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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거친호흡 몰아쉬며 ^^ 굽이치는 산맥넘어 손의 자유, 발의 자유, 정신의 자유를 찾는다. 기억은 희미해지기에 이곳에 기록을 남긴다
문화문학음악

필경사 가는 길

by 한국의산천 2005. 5. 22.
 

2005년 5월 22일 일요일 ( 날씨: 흐리고 비)  

 

편안한 집을 놔두고 복잡한 길을 왜 떠나는가?

그런 질문에 어떻게 말해야하나.

 

그런 당신은 왜 안떠나는가? 라고 반문해야하나?

 

나는 떠난다 왜?

다시 돌아올곳이 있기에......  


 

7,300m 길이의 서해대교를 넘어서 송악IC를 빠져나와서 왜목마을 가는 길에 잠시 심훈 문학의 산실인 필경사를 둘러보았습니다. 대로에서 약 500m정도에 위치하고 있기에 접근하기가 쉬운곳입니다.  (필경사는 집 한채있는 사적지라 둘러보는데 많은 시간이 들지 않습니다) 

 

※ 여행

언제나 떠나는 여행이지만 

여행 목적지에 대한 큰 기대는 오히려 실망을 줄수있다.

두눈으로 보고 온 것보다, 작은 가슴으로 담아온 그 무엇인가가 있을때에  

그 여행은 가슴 속깊이 멋진 여행으로 각인될것이다.

 


 

○ 필경사의 옥호는 상록수 집필에 앞서인 34년 11월에 쓴 그의 고백수기 '필경사 잡기'에서 나왔다고 합니다. 1930년에 「그날이 오면」이란 제목으로 시집을 내려다가 일제의 검열에 걸려 못냈는데 그 시집 원고 중에 있는 필경이란 시의 제목에서 딴 것이라고 그의「필경사 잡기」란 글에서 밝히고 있다.

 

'필경사 잡기'는 그 시기에 그가 인생의 방향을 확정짓기 위해 고뇌했던 흔적과 그 사상을 보여준다. 「...나는 어려서부터 문예에 뜻을 두었었다. 시를 쓰는 체, 각본을 꾸미는 체하고 영화박이는 흉내도 내고 여러해 보람없는 저널리스트 노릇도 하다가 최근에는... 장편소설을 쓰고 있다. 바늘구멍으로 낙타를 끄집어 내려는 대담함에 식은 땀이 등어리를 적심을 스스로 깨달을 때가 많다. 동시에 더욱이 문예의 길이란 가시밭을 맨발로 밟고 나가는 것이나 다름없이 가난한 것을 깨달았다...적어도 한 십년하고 살을 저미고 뼈를 깎아내는 듯한 노력과 수련을 쌓는 시기가 있어야 비로소 제일보를 내어 디딜수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방랑성을 다분히 타고난 나는...오늘날까지 정신생활에 있어서도 비현실적인 몽환경을 더듬으며 헤매어 왔다. ...어줍지 않은 사회봉사, 입에 발린 자기희생,그리고 그어떤 주의(이념)에 노예가 되기전에 맨 먼저 너 자신을 응시하여라!  새로운 생활에 말뚝을 모래성 위에 꽂지 말고 질척질척한 진흙 속에다가 박아라. 떡메질을 해서 깊이 깊이 박아라.」(「필경사 잡기」중) - 펌 -

 

 


 

▲ 필경사 들어가는 마을 입구에 탐스럽게 활짝 핀 수국(?)이 아니고 "불두화"입니다.

(어느분이 친절하게 제 자신이 민망스럽지않게 알려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저는 나무수국으로 알고있었는데..)

 


 

▲ 위 꽃을 클릭하면 확대됩니다. 부처님의 꼬불 꼬불한 머리를 닮은 佛頭花 .  

 

  

     ▲ 마을 작은 송림공원에 세워진 시비. 클릭하시면 확대됩니다.

 

 
▲ 그날이 오면 마당의 시비는 1996년 한국문인협회가 세운 것이다.(클릭하시면 확대됩니다)

 

 


 

 ▲ 필경사 

필경사는 심훈 문학의 산실이다. 심훈은 1933년 서울 생활을 청산하고 그의 아버지가 살고 있는 이곳 당진군 송악면 부곡리로 내려와 한 동안 아버지와 한 집에서 살면서 영원의 미소, 직녀성 등을 집필하였다. 1934년에 독립하여 살집을 직접 설계하여 지은 집이 필경사이다.
필경사를 지을 터를 잡기 위해 이곳 저곳을 돌아다녔는데 그러는 둥에 아끼던 상아 빨뿌리를 잃어버렸다. 그것을 찾기위해 돌아다닌 곳을 되짚어 다니다가 빠트렸던 상아 빨뿌리를 찾는 곳이 지금의 필경사 자리였다 한다. 빨뿌리를 찾아 담배를 피워물고 앉아 살펴보니 사람들이 길들일만 한 터더라는 생각에 지은 집이 필경사라고 전한다.
필경사는 한때 교회로 사용되기도 하였는데 그의 장조카인 고 심재영옹이 되사가지고 관리하다 당진군에 희사하였다.
우리나라 농촌소설의 대표작 중 하나인 '상록수'는 1935년에 이 집에서 집필된 소설이다. 가옥의 형태는 아담한 건물로서 18.7평이며 앞에는 상록수문화관이 있다. (자료 당진군청)

 

※ 마을입구에서 필경사까지 대형버스는 진입이 어려움.

 


 

상록수

심훈이 '상록수'에서 `청석골`이라 부른 마을이 바로 경기도 안산시 상록구 본오동의 샘골마을이다. 또한 농촌의 문맹퇴치를 위해 야학에 온힘을 기울이는'채영신'이란 여자주인공은 일생을 농촌계몽운동에 헌신한 최용신(崔容信)의 실제인물이다.  
 

최용신은 서기1909년 8월 함경남도 원산읍 두남리에서 최창희(崔昌熙)의 둘째딸로 태어났다. 그의 어린시절은 대단히 곤궁한 생활속에서 살았지만 신앙심이 깊어 열심히 교회를 다녔으며, 그로인해 루씨(樓氏) 여자보통학교와 루씨여자고등학교를 나왔다. 서울에 있는 감리교 협성신학교 졸업을 1년 앞둔 1931년 10월 최용신은 학업을 중단하고 샘골마을로 농촌계몽운동을 하기 위해 내려왔다. 

농촌계몽운동과 유학중에 얻은 병과 과로가 겹쳐 학생들과 학부모 그리고 샘골마을 주민들의 지극한 병간호를 외면하고 1935년 1월 23일꽃다운 나이 26세에 이세상을 하직했다.
그 후 많은 세월이 지난 1974년 11월 30일 루씨동문과 천곡교회에서 상록수 최용신 선생을 기리기 위한 기념비를 세웠으며,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다.

- 최용신 선생의 묘  
- 소 재 지 : 안산시 상록구 본오동 879-4
- 지정번호 : 안산시 향토유적 제18호
- 규모.재료 : 봉 분- 240×97cm, 유적지-3,723평
- 시대 : 묘 - 일제강점기(1931∼1935)
 
찾아가는 길: 전철을 이용하여 안산방면 상록수, 한대앞역에서 내린후 상록수 우체국방향으로 가다가 상록수 우체국 옆길로 들어가면 상록수 공원안에 최용신선생의 묘가 있다.

 


 

▲ 필경사 뒤의 대나무 숲

 


 

▲ 상록수가 탄생된 그 책상...

 


 
 

 

 


 

▲ 좌측이 필경사 우측이 상록수기념관. 

 

가는 길

서울, 경기, 천안에서
○ 서해안 고속도로 - 송악 IC - 한보철강 방향 대로 - 필경사 이정표에서 좌회전  

○ 천안 IC( 경부 고속도로) - 아산(39번국도) - 삽교호관광지(38번국도) - 송악 IC(서해안고속
도로 밑) - 부곡.고대국가공단(동부제강) - 한보철강 필경사 - 석문방조제- 왜목마을

 

스크롤의 압박이 심한 관계로 계속해서 다음 페이지에 왜목마을로 이동합니다.

 

※ 심훈과 필경사에 관한 상세한 자료는 아래 명승지안에 있습니다. 

 

산찾기 레져정보 명승지 바 다 강여행 사 찰 철쭉산행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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