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희경 장편 '빛의 과거' 출간
같은 시간·다른 기억… 다시 꺼내본 내 靑春
조선일보 백수진 기자 / 입력 2019.09.04 03:00
[은희경]
1977~2017년 시공간 교차시킨 7년 만의 장편 '빛의 과거' 출간
음악감상실·다방·미팅 풍속도 70년대 분위기 그대로 재현
구상부터 완성까지 15년… 권위적 사회·만연한 性차별에 '어쩔 수 없지' 했던 반성 담아
◀ 은희경
은희경은 "철저히 현재의 감각으로 과거를 보는 소설"이라면서 "과거가 아닌 지금 이 시대의 이야기라고 생각하고 썼다"고 했다. /이진한 기자
'군대의 비극은 섞이는 것이다.' 1977년 여대 기숙사에 처음 들어간 신입생은 책 속의 이런 문장에 밑줄을 긋는다.
은희경(60)의 신작 '빛의 과거'는 출신지와 자라온 환경이 다른 20대 초반 여대생들이 뒤섞이는 기숙사가 배경이다. 이질적인 청춘들이 부대끼는 낯선 공간에서 "비극이라고 이름 붙일 만한 서투름과 욕망의 서사"가 그려진다.
2일 만난 은희경은 "낯선 곳에만 가면 대학 기숙사에 처음 들어갈 때의 그 두렵고 불안한 느낌이 되살아났다"면서 "지금 내 인생이 과거의 청춘과 무관하지 않게 느껴졌다"고 했다.
"밤하늘의 별빛이 먼 별에서부터 오래전 떠나온 빛이듯, 지금 보이는 나도 결국 과거로부터 온 것이란 생각이 들었죠."
소설은 2017년 예순이 된 유경이 스무 살이었던 1977년을 회상하는 형식이다.
대학 동창이 쓴 소설을 읽은 유경은 자신의 기억과 전혀 다르게 적힌 과거를 보고 혼란에 빠진다.
적당히 편집되고 미화되었던 과거를 냉정히 돌아보게 된다. 은희경은 "과거를 바꿀 수 없다면 우리 인생에 무슨 새로움이 있겠느냐"면서 "하지만 과거를 다르게 해석한다면 지금의 인생도 조금은 새로워질 수 있다"고 했다.
그 시절 데이트 코스였던 음악감상실과 싱어롱 다방, 유행과 미팅 풍속도까지 1970년대의 풍경을 생생히 되살려낸다. 그는 "대학 때 쓴 일기장부터 학보사 기자로 일하며 쓴 노트까지 남아 있어서 쉽게 완성할 줄 알았다"면서 "자료가 많으니까 오히려 이야기에 필요한 것을 가려내기 어려워지더라"고 했다.
2012년 소설 '태연한 인생' 이후 7년 만의 장편이다. 구상부터 완성까지 15년 가까이 걸렸다. 도중에 왼쪽 눈 망막에 구멍이 나기까지 했다.
"이 소설은 나를 너무 오래 혹사했던 애인 같아요. 긴 사랑이 끝나니 나는 또 어떤 새로운 소설과 사랑하게 될까 기대돼요."
"인물 만들기가 가장 어려웠다"고 할 만큼 시대를 반영하는 다양한 인물들이 등장한다.
각자가 지닌 취향과 욕망, 약점으로 입체적인 인물을 빚어낸다.
클래식 기타를 연주하고 카세트 플레이어로 음악을 듣는 의류학과 학생이나 패티김의 '장미와 빤따롱'을 부르는 사자 머리 학생에게 푹 빠져 읽게 된다.
"획일적인 사회였지만 그럼에도 낯선 것에 대한 호기심을 가진 사람들이 있었어요. 당시엔 충격적이었던 패티김의 '미스터 리, 흥분하다'라는 노래도 쓰고 싶었는데! 장황해질까 봐 뺀 것이 많아요."
인생에 대한 단상을 툭툭 던지는 은희경식 문장도 여전하다. '계속해서 다음 권이 출간되는 문제집 시리즈를 풀어가듯 주어진 생을 감당하며 살아왔을 뿐'이라거나 '약점이 있는 사람은 세상을 감지하는 더듬이 하나를 더 가진다' 같은 문장이다.
"정확하고 건조한 문장을 쓰고 싶었어요. 그런데 독자는 오히려 '새의 선물' 같은 초기작처럼 통제하지 않고 쏟아내 주길 바라더라고요. 이번 소설에선 옛날 버릇이 좀 나온 것 같기도 하네요."
친구가 쓴 소설을 다 읽었을 때쯤 주인공은 자신이 인생에서 부딪친 문제를 회피하며 살아왔음을 깨닫는다.
개별 인물들의 이야기엔 독재 정권과 어용 총장, 만연한 성 차별 등 억압적인 시대 분위기가 스며들어 있다.
은희경은 "그 시절 '어쩔 수 없지' 하고 지나쳤던 나 자신에 대한 반성도 담겼다"고 했다.
"지금 사회가 잘못됐다면 방관했거나 도피했던 나의 선택도 한몫했을 거예요. 그걸 받아들일 나이가 됐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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