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이 안 써질 때마다 등단작 '나목'을 펼쳤다
백수진 기자 입력 2020.01.29 03:00
소설가 박완서 9주기 맞아 서문 모음집·오디오북 등 출간
박완서 작가/문학동네
"자신의 20년 전 처녀작을 읽으면서 절절한 애틋함에 눈시울을 적시는 늙은 작가―이건 아무리 좋게 봐주려도 궁상과 비참의 극치라고 생각하면서도 어쩔 수가 없었다."
박완서(1931~2011·사진)는 장편소설 '나목'의 개정판 서문에서 "이 작품에 대한 나의 애착은 편애에 가깝다"고 썼다. 글이 안 써질 때마다 등단작인 '나목'을 다시 펴본다며 "느지막이 사십 세에 썼지만 이십 세 미만의 젊고 착하고 순수한 마음으로 썼다고 기억된다"고 했다.
타계 9주기를 맞아 서문 모음집인 '프롤로그 에필로그 박완서의 모든 책'(작가정신)이 출간됐다. 작가가 썼던 소설·산문·동화의 서문에 실린 '작가의 말' 67편을 연대순으로 정리했다. 작품을 쓴 계기부터 독자에게 전하고 싶은 말, 신문에 연재하며 "여자들을 왜 불행하게 하느냐"는 항의를 받은 사연들이 담겼다.
6·25 전쟁의 참혹했던 경험을 소설에 반복해서 묘사한 이유도 서문에 드러난다. 소설 '목마른 계절'의 서문에서는 "6·25의 기억만은 좀처럼 원거리로 물러나 주지 않는다"며 "아직도 부스럼 딱지처럼 붙이고 산다"고 썼다. "나의 부스럼 딱지가 개인적인 질병이 아닌, 한 시대의 상흔일진대, 그대로의 모습으로 독자와 만나자는 것도 아주 뜻 없는 일만은 아니겠거니 싶어서이다."
문학과지성사에서는 박완서의 작품집 '복원되지 못한 것들을 위하여'를 출간했다.
초기작 '도둑맞은 가난'과 '겨울 나들이'부터 6·25 전쟁을 견뎌낸 여성들의 이야기 '공항에서 만난 사람', 인민군 동생을 삽으로 쳐 죽이는 골육상잔의 비극 '빨갱이 바이러스' 등 10편의 중·단편을 실었다.
편집을 맡은 손유경 서울대 국어국문학과 교수는 "가족이나 지인의 죽음을 가까이에서 지켜본 '살아남은 자'라는 정체성이 박완서의 삶과 글을 이해하는 결정적 단서"라며 "생을 지속시키는 힘에 대한 탐구에 몰두한 작가"라고 해설했다.
문학동네에선 9주기를 맞아 박완서 단편소설 전집을 오디오북으로 만든다. 아나운서들 목소리로 97편에 달하는 작품을 낭독해 네이버 오디오클립에 출시한다. 작가의 대표 중단편을 모은 '대범한 밥상'도 새 표지를 입혀 한정판으로 출간했다.
후배 작가들의 애정 어린 고백도 이어졌다. 최은영은 서문집에서 "선생님의 말씀을 읽으며 강한 사람이란 모든 일을 대수롭지 않게 넘겨버 리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경험을 피하지 않고 그대로 느끼며 통과하고 기어이 기억하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했다"고 썼다.
정이현은 "선생님이 여기 계시지 않는다는 사실을 실감하지 못할 때도 있었다"며 "선생님의 글은 시대가 바뀌고 시대정신이 달라져도 여전히 생생하고 강력한 흡인력으로 독자를 끌어당겨 다른 생각 할 틈을 주지 않으니까"라고 그리움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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