하는데 부평의 진산인 계양산(394.9m) 동쪽 능선에 축조되어 있다. 성의 축조형식은 지형분류상으로 산정식에 속하며, 방법상으로는 내탁식으로 외벽을 잘 다듬는 돌로 쌓았다. [증보문헌비고] <관방성곽>조에 의하면 `이 성은 삼국시대에 축조된 것으로 둘레가 1937보(587m)이나 지금은 퇴락되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을 고려해 볼 때 계양산성은 삼국시대 이래 부평읍의 성곽 역할을 담당해 왔음을 알 수 있다. 이 성과 관련된 전투기록은 보이지 않으나 임진왜란 때 명군이 전투를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2)부평향교(富平鄕校) 지역 계양구 유형 문화/유적지

▲2006.4월3일 현재 보수중.

고려 인종 5년(1127)에 건립된 부평향교는 병자호란(1636~37)때 불탄 것을 숙종 14년(1688) 현 위치에 재건하였다고 전한다. 또한 문헌(경기읍지 중 부평읍지)에 의하면 당초 부평향교에는 일반적인 향교 건물 배치인 대성전, 동·서 양무, 동·서 양재 이외에 전사청, 공수고 등의 건물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현재는 남아 있지 않다. 건축양식은 대성전, 동·서 양 무, 동·서 양재는 맞배지붕 형식으로 되어 있고, 명륜당은 팔작지붕 형식으로 되어있다. 1906년 보통학교령이 공포되어 교육기능을 마감하고 성현에 제사를 모시는 곳으로 오늘에 이어져 오고 있다.

3)부평도호부청사 (富平都護府廳舍) 지역 계양구 유형 문화/유적지
인천 문화재 1-3호

 

부평은 고려 의종 4년(1150) 안남도호부가, 고종 2년(1215) 계양도호부가 설치되었으며,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태종 13년(1413) 도호부가 각각 설치되었다. [부평부읍지]에 의하면 부평도호부 내에는 객사, 동·서헌, 삼문, 근민당, 좌·우 익랑, 동·서책방, 사령청, 향청, 포도청, 훈무당, 부창 등 여러 채의 건물이 있었다고 전한다. 이러한 청사 규모는 인천도호부를 능가하는 것으로 이는 부평이 고려시대 이래로 내려온 웅부(雄府)였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 도호부 건물과 욕은지(浴恩池)
 

현재 부평도호부청사 건물의 정면 바로 앞에 위치하는 욕은지는 동서길이 15.3m, 남북길이 12.9m가량되는 정방형 평면형태를 하고 있으며 그 중앙에는 반경 5m가량되는 원형의 인공섬을 만들고 남측변 중앙에서부터 돌다리를 놓아 연결시켜 놓았다.
서측면의 모서리에는 폭 190mm, 높이 400mm가량되는 물이 나오는 입구가 있으며, 남측 모서리에는 폭 870mm정도되는 연못으로 내려가는 계단을 5단 만들어 놓았습니다. 이 계단의 댓돌로 사용된 부재는 길이 1,025mm, 높이 655m, 두께 220mm가량되는 화강석으로 우주와 탱주의 형태가 조각되어 있어 탑신석으로 보이며 또한 서측면 좌측하부에는 안상을 조각한 부재를 끼워 넣어 탑재의 기단 면석으로 추측된다. 도호부 건물 좌측면의 고막이석에도 같은 형태의 안상조각이 있어 이건물과 욕은지의 축조시에 부근의 탑을 해체하여 그 부재를 사용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욕은지는 정조가 장능에 참배할 때 이곳에서 목욕재계하고 참배한 곳이라고도 하며, 또는 어사대에서 활쏘기를 마친 정조가 이곳에서 손을 씻었다고 하여 명명한 것이라고도 한다.

▲ 부평초등학교 내에 있는 부평도호부와 500년생 은행나무


현재 남아 있는 내아(동헌이라는 견해도 있음) 건물은 당초 `ㄱ`자형 건물이었으나 현위치로 이전하면서 `ㅡ`자형 건물 로 변형되었으며 정면 6칸 측면 2칸 규모의 팔작지붕 도리집이다.
※역대 임금중에 공식적으로 부평을 경유해간 임금은 정조대왕 한분이다. 정조21년(1794) 에는 김포에 있는 인헌왕후의 장릉을 참배하고 부평,안산을 거쳐 수원에 있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를 참배하였다.
이때 정조는 부평에 머물며 활을 쏘며 욕은지에서 손을 씻었다고 한다.
위치: 인천 계양구 943 부평초등학교 內

4) 인천도호부청사 지역 남구 유형 문화/유적지
인천도호부청사의 정확한 건축연대는 밝혀지지 않고 있지만 강희맹이 쓴<인천누승호기>에 의하면 세종2년(1424)에 이미 청사가 있었다고 한것으로 보아 조선초기에 건축되었음을 추측할 수 있으나 현재의 건물을 조선초기의 것으로 보기는 어렵고 객사지붕의 기와에서 `강희 16년(숙종3년:1677)` 이라는 명문이 나온 것을 볼 때 중수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인천도호부로 승격된 것은 조선 세조6년(1460)으로 세조의 어머니 소헌왕후 심씨(세종비)의 진외가 이기 때문이었다. <인천부읍지>에 따르면 인천도호부에는 객사, 동헌, 내동 헌, 삼문, 사령청, 향청, 군관청, 훈무당, 옥사, 어용고, 군기청 등 원래 15∼ 16동의 건물로 구성되었다고 전하나 현재는 객사<客舍>의 일부와 19세기초 건물인 동헌<東軒> 및 훨씬 후대에 세워진 창고만이 남아 있다.
인천도호부청사의 정확한 건축년대는 밝혀지지 않고 있지만 객사는 지붕기와에서 발견한 명문<銘文>에 의해서 1677년에 중수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으나 1950년 현 문학초등학교를 세우면서 동헌과 함께 지금의 위치로 이전 개축하였기 때문에 당초 건물들의 배치형태를 알 수가 없게 되었다. 객사는 원래 20칸의 규모였다고 전하여지나 현재는 양쪽 익랑채가 없어지고 박공지붕으로 된 중앙부의 정면 3칸 측면 2칸의 건물 일부만 남아 있다. 동헌은 합각지붕의 굴도리 집으로서 관청 건물로는 드물게 부연을 달지 않은 홑 처마지붕을 하고 있으며 기둥도 둥근 기둥이 아닌 네모 기둥을 사용하고 있다. 
 
5) 능허대지
옛날에 중국으로 가려면 대륙을 이용하기도 했지만 서해안에서 뱃길을 이용했었다. 더구나 고구려, 백제, 신라가 각축을 벌이던 삼국시대에 백제는 육로를 통하지 않고 대륙으로 가는 길이 필요했다.
능허대지는 백제가 중국 동진과 통교를 시작한 근초고왕 27년부터 웅진으로 도읍을 옮긴 개로왕 21년(475)까지 사신들이 중국을 왕래할 때 출발했던 나루터가 있던 곳이다. 당시 삼국으로 나뉘었던 한반도와 마찬가지로 중국도 남북조로 나뉘어 서로 대립하고 있었다. 고구려와 적대관계에 있던 백제는 육로를 포기하고 뱃길을 이용해서 남조로 들어갔다.
능허대에서 가까운 한나루는 중국으로 가는 가장 가까운 길목에 있는 항이었다. 중국으로 가는 사신들은 능허대에서 머물다가 배를 탔고, 따라서 능허대는 사신들을 배웅하는 장소였던 셈이다. 당시에는 멀어져가는 배를 한참동안 바라보아도 고개가 아프지 않을 만큼 적당한 위치에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간척사업으로 아파트와 유원지로 개발돼 도심 한가운데 자리잡게 되었다. 옛날의 자취는 전망대에 올라 서해를 바라보며 미루어 짐작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현재 능허대지는 송도 앞바다를 매립하면서 당시의 장소를 기리기 위해 이곳으로 옮겨 공원으로 조성한 것이다. 이곳에는 작은 정자와 연못이 있으며 연못에는 인공폭포와 분수대 그리고 잉어 등이 있어 시민들의 휴식처로 이용되고 있다.
 
6) 흥륜사 지역 연수구 유형 문화/유적지
흥륜사는 지금으로부터 약 613년 전(서기1376년) 고려 우왕 2년 공민왕의 왕사로 계시던 나옹화상께서 개창하셨다. 처음 이곳의 경관이 하도 수려하여 절이름을 청량사라 하였고 그에 따라 산의 이름도 청량산이라 이르게 되어 오늘날까지 이 산을 청량산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그 후 청량산은 210여년 동안 전하여 왔으나 1592년 임진란의 변화로 소실된 후 340여년 동안 빈터만 남아있다가 서기 1938년에 절을 다시 세우게 되었다. 그 후 1966년에 노후 쇠퇴한 옛 건물들을 헐고 새로이 건물 8동을 세웠으며 1977년 6월에는 절 이름을 바꾸어 지금의 흥륜사로 개칭하여 사용하고 있다.  
 

7) 강화산성 지역 강화군 유형 문화/유적지
강화산성은 고려 고종 때 강화도로 천도하며 쌓은 성이다. 몽고의 침략에 항전한 호국의 현장인 셈이다. 1259년 고려가 개성을 환도하기전 성을 헐었는데 조선초에 다시 보수됐다가 1637년 병자호란 때 청군의 침략으로 파괴됐다. 1677년 조선 숙종때 다시 대대적인 개축공사를 했다. 하지만 병자호란 때 청군의 침략으로 다시 파괴되는 등 곡절을 겪었다. 근세엔 병인, 신미양요와 일본의 침략을 겪은 아픔의 현장이다.
성안에는 남쪽에 안파루, 서쪽에 첨화루, 동쪽에 망한루, 그리고 북쪽에 진송루 등 4대문이 있었다. 온갖 시련을 겪고 세월이 흐르며 성곽과 문루가 없어 졌지만 지난 1974년에 남문을, 1977년엔 북문을 복원했고 서문은 다시 개축했다. 북문에서는 멀리 휴전선 넘어 장단과 개성의 송악산이 훤히 내려다 보인다. 고향을 북쪽에 두고 있는 이들은 이곳에 서서 눈시울을 붉히기도 한다.

8) 연미정 지역 강화군 유형 문화/유적지
연미정은 한강과 임진강이 합류하여 한 줄기는 서해로, 또 한 줄기는 강화해협으로 흘러 그 모양이 마치 제비꼬리같다 하여 연미정이라 부른 것입니다. 고려 고종이 구제(九薺)의 학생을 모아 이곳에서 공부하게 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조선시대에는 황형 장군이 공을 많이 세워 조정에서 연미정을 하사 받았다고 합니다. 옛날에는 한양을 들어갈 선박들이 이 앞에서 모여 쉬었다가 만조를 기다려 한강으로 들어갔다고 합니다 

 

9) 고려궁지 지역 옹진군 유형 문화/유적지

 


이곳 고려궁지는 지금으로부터 760여년전 몽고의 침입을 방어하기 위해 고려 왕조가 강화도로 피난했을 당시 임금님이 거쳐하시던 궁궐로 이곳에서 약 39 년간(1232~1270) 몽고에 항쟁하였다. 강화로 천도해온 고종은 약 2년에 걸쳐 연경궁을 본궁으로 궁궐과 관아를 지어 건물의 명칭을 전부 개성의 궁궐과 똑같이 하고 궁궐 뒷산도 송악산이라 불렀다고 한다.
궁궐은 몽고와의 화친에 따라 허물었으며 현재 궁지 내에는 강화지역을 다스렸던 유수부가 있다. 또한 고려궁지 내에는 외규장각이 있었으며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들이 이곳에 있던 많은 서적들과 은괴, 지도 등을 약탈해 갔다. 현재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있는 고서들도 이곳에서 약탈해간 것이다. 고려궁지에는 오래된 역사와 함께 그 자리를 지켜온 고목들이 많으며 아름다운 꽃나무들로 봄이면 더욱 아름다운 정원이 된다.

고려궁지 서남쪽으로 있는 계곡에는 왕자샘이 있다. 왕자가 사용하던 우물이라해서 왕자샘이라 불렀다. 물이 차고 깨끗해 찾는 발길이 많다. 

 

 

10) 철종의 잠저지 강화군 유형 문화재

▲ 철종의 잠저지(潛邸址) 용흥궁 (지방유형문화재 20호)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관청리 441

왕세자와 같이 정상법통이 아닌 다른 방법이나 사정으로 임금으로 추대된 사람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살던 집을 잠저()라고 한다.

이곳은 고려 궁지에서 도보로 5분 거리에 있으며 강화도령 철종이 임금님으로 등극하시기 전에 기거하시던 잠저지이디. 원래는 3칸짜리 초가집이었으나 임금님이 되신지 4년 되던 해에 강화유수 정기세가 현재와 같은 기와집을 짓고 용흥궁이라 하였다. 문을 들어서서 오른편으로 계단을 올라가면 작은 비각에 '철종잠저구기'라 적혀 철종이 머물던 곳임을 표시하고 있다.
(찾아가는 길 : 강화대교→강화읍→고려당삼거리에서 고려궁지방향 우회전후 20m직진→우회전하여 골목 안으로 50m→용흥궁)

11)연무당 옛터 지역 강화군 유형 문화/유적지
강화성 서문 옆에는 연무당 옛터가 있다. 이곳은 강화부의 군사들이 훈련하던 집이다. 일본의 강압으로 한일수호조약(1876년)을 체결한 뼈아픈 곳이기도 하다. 이 조약으로 인해 인천·부산·원산의 항구가 개항되고 새로운 문명을 받아들이는 계기가 되었지만, 결국 일본에게 36년간 나라를 빼앗기는 결과를 맞았다. 신문물이 들어온 현장임과 동시에 민족시련이 시작된 반성의 터다.

12) 선원사지 지역 강화군 유형 문화/유적지
선원사지는 선원사라는 옛 사찰 터이다.
선원사는 고려시절 항몽투쟁의 중심 인물인 최우가 대몽항쟁의 종교적 거점으로 창건한 고려 최대의 절이다. 선원사에서 호국정신의 종교적 상징인 팔만대장경을 만들었고 1290년 고려 충렬왕은 몽고군 침입에 대비하여 강화로 제2의 천도를 할 때 선원사는 2년간 고려의 왕궁 역할을 하기도 했다.
기록에 의하면 옛날에는 이곳이 바닷가여서 거제에서 대장경 목판을 싣고 선원사 앞까지 배가 들어왔다고 한다. 그러나 현재는 건립 당시 건물은 모두 없어지고 길이 250m, 폭 170m 가량의 터만 남아 있으며 여기서 보상화문전, 막새기와, 치미 등이 출토되었다. 현재는 동국대학교 박물관 팀에서 발굴작업중이며 아래에 조그만 유물전시관이 있다. 이 절터에서는 많은 유물들이 출토되었는데, 대표적인 것으로는 보상화문전(寶相花文塼), 명문이 새겨진 막새기와, 치미, 원숭이상 등으로 이들은 그 양도 풍부하고 질적으로도 상당히 우수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 유물들은 절 터의 아래쪽에 위치한 선원사지유물전시관에 보관되어 있는데, 이외에도 청자편, 상감청자편과 숫키와, 암키와, 어룡형장식와, 보상화문전 등의 출토물이 전시되어 있다. 또한 선원사 초대 주지인 진명국사와 선원사를 거쳐간 송광사의 16국사 가운데, 4분의 영정(자진국사진영, 원감국사진영, 진명국사진영, 혜감국사진영)과 한쪽 벽면에는 고려대장경의 판각과정과 인출장면 등이 사진과 글로 전시되어 있다.

13) 용진진 지역 강화군 유형 문화/유적지
역사관에서 해안순환도로를 따라 달리다 보면 왼편으로 누각을 하나 만날 수 있는데 이것이 용진진이다. 용진진은 숙종 42년에 설치되었다 하며 3개의 돈대를 관장하였다

14) 충렬사 지역 강화군 유형 문화/유적지
병자호란 때 인조임금은 강화로 피난 오시는 길에 길이 차단되어 남한산성에서 45일간을 버티다 결국은 청 태종에게 무릎을 꿇는 치욕적인 일을 당하고 항복하였다. 남한산성에서 인조 임금님이 항복하시기 8일전에 청군이 강화로 침공해 왔는데 강화산성이 함락되자 당시 76세의 우의정 김상용선생은 그의 손자와 함께 강화산성 남문에 올라 화약에 불을 붙여 순직하셨다. 충렬사는 선생의 사후 4년만에 건립하였는데 선생 외에도 신미양요 때 순국하신 어재연, 어재순 두 형제분의 위패를 봉안한 곳이다.
이 사당이 건축된 것은 인조19년(1641)으로 당초 현충사라 하였으나, 효종 9년(1658) 유수 허위가 현재 명칭인 충렬사로 사액 받았다.

 

15) 광성보 강화군 유형 문화/유적지

 

 


해안순환도로를 따라 병인양요, 신미양요, 운양호사건의 격전지를 만날 수 있습니다. 광성보는 신미양요때 격전지입니다. 광성보 내에는 안해루와 광성돈대, 손돌목돈대, 용두돈대가 있으며 산책로가 잘되어 있어 많은 관광객들이 즐겨찾는 곳이다.
매년 음력 4월 24일에는 신미양요 순국선열들을 위한 광성제가 열립니다. 광성보내에는 산책로가 잘 정비되어 있어 가족이나 연인과 함께 걷기가 좋은곳이다.
※ 광성보는 신미양요 때 순국하신 분들의 묘와 그 분들의 애국심을 기리는 비석이 있는 곳이므로 엄숙하고도 조상들의 호국의 얼을 기리는 장소이다.

 

16) 덕포진 강화군 유형 문화/유적지

 

 

▲ 파수장터
파수장터에서 1980년 발굴, 복원되었으며 발굴 당시 7개의 포탄과 조선시대 때 사용하던 화폐인 상평통보 2개가 출토되었다. 이 곳에서 출토된 것은 주차장에 있는 전시관에 보관되어 있다. 파수장터는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건물로 이 터 안에서 주춧돌과 화덕이 발견되었으며 포대와 돈대의 중심부에 위치한 것으로 보아 포를 쏘는 불씨를 보관하던 장소인 동시에 포병을 지휘하던 장대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덕포진 덕포진은 서해로부터 강화만을 거쳐 서울로 진입하는 길목인 손돌항에 천혜의 지형을 이용한 군사의 요충지로, 창설 시기는 임진왜란의 쓰라린 체험을 겪은 조선 왕조의 선조조로 추정된다. 그후 영조36년(1760) 에는 덕포진에 종 3품의 수군첨사가 수군 316명을 지휘하였으며, 부에서 전속 방어 거리는 남쪽으로 15리에 이르렀다. 병인양요(1866)와 신미양요(1871) 격전을 치루었던 곳이며, 1980년에 발견되어 옛 모습 대로 복원하였다. 발굴 당시 탄약고 및 포대에 불씨를 공급하기 위한 불씨 보관 장소 파수청지가 발굴되었고 소포, 중포, 포탄 및 상평통보가 출토되었다. 당시 발굴된 6문은 국립중앙박물관에 5문, 덕포진에 1문이 보관중이다.

가는 길
올림픽대로를 타고 김포·강화 방면으로 진입하려면 48번 국도를 타고 김포로 들어가는 방법과 제방도로(352 지방도로)를 타고 가는 방법이 있다. 도로의 폭은 비록 좁지만 352번 제방도로를 타고 가다가 김포 방면(48번 국도)으로 들어가 바로 만나게 되는 누산삼거리에서 좌회전한다. 여기에서 덕포진, 대명리 방면인 352번 지방도로를 계속 타고 양곡우회도로 사거리가 나오면 이곳에서도 역시 직진이다. 도로를 새로 닦아서 널찍하다. 서행 운전을 하다가 대명리포구와 덕포진 사거리를 만나 덕포진 쪽으로 우회전하면 바로 덕포진교육박물관 표지를 볼 수 있다. 덕포진 방면으로 좌회전하여 한번 더 좌회전하면 우측에 덕포진교육박물관이다. 덕포진은 이곳에서 약 100m 정도 떨어져 있고 주차장도 넓다.

17) 덕진진 강화군 유형 문화/유적지
덕진진에는 강화제일의 남장포대와 덕진돈대가 있으며 바닷가에는 경고비가 서 있다. 남장포대에는 15문의 대포가 있었다고 전하는데 현재는 7문을 전시중이며 남장포대를 지나 계단을 올라가면 병인양요 당시 프랑스군이 강화읍을 점령하여 양헌수 장군부대가 야음을 틈타 강화로 들어왔던 덕진돈대가 있다. 덕진돈대를 지나 왼쪽아래 계단으로 내려가면 바다를 향해 비석이 서 있는데 이것이 경고비이디. 바다의 척화비라고도 불리며 외국의 배가 우리해역으로 들어오지 말 것을 경고하는 비석으로 염하강을 지키고 있다.

18) 전등사 /삼랑성 지역 강화군 유형 문화/유적지
전등사의 나이는 약 천육백살이다. 고구려 소수림왕때 세워진 것으로 여겨지는 고찰인데 불교 3대 본산의 하나로 꼽힌다. 강화도가 역사의 왜침이 심했던데 비해서 비교적 옛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편이다.
대웅전과 역사전을 비롯해서 철제범종을 찾아볼 만하다. 1621년에 건립한 대중전(보물 제178호)의 조각과 단청은 매우 아름답다. 특히 대웅보전 지붕 네 귀퉁이의 추녀를 떠받치고 있는 벌거벗은 여인상은 보는 이들의 궁금증을 자아내게 한다.

▲ 무거운 처마를 떠받들고 있는 나부상

그 사정은 이렇다. 지금의 나부상이 만들어진 것은 17세기 말로 추측된다.
당시 나라에서 손꼽히는 도편수가 대웅보전 건축을 지휘하고 있었다. 고향에서 멀리 떠나온 그는 공사 도중 사하촌의 한 주막을 드나들며 그곳 주모와 눈이 맞았다. 사랑에 눈이 먼 도편수는 돈이 생길 때마다 주모에게 모조리 건네주었다.

“어서 불사 끝내시구 살림 차려요.”
“좋소. 우리 그림 같은 집 한 채 짓고 오순도순 살아봅시다.”
도편수는 주모와 함께 살게 될 날을 손꼽아 기다리며 대웅보전 불사를 마무리하고 있었다.
하지만 공사 막바지에 이른 어느 날 그 주막으로 찾아가보니 여인은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도편수는 머리끝까지 화가 치밀었다. 여인에 대한 배반감과 분노 때문에 일손이 잡히지 않았고 잠도 오지 않았다. 그래도 도편수는 마음을 다잡고 대웅전 공사를 마무리했다. 공사가 끝나갈 무렵 대웅전의 처마 네 군데에는 벌거벗은 여인이 지붕을 떠받치는 조각이 만들어졌다.

이것이 전등사 대웅보전에 얽힌 전설이다. 

이 나부상이 더욱 재미있는 것은 네 가지 조각이 제각각 다른 모습이라는 점이다. 옷을 걸친 것도 있고 왼손이나 오른손으로만 처마를 떠받든 조각도 있으며 두 손 모두 올린 것도 있기 때문이다.
이 전등사 대웅전의 나부상은 희랍의 시지프스 신화를 연상케 한다. 그런가 하면 부처님을 모신 성스러운 전각이지만 그런 조각상을 세운 당시 도편수의 익살과 풍자, 그런 파격을 기꺼이 받아들일 줄 아는 전등사 스님들의 자비로운 마음을 느끼게 하는 대목이다.
과연 그 대웅전을 중건했던 도편수나 스님들은 무슨 뜻으로 나부상을 올려놓았던 것일까?
단순히 사랑을 배신하고 욕심에 눈 먼 여인을 징계하고자 하는 뜻만은 아닐 것이다. 도망간 여인이 잘못을 참회하고 세상을 올바르게 살아가라는 염원도 들어있는 것이다. 또 그런 조각상을 보게 될 후대의 사람들에게 부처님의 자비로운 마음을 본받으라는 뜻도 담겨 있으리라. 그렇기에 전등사 대웅보전의 나부상은 보면 볼수록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만든다.

 

그밖에 절안에는 약사전(보물 제179호) 등의 조선중기 건물을 비롯해서 명부전, 삼성각, 정묵당, 향로전 대조루, 극락암 등과 함께 절 내부에 여기저기 걸려있는 많은 탱화를 볼 수 있다.
대웅전 맞은 편에 있는 범종(보물 제393호)은 높이가 164cm, 밑지름이 100cm의 중국 송나라종이다. 우리나라 종은 용이 한 마리가 그려져 있지만 중국종은 두 마리가 그려져 있어 구분을 쉽게 할 수 있다. 종에 새겨진 글씨에 따르면 이 종은 북송 철종 소성4년(1097년)에 제작된 것으로 중국 하남성 백암산 숭명사의 종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왜 이곳으로 옮겨져 왔는지는 알수 없다.
종 표면에 새겨진 기하학적인 무늬는 중국종의 솜씨를 엿볼 수 있게 한다. 종소리도 맑고 아름답다. 일제시대 금속류 강제수탈로 빼앗겼다가 해방 뒤 부평에 있는 군기창에서 다시 찾아온 기구한 운명을 간직하고 있다.

 

19) 성공회 강화성당 지역 강화군 유형 문화/유적지

 


성공회가 강화에 전파된 것은 1893년 영국인 왕남도 신부에 의해서이다. 갑곳나루에서 전도를 시작한 후 강화읍에서 영화원이라는 보육원을 개설하고 강화에 의료기관이 생기기 전까지 서양 의술로 많은 환자를 돌보았다. 현재 건물은 1900년에 지어졌는데 성당을 한옥식 건물로 지어 올려 동서양의 조화를 이루고 있으며 백두산에서 운반해온 나무로 지었다고 합니다. 전체 성당의 모습은 배모양을 취하고 있으며 성당의 내부는 전형적인 바실리카 양식이다. 성당의 담장도 아름다운 돌담으로 이루어져있다.

 

▲ 아름다운 성공회 성당 돌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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