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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거친호흡 몰아쉬며 ^^ 굽이치는 산맥넘어 손의 자유, 발의 자유, 정신의 자유를 찾는다. 기억은 희미해지기에 이곳에 기록을 남긴다
문화문학음악

임진왜란 때보다 군사가 더 강하니, 겁낼 것 없다

by 한국의산천 2019. 9. 5.

예나 지금이나

무력한 임금과 무능한 대통령이 나라를 말아먹고

백성과 국민을 힘들게 한다


권력과 엿 바꿔 먹은 군사력과 섣부른 자만(自慢)이 아니었다면 달라졌을, 맑은 겨울날 아침이었다.


[박종인의 땅의 歷史]

"임진왜란 때보다 군사가 더 강하니, 겁낼 것 없다"

박종인 여행문화 전문기자 입력 2019.09.04 03:00 | 수정 2019.09.04 03:37


[180] 무지하고 자만했던 1874년 여름 어전회의
제국주의가 몰려오던 1874년 여름 어전회의
병인·신미 두 양요 겪고 궁궐 담장 무너지고 전국 홍수로 앓던 날
"300년 전 임진왜란 때보다 군사력 더 나으니 걱정 없다"
친정 선언한 젊은 고종, 대원군이 만든 군대 해산… 궁궐 수비대로 전환
개화파 정승 박규수 "언젠가 일본이 무력으로 개항 요구할 것"
1875년 日 군함 강화도 포격… 권력욕과 자만이 부른 강화도조약 강제 체결


박종인의 땅의 歷史
 

서기 1874년 어느 여름날 아침 창덕궁 중희당에서 어전회의가 열렸다.

추적추적 비가 내렸다. 새벽 1시 무렵 내린 비는 동이 터서야 겨우 멎었다가 오후까지 또 쏟아졌다.

궐내 측우기 강수량은 3치 5푼, 약 100㎜가 넘었다. 그때 조선 국왕은 고종이었다. 스물두 살 먹은 고종은 7개월 전 아비 흥선대원군으로부터 권력을 환수하고 친정을 선언했다.


원래 고종이 살던 곳은 창덕궁이 아니라 건청궁이었다. 건청궁은 경복궁에 있다. 그런데 지난겨울 섣달 10일, 갓 완공된 경복궁에 불이 나 임시로 잡은 거처가 창덕궁이었다. 그래도 왕은 패기만만했다.


나라는 초라했다. 홍수가 잇달았지만 나라에는 지방에 보낼 구호금도 제대로 없었다.

창덕궁 정문인 돈화문 옆 수문(水門)은 철창이 부서져 있었고 함춘원 담장은 열아홉 칸이나 부서져 있었다.

종묘(宗廟) 대문 옆 담장 또한 두 칸이 허물어져 있었다. 창덕궁 북쪽 대보단 남문인 공북문 또한 담장이 무너져 내렸다.


그 옹색한 날, 국왕과 영의정 이하 대신들이 이리 의견 합치를 보았다. "임진왜란 때보다 군사력이 나으니, 오랑캐에게 겁낼 필요가 없구나."

병인(1866년), 신미(1871년) 두 양요에 서구 열강에 의해 뒤집힐 뻔했던 나라 구중궁궐에서 벌어진, 무지하고 자만했던 어전회의 풍경이다.

때는 1874년 음력 6월 25일 병신일이었다.(같은 날 '승정원일기')


이리 떼가 몰려오던 구한말


1873년 겨울, 고종은 대원군으로부터 독립해 친정을 전격 선언했다. 스물한 살이던 고종은 친대원군 세력을 제거하고 친위 세력으로 주변을 채워나갔다.

세상은 어지러웠다. 7년 전에는 프랑스 함대가 강화도를 쑥대밭으로 만들고 퇴각했다. 2년 전에는 미국 함대가 그 쑥대밭을 또다시 초토화하고 사라졌다.

조선 권력층은 두 전투에 모두 승리했다는 대착각 속에 빠졌다. 젊은 군주 고종 또한 마찬가지였다.


▲ 찌는 여름날, 광화문 뒤로 경복궁 흥례문이 보인다. 임진왜란 때 백성에 의해 불탔던 경복궁은 1872년 중건됐다가 이듬해 겨울 다시 불탔다. 재중건 공사 중인 1874년 여름 고종과 대신들이 창덕궁 중희당에서 어전회의를 열었다. 프랑스(1866년)와 미국(1871년)의 침략으로 나라는 위태로웠다. 종묘와 창덕궁 담장은 곳곳이 무너져 있었다. 나라가 기울고 있는데, 지도자들은 "(280년 전인) 임진왜란 때보다 군사력이 나아졌고, 두 양요 후 서양 오랑캐에 대해 잘 알고 있으니 걱정 없다"고했다. /박종인 기자
 
1854년 일본이 미국 함포 사격에 굴복해 나라 문을 열었다. 1873년 프랑스는 베트남을 차지했다. 1874년 5월 일본이 대만을 정복했다. 두 나라 모두 청나라에 조공하는 나라였다. 청나라는 아무런 항의도 하지 못했다. 두 양요는 제국주의 발톱을 내민 프랑스와 미국이 조선에 침을 발라댄 사건이었다. 하지만 조선 정부는 그저 소동이라고 생각하고 말았다. 잘 퇴치했으니 됐다고 생각하고 말았다. 이리 떼가 초원을 누비는데, 고종 이하 관리들은 염소 떼처럼 구중궁궐에서 풀을 뜯고 있었다. 그리고 홍수 사태가 난 그 여름, 언제나처럼 회의가 벌어진 것이다.


영의정 이유원의 근거 없는 자신감


1874년 6월 24일 청나라가 보낸 긴급 첩보가 도착했다. "대만에서 철수한 일본군이 조선을 치려 하니 프랑스와 미국이 일본에 동조하기 전에 두 나라와 먼저 수교하라"고 적혀 있었다.(1874년 6월 24일 '고종실록') 폭우가 쏟아지던 다음 날 아침 회의 메인 안건은 바로 이 전문이었다. 다음은 '승정원일기'에 기록된 그날 회의록이다.


영의정 이유원이 말했다. "상국(上國)이 우리를 속국으로 인정하고 알려줬으니 고맙기 이를 데 없는 일이다. 그러나 알려만 주면 됐지 왜 통상 따위를 얘기하며 공갈치듯 유혹하는가." 두 번이나 승전한 나라이니, 쓸데없는 간섭은 받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이유원은 "병서(兵書)에 따라 준비를 하면 되고, 준비해서 쓰는 일이 없으면 다행인 일"이라고 했다.


이후 대화는 비상시기 지도자와 참모들이 나눈 대화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한심했다. 서기 1874년 여름에, 서기 1592년 벌어진 282년 전 임진왜란을 입에 올린 것이다.

고종이 말했다. "지금 군사를 일으키려면 임진년에 못 미칠 것이다."


이유원이 답했다. "요즘 무기가 잘 단련되고 포(砲)를 설치한 곳도 많다. 군량미도 몇 년은 지탱할 수 있다. 게다가 이미 포를 쏘는 기술까지 알고 있으니, 겁낼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추락한 타임머신에서 내린 듯, 이들은 바다를 점령한 이양선들을 보며 조총(鳥銃)으로 무장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일본군을 상상하고 있었다.


영의정이 확신 가득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연전에 또 두 차례 양요를 겪어 서양놈들 장점과 단점을 남김없이 잘 알고 있으니[凡洋醜之長短 習知無餘] 임진왜란 당시와 비교하면 도리어 나은 데도 있다고 본다[反有或勝處]."


자신감은 일본을 넘어 서양 제국주의 세력에까지 확장돼 있었다. 그리고 그 자신감의 근거는 '천하에 더할 수 없이 막강한 평안도 강계(江界) 포수들'이었다. "추위와 더위를 견디고 배고픔을 참고 목마름을 참으며 한 번 손을 들었다 하면 백발백중이니, 강계 포수들은 저들 나라에 없고 우리나라에만 있다. 오랑캐들이 출중한 재주가 따로 있겠으며, 우리나라 또한 쓸 만한 인재가 없겠는가."


분명히 어전회의였으나 대화는 고종과 영의정 사이에서만 오갔다. 고종이 말했다. "이럴 때일수록 사학(邪學)을 더욱 통렬히 금해야 한다. 양놈들이 우리나라 속사정을 아는 것은 끄나풀이 있기 때문이다." 사학은 천주교를 뜻한다. 영의정 이유원은 좌우 포도청과 지방 군부대에 사학 단속령을 강화하겠다고 답했다. 임진왜란보다 나은 군사력과 이념 통제로 제국주의에 맞서겠다는 다짐이 국왕과 영의정이 내린 결론이었다. 수재와 세금 미납에 대한 논의에 이어 드디어 다른 대신들에게 발언권이 돌아갔다.


우의정 박규수의 작심 발언


입을 잠그고 있던 우의정 박규수가 말을 쏟아냈다. "청나라 긴급 전문은 군국(軍國)에 관련된 일이니 쉽게 볼 일이 아니다." 일찌감치 결론 낸 안건이 또 나오자 고종이 심드렁하게 답했다. "장수로서 지략이 있는 자를 거두어 써야 한다." 박규수가 작심하고 답했다. "지금이 어찌 군신 상하가 편안하게 놀고 있을 때인가. 군사를 기르려면 식량과 재물을 미리 준비해야 가능한데 이는 급한 일이 아니다."


▲  고종이 사후 마지막으로 머물렀던 창덕궁 선정전. 1919년 고종 승하 후 이듬해 이곳 선정전에서 3년상을 치른 뒤 고종은 홍릉으로 안장됐다. 여름에는 동·서빙고에서 떠온 얼음으로 냉장 영안실을 만들어 부패를 막았다. 1866년 왕비 민씨 간택이 이뤄졌던 장소이자 어전 회의가 주로 열렸던 중희당은 1891년 알 수 없는 이유로 철거됐다. 지금은 후원 가는 통로로 변했다.
 
박규수는 이보다 8년 전인 1866년 평양에서 미국 상선 제너럴셔먼호를 불태웠던 강경파였다. 그런데 군사가 급하지 않다는 것이다. 오히려 박규수는 "나라를 끝없이 멀리 이어나갈 방도에 더 힘쓰라"는 뜬구름 같은 소리를 해댔다.


얼핏 케케묵은 성리학적 언사 같지만, 박규수 말에는 가시가 날카롭게 돋아 있었다. 그가 말을 이었다. "한 나라 정치가 제대로 선 다음이라야 모든 나라가 복종하는 법이다[立一國之政然後 海隅諸邦 罔不率服]." 개혁 관리 입에서 왜 이런 구태의연한 말이 나온 것인가.


권력욕이 붕괴시킨 국방


고종이 친정을 하면서 추구한 군사정책은 궁궐 친위병 강화였다. 대원군이 장악했던 기존 군사들을 해체하고 자기를 지원할 무력 양성이 목표였다. 1874년 4월 25일 고종은 "궁궐 수비병이 400명밖에 없으니 증원하라"고 명했다. 영의정 이유원이 경비가 부족하다고 하자 고종은 이렇게 말했다. "각 영에서 차출해 보충하라."(1874년 4월 25일 '고종실록') 각 부대 병사 차출 및 친위대 구성은 속전속결로 진행됐다.


한 달 열흘 만인 6월 4일 '무위소(武衛所)'라는 궁궐 친위부대가 공식 출범했다. 총원 500명으로 출범한 무위소는 그해 8월 1270명 규모 대부대로 확장됐다.(육군군사연구소, '한국군사사' 근·현대편) 무위소 병력은 모두 타 부대에서 차출됐고, 대원군이 무관으로 임명했던 부대장들은 모두 문신인 지역 수령 겸직으로 바꿔놓았다. 두 양요를 치르고 강화됐던 강화도 진무영도 마찬가지였다. 군사력 강화가 아니라, 고종 본인의 권력 강화와 대원군의 권력 기반 파괴가 목적이었다. 대원군은 이를 보며 "국가에 무슨 해를 끼쳐서 그 장성을 파괴하는가[壞長城也]?"라고 한탄했다.(황현, '매천야록' 1집 '강화도 무위영의 철폐')


박규수는 바로 이 친위부대 육성을 지적한 것이다. 한 나라 국방을 권력 강화 수단으로 써먹는 얼토당토않은 군주를, 박규수는 대놓고 비난하지 못했다. 대신 박규수는 "파수군 500명에 신경 쓰지 말고 나라 지키는 데 힘쓰라"고 충고하고 말문을 닫아버렸다. 국왕은 귀를 닫아버렸다.

보름 뒤 고종은 한양 중앙군 전 부대를 무위소로 이속시켰다.(1874년 7월 11일 '고종실록') 도성 수비대 전 병력이 궁궐 파수군(把守軍)으로 변신했다.


박규수의 예언과 속상했던 겨울날 아침


이듬해 4월 20일 일본 군함 운요호가 부산에 나타나 조약 체결을 요구했다. 조선 정부는 "오랑캐가 감히 황제 운운한다"며 거부했다. 그 무렵 박규수가 대원군에게 편지를 썼다. '저들이 포를 한 번 쏘고 나면 문서를 받고자 해도 받을 방법이 없을 것이다.'(박규수, '환재집' 11권, '대원군에게 답하는 편지[答上大院君]' 1875년 5월  )


예언은 바로 현실화됐다. 그해 8월 운요호가 강화도를 기습 포격했다. 두 양요에 파괴됐던 강화도 병영은 다시 한 번 파괴됐다. 이번에는 대응도 하지 못했다. 조선 권력층은 이듬해 일본과 강화도 진무영 병영에서 강화도조약을 체결했다. 2월 3일 오전 7시였다.

권력과 엿 바꿔 먹은 군사력과 섣부른 자만(自慢)이 아니었다면 달라졌을, 맑은 겨울날 아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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