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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 이전에 그들도 아버지였다

by 한국의산천 2020. 4. 29.


화가 이전에 그들도 아버지였다

정상혁 기자 입력 2020.04.27 03:00

  

풍채 좋고 잘생긴 박수근(1914~1965)은 동네 불문 아낙을 몰고 다닌 인기남, 사람 좋은 술꾼 장욱진(1917~1990)은 유학 시절 시비 붙은 일본인 무리에게 쓰레기통을 집어던지며 맞선 상남자였다? 한국 미술사의 두 거목, 그들의 비화를 두 딸이 동시에 책으로 펴냈다. '내 아버지 박수근'과 '내 아버지 장욱진'. 이 지극히 사적인 평전(評傳)이 가난했고 미숙했으나 정겨웠던 삶의 면모를 드러낸다.


[딸 박인숙이 말하는 박수근]

"동네 불문… 아낙을 몰고 다닌 인기남"

"女心 출렁이게한 미남이었죠
수작부리던 집주인 아주머니, 외삼촌이 목격해 난리나기도"


 


박수근이 큰딸을 그린 ‘독서’(1950년대) 일부.
 

평양서 이사 다니던 무렵, 큰딸 박인숙(76)씨는 외삼촌이 노발대발하던 광경을 잊지 못한다.


"당시 아버지 수입으로는 도저히 살 수 없는 굉장히 좋은 조건의 집"으로 식솔 전부가 옮겨 온 직후였다.

"영문을 들어보니 주인아주머니가 아버지를 남몰래 흠모해 어떻게든 연을 만들어 보고자 수작을 부린 것이다.


마침 야릇하게 안방으로 아버지를 끌어들이는 아주머니를 우연히 현장에서 목격한 외삼촌이 온 집안을 들쑤셔 놓은 것이다."


'나목'으로 대표되는 '국민 화가'로 자주 호명되지만,

딸의 기억 속 박수근은 이사 다닌 동네마다 여심 출렁이게 한 미남자였다.

"동네 아낙들이 어머니더러 우스개로 '미국 사람과 사는 여인'이라 할 정도였다… 전농동 살던 시절에는 이웃한 여인들이 '저런 남자랑 살아 보면 소원이 없겠다'고 수군거리는 게 어머니 귀에까지 들어갈 정도였다."

 

1959년 서울 청진동 집에서 박수근과 아내 김복순 여사, 막내 인애. /도서출판 삼인
 

딸린 가족만 일곱, 쥐꼬리 월급을 초월한 매력의 정체는 "수더분함"이었다. "과묵하고 내성적인 분이다 보니 성품 어딘가에 숨겨진 남성성이 있지는 않을까 기대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자식으로서 지켜보건대, 거칠고 공격적인 면은 거의 없다고 해도 무방하다."


도둑이 들자 아내를 깨워 "도도도도도둑놈이 왔어" 말하며 턱을 덜덜 떨던 겁쟁이, 그러면서도 셋째 아들 태어나던 날 핏물 범벅 수건 더미를 말없이 빨아 오던 남편,

노점의 아낙들이 가여워 똑같은 나물을 사면서도 이쪽서 한 단, 저쪽서 한 단씩 사던 여린 아버지에게서 딸은 "상대방의 숨어 있는 시간과 사연을 보는" 한 인간을 발견한다. "아버지를 통해 '삶'과 '사람'이라는 두 단어가 형태와 쓰임만 다른 같은 단어임을 배운다."


[딸 장경수가 말하는 장욱진]

"학생부에 화백 대신 자유업이라 썼죠"

"화백이라는 단어 질색했지만 '집 가' 들어간 화가는 좋아하셔
속정 깊고 잔정 많으셨던 분"


 

장욱진의 단출함을 보여 주는 ‘부엌’(1973).
 

"아버지, 학생기록부에 직업을 '화가'라고 쓸까요?" 중학생이던 큰딸 장경수(75)씨의 질문에 그는 아무 말 없이 웃기만 했다. "나는 고민 끝에 아버지의 직업을 '자유업'이라 써서 냈다." 평생 단출함의 미학을 추구했던 장욱진은 생활에서도 오로지 그림뿐이었다.


서울대 교수직 봉급은 제자들 술값으로 다 나갔고, 경제관념은 전혀 없었다. 대신 아내가 서점을 운영하며 다섯 자식을 건사했다. "아버지는 생활인이 아니라 처음부터 끝까지 자유로워야 하는 그림 그리는 사람"이었다.


순둥이였으나, 일본에 대해선 의외의 강단을 보였다고 한다. 고교 재학 당시, 일본인 역사 교사에게 반발해 걸상을 들고 서 있는 벌을 받다가 걸상으로 교사를 쳤다는 이유로 퇴학(자퇴 처리)을 당했다.

이후 일본서 대학을 다녔지만 식민지 시절에 대한 울분 탓에 술집서 객기를 부리기도 했고, 귀국 후 다신 일본에 가지 않았다.

"어머니가 일본 온천 여행을 하고 싶다 하셨지만 아버지는 말씀을 안 하셨다. 그래서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다음 내가 어머니를 모시고 일본 온천 여행을 갔다." 다만 우동이나 소바는 좋아했는데 "일본은 싫어하시면서 왜 일본 국수는 좋아하세요?"라고 물으면, 아버지는 또 대답 대신 웃었다.

 

경기도 덕소 시절(1963~1975) 화실의 장욱진과 아내 이순경 여사. /도서출판 삼인
 

대낮에도 술을 달고 살아 폐인으로 오해받는 일이 잦았지만 끝내 천진했고 가족을 끔찍이 위했다. '화백'  이라는 단어는 질색해도 집 가(家)가 들어간 '화가'는 좋아했다. 첫 아이를 낳았을 때, 장욱진은 큰딸의 손을 주무르며 말했다. "경수야, 힘들었지? 이제 그만 낳아라." 그 목소리 덕에 "속정 깊고 잔정 많은 우리 아버지"의 말씀은 잊히지 않는다. "나는 누구보다 나의 가족을 사랑한다. 그 사랑이 다만 그림을 통해서 서로 이해된다는 사실이 다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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