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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거친호흡 몰아쉬며 ^^ 굽이치는 산맥넘어 손의 자유, 발의 자유, 정신의 자유를 찾는다. 기억은 희미해지기에 이곳에 기록을 남긴다
문화문학음악

열광하는 기형도 시 읽기 / 노운미 시를 베는 소리

by 한국의산천 2020. 9. 2.


열광하는 기형도 시 읽기 / 노운미 시를 베는 소리

2009. 12. 17. 7:20

 

열광하는 기형도 시 읽기

- 밀실속의 외톨이 -

 

노운미

 

‘입속에 검은 잎’을 읽을 때 마다 생각했다.

쓸데없는 가상이지만, 시인이 살아 있었다면 지금처럼 이 시집에 많은 사람들이 열광할까? 그랬더라면 그의 시집을 나는 만났을까? 시집을 읽기 전, 그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먼저 들었다. 한 심야 극장에서의 죽음, 더군다나 젊은 나이에 뇌졸중이라니 생각하면서도 나는 그의 젊은 나이의 죽음에 묘한 매력을 느끼기도 했다.

 

죽음은 예술가에게는 가장 치명적인 유혹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내가 문학을 하기 전이었으니 아마도 누구나 한번쯤은 요절이라는 것을 생각해 보지 않았을까 싶다.

 


시인세계의 기획특집에서 다룬 ‘과대평가된 시인, 과소평가된 시인’에 실린 젊은 비평가 홍기돈의 글 ‘죽음의 후광을 넘어서기 위한 단상’은 기형도(1960~1989)시인의 유고시집 ‘입속의 검은 잎’에 가려있는 죽음의식과 그 사회적 공명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 것으로 서정주 윤동주 김수영과 함께 과대평가를 받은 시인으로 분류되었다.

 

서울 종로3가의 한 심야극장에서 새벽에 숨진 채로 발견된 것은 1989년 3월 7일의 일이다. 지인들이 유작시들을 모아 펴낸 시집이 ‘입속의 검은 잎’이다.

어두운 80년대를 노래했던 진혼곡인 셈이다. 홍기돈은 숱한 비평가들이 기형도의 시를 그의 죽음위에 올려놓고 읽어간 방식을 문제 삼고 있다고 한다 “어느 한 시인의 우발적인 죽음을 필연으로 수용하는 현상은 그 사회가 처한 조건과 관계맺는다고 한다. 즉 사회에 은연중에 유포되어 있는 죽음의 분위기가 기형도의 죽음과 공명하였기 때문에 그런 현상이 나타났다는 것이다. 공명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한 기형도의 죽음은 우리 문학계에서 마치 신탁과도 같은 영향력을 가지게 된다고 한다.”

 

그렇다. ‘잎속의 검은 잎’의 경우, 시가 괄시 받는 요즘에도 1주일에 300부씩 팔려나갈 정도며 연간 1만부가 판매되고 있다고 한다. 지금까지 모두 36쇄를 돌파, 35만명 가까운 독자가 찾아 읽을 정도로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기에 점점 열광하는 팬들이 늘어나 기형도를 모티브로 한 시도 30편에 육박한다는 것이 통설이고 보면 기형도 현상은 기형도라는 한 시인의 개인적인 층위를 넘어 사회적인 층위로 해석되는 문화적 현상으로 자리매김된 것이 사실이다.

 

시는 시인 자신 말고는 누구도 정확히 알 수는 없다 다만 그의 삶과 마음, 그가 선택한 시어들의 상징을 통해 어둡고 암울한 우울을 짐작할 뿐이다. ‘시간의 무늬’에서 “시를 쓰지 못하며, 시를 쓸 수 있게 되는 마음의 바탕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고백한 소설가 김훈은 “시적대상이나 정황이 시행으로 바뀌는 언어의 작동방식을 짐작조차 하지 못하며, 그래서 시를 읽을 때 내 마음은 시행을 이루는 언어와 그 언어 너머의 시적 실체 사이에서 표류한다.”고 한다. 그렇다. 시의 막막함이란 이런 것일꺼다.

 

내가 기형도의 시집을 처음 접하게 된 시기는 2001년이었다. 산본 도서관 앞에서 펄럭이는 플랜카드를 보고 호기심 발동으로 문학이라는 공간에 들어섰었다. 그리고 그곳의 스터디 모임에서 기형도 시인의 ‘입속의 검은 잎’을 만났다. 시는 처음부터 끝까지 다 우울하고 음울했다. 시속의 그는 타인과의 소통이 불가능하며 바깥세상을 두려워한다. 또한, 갇히거나 닫힌 세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자폐적인 성격을 띠기도 하는 그는 세상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고 혼자 남겨진 외톨이였다.

자신의 세계 속으로 도피하는 어둠 속에 숨어 버리는 그. 그래서 평론가 김현은 그의 시집 해설에서 기형도의 시세계는 그로테스크 리얼리즘이라 명명했는지도 모르겠다. 시 속에서의 그는 현실과 타협하지 못하고 세계로부터의 단절은 유년시절부터 외톨이 의식이 내면에 자리 잡게 된다. 문학평론가 정과리는 ‘죽음, 혹은 순수텍스트로서의 시’에서 “시가 문학의 죽음이라는 장기 지속적 과정을 예시적으로 비추는 상징 구슬의 기능을 하였다면 기형도의 시는 그 상징의 상징, 거울의 거울이었다.”라고 하듯 그의 작품 <엄마 걱정>에서 유년의 상처가 고스란히 들어 나 있다.

 


열무 삼십 단을 이고

시장에 간 우리 엄마

안 오시네, 해는 시든 지 오래

나는 찬밥처럼 방에 담겨

아무리 천천히 숙제를 해도

엄마 안 오시네, 배추잎 같은 발소리 타박타박

안 들리네, 어둡고 무서워

금간 창틈으로 고요히 빗소리

빈방에 혼자 엎드려 훌쩍거리던

 


아주 먼 옛날

지금도 내 눈시울을 뜨겁게 하는

그 시절, 내 유년의 윗목

<엄마 걱정>전문

 


가족들과 서로들에게서 소외되어 그는 홀로 찬 빈방에 찬밥처럼 갇혀 두려움과 외로움에 떨고 있다. 아무리 천천히 숙제를 해도 숙제라는 것으로 두려움과 외로움을 이겨내지 못하고 빈방에 혼자 엎드려 훌쩍거리며 울음을 터트리고 만다. 이런 외부와의 고립감과 단절감의 정서는 그의 내면에 깊은 상처로 자라며 청년기인 <대학시절>로 옮겨간다.

 


나무의자 밑에는 버려진 책들이 가득하였다

은백양의 숲은 깊고 아름다웠지만

그곳에서는 나뭇잎조차 무기로 사용되었다

그 아름다운 숲에 이르면 청년들은 각오한 듯

눈을 감고 지나갔다, 돌층계 위에서

나는 플라톤을 읽었다, 그때마다 총성이 울렸다

목련철이 오면 친구들은 감옥과 군대로 흩어졌고

시를 쓰던 후배는 자신이 기관원이라고 털어 놓았다

존경하는 교수가 있었으나 그분은 원체 말이 없었다

몇 번의 겨울이 지나자 나는 외톨이가 되었다

그리고 졸업이었다, 대학을 떠나기가 두려웠다

<대학시절> 전문

 


인생을 증오하며 (시 ‘장미빛 인생’) ‘미안하지만 이제는 희망을 노래하련다’고 다짐하지만 그가 희망이라고 생각했던 시에게조차 더 이상 접근하지 못할 만큼 공허와 권태에 사로잡혔던 그는 ‘철저히 파멸하고 망가져 버리는 상태에까지 가고 싶었던 ’(산문‘짧은 여행의 기록’) 그가 ‘언제 너(죽음)을 두려워했던 적이 있었던가’ (시 ‘쓸쓸하고 장엄한 노래여2’)라며 어느날 갑자기 어둠 속에 갇힌 큰 방(심야극장)에서 생을 마감했다.

 

 

문을 열고 사내가 들어온다

모자를 벗자 그의 남루한 외투처럼

희끗희끗한 반백의 머리카락이 드러난다

삐걱이는 나무의자에 자신의 모든 것을 밀어넣고

그는 건강하고 탐욕스러운 두 손으로

우스꽝스럽게도 작은 컵을 움켜쥔다

단 한번이라도 저 커다란 손으로 그는

그럴듯한 상대의 목덜미를 쥐어본 적이 있었을가

사내는 말이 없다, 그는 함부로 자신의 시선을 사용하지 않는 대신

한 곳을 향해 그 어떤 체험들을 착취하고 있다

숱한 사건들의 매듭을 풀기 위해, 얼마나 가혹한 많은 방문객들을

저 시선은 노려보았을까, 여러 차례 거듭되는 의혹과 유혹을 맛본 자들의 그것처럼

그 어떤 육체의 무질서도 단호히 거부하는 어깨

어찌 보면 그 어떤 질투심에 스스로 감격하는 듯한 입술

분명 우두머리를 꿈꾸었을, 머리카락에 가리워진 귀

그러나 누가 감히 저 사내의 책임을 뒤집어쓰랴

사내는 여전히 말이 없다, 비로소 생각났다는 듯이

그는 두툼한 외투 속에서 무엇인가 끄집어낸다

고독의 완강한 저항을 뿌리치며, 어떤 대결도 각오하겠다는 듯이

사내는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얼굴 위를 걸어다니는 저 표정

삐걱이는 나무의자에 자신의 모든 것을 밀어넣고

삭내는 그것으로 탁자 위를 파내기 시작한다

건장한 덩치를 굽힌 채, 느릿느릿

그러나 허겁지겁, 스스로의 명령에 힘을 넣어가며

 

나는 인생을 증오한다

 


「장미빛 인생 」전문

 


지리한 욕망과 허무의 싸움. 그 속에서 스스로를 쏟아내다 서른살의 나이로 요절한 사람.

우리는 그의 글 속에 스스로를 빠트린다. 그리고 같이 허우적 거리며 괴로워하며 동질감을 얻으며 위로 받는다. 그도 이렇게 괴로워 그를 회색인간이라 부르고 싶듯이 나도 그를 회색인간이라고 부르고 싶다.

 


슬프구나
벌레 먹은 햇빛은 너무도 쇠잔하여
마른 풀잎 하나 건드리지 못한다.
이제 한 도막 볏짚만큼 짧은 가을도 숨죽여 지나가고
적막한 벌판에 허수아비 하나 남아
마른 수건처럼 쓸쓸한 가을 임종을
두 눈 부릅뜨고 지켜보고 있다
그리하여 앙상한 빈 들엔 시간이 가파르게 이동하고
이치를 아는 바람의 무리만이
생각난 듯 희뜩희뜩 떠다닐 것이다.
곧 밤이 되리니 겹쳐 꾸는 꿈속에서
암초에 걸린 맨발로
핼쑥한 하얀 달 하나 떠오르고
기진한 덩굴손 같은 달빛 몇 줄기로
단단히 동여맨 가을의 시체를 끌고 이리저리 떠돌다
새벽이면 세상 빈자리마다
얼어붙은 땀을 쏘며 사라질 것이다.
죽음이여, 그러나 언제 우리가
너를 두려워했던 적이 있었던가
상식으로 무장한 이 세상에서
새로 태어나는 것이 어디 있으며 새롭게 소멸하는 것이
무엇이냐. 오, 지폐처럼 흩날리는 우리의 생애 속에서
얼마나 오랫동안 우리는
숱한 겨울과 싸워 이겨왔던 것이냐, 보아라
畢生의 사랑을 껴안고 엉켜 쓰러지는 일년초의 아름다움이여.
불어라, 바람아 우리가 가을을 잃은 부족으로 헤매이다
바람아, 불어라 어느 시린 거리에서 풀썩이는 꽃처럼 쓰러져도
힘차게 튕겨지는 씨앗의 형상으로
우리는 견고하게 되살아나
불어라 바람아, 우리 몸이 가장 냉혹한 처형의 창고에 던져지고
바람아 불어라, 우리 목숨이 식은 노을 퍼붓는 거리에서
한 장 얼음으로 결박될지라도
아, 그러나 그 무엇이 다가와
槍날같이 부릅뜬 우리의 눈빛을 거두겠는가

 

 

죽었는가, 장엄한 우리여, 누가 우리를 죽음이라 부르겠는가.

-「쓸쓸하고 장엄한 노래여2」전문

 

 

 

비가 왔으면 싶다. 희망은 있는가, 있을 것이다. 그것이 없다면 이 도저한 삶과 삶들, 이해할 수 없는 저 사람들은 오래전에 나에겐 부재(不在)했을 것이다. 나에게 지금 희망은 어떤 모습일까? 한때 나는 그것을 문학이라고 생각하였다. 한때라니? 그랬다. 나는 더이상 시에 접근하지 못한다. 나는 그것을 안다.

시는 어쨌든 욕망이었다. 그러나 나에게는 지금 욕망이 사라졌다. 그건 성(聖)도 아니다. 추악하고 덧없는 생존이다. 어쨌든 나는 오래도록 기다려 왔던 탈출 위에 있다. 나는 부닥칠 것이다. 공허와 권태뿐일 것이다. 지치고 지쳐서 돌아오리라.

나는 이제 다르게 살고 싶다. 그럴 경우 모든 굳은 체념들이 살아날 것이다. 어차피 존재들은 유한하다면 인식의 바꿈을 통해 나는 두배의, 아니 그 이상의 삶을 살 수 있다.

 


전쟁은 장마비처럼 줄기차게 대기에 흙줄을 파며 지나갔다. 노마네 마을은 구멍투성이였다. 전쟁이 끝난후 마을 사람들은 다리를 놓고 종루를 고치며 밭을 일구기에 여념이 없었다. 가을이 다 갈때까지 마을 사람들은 분홍빛 사막위에 꽃을 피우듯이 열심히 마을을 깁고 기웠다. 그러던 어느날 마을이 어느정도 회복되고, 겨울이 소리없이 다가왔을때 노마의 마을에는 이상한 소문이 떠돌기 시작하였다.

밤이면 흰빛의 미친 개 가 나타나 사람들을 물어 죽인다는 소문이 그것이었따. 더구나 그 개는 전쟁동안 굴 속에 숨어 죽은 사람을 뜯어 먹으며 살아왔다고 사람들은 수군대었다. 마을 사람들은 불안에 떨기 시작했다.

 

밤이면 문을 걸어 잠갔으며 어느날 밤부턴가는 마을이 대낮같이 횃불을 머리에 인 채 활활 타올랐으며 언제부턴가는 밤마다 갓난아기의 입을 헝겁으로 틀어막아 소리를 못 지르게 하는 집이 하나 늘어갔다. 밤마다 소문은 비누거품처럼 사람들 사이에 더욱 부풀어 올랐고, 두려움은 점점 그 개를 보았다는 사람이 늘어감에 따라 커져갔다.

어느날 흰눈이 구름 허물어지듯 마을을 뒤덮으면서, 마을 사람들은 급기야 그들의 눈에 뜨이는 개란 개는 모조리 미친개처럼 느끼기 시작하였다.

 

그 후로 개들이 하나 하나 죽어갔따. 하얀 개뿐만 아니라 검정, 노랑, 빨강개까지 죽음을 당하지 시작하였다. 마을은 또 다른 전쟁으로 번져갔다. 개들은 밤마다 피를 흘리며 쇠줄을 끊고 산속으로 달아났다. 그러나 달아난 개들은 다음날이면 산 중턱에 사금파리에 베인 발바닥같이 배를 가른채 죽어있었다. 사람들은 미친개의 피를 먹이면미친개에 물리지 않는다는 또 다른 소문으로 인하여, 죽은 개 주위에 붉게 물든 눈까지 한웅큼 퍼서, 그 배인 피를 빨아먹었다.

 

그러나 노마는 자기의 삽살개를 광속 깊이 깊이 감추어 두었따. 삽살개는 절대로 미치지 않았다고 노마는 생각했다. 그러나 사람들이 숨겨둔 개까지 찾아내어 죽이기 시작했을때, 어느날 밤 노마는 삽살개를 끌어안고 얼음 뒤덮인 산을 올라갔따. 산 꼭대기의 바위 사이에 삽살개를 감추어 두고 노마는 울면서 내려왔다. 다음날, 최후의 개인 삽살개를 잡기 위해, 마을 사람들은 손에 손에 몽둥이와 칼을 들고 산으로 올랐다. 산은 온통 반짝반짝 빛나는 보석같았다. 노마도 어른들을 따라 올랐다. 삽살개는 쉽사리 눈에 띄지 않았다. 사람들은 바위틈, 소나무 가지끝이며 덤불속까지 샅샅이 뒤지었다. 사냥은 저녁까지 계속되었고, 희끗희끗 눈발이 내리기 시작했다. 눈은 바람속에 섞이어 흩날리었다.

 

눈이 그치고 새파란 밤 하늘에 달이 떠오르고 산 밑의 동네가 얼음처럼 빛나던 밤중에, 삽살개는 산꼭대기의 바위틈에서 쪼그린채 문풍지같이 떠는 모습으로 발견되었다. 사람들이 다가같고 삽살개는 아름다운 모습으로 학살당하였다. 사람들이 그 피를 건져먹기 시작했을 때, 눈위에 꽃잎 같은 핏방울들이 점점이 떨어질때, 노마의 가슴에는 약솜처럼 고요한 피곤이 몰려왔다.

 

개들은 이제 그 그림자조차 가위에 잘리운 채 마을에서 사라졌다. 이제 마을의 밤은 성대를 잃은 고요속에서 예전의 어둠을 되찼았다. 그러나 그 고요는 오래지 않아 미친개가 언제 또 다시 나타나지 않을까 하는 불안에 빠져들면서 다시 술렁이지 시작했다. 마을 사람들은 또 다시 횃불과 몽둥이를 준비하였지만 개들은 하나도 나타나지 않았다. 개들이 나타나지 않을수록 마을 사람들은 더욱 초조하였고 두눈에 빨강 거미줄을 세우며 밤을 지새웠다. 그러나가 겨울이 막바지에 이르렀을때 이상하게도 마을 사람들이 하나하나 밤마다 산과 들을 쏘다니기 시작하였다.

 

나뭇가지에 걸려 찢긴 윗옷을 걸치고 신발을 잃어버린채 그들은 미친 개를 찾아 헤매기 시작하였다. 아침이면 그들은 큰소리로 울부짖다가 쓰러져 잠이 들었다.

 

그해의 마지막 눈이 산사태처럼 쏟아지던 밤, 노마는 온 몸에 흰 눈을 맞으며 미친 마을을 떠났다. 강물처럼 무릎위로 차오르는 눈길을 헤엄치듯 사라져 다시는 마을로 돌아오지 않았다.

- 산문「노마네 마을의 개 」짧은 여행의 기록 중에서

 

시 - 쓸쓸하고 장엄한 노래여2

 

삶과 세상의 모든 것, 욕망과 그리움조차 권태로웠던 그는 기적을 믿지 않았고(시 ‘오래된 서적’),과 <대학시절>에서 나는 외톨이라는 그의 의식을 단적으로 드러낸다. 그의 시 곳곳에는 외로움과 고립감으로 나타나는 ‘외톨이’라는 감정이 드러나는데 특히 이 작품에서는 자신이 외톨이라는 것을 고백한다. 잘못되어 가고 있는 현실을 보면서도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그가 하는 일이라는 것은 고작 책 읽는 일이었다. 의지하던 교수마저 그에게 방향제시를 해주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그는 대학을 떠나기가 두려웠다라고 말한다. 사회에 나가서도 현실에 직접 맞서지 못할 자기 자신의 불안한 심리를 표현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런 불안 심리가 자포자기 형태로 <오래된 서적>에서 나타난다.

 

내가 살아온 것은 거의

기적적이었다.

오랫동안 나는 곰팡이 피어

나는 어둡고 축축한 세계에서

아무도 들여다보지 않는 질서

 

속에서, 텅 빈 희망 속에서

어찌 스스로의 일생을 예언할 수 있겠는가

다른 사람들은 분주히

몇몇 안 되는 내용을 가지고 서로의 기능을

넘겨보며 書標를 꽂기도 한다.

또 어떤 이는 너무 쉽게 살았다고

말한다, 좀 더 두꺼운 추억이 필요하다는

사실, 완전을 위해서라면 두께가

문제겠는가? 나는 여러 번 장소를 옮기며 살았지만

죽음은 생각도 못했다, 나의 경력은

출생뿐이었으므로, 왜냐하면

두려움이 나의 속성이며

미래가 나의 과거이므로

나는 존재하는 것, 그러므로

용기란 얼마나 무책임한 것인가, 보라

 

나를

한번이라도 본 사람은 모두

나를 떠나갔다, 나의 영혼은

검은 페이지가 대부분이다, 그러니 누가 나를

펼쳐볼 것인가, 하지만 그 경우

그들은 거짓을 논할 자격이 없다

거짓과 참됨은 모두 하나의 목적을

꿈꾸어야 한다, 단

한 줄일 수도 있다.

나는 기적을 믿지 않는다

<오래 된 書籍> 전문

 


그는 곰팡이 핀 어둡고 축축한 세계에서 기적적으로 살아 나왔다. 하지만 그의 세계는 여전히 두려움이 나의 속성이며 미래가 나의 과거인 것이다. 미래가 없는 아니, 어둠으로 가득 차 있는 과거가 반복되어 미래에 펼쳐지는 암울한 그를 한번이라도 본 사람은 모두가 떠나가고 다시는 그를 찾아오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나의 영혼은 검은 페이지가 대부분이기 때문에 그러니 누가 나를 펼쳐볼 것인가? 어떠한 경우라도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고 ‘나는 기적을 믿지 않는다.’ 라고 확고하게 말한다.

 

그는 말을 듣지 않는 자신의 육체를 침대 위에 집어던진다

그의 마음속에 가득찬, 오래 된 잡동사니들이 일제히 절그럭거린다

이 목소리는 누구의 것인가, 무슨 이야기부터 해야 할 것인가

나는 이곳까지 열심히 걸어왔었다, 시무룩한 낯짝을 보인 적도 없다

오오, 나는 알 수 없다, 이곳 사람들은 도대체 무엇을 보고 내 정체를 눈치챘을까

그는 탄식한다, 그는 완전히 다르게 살고 싶었다,

나에게도 그만한 권리는 있지 않은가

모퉁이에서 마주친 노파, 술집에서 만난 고양이까지 나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중얼거린다, 무엇이 그를 이곳까지 질질 끌고 왔는지, 그는 더 이상 기억도 못한다

그럴 수도 있다, 그는 낡아빠진 구두에 쑤셔박힌, 길쭉하고 가늘은

자신의 다리를 바라보고 동물처럼 울부짖는다,

그렇다면 도대체 또 어디로 간단 말인가!

<여행자> 전문

 


노인은 세상의 중심에서 밀려나 아무런 힘이 없는 존재이고 고양이는 인간의 시선에서는 존재적인 가치가 없는 동물이다. 그러한 존재들에게까지도 그는 시선을 받지 못한다. 그는 탄식한다, 그는 완전히 다르게 살고 싶었다, 나에게도 그만한 권리는 있지 않은가? 나름대로 노력을 했고 최선을 다했던 그의 의지가 엿보였다. 그러나 결과는 새로운 인생 도전은 허물어 졌다. 그리고 투명인간이 되어버린 듯 주변부적인 존재들에게 조차 관심을 받지 못하고 소외를 당한다. 도대체 어디로 간단 말인가! 탄식하면서 좌절하고 방황한다. 어디로 가야 할 것인지 방향감각마저 잃어버린 그는 이제 완전히 혼자가 되었다.

 

김은 주저앉는다, 어쩔 수 없이 이곳에

한번 꽂히면 어떤 건물도 도시를 빠져나가지 못했다

 

한 번 꽂히면 김도, 어떤 생각도, 그도 이 도시를

빠져나가지 못한다

김은 천천히 눈을 감는다,

 

<오후 4시의 희망>부분

 


한번 꽂히면 건물도, 생각도, 자신도 빠져나가지 못하는 도시에 주저앉아 모든 것을 포기한 듯 김은 천천히 눈을 감는다. 유년시절 빈 방에 갇혀 있던 그가 이제는 현실과 타협점을 찾지도 못하고 도시에, 바깥에 갇혀버린다. 우리는 모두가 위대한 혼자였다<비가2> 라고 말하듯 시 속의 그는 늘 혼자였고 혼자로 남았다. 시는 어쩌면 자기 자신을 지키기 위한 최선의 방어망 이였고 방법이었는지 모를 일이다. 포기하기 전 그는 희망을 갖고 완전히 다르게 살고 싶었다.<여행자>라고 새로운 삶을 선택한 적도 있었다.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며 질투는 나의 힘 이라고 했던 그가 두려움과 절망의 늪에서 자신을 구원하기 위해 사랑을 찾아 헤매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생각해 본다.

혼자가 된다는 것, 나는 그것을 두려워한다. 라디오를 켠다. 가래 끓는 소리로 라디오는 노래를 하고 뉴스를 끊임없이 흘려보낸다. 잠들어도 라디오는 여전히 노래를 하고 뉴스를 내 보내지만 나는 제대로 귀 기울여 듣지 않는다. 누군가가 곁에 있다는 것의 안도감을 갖기 위한 나의 바람 때문에 라디오가 주절거리게 둔다. 라디오는 홀로 오늘의 이야기를 하고 내일의 날씨를 말하며 노래한다. 볼륨을 올리자 뉴스가 쏟아져 나온다. 내가 나를 보호하는 하나의 방법이다.

올해로 20주기가 되는 그의 죽음이 1990년대에 제기된 ‘문학의 죽음’ 이라는 비관적 전망과 맞물려 일파만파로 전파되었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우리를 죽음의 방향으로 끌어당긴 90년대가 지나간 이상, 기형도를 ‘글루미 선데이’의 염세적 우울속에 방치할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다고 정철훈은 말한다. 또 기형도를 죽음의 신화에서 건져내 현재형의 시인으로 만드는 작업이야말로 비평가들의 몫이라고 말하는 소리를 귀담아들으며 그가 간지 20주기를 맞는 그의 시는 죽음과 함께 늘 태어난다. 나도 그에게 추모시 한편을 받친다.

 

시집 속에 갇히다/ 노운미

 

문을 열었어요. 잘 익은 어둠이 쏟아져 나왔죠. 풍성하게 담겨져 있는 어둠을 밟으며 안으로 들어섰어요. 와와- 소리치며 랄랄랄 노래를 부르며 사람들이 몰려왔어요. 서로들에게 말랑거리는 어둠을 던지며 킥킥킥 즐거워했지요. 한 덩이가 내 얼굴로 날아들었죠. 문을 열었어요. 문 속의 문을 열었어요. 문 속의 문, 문 속의, 문, 문들은 마토루시카 인형 같았어요. 문을 열 때마다 사람들이 줄줄 흘렀어요. 숨 막히는 어둠에 열광했어요. 어둠의 벽에 던져져 즐겁게 터지기도 했어요. 어둠에 찔려 신나게 실명하기도 했죠. 어디선가 입 속의 검은 잎으로 부는 피리소리 들렸어요. 프릴달린 검은 옷을 입은 여자는 한 마리 박쥐처럼 어둠에 매달려 춤을 추었죠. 사람들은 서로의 몸을 두들기며 연주를 했어요. 검은 잎들이 팔랑이며 허밍허밍 어둠을 뜯어 먹었어요. 어둠을 요절내기 위해 먹는 것이라고 했어요. 먹으면 먹을수록 짙어지는 어둠을 먹어야 어둠이 될 수 있다고 했어요. 어둠이 되고 싶어요? 어둠이 되고 싶어요.

 

[출처] 열광하는 기형도 시 읽기 / 노운미|작성자 문 향

 

전등사 나부상의 전서(傳書)

 

노운미

- 도편수에게 보내는 -


아무때나 피고 떨어지지 않지요
꽃은 시기를 알지요

 

술이 넘치고
웃음이 넘치는 주막이라 해서
연정(戀情)이 넘치는 주모는 아니옵지요
뭇 사내들이 흘리거나, 두고 간
마음을 다 품을 수 없는 노릇이지요
도편수 당신의 사랑, 당신의 것이기에
흐르고 넘치는 것 또한,
내 알바가 아니겠지요

 

어찌, 사내들은
없는 사랑을 짜내라 하는지
떼쓰는 어린아이와 무에 다른지
웃음을 판다 하여 분명,
실없는 여인네라 생각지 마라 했는데
허투루 들은 탓을 내게 돌리다니
내 떠난 것은,
도편수 당신의 마음을 알았기에
상처 될까 염려한 배려였거늘

 

그 투명했던 사랑을
처마 밑에 걸어두고 욕보인
당신의 어리석음이
내 몸뚱이, 내 마음이 걸린 것 보다
더, 안타까울 뿐이지요
사백년을 처마 밑,
허울좋은 하눌타리 사랑으로 버텨! 야 하다니요

 

 

지족불욕(知足不辱) 만족할 줄 알면 욕됨이 없고,

지지불태(知止不殆) 그칠 줄 알면 위태롭지 않으니 

가이장구(可以長久) 오래도록 편안할 것이다.  - 노자 도덕경에서

 

건강하고 즐겁게 대한민국 구석구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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