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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거친호흡 몰아쉬며 ^^ 굽이치는 산맥넘어 손의 자유, 발의 자유, 정신의 자유를 찾는다. 기억은 희미해지기에 이곳에 기록을 남긴다
MTB등산여행

칠현산 칠장사

by 한국의산천 2005. 11. 16.

칠현산 칠장사[2005.11.15.] [

한국의산천

]

 

 

칠현산과 칠장사
고찰 칠현사가 자리한 바로 뒷산은 칠장산(七長山)으로 표기되어 있다. 국립지리원 발행 지형도에는 칠장산과 칠현산등 각각의 산명이 표시되어있으나 옛 기록에는 이 일대의 산을 다른 명칭없이 모두 칠현산으로 불렀다.

속리산에서 부터 벋어 내린 한남금북정맥이 칠장산에서 북쪽으로 방향을 틀어 의왕의 백운산을 거쳐서 관악산을 이어 김포의 문수산까지 이어지며 한남정맥이라 명명하고, 칠장산에서 남쪽으로 벋어 내려간 능선을 금북정맥이라 칭하며 서산의 가야산과 일락산을 들어올리고 서산 팔봉산을 솟구친 후 그 여맥을 서해바다에 가라앉힌다.

여암(旅庵) 신경준(1712~1781)의 저작으로 알려진 산경표(山經表)가 제시하는 산줄기의 개념을 간단, 명료, 명쾌하게 요약한 한마디가 떠올랐다.

 

"산은 물을 넘지 못하고, 물은 산을 건너지 않는다."

안성 죽산면 칠장리 칠장사는 대한 불교 조계종 2교구 용주사의 말사로서 칠현산 산기슭에 자리하고 있다. 절 입구에는 은행나무와 잎사귀가 작고 예쁜 애기단풍이 주변을 감싸고 있으면 감나무가 많은 울창한 숲 속에 칠장사가 아담하면서 고풍스럽게 앉아있다.

 

 

칠장사는 임꺽정이 병해대사를 만난 곳이며, 또한 임꺽정이 이봉학 등과 함께 형제의 의를 맺은 곳이다.   당시 병해대사는 갖바치 출신이었으며 임꺽정은 백정이었던 터라 이들의 만남은 의미가 매우 컷다. 어른이 되기까지 병해대사에게서 무술을 연마하고 글을 배웠으며, 임꺽정이 난을 일으켰을 때도 관군을 피해 도착한 곳도 이곳 칠장사였다. 당시 임꺽정이 스승인 병해대사의 부처를 만들기 위해 목수를 시켜 만들었다는 부처는 현재 소재가 밝혀지지는 않고 있지만 지금도 그 부처를 꺽정 부처"라고 부르며 최근까지도 사찰안에 있다고 전해온다. 

  

 

 

칠장사는 예로부터 깊은 차령산맥이 그 줄기를 품고 있어 고려 말 왜적의 침입이 잦을 때 사서를 칠장사로 옮겨 8년간 비장해 소실을 면한 일이 있다.

 

 

칠장산 당간 지주
완전한 형태를 갖추고 있는 높이 11.5m의 철재당간으로 사찰에 큰 행사가 있을 때와 부처와 보살의 공덕과 위신을 기리는 당(깃발)을 달기 위한 깃대를 말한다. 본래는 30개의 원통이 연결되어있었다고 전하나 현재는 14마디의 원통이 남아있다.

 

 

 

 

 

▲ 칠장사 사적비 철 당간지주 옆에는 <칠장사 사적비>가 서있다.
특별히 전해오는 사적기가 있지 않기에 이 사적비는 칠장사의 내력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며, 이 사적비에 의하면 고려 충렬왕 34년 안성출신의 고승 혜송국사의 높은 유덕을 기리기 위해서 창건되었다고 한다.
일찍이 생전에 혜소국사가 칠현산에 홍제관을 세우고 일곱 악인을 교화 제도한 일에 따라 칠장사라 한 것이 이절의 시초라고 전한다. 비의 규모는 높이 2.2m 폭 1m, 두께 27cm 이다.
비신에는 <조선국 죽산 칠현산 칠장사 중수 향화 사적비명> <대명승정 44년 신해 6월일 立> 이라고 쓰여 있다. 

 

[ 朝鮮國竹山七賢山重修香火事蹟碑銘竝書 ]

   (

 조선국죽산칠현산중수향화사적비명병서 )

 

延昌에 산이 있는데 이름이 七賢이고 칠현에는 절이 있는데 七長이다. 고려 대선사 慧炤 鼎賢大師(혜소 정현대사)가 창건하였다. 속세에 7健이 道塔을 만들었다는 소리가 있는데, 탑은 정현으로부터 시작되어 先后 七賢을 가지런히 함으로써 七長이다. 七長 칠부도는 아! 역시 기이하다. 땅은 신령스럽고 사람이 뛰어나니 그 이름이 실로 부합되는 오래된 것이다. 梵宮 塔廟의 기단에서 법계를 포교하니 香火하며, 부처님을 받든 것이 아침저녁으로 끊이지 않았다. 비록 명산의 거찰이나 서울은 아니다. 辛禑 9년(1383) 섬나라 오랑캐에 의해 불이 일어나 재만 남은 빈곳을 佛宇와 位田, 옛 물건을 중수하였다. 民戶를 모두 들이니 무릇 100호를 옮기고 香火가 끊긴지가 거의 300년이다. 만물이 흥하고 교체되는 것이 실로 그 이치이고 대개 교체되고 흥하는 것을 역시 그 사람들이 기다린다. 白城에는 스님이 있는데 이름하여 竹軒宗演이다. 大乘 轉輪을 따라 개연히 중수하고 신구 사찰에 향화를 다시 올린다. 자기의 임무를 다해 승려를 모으니 보배가 널리 있다고 하니 壇信이 말하고 守仁이 말하고 信贊이 말하고 双湖가 말하고 楚堅 楚性이 말하며 佛力으로써 도구를 갖춰 스승의 뜻을 이루었다. 마침내 옛것을 받들어 蓮宮의 구조를 새롭게 창건하였고 梵字輪을 빛나게 일신함이 부처를 받드는 禮에 이르렀는데 금년부터 복설되었다. 비록 옛것을 받들어 번성하였으나 없어진 것도 있었다. 이런 까닭에 숲과 산에 경사가 미쳐 채색이 발하여 계곡이 윤택하였고 정현대사의 옛 자취가 이곳에 미쳐 더욱 뚜렷하게 살아나니, 이곳을 지나는 사람으로 하여금 다시 보지 않을 수가 없게 하였다. 무릇 民舍의 시주자가 三輪과 그 전토를 도왔고 부처님을 공양하고 香火를 올려 세상에 전하니 오래도록 폐하지 않았는데 사람이 악하지 않음이 여기 있다. 아! 이 寺位田은 옛것이 아니고 많지도 않으나 다만 綠兵이 마을의 喪契券을 태운 까닭에 영세토록 전하지 않아 香火가 끓어 졌다. 전에 鐵足으로 後鑑을 삼아 竹師 民田을 시행한 것을 본받고자 하였는데, 貞石에 새겨 영구히 전하니 즉 그것을 고려한 뒤이다. 그 奉佛을 깊이하고 사물의 끝과 시작을 성심으로 하였다. 스님이 도공의 기술을 이루게 된 것이 반드시 이러한 연우인 즉 七長의 七浮屠임을 쉽게 알 수 있다. 또 그 一浮屠를 더하여 산 이름을 八賢이라 부르고 절 이름을 八長이라 하였으니 후에 지금까지 이어져온다. 각기 그 이름과 수를더하여 무궁토록 전한다. 倻山의 승려 覺圓이 그 나머지 銘文을 구하여 그 사실을 기록하였다.

 

 

“七賢의 산에 七長은 그 절인데, 香火가 폐절된 것이 300해가 지났네. 위대한 비구가 있어, 기둥과 집을 새로 지었고, 백성이 그 田을 베풀어 佛祖를 제향하네. 아침 저녁 예를 올리니, 다시 前古를 밟았고, 貞珉을 다스려 영구히 업을 이루니, 항상 沙法界에 한 등불로 만겁을 비춘다”

 

大明 崇禎 44년(1671) 신해 6월 일 세우다. 
 

 

 

 

▲ 홍제관(弘濟館)과 아란탑(阿蘭塔)

 

 

▲ 대웅전 대웅전은 오랜 세월을 견디어 온 풍상의 흔적이 엿보이며 대웅전 오른쪽 옆에 조각솜씨가 빼어난 석불입상 한 기가 모셔져 있다. 

 

나한전  절 왼쪽 한켠에 칠인의 현인을 모신 나한전이 있는데 있는데, 나한전은 혜소국사가 교화시킨 일곱도적의 동자상을 모신곳이다. 조선조 500년간 칠장사는 3번 전소되었으나 나한전 만은 건재했고,  어사 박문수가 이 곳에서 치성을 드린후 장원급제를 하였다는 전설이 더해져 있다. 특히 조청(엿기름)으로 만든 과자공양을 올리면 영지를 얻는다하여 조선조 내내 과거를 꿈꾸는 선비들이 줄을 이었다고 한다.요즘도 입시철만 되면 여기 나한전을 찾는 수많은 발길이 끊어지지 않는다. 

 

7인의 도적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일곱의 도적이 있었는데 그 중 하나가 샘가에 갔는데 금바가지가 보여 몰래 집으로 들고왔는데 와서보니 깨진 바가지였다고 한다. 다른 도둑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전하니 다른 이들도 모두 유사한 경험을 이야기 하게 되었고, 이들은 이를 혜소국사의 신통력에 기인한 것으로 믿고 국사의 가르침을 받아 어진 사람이 되었다고 한다. 아미산으로 불리던 이 산이 이들로 인해 일곱의 현자라는 칠현산으로 개명되었다고 한다. 

 

벽초 홍명희의 소설 "임꺽정"에서는 임꺽정의 스승인 갖바치 병해대사가 이곳에 은둔하면서 민중의 정신적 지주가 되었다고 전한다.

 

 

원래 죽산리 봉업사터에 있었던 이 불상은 절이 폐사되자 죽산중고등학교 교정에 옯겨져서 자연 방치되다가 이곳 칠장사로 옮겨왔다고 한다.
불상은 큼직하고 깨끗한 화강암 꽃무늬 대좌 위에 모셔져 있다. 불상은 얼굴의 눈, 코 부분이 마모가 심하지만 불상을 빚은 조각 솜씨는 매우 섬세하고 화려하다. 몸 전체를 감싸고 있는 광대의 조각 솜씨가 그 시대의 정성을 고스란히 담아내고 있다. 화려한 조각솜씨를 미루어 보면 8세기 통일신라시대 양식의 우수한 수작으로 평가받는다. 

 

 

대웅전內에 있는 국보 제296호 오불회괘불탱(七長寺五佛會掛佛幀).
대웅전內 있는 1폭의 괘불탱으로 제작연대는 1628년(인조 6년)이다. 세로 길이 6.56m, 폭 4.04m. 그림에는 <용화회도(龍華會圖)>라고 표기되어 있다. 형태는 삼단구도로서 상단은 비로자나불을 중심으로 석가불·노사불, 중단은 아미타불·약사불, 하단은 지장보살·관음보살이 배치되어 있다. 

인조반정 후 인목대비가 억울하게 죽은 영창대군의 원혼을 달래기 위하여 화사(畵師) 영관(靈貫)과 법문(法門)으로 하여금 완성하게 하였다고 전한다. 

 

※ 괘불이란 절에서 큰 법회나 의식을 행하기 위해 법당 앞뜰에 걸어놓고 예배를 드리는 대형 불교 그림이다. 

 

 

▲ 삼불회 괘불탱 (보물 1256호) 숙종 36년(1710)에 그려진 이 괘불은 영축산에서 석가가 설법하는 모습을 묘사한 작품이다.

 

 

▲ 혜소국사의 묘탑비 (보물 488호) 비신 높이 227cm, 폭 127cm. 1060년(문종 14) 건립. 화강석과 흑대리석으로 만들어졌다. 비석의 글은 좌복야(左僕射) 김현(金顯)이 짓고 전중승(殿中丞) 민상제(閔賞濟)가 썼다. 전액에는 “贈諡慧炤國師碑銘” 8자를 가로 2단으로 신석 상부에 새겼다. 아래로 비문이 가는 글씨로 새겨졌으며, 전액 글자는 지름이 9cm, 본문 지름은 2cm로 해서이다.  

 

비몸은 중간이 절단되어 심하게 파손되었지만, 비몸 양옆에 새겨진 용조각이 화려하며, 귀부와 이수의 조각도 힘차게 느껴진다.  비신 중앙부가 절단된 것을 1975년 비각 복원과 함께 보수하였으며 비각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으로 되어 있다. 혜소국사비는 귀부·비몸·이수를 모두 갖추었으나 현재는 비각 안에 따로따로 두었다. 비문은 김현(김현)이 지었고, 글씨는 통일신라와 고려시대에 유행한 구양순체로 민상제(민상제)가 썼다. 고려전기의 우수한 비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혜소국사는 고려 광종 23년(972)에 안성에서 출생하여 10세에 출가하여 17세 때 승려 융철에게 배웠고 영통사에서 계를 받았으며, 말년에 칠장사에서 수도하며 절을 크게 고쳐 세웠으며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고 한다.  문종8년(1054년)에 이 절에서 83세로 입적하였다.

 

혜소국사비를 자세히 보면 비의 중앙부가 대각선으로 잘려진 흔적이 남아있다. 이것에 대해서 전하는 이야기를 보면 임진왜란 때 가토오가 이 절에 들어오자 노승이 크게 꾸짖자 그때 칼을 빼어 노승을 치자 노승은 간데없고 대신에 이 비석이 피를 흘리고 있으니 적장이 매우 놀라서 그대로 도망쳤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 

 


 

 

혜소국사비를 돌아서면 숲 사이로 칠장산- 칠현산 등산로가 나온다.

 

                                

                                여행과 山行은 갈망되고 이어 준비된다.

 

지족불욕(知足不辱) 만족할 줄 알면 욕됨이 없고,

지지불태(知止不殆) 그칠 줄 알면 위태롭지 않으니 

가이장구(可以長久) 오래도록 편안하다.  - 노자 도덕경에서

 

대한민국 구석구석 즐겁고 행복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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