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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문학음악

우리 편이니, 역적이라도 처벌은 불가하다 송시열

by 한국의산천 2019. 8. 28.


[박종인의 땅의 歷史]

"우리 편이니, 역적이라도 처벌은 불가하다"

박종인 여행문화 전문기자 입력 2019.08.28 03:00


[179] 송시열의 진영 논리와 소장파의 집단 반발
1682년 서인 김익훈이 까발린 남인 역모 사건
숱한 남인 처형하고 보니 조작된 공작 정치

남인은 물론 젊은 서인들까지 김익훈 처벌 요구
서인 당수 송시열, "스승의 자제이니 처벌할 수 없다"
한 달 뒤 "나는 김익훈 변호한 적 없다"고 잡아떼

도덕주의자의 진영 논리에 소장파 반발, 노·소론 분당

 
 
박종인의 땅의 歷史
 

서울 종로구 서울과학고등학교 교정에는 천재암(千載岩)이라는 바위가 있다. '천년바위'라고도 한다.

바위 위에는 '今古一般(금고일반)' 네 글자가 새겨져 있다. 예나 지금이나 신념은 한결같다는 뜻이다.


과학고에서 나와 주택가로 들어가면 골목길 왼쪽 암벽에 또 네 글자가 새겨져 있다. '曾朱壁立(증주벽립)'이다.

공자 제자인 증자와 송나라 성리학 원조인 주자처럼 벼랑 끝에서도 신념을 지킨다는 말이다.


두 바위가 있는 곳은 혜화동이다. 옛날에는 송동(宋洞)이라고 했다. 예전에 이곳에 살던 한 거물 정치가 이름을 딴 지명이다.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지조를 지키겠다고 공언하며 살았던 그 정치가 이름은 우암 송시열(1607~1689)이다.

조선 후기 정치를 좌지우지했던 그가 정말 그리 살았나 한번 본다.


막강한 어린 왕 숙종


조선은 무신 이성계를 앞세워 정도전을 위시한 신진 사대부가 함께 세운 나라였다. 태생적으로 군약신강(君弱臣强)의 나라였다. 정도전은 술에 취하면 "한 고조가 장자방을 참모로 쓴 것이 아니라, 장자방이 한 고조를 썼다"며 이성계가 아니라 자기가 건국의 아버지라고 내뱉기도 했다.(1398년 8월 26일 '태조실록')


1674년 조선 19대 국왕 숙종이 등극했다. 열세 살짜리 어린 왕이었지만, 왕권을 억누르는 신하들을 두고 보지 않았다.

등극과 함께 선왕 현종에 대한 행장(行狀)을 송시열에게 작성하라 명하니, 곽세건이라는 유생이 "선왕을 장남이 아니라고 깎아내린 사람이니 송시열은 행장 필자가 될 수 없다"고 상소했다.


이에 숙종이 이조참판 이단하에게 "송시열이 깎아내렸다는 사실까지 덧보태 행장을 쓰라"고 명했다.

이단하가 "송시열은 스승이라 어렵다"고 답하자 숙종이 이렇게 답했다. "스승만 알고 임금이 있는 줄은 모르는구나." 이단하는 그 자리에서 파면됐다.(1674년 12월 18일 '숙종실록')


▲ 서울 혜화동 서울과학고등학교 교정에는 '今古一般(금고일반)'이라고 새겨진 큰 바위가 있다. 혜화동에 살았던 조선 후기 거물 정치인 송시열이 새긴 글자다.

'예나 지금이나 신념은 한결같다'는 뜻이다. 원칙주의자요 도덕주의자 송시열의 면모다.

서인 당수였던 송시열은 1683년 공작 정치를 통해 남인을 제거하려던 김익훈을 "우리편이니 처벌할 수 없다"고 옹호했다.

도덕주의자의 이 같은 진영 논리에 젊은 서인들이 등을 돌려 서인은 노론과 소론으로 갈라졌다.

'今古一般(금고일반)', 과거와 현재에 무엇이 같다는 말인가. /박종인 기자
 
왕의 눈총에 한번 빗맞으면 파멸이었다. 열세 살짜리 어린 왕에게 온 조정에서 두려워 떨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이건창, '당의통략') 그래서 신하들은 죽기 살기를 각오하고 권력 투쟁에 뛰어들었다.

서인(西人)은 물론 남인(南人) 또한 권력 쟁취에 목숨을 걸었다. 그런데 서인의 술수가 한 수 위였다. 서인은 '끓는 물이나 불 속에 들어가 죽더라도 피하지 않았고, 남인은 본래 나그네로서 나왔다 물러갔다 할 뿐 경계하는 일에 소홀하였다.'(남하정, '동소만록') 결국 목숨을 건 당쟁에서 이긴 당은 서인이었다.


경신환국과 공작정치


술수가 모자란 남인은 권력 즐기는 모습이 엉성하기 짝이 없었다. 1680년 3월 28일 영의정 허적 집에서 잔치가 벌어졌다. 할아버지 허잠이 시호(諡號)를 받은 기념 파티였다. 마침 비가 내렸다. 숙종이 "왕실 장막과 차양을 잔칫집에 갖다 주라"고 명했다. 잠시 후 내시는 "이미 허적이 다 가져갔다"고 보고했다. 숙종은 "한명회도 못 한 짓"이라며 그날로 남인들을 숙청하고 고위직을 서인으로 가득 채워버렸다.(이긍익, '연려실기술' 34권, 숙종조 고사본말) 이를 경신환국 혹은 경신대출척이라 한다. 1674년 이래 6년 만에 서인이 권력에 복귀했다. 권력 유지를 위해 서인이 꺼낸 술수는 공작정치를 통한 남인 몰살 작전이었다. 일단 남인 당수 윤휴를 역적 혐의를 씌워 죽였다. 이어 100명이 넘는 남인이 처형됐다.


1681년 남인이 역모를 꾸민다는 유언비어가 돌았다. 이에 우의정 김석주가 어영대장 김익훈과 함께 만들어낸 사건이 임술년 역모 조작사건 임술고변(壬戌告變)이다. 이들은 남인과 친한 심복 김환을 시켜 남인 허새와 허영에게 역모를 사주하라고 했다. 성공만 하면 남인 잔당을 박멸할 수 있는 대사건이었다. 이 같은 정보가 남인에게 역으로 들어가자 김환은 김익훈과 상의 없이 "무기를 준비한 남인의 역적모의를 적발했다"며 대궐로 들어가 신고해버렸다.(1682년 10월 21일 '숙종실록') 허영과 허새는 조사 과정에서 역모를 자백하고 처형됐다.


그런데 사건을 아무리 파고들어가도 앞뒤가 맞지 않는 것이다. 결국 역모는 조작으로 드러났다. 무고한 남인들 목숨이 또 달아났다. 하지만 공작을 꾸민 주동자 김익훈은 아무런 처벌을 받지 않았다.


젊은 서인들은 김익훈을 멀쩡하게 놔두는 노장파에게 극렬하게 반발했다. 이듬해 2월 사간원 지평 박태유와 유득일은 "김익훈을 귀양 보내라"고 주장했다가 거제도 현령과 진도 군수로 쫓겨났다.


대로(大老) 송시열의 선택


우암 송시열 초상(국보 239호). /국립중앙박물관
 
이에 앞서 1682년 7월 26일 숙종은 존경받는 재야 서인 학자 3인, 송시열과 박세채와 윤증을 조정으로 불러들였다.


이 가운데 송시열은 대로(大老)라 불리는 거물 중의 거물이었다.

그해 11월 고향 회덕을 출발한 송시열이 경기도 여주에 도착했다.


승지 조지겸이 여주로 가서 그를 만났다. 조지겸은 김익훈 사건 전모를 소상히 이야기했다. 그러자 송시열은 "형편없는 짓이니 죽는다 해도 애석할 것이 없다"고 답했다.


이에 어린 서인들이 드디어 크게 기뻐하면서 대로(大老)의 소견도 자기네 뜻과 같다고 하였다.(송시열의 수제자 권상하, '한수재집', 한수재선생문집 부록 '강상문답')


1683년 1월 마침내 대로가 입경했다. 척신들이 찾아가고 김익훈 가족이 찾아와 곡절을 호소하였다.(권상하, '한수재집') 그리고 상황이 급변했다.


1월 19일 숙종이 주재하는 아침 회의 주강에서 송시열이 입을 열었다. "김익훈은 내 스승 김장생의 손자다. 스승에 대한 도리로서, 내가 죄인이다[臣實趙穆之罪人也]."(1683년 1월 19일 '숙종실록')


목에 칼이 들어와도 원칙을 외치던 송시열이 궁궐을 피칠갑한 악한을 오로지 우리 편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무죄라고 하고, 자기 부덕의 소치라고 변호한 것이다. 놀란 제자 김간이 집으로 찾아가자 송시열은 직설적으로 대답했다. "스승의 자제이니 구제하지 않을 수 없다[師門子弟不可不救]."(송시열, '송자대전' 부록 15 '김간(金榦)의 기록')


비난 여론이 빗발치자 송시열은 한 달 뒤 "김익훈과 형제의 의리가 있긴 하지만, 나는 (아이를 가르치지 못한) 내 허물을 말했을 뿐 변호한 적은 없다"고 잡아뗐다.(1683년 2월 27일 '숙종실록')


도덕률과 원칙을 무기로 삼았던 도덕주의자였지만, 칼집 속에는 형편없이 무딘 칼이 들어 있었다.

그 뒤로 사류가 크게 쑥덕거려 "어른이 돼 가지고 편벽된 사사로움에 빠져서 그 첫 소견을 바꾸는 법이 어디 있는가"라며 드디어 자립할 마음을 먹었다.(이건창, '당의통략') 훗날 배신당한 소장파가 당을 빠져나가니 이게 노론과 소론의 분당이다.


장희빈 사건과 송시열


1689년 1월 10일 숙종이 희빈 장씨가 낳은 아들 이름을 짓겠다고 선언했다. 희빈 장씨는 서인 세력이 기피하는 인물이었고, 그 아들이 세자로 책봉되면 서인 미래는 참담했다. 서인은 여러 가지 이유를 대며 이를 반대했다. 2월 1일 송시열이 반대 상소를 올렸다. 그날 밤 숙종은 서인 정권을 몰아내고 남인으로 다시 조정을 가득 채웠다. 송시열은 제주도로 유배시켰다. 이를 기사환국이라 한다.


반대한 사람 가운데 박태보가 있었다. 고문으로 온몸이 불에 타고 뼈가 부러져 골수가 흘러도 원칙주의자 박태보는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

숙종은 죽어가는 박태보를 진도로 귀양 보냈다. 박태보는 서울 노량진 사육신묘 앞에서 휴식 중 죽었다.


▲ 서울 혜화동 송시열 집터 암벽에 새겨진 '曾朱壁立(증주벽립)' 네 글자.

공자의 제자 증자와 성리학 원조인 주자처럼 벼랑 끝에서도 신념을 지킨다는 말이다. 송시열 글씨다. 송시열이 살았던 혜화동은 조선 말기까지 송동(宋洞)이라고 불렸다.
 
제주도 유배 중이던 송시열은 서울로 재소환 도중 해남에서 그 소식을 들었다. 송시열은 눈물을 흘리며 자손에게 박태보 이름을 부르지 말라고 경계하였다.(1689년 5월 4일 '숙종실록') 통곡하는 모습이 마치 실성한 듯했다.


그 눈물이 진심이었는지 의심스럽다. 박태보는 송시열이 '사문난적'이라며 맹비난했던 박세당의 아들이 아닌가. '연려실기술'은 이렇게 기록한다. '그가 손자에게 말하기를 "박태보와 관련된 글은 모두 불에 넣으라" 하였다. 박태보를 헐뜯은 글을 급히 태워버리게 한 것이다.'

유배가 풀리고 정계 복귀를 기대했던 송시열은 정읍 길거리에서 사약을 받고 죽었다. 그가 남긴 유언은 "'곧을 직[直]' 한 글자를 따르라"였다.


어느 관대한 인터뷰


2010년 12월 6일 자 '경향신문'에는 '진보집권플랜'이라는 책을 펴낸 저자 인터뷰가 실렸다. 저자는 서울대 교수 조국이다.

저자의 비전에 대한 설명 끝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그의 딸은 외고를 거쳐 대학 이공계에 진학했는데, "나  의 진보적 가치와 아이의 행복이 충돌할 때 결국 아이를 위해 양보하게 되더라"고 자신의 한계를 인정했다. 이쯤 되면 인간적인 중도좌파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인간적인 중도좌파'라는 평가가 무슨 뜻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아이 행복을 위해서라면 양보할 수 있는 가치가 진짜 가치로운지도 알 수가 없다. '금고일반(今古一般)', 한 걸음도 벗어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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