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인의 땅의 歷史] 몸을 두루 인두로 지졌으나, 박태보는 의연하였다
조선일보 박종인 선임기자
입력 2020.08.12 03:12 | 수정 2020.08.12 09:30
[224] 조선형벌잔혹사 ②온갖 고문 다 당하고도 의연했던 의인 박태보
▲ 경기도 의정부에 있는 박태보 묘. 긴 장마 속에 무덤 앞에는 분홍색 무릇꽃 몇 줄기가 솟아올라 있다. 묘는 아버지 서계 박세당 고택 안에 있다. 박태보는 1689년 숙종이 희빈 장씨 아들을 적장자로 삼고 왕비 민씨를 폐하려 하자 이에 반대하는 상소를 대표집필했다. 이에 숙종은 상소를 올린 서인들을 친국하며 박태보에게 심한 고문을 가했다. 압슬형과 낙형과 장형으로 만신창이가 됐지만 박태보는 오히려 "망국적인 일을 하지 마시라"며 질책했다. 사형을 면하고 유배를 떠난 박태보는 사육신묘가 있는 노량진에서 죽었다. /박종인 기자
영조 시대에 많은 고문과 형벌이 금지되었다. 인두로 발바닥을 지지는 낙형(烙刑)과 사금파리 더미 위에 꿇어앉힌 뒤 피의자 무릎을 바위로 짓이기는 압슬형(壓膝刑)이 대표적인 잔혹 형벌로 인정돼 공식적으로 폐지되었다.
포도청에서는 주리를 트는 전도주뢰형(剪刀周牢刑) 또한 금지되었다. 비록 이 형들을 다 사용해 정적을 제거한 다음이긴 했지만, 영조가 한 조치는 획기적인 일이었다.〈2020년 8월 5일 '땅의 역사' 참조〉
그런데 영조보다 앞선 숙종 때, 박태보(朴泰輔·1654~1689)는 이 고문들을 하룻밤 만에 한꺼번에 받고 죽었다. 서른다섯 살 젊은 관료가 맞은 최후가 워낙 극적인지라, 그가 속한 서인(西人) 당색은 물론 적이었던 남인(南人)들까지 그 의연함을 기렸다. 자백을 받기 위해 행한 잔혹한 고문, 그 고문을 행한 권력자, 그리고 고문에도 의지를 굽히지 않은 관료가 주인공인 1689년 여름밤 이야기다.
막강 왕권 숙종과 장희빈
박종인의 땅의 歷史
1674년 8월 18일 현종이 죽었다. 닷새 뒤 왕세자가 창덕궁 인정문에서 즉위 교서를 발표하고 왕위를 이어받았다. 숙종이다. 그때 숙종은 열세 살이었는데, 호락호락한 군주가 아니었다.
숙종은 소위 '경신환국(庚申換局·1680)' '기사환국(己巳換局·1689)'과 '갑술환국(甲戌換局·1694)'을 통해 하루아침에 정권을 갈아치우며(환국·換局) 왕권을 강화해갔다. 온 조정에서 두려워 떨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로 무서운 왕이었다.(이건창, '당의통략', 자유문고, 2015, p143)
이 가운데 기사환국은 희빈 장씨와 왕비 민씨(인현왕후)에 얽힌 사건이었다. 숙종은 왕비 민씨와 혼인 후 8년 동안 아이가 없었다. 1689년 1월 15일 태어난 지 석 달 된 후궁 장씨 소생 아들 이윤을 적장자로 선언하고 장씨를 희빈으로 삼았다.
남인은 희빈 장씨를 지지했고 노론은 왕비 민씨를 지지했다. 집권 세력인 노론은 반대했지만 숙종은 야당인 남인을 등에 업고 이를 강행했다. 그리고 숙종은 노론인 영의정 김수흥을 파직하고 노론 영수 송시열에게 유배형을 내렸다. 주요 관직에 있던 노론을 대거 몰아내고 남인으로 채웠다.
그해 4월 25일 노론과 소론으로 갈라져 있던 서인 86명이 연명으로 이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 박태보의 비극은 그날 시작했다. 총애하는 여자와 고대하던 아들을 반대하는 상소를 바로 이 젊은 박태보가 대표 집필한 것이다.
그 아버지에 그 아들, 박세당과 태보
'나는 소론 선배 가운데 박세당을 가장 좋아한다. 문장과 지조는 오염된 세상 풍속에 경종을 울리기에 충분하다.'(노론 관료 심노숭·1762~1837, '자저실기', 안대회 옮김, 휴머니스트, 2014, p203)
박태보 묘.
박세당은 박태보의 아버지다. 송시열 이후 노소론으로 갈라진 서인 가운데 소론 영수였다. 그 아들이 박태보다. 지기(志氣)가 높고 시비를 가리는 데는 논리가 정연하고 과감한 사내들이었다. 강직과 논리에는 서로 지려 들지 않는 부자였다.
아들은 "아버지 글은 명재 윤증과 약천 남구만 아래"라고 대놓고 말하고, 아비는 "네가 나를 너무 가볍게 본다"고 답하는 사이였다. 집 마당 살구나무 열매 개수를 놓고 내기를 했다가 아들이 틀려 꾸짖었더니 기어이 아들이 하나를 더 찾아내 이기고 마는 그런 사이기도 했다.(심노숭, '자저실기', p377, 567)
그 강직한 성격 탓에 아버지는 노론에게 사문난적(斯文亂賊·'주자의 아름다운 글을 어지럽히는 도적': 노론이 정적들을 몰 때 쓰던 말)으로 몰렸다. 아들은 최고 권력자로부터 고문치사(拷問致死) 당했다.
331년 전 여름밤의 잔혹극
"인심과 하늘의 뜻은 억지로 어길 수 없나이다. (여자들끼리) 서로 무함과 알력이 생기니 뒤로 미칠 화(禍)가 이루 말할 수 없으리다."(1689년 4월 25일 '숙종실록') 늦은 밤 올라온 서인 연합 상소에 숙종은 "그냥 나를 폐위시키라고 하라"며 삼경(三更·오후 11시~오전 1시) 전에 인정문 앞에 형구를 준비하라고 명했다. 내시가 헐떡이며 달려와 "한밤중이라 준비가 불가능하다"고 하자 "비가 억수같이 쏟아져도 친히 국문하겠다"며 친국을 강행했다.
박태보는 오두인에게 "누가 썼냐고 물으면 반드시 내가 썼다고 하라"고 당부했다. 상소에 동참했던 이세화가 "이번에 안 되면 거듭해서 꼭 허락을 받자"고 하자 소두(疏頭·대표 상소인) 오두인은 "그럴 겨를이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이긍익, '연려실기술'35 숙종조고사본말, '원자 명호를 정하다')
▲ 박태보를 모신 노강서원. 노량진 사육신묘 옆에 있었으나 6·25 때 파괴되고 지금은 아버지 박세당 고택이 있는 의정부 수락산 자락으로 옮겼다.
맨 먼저 심문을 받은 오두인이 박태보가 대표 집필했다고 자백했다. 박태보가 끌려나왔다. 박태보에게 숙종이 자초지종을 물으니, 박태보는 모두 사실이라고 답했다. 숙종이 말했다. "이런 독물(毒物)은 곧바로 머리를 베어야 한다." 대신들 만류에 숙종은 곧바로 장(杖)을 치라 명했다.
한차례 장을 맞은 박태보가 이리 답했다. "비록 못났으나 대의(大義)가 뭔지 아니, 나는 전하를 배반한 적 없나이다." 숙종이 소리쳤다. "네가 더욱 독기를 부리는구나. 매우 쳐라, 매우(猛杖猛杖·맹장맹장)!"
'고문 종합 선물세트' 그리고 기개
박태보가 "우리가 무슨 무함을 했나이까"라 말했다. 숙종은 "들을 필요 없으니 계속 치라"고 명했다. 그때 이미 왕에게는 기필코 죽이려는 의도가 보였다(示必殺之意·시필살지의).(같은 날 '숙종실록') 하지만 박태보는 한마디도 실수 없이 평상시처럼 태연하였다.
"끝내 비명을 지르지 않으니 참으로 독물이다. 빨리 장을 치라!" 박태보가 말했다. "어찌하여 이런 망국적인 일을 하십니까!" 숙종이 이렇게 말했다. "어째서 저 입을 치지 않는가!"
숙종은 다시 오두인을 불러 문초하며 장을 치라 명했다. 늙은 오두인은 비명을 지르다 지쳐 말이 끊겼다.
박태보 묘표. 오른쪽은 '泣血(읍혈):소리 죽여 피눈물로 통곡함'. 아들 필모가 썼다. 왼쪽은 '噫(희):슬프도다'. 외삼촌 윤증이 쓴 글 마지막 문장이다.
대신들이 "날이 새려고 한다"며 중단을 청했다. 숙종은 "일없으니 죄인을 구하려거든 너희들이나 나가라"고 답했다. 그리고 다시 박태보를 끌어내 장을 때렸다. 숙종이 말했다. "사실을 고하지 않으면 압슬(壓膝)할 것이다." 박태보가 답했다. "이미 다 말했나이다." 숙종은 곧바로 나장에게 무릎을 꿇려 짓이기라 명했다. 그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그러자 숙종은 낙형(烙刑)을 가하라고 명했다. 박태보는 때로 신음소리를 냈지만 끝내 신기(神氣)는 어긋나지 않았다. 이에 임금은 "옷을 벗기고 두루 지지라" 명했다. "오늘 네가 살 것 같으냐?" 온몸을 두루 지지고 양다리와 넓적다리까지 인두가 이르자 나장이 "법에는 발바닥만 낙형하도록 돼 있다"고 머뭇대며 말했다. 박태보는 이후 또 발바닥에 낙형을 받았다.(같은 날 '숙종실록')
낙형과 압슬형은 모두 열세 번 짓이기고 지지는 걸 1회로 치니, 박태보는 모두 스물여섯 차례 몸을 지지고 무릎이 짓이겨졌다. 태보는 살가죽과 살이 문드러지고 벗겨져 피가 얼굴에 가득 흘러도 오히려 얼굴을 바로잡고 안색을 바꾸지 않았다. 이어 장을 더 맞으니 정강이뼈가 튀어나왔다.
사람들이 무릎을 싸맬 천을 찾자 박태보가 "내 도포 소매를 찢어서 쓰시오"라 말하고는, 소매 속 부채를 옆사람에게 꺼내주며 "움직이는 데 꽤 방해가 되니 집에 전해주오"라고 말했다.('연려실기술' 같은 조)
1689년 4월 25일 자 실록 사관은 이렇게 기록했다.
박태보는 '임금 노여움이 격발될수록 응대가 화평스러웠고 정신이 의연하며 절의가 있었다.'
노량에서의 죽음과 무릇꽃
목숨만은 살려달라는 영의정 권대운의 상소에 숙종은 박태보에게 진도 유배형을 내렸다. 박태보가 의금부 감옥에서 나오자 경성 사녀(士女)들이 길을 메우고 떠들면서 말하기를, "충신의 얼굴을 보고 싶다" 하였고, 우는 이까지 있었다.(1689년 4월 26일 '숙종실록') 박태보는 명례방(명동) 집에서 잠시 쉬다 책 몇 권을 꾸려 황혼에 남대문을 나섰다. 길가에 있던 늙은이들이 가마를 자진해서 들었다.
강을 건너 노량에 닿았는데 병 때문에 그곳에 머물렀으니, 사육신 사당 아래였다. 아버지 박세당이 "어찌하겠느냐, 그저 조용히 죽어 마지막을 빛내라"고 어루만졌다. 태보는 "가르침을 좇겠다"고 답했다. 아버지가 울면서 나가고, 숨이 끊어졌다. 1689년 5월 5일 오전 9시였다.('연려실기술' 같은 조)
남인은 오직 교리 이후정이 반대 상소를 올렸는데(같은 날 '숙종실록') 당(黨)이 막아서 임금에게 올라가지 못했다.(이건창, '동소만록', p242) 그럼에도 남인은 "굳이 따지자면 박태보처럼 죽지 못한 남인도 70여 명"이라며 박태보를 은근히 기렸다.(남하정, '동소만록', 원재린 역 주, 혜안, 2017, p323)
여기까지가 기개 넘치는 젊은 관료의 고문치사 사건 전말이다. 통제가 없는 권력이 보여준 조야한 야만성과, 권력과 결탁한 자들이 야만 앞에서 보인 비겁함이 만든 잔혹사였다.
하여, 경기도 의정부 서계 박세당 고택 안 박태보 묘에 가보시라. 긴 장마에 풀들이 무성하고, 분홍빛 무릇꽃 몇 줄기가 그 젊은 의인 유택 앞에 하늘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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