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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문학음악

[백영옥의 말과 글] [231] 소나무와 동백

by 한국의산천 2021. 12. 18.

[백영옥의 말과 글] [231] 소나무와 동백

백영옥 소설가/ 입력 2021.12.18 00:00


소나무가 그려진 크리스마스카드를 받은 적이 있다. 카드에는 “아름다운 꽃이 아니라 영원히 변치 않는 소나무가 되어다오”라고 쓰여 있었다. 이 시기에 푸른 건 소나무뿐이다. 공자도 “가장 추운 시절이 된 뒤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푸르다는 것을 알게 된다”고 말했다. 

 

“봉래산 제일봉에 낙락장송이 되었다가 백설이 만건곤할 때 독야청청하겠다”고 노래한 성삼문은 어떤가. 선비를 상징하는 소나무처럼 그는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삶을 살다 갔다.

나무에 관한 책을 읽다가 소나무가 독야청청한 이유를 알았다. 소나무의 뿌리와 솔잎에서는 독성 물질인 갈로타닌이 분비되는데, 이 물질은 주위의 다른 나무의 성장을 방해한다. ‘거목 밑에 잔솔(애송) 못 자란다’는 말도 이를 뜻한다. 

 

산림욕을 할 때 듣는 ‘피톤치드’의 어원은 ‘식물’을 뜻하는 ‘phyton’과 ‘죽이다’를 뜻하는 ‘cide’의 합성어다. 이것은 나무가 다른 식물과 해충으로부터 자기를 보호하기 위해 내뿜는 일종의 항균 작용으로 소나무가 홀로 고고한 이유도 비슷하다.

 

살다 보면 독야청청, 변치 않고 자신의 모습을 굳게 지켜나가야 할 때가 있다. 하지만 ‘고독’과 ‘고립’을 분별해야 하듯 ‘고독’과 ‘공존’은 조화로울 때라야 가치를 발한다. 

 

모두가 자신만의 이익을 위하여 달려갈 때는 독야청청할 수 있어야 하고, 다소 자신의 이익에 반하더라도 공동체에 도움이 될 때는 함께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게 침엽수인 소나무는 홀로 고고하게 아름답고, 활엽수인 참나무 잎은 흩어져 땅의 비옥한 거름이 된다. 어느 것 하나 치우침 없이 숲은 이미 자연의 지혜를 터득해 ‘더불어’ 살아온 셈이다.

지금 남쪽에는 동백이 한창이다. 이전에는 꼿꼿이 목을 든 채 통째로 떨어지는 저 꽃이 무섭기도 했지만 이젠 ‘기개’와 ‘성품’이 느껴져 소중해진다. 

 

소나무를 닮은 꽃을 꼽으라면 이젠 동백을 꼽고 싶다. 훌쩍 피었다가 시들지 않은 채 제 목을 쳐내며 떨어지는 처연한 아름다움이 독야청청 아니면 뭔가.

 

[백영옥의 말과 글] [228] 살아남은 자의 슬픔  살롱(salon)   
백영옥 소설가 / 입력 2021.11.27 00:00


아내를 잃은 유명 작가가 있었다. 그는 38년간 아내가 만든 주먹밥과 녹차를 먹으며 원고를 고쳤다. 주먹밥은 늘 시간에 쫓기던 그를 위한 아내의 배려였다. 장례식이 끝나고 식욕마저 사라졌던 작가에게 허기가 찾아왔다. 오전 10시, 아내가 주먹밥과 녹차를 내주던 시간이었다. 그는 부엌으로 가서 냉장고 문을 열었고, 찬장의 찻잔을 챙겼다. 하지만 아내가 어떻게 주먹밥을 만들었는지, 녹차를 우렸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멍하게 서 있던 그는 아침 식사를 건넨 후, 수고하라는 듯 늘 자신의 어깨를 두 번 두들기던 아내의 손을 떠올렸다. 햇살과 함께 스미던 따스한 손의 감촉이, 그 한결같은 응원의 목소리 말이다.

담담했던 한 남자가 무너졌다. 그는 마치 어린애처럼 소리 내 울었다. 사랑은 이토록 사소하지만, 결코 사소할 수 없는 많은 것으로 이루어진 탓에 사랑하는 이를 잃은 사람은 언제, 어디서 또 길을 잃을지 알 수 없다.

슬픔을 말할 때 기억나는 것 중 하나는 연극 리어왕의 한 장면이었다. 숨이 끊긴 딸 코델리아를 안고 무대를 천천히 걷는 백발의 리어왕. 이때 슬픔은 ‘축 늘어진 무거움’으로 압축되는데 셰익스피어는 슬픔을 상징이 아닌 실체로 묘사한다. 연구에 따르면 슬픔은 실체적인 통증을 수반한다. 살이 찢어지고, 팔이 데거나, 심장이 찔리는 슬픔이란 표현이 과장이 아닌 것이다. ‘애가 탄다’의 ‘애’는 창자를 가리키는 말이다. ‘애타는 슬픔’이란 몸이 타는 듯한 슬픔의 고통을 말한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친구에게 조앤 디디온의 ‘상실’의 한 구절을 읽어주었다. “나는 나머지 신발들을 처분할 수가 없었다. 그가 돌아오면 신발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아주 오랫동안 사랑하는 이의 물건을 치우지 못했다. 이별에서 슬픔을 제거해버리는 마법은 없다. 울음이 멈출 때까지, 기억이 희미해질 때까지 애도하며 작별하는 것만이 거의 유일한 방법이다. 상처는 아물어도, 흉터는 남는다. 쉽게 처분할 수 없는 그의 오래된 신발처럼.

#백영옥의 말과 글#읽어주는 칼럼
백영옥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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