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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거친호흡 몰아쉬며 ^^ 굽이치는 산맥넘어 손의 자유, 발의 자유, 정신의 자유를 찾는다. 기억은 희미해지기에 이곳에 기록을 남긴다
MTB등산여행

융건릉

by 한국의산천 2005. 6. 5.

 

융,건릉   

 

사도세자(장헌세자)와 그의 비 혜경궁 홍씨(현경왕후)를 모신 능은 융릉(隆陵)이고, 

정조대왕과 그의 비 효의왕후 김씨를 모신 능은 건릉(健陵)이다.    누가 떠나고 누가 남는가

위대한 사람들의 무덤을 바라볼 때
마음속 시기심은 모두 사라져 버린다.
미인들의 묘비명을 읽을 때  
무절제한 욕망은 덧없어진다.

아이들 비석에 새겨진 부모들의 슬픔을 읽을 때  
내 마음은 연민으로 가득해진다.  
하지만 그 옆에 있는 부모들 자신의 무덤을 볼 때  
곧 따라가 만나게 될 사람을 슬퍼하는 것이
얼마나 헛된 일인가를 깨닫는다.

쫓겨난 왕들이 그들을 쫓아낸 사람들 옆에
묻혀있는것을 볼 때
또 온갖 논리와 주장으로 세상을 갈라놓던  
학자와 논객들이 나란히 묻힌것을 볼 때
인간의 하잘것없는 다툼, 싸움, 논쟁에 대해
나는 슬픔과 놀라움에 젖는다.

-조지프 에디슨. 웨스트 민스트 대성당에서 쓴 글-
 
  

 

 

 ⓒ2005 한국의산천

 

세월은 흘러도 아픔은 남는 법.

영조는 조선조 후기 학문과 정치 사회발전의 기틀을 마련하는데 큰 업적을 남긴다. 그러나 사회를 바로잡으려는 일념이 지나칠 정도로 강했다.

왕세자로 책봉된 장헌세자의 호탕한 성격을 못마땅하게 여겨오던차에 후궁 문숙의(文淑儀)의 질투심 어린 참소와 신하였던 나경의로부터 세자의 비행을 적은 상소를 받고 대노하여 세자를 서민으로 폐하고 쌀뒤주속에 가두어 창경궁 선인문앞에 내놓고 큰돌을 올려놓는 공개처형의 형벌을 내렸다.

 

뒤주속에 갇혀있던 세자는8일째 되던 날 허기와 더위로 인해 질식사하는 끔찍한 궁중 참극이 벌어진다.  

국가 기강확립차원에서 형벌을 내렸지만 부모로서 애통함을 금할수없었던 영조는 사도라는 시호를 내려 혼을 위로하고 서울 배봉산 아래에서 장례를 지냈다. 

 

그 후 영조가 83세로 승하한후 뒤를 이은 22대 정조는 사도세자의 아들로 아버지의 비참한 모습을 직접보았기에 더욱 극진한 효심을 보인다. 

 

배봉산에 있던 부친의 묘를 열고 다시 염을 한다음 궁중으로 모시고 국장처럼 성대하게 장을 치룬 후 지금의 능자리인 경기도 화성군 화산(花山)으로 옮겼다.   

 

정조는 재위 24년간 능관리를 각별하게 하며 송충이를 직접잡고 잡은 송충이를 씹어서 보여줌으로서 송충이 구제작업을 독려하기도 하였다는 일화가 전한다.  

 

지금도 빽빽한 송림과 잔디로 덥혀 흙을 볼수없는 이곳의 초록 풍경은 정조의 각별한 정성 때문이다. 조선왕조의 어느왕릉보다 아름답고 뛰어난 풍광을 보여주는 곳이다.  

 

26만평의 드넓은 곳이 송림과 황금잔디로 뒤덮혀 별천지를 이루는 곳으로 지금은 산책로도 개설되어있어 가족단위의 고적답사 나들이나 역사 탐방 학습훈련장으로 적극 추천한다.   

 

정조는 능에서 1.5km 떨어진 용주사를 증축할 때 부모은중경(父母恩重經)을 목판에 새겨 보존하도록 명을 내리고 당대 제일의 화가 김홍도에게 맡겨 아름답게 꾸미도록 했다. 

 

50여 목판과함께 대웅전 옆 잔디밭에는 10개 항에 이르는 부모은중경을 새긴 탑비가 우뚝 서 있다. 

대웅 전 후불탱화는 김홍도의 지휘로  그려진 걸작이고 정조대왕이 심었다는 대웅전앞 회양목은 수령이 무려 200여년이 넘는 천연기념물 제264호다.

 

 세월은 가도 제 가슴에는 지금 글로만 접해 본 그 때의 아픔이 전해옵니다. 또한 정조대왕의 지극하신 효성을 다시 한번 가슴에 담아봅니다. 

   

 

 ⓒ2005 한국의산천

 

 

 ⓒ2005 한국의산천

 

 

 ⓒ2005 한국의산천

 

 

ⓒ2005 한국의산천

 ▲ 굴참나무와 소나무가 하늘높이 솟아있는 융건릉. 봉곡사 송림숲하고 이미지가 너무 비슷해서.

 

 

 ⓒ2005 한국의산천

 

 

 ⓒ2005 한국의산천

 

 

 ⓒ2005 한국의산천

 ▲ 키가 높은 노송과 융단처럼 곳곳에 펼쳐진 융건릉의 잔디.가족나들이와 야외학습장으로 적극 추천합니다.  

 

 

 ⓒ2005 한국의산천

 

 

▲ 융릉

ⓒ2005 한국의산천

 

 

▲ 고즈녁한 능 주변 숲, 숲에서는 뻐꾸기 소리가 들려오고있었다. 

ⓒ2005 한국의산천

 

고향           - 정지용 -  

고향에 돌아와도 그리던 고향은 아니러뇨

산꿩이 알을 품고 뻐꾸기 제철에 울건만

마음은 제 고향 지니지 않고

머언 항구로 떠도는 구름.

오늘도 뫼 끝에 홀로 오르니

흰 점 꽃이 인정스레 웃고,

어린 시절에 불던 풀피리 소리 아니나고

메마른 입술이 쓰디 쓰다.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 그리던 하늘만 높푸르구나.  

 

 

 ⓒ2005 한국의산천

 

 

 ⓒ2005 한국의산천

 

 

 ⓒ2005 한국의산천

 장인,장모,사위, 임산부 부부, 할머니, 할아버지 손자등등 가족단위의 탐방객이 많이 왔습니다. 

 

 

▲ 귀룡나무,굴참나무,소나무가 빽빽한 융건릉 숲길. ⓒ2005 한국의산천

 

 

 ⓒ2005 한국의산천

▲ 어제,그리고 오늘도 걸었지만 융건릉에서 솔향과 피톤치드로 산림욕을 하니 몸이 가벼워지는듯한 느낌.  

 

♣ 화성 팔경중 제 1경 융건 백설
화성시 태안읍 안녕리 산1-1번지에 위치한 융건능은 사적 제206호로 지정된 효의 상징으로서, 정문에서 볼때 오른편에 있는 융능은 정조대왕의 생부인 장헌세자(일명 : 사도세자, 후에 장조로 추존)와 경의왕후로 추존된 혜경궁 홍씨의 합장능이며, 왼편의 건능은 정조와 효의 왕후의 합장능이다.


 
정조대왕은 그의 부친인 사도세자의 죽음을(뒤주속에 갇혀 죽음) 애석해하며 양주 배봉산에 있는 영우원을 현재의 화산으로 옮겼는데 어느날 아버지의 능주변 소나무에 송충이가 대단히 번식하여 소나무를 갉아 먹고 있다는 보고를 받고 행차를 서둘러 산에 와보니 송충이의 기승이 목불인견이라, 정조가 진노하여 송충이를 잡이 깨물면서 "아무리 미물일 망정 네 어찌 내가 부친을 그리워하며 정성껏 가꾼 소나무를 갉아 먹느냐"고 꾸짖고 돌아서자 천둥번개와 함께 장대비가 쏟아져 송충이가 사라졌다는 일화가 있으며, 융건능은 용주사와 함께 정조대왕의 효심이 깃든 유적으로 효(孝)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우리의 자랑거리이다.

 

봄, 여름, 가을, 겨울 모두 수려한 경관을 자랑할만하다. 특히, 능 전역에 빽빽히 들어선 노송의 백설이 덮힌 풍경은 세인들의 마음을 무아의 경지로 빠지게하는 장관이 이루어지는 곳이다.   그럼 다음 코스는 융건릉에서 5분 거리인 용주사로 이동하겠습니다. 융건릉 가는 길 신갈-안산간 고속도로 동수원IC 또는 북수원IC에서 수원 시내로 진입, 수원역 지하차도를 이용 발안/남양 방면으로 우회전한 후 고색동을 지나 오목천 삼거리에서 좌회전한다. 여기서 약 500m 가면 발안,태안,수원대 방면의 수영리 사거리가 나온다. 여기서 다시 태안,수원대 방면으로 약 5km 직진하면 좌측에 있다.      

 

지족불욕(知足不辱) 만족할 줄 알면 욕됨이 없고,

지지불태(知止不殆) 그칠 줄 알면 위태롭지 않으니 

가이장구(可以長久) 오래도록 편안할 것이다.  - 노자 도덕경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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