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바퀴에 스치는 바람 스물아홉번째 이야기 2
유월의 첫날
바람이 살랑 살랑 부는 하늘색 고운 토요일
심도기행 철종외가 가는 길 2
철종외가 가는 길 1편보기 >>> http://blog.daum.net/koreasan/15606889
유월의 언덕
- 노 천 명
아카시아꽃 핀 유월의 하늘은
사뭇 곱기만 한데
파라솔을 접듯이
마음을 접고 안으로 안으로만 들다
이 인파 속에서 고독이
곧 얼음모양 꼿꼿이 얼어 들어옴은
어쩐 까닭이뇨
보리밭엔 양귀비꽃이 으스러지게 고운데
이른 아침부터 밤이 이슥토록
이야기 해볼 사람은 없어
파라솔을 접듯이
마음을 접어 가지고 안으로만 들다
장미가 말을 배우지 않은 이유를 알겠다.
사슴이 말을 하지 않는 연유도 알아듣겠다.
아카시아꽃 핀 유월의 언덕은
곱기만 한데.
6월의 기도
- 안 성 란
어둠의 터널에 빛을 주시고
메마른 가지에 이슬을 주시어
마르지 않는 샘물처럼
흐르는 맑은 물과 같은 사람이 되게 하소서
온종일 지친 어깨
삶의 흔적 후회의 그늘을 만들기보다
빛 가운데로 걷는
자신감 넘치는 발길을 주시고
향기없는 꽃이지만
입에서 흐르는
고운 향내로 따뜻한 마음을 주소서
소리없이 사라지는 먼지같은 인생에
반쪽의 흔적을 소중히 여기게 하시고
자신을 향해서 크게 웃는
마르지 않는 기쁨을 주소서
한 사람의 사랑으로
수없이 많은 이들의 미움을 버리게 하시고
두 손에 거머쥔 행복을 소중히 여겨
절대로 놓치지 않는 세월로
인생도 삶도 사랑도 귀중함을 알게 하소서
사랑받기 보다 사랑하는 마음을 주시고
세상을 한탄하며
시들어 버리는 꽃이 되지 않게 하소서
45. 선원사(禪源寺126)*)
- 화남(華南) 고재형(高在亨)
禪源古寺問阿誰 선원사 옛 절을 누구에게 물어보나,
流水桃花處處疑 시냇물에 복사꽃 떠오는 곳곳마다 의심 가네.
寂矣半千龕月影 적막토다 오백불상 달그림자 속에 들고,
黃金銷盡碧蘿垂 황금불상 다 녹아서 푸른 덩굴 드리웠네.
○ 선원사(禪源寺)는 지금의 선원리(仙源里)에 있다. 고려 고종 때 술사(術士)의 말을 따라서 절을 지었다. 최우(崔瑀)127)가 매우 장엄하고 화려하게 꾸몄으므로 ʻ반천선감(半千禪龕)ʼ128)이라고도 하였다.
126) 고려시대 강화도읍기 당시 최고집권자 최우(崔瑀)가 강화도에 세운 절. 무인정권과 관련이 있던 정혜결사의 송광사 스님들이 주로 주석하였다. 충렬왕이 피난을 하기도 했으며, 실록을 보관하는 등 국가적 비중이 컸던 절이다.
127) 최우(?∼1249) 고려 무신정권의 집권자. 본관은 우봉(牛峰). 뒤에 이(怡)로 개명하였다. 아버지는 충헌(忠獻)'선(禪)'을 '선(仙)'으로 바꿔 지명이 되었으므로 당시에 무엇을 숭상하였는가를 알 수가 있다. 지금은 폐지되었으며 여전히 옛 터가 전해지지만 넝쿨 숲만이 무성할 뿐이다.
21. 냉정동(冷井洞62)) 충렬사(忠烈祠)
- 화남(華南) 고재형(高在亨 1846-1916)
壽嶺東南冷井流 숫고개(壽嶺)의 동남쪽엔 찬우물이 흐르는데,
居人於此闢田疇 주민들 이곳에서 전답을 개간했네.
鄭金二雅知幽趣 정씨와 김씨가 고상함을 알아서,
時與前村野老遊 수시로 앞마을 노인들과 교유하며 지냈네.
○ 고개의 길가에 우물이 있는데 매우 차가왔기 때문에 동네 이름이 냉정(冷井)이 되었다. 경주(慶州) 정(鄭)씨 추만(秋巒) 정지운(鄭之雲)63) 후손인 참의공(參議公)의 손자와 안동(安東) 김씨 선원(仙源)김상용(金尙容)의 후손 김씨가 거주하고 있다.
철종외가는 조선 철종(재위 1849∼1863)의 외숙인 염보길이 살던 집이다.
철종 4년(1853)에 지은 이 건물은 원래 안채와 사랑채를 좌우로 두고 H자형 배치를 취하고 있었으나, 행랑채 일부가 헐려 지금은 ㄷ자 모양의 몸채만 남아 있다.
사랑채와 안채가 一자형으로 연결되어 있고 안(안채)과 밖(사랑채)의 공간을 작은 담장으로 간단히 분리하였다.
규모는 작으나 예스럽고 우아한 아름다움이 묻어나는 건물이다.
▲ 철종외가 (인천광역시 강화군 선원면 냉정리 246번지)
철존외가(哲宗外家)는 인천광역시 강화군 선원면 냉정리에 있는 조선시대의 건축물로서 1995년 3월 1일 인천광역시의 문화재자료 제8호로 지정되었다.
사도세자의 증손인 철종이 강화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은 할아버지 은언군 때부터다. 은언군의 장남 상계군이 홍국영의 모반죄로 몰려 유폐 당한 후 음독자살하였다. 이 사건으로 그 일가족 모두가 강화로 유배되었다. 여기서 부인 송씨와 며느리 신씨는 세례를 받고 천주교 신자가 되었다. 이로 인해 신유박해 때 은언군은 부인·며느리와 함께 사약을 받고 사사되었다.
강화에는 은언군의 차남인 전계군만 홀로 남게 되었다. 그에게는 부인 최씨와 염씨·이씨 2명의 첩이 있었다. 철종의 어머니 용담염씨(龍潭廉氏)는 강화 출신이다. 전계군은 순조의 특명으로 유배에서 방면되어 도성에서 거주하게 되었다. 이때 철종(1831~1863)이 태어났는데 초명은 원범이었다. 철종이 11세 때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 그런데 민지용에 의해 이복형 원경을 왕으로 추대하려는 역모사건이 일어났다. 이 바람에 원경은 사사되고 이씨 소생의 형 경응과 함께 강화도로 유배되었다. 원범의 나이 14살 때였다.
이처럼 철종은 세간에 알려진 것처럼 강화에서 태어나지 않았다. 어머니 염씨(1793~1863)와 함께 살았기 때문에 천애고아도 아니었다. 또 나무나 하는 무지렁이도 아니었다. 무식한 강화도령으로 알려진 것은 당시 권력자들이 철종의 미천한 신분을 강조하기 위해서였던 것 같다. 철종이 강화에 산 기간은 불과 5년이다. 지금의 강화읍 관청리 소재 용흥궁은 아버지 전계대원군이 유배 당시 살았던 곳이다. 그는 자주 냉정리에 있는 외가에 들렸다. 외가는 매헌서당(梅軒書堂) 현판이 있는 것으로 보아 서당을 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외삼촌 염보길에게서 글도 배웠을 것이다. 또 강화집과 외가 중간에 있는 찬우물 가에서 양순이(봉이)를 만나 사랑에 빠지기도 했다.
제24대 왕인 헌종이 23세의 젊은 나이로 후사 없이 죽었다. 그러자 후대 왕을 누구로 할 것인가를 놓고 안동김씨와 풍양조씨 집안 간에 각축이 벌어졌다. 풍양조씨는 흥선대원군의 형인 이하전을 염두에 두었다. 그러나 안동김씨는 원범을 택하였다. 왕실의 최고 어른인 대왕대비 순원왕후 김씨는 원범을 자신의 양자로 삼아 왕으로 지명하였다. 철종의 나이 19살 때다. 14살에 강화에 왔으니 5년 만에 왕이 되어 돌아간 것이다.
오색 깃발 휘날리며 자신을 모시러 온 영의정을 보고 땅에 엎드려 사또님 살려달라고 울먹인 천애 고아 강화도령 원범이 강화도 처녀 봉이와 뛰어놀며 사랑을 나눈 사연이 굽이굽이 묻어나는 길이다.
짧은 학문과 얕은 경륜에 대한 자격지심, 세도 정치가들 때문에 왕 노릇도 제대로 못 한 비운의 왕, 짧은 재위기간 내내 강화도의 산천과 정인 봉이 생각으로 가슴앓이 하다.
33세라는 젊은 나이로 병사한 원범이 봉이와 나란히 거닐며 소곤소곤 정담을 나누는 소리가 들리는듯해 발걸음이 조심스럽다.
구중궁궐에 머문들 마음이 지옥인데, 농사짓고 나무나 하면서 무지렁이 총각 원범으로 살았다면 그렇게 단명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을 내내 떨쳐 버릴 수 없는 애틋한 사랑의 길이다.
조선 제25대 왕 철종[1831.6.17(19세)~1863.12.8(33세) 제위기간 14년 6개월]
이광의 셋째 아들.
초명 : 이원범
휘 : 이변
별호: 자[도승(道升)], 호(대용재(大勇齋))
묘호: 철종 (哲宗)
존호: 희륜정극수덕순성흠명광도돈원창화 (熙倫正極粹德純聖欽命光道敦元彰化)
시호: 충경 문현무성헌인영효대왕(忠敬 文顯武成獻仁英孝大王) (조선), 문현무성헌인영효장황제 (文顯武成獻仁英孝成章皇帝)(대한제국)
능호: 예릉 (睿陵)
철종(哲宗, 1831년 7월 25일(음력 6월 17일) ~ 1864년 1월 16일(1863년 음력 12월 8일)은 조선의 제25대 왕이자 대한제국 추존황제이다.
추존 군주 장조의황제의 서자였던 은언군의 서손자이자 전계대원군 이광의 셋째 아들이다. 한성부에서 태어났으나 은언군과 상계군 사건과 이복 형 원경의 옥사로 교동도와 강화도로 유배지가 옮겨진 뒤 왕족으로서의 예우를 박탈당하고 평민처럼 생활하였다. 그 뒤 농업과 나무꾼, 행상으로 살던 중 순원왕후의 명으로 덕완군에 봉해진 뒤, 종숙부 순조의 양자 자격으로 왕위를 이었다.
초명은 이원범(李元範), 휘는 이변(李昪),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도승(道升), 별칭은 강화도령, 호는 대용재(大勇齋)이며, 사후 시호는 철종희륜정극수덕순성문현무성헌인영효대왕(哲宗熙倫正極粹德純聖文顯武成獻仁英孝大王)이며 이후 대한제국이 성립된 1908년(융희 1년)에 장황제(章皇帝)로 추존하여 정식 시호는 철종희륜정극수덕순성흠명광도돈원창화문현무성헌인영효장황제(哲宗熙倫正極粹德純聖欽明光道敦元彰化文顯武成獻仁英孝章皇帝)이다. 그가 서출인데다가 강화도로 유배간 후 나무꾼으로 있다가 왕실의 정통성을 지키기 위해 안동김씨 세력들에 의해 왕이 되었다 하여 재위기간 중 반가에서는 그를 강화도령이라 조롱하였고 이는 곧 그의 별명으로 굳어지기도 했다.
1858년 그에게는 유일한 적장자 이융준이 태어났지만 6개월 만에 사망한다. 후궁들에게서 본 서자들은 태어나자마자 바로 사망하였고, 이듬해 태어난 서녀 영혜옹주는 14세에 사망하여 그의 후손은 단절되었다.
철종이 왕이 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당시 순조, 익종(문조), 헌종과 가장 촌수가 가까우면서(종법상 헌종과 7촌) 아직 장가를 가지 않은 종친이기 때문이다.
이는 양자를 들이는 데 있어 당시의 관습이다. 흥선군 이하응은 할아버지 은신군과 아버지 남연군이 모두 양자로 계보를 이었기 때문에 족보상으로는 헌종과 11촌이 되며,(사도세자의 후손으로 보면 철종과 같은 촌수) 헌종 승하 당시 결혼하여 아들(이재면)을 두고 있는 상태였다. (오히려 이재면이 왕위 계승에 가까웠다).
이하전은 족보상 헌종과 27촌이다. 고종이 왕위에 오를 때에도 큰아들 이재면은 결혼한 상태이기 때문에 결혼 전인 둘째 이명복이 익종의 양자로 들어가 왕위를 잇게 된다.
한 시절 만나 꽃잎처럼 스러진 철종과 봉이
그들의 사랑은 한낱 허깨비같은 꿈이었어라
비운의 왕 철종이 사랑한 유일한 여인, 봉이. 그는 철종의 정인이라는 이유로 끝내 죽임을 당한다. 자객의 독화살을 맞고 피를 토하며 죽어가는 봉이를, 그에게 향을 만드는 방법을 알려준 스승 지명 선사가 등에 업고 혜각사 대웅전 앞뜰에 당도했다.
죽어가는 봉이와 선사의 대화는 참으로 눈물겹다. 채 피어나지도 못한 채 사랑하는 사람을 구중궁궐로 떠나보내고 정인이 왕이 되었다는 이유로 끝내 생을 마감하는 봉이와 나누는 대화는 그대로가 한 편의 절절한 법문이다.
자신이 만든 향을 전하께 전해달라며 지명 선사와 나누는 대화는 가슴을 먹먹하게 한다. 지명 선사는 봉이와 강화도령 철종의 스승이자, 철종이 왕이 된 후에는 왕사와 같은 역할을 했던 스님이다.
“전… 전하 꿈속에… 나타나지 않을 거예요. 제가… 꿈속에 나타나면… 전하는 슬픔 속에서 벗어나지… 못할 거예요. 전하가 빨리 잊고… 성군이 되시기를….”
“분명 그리되실 게다!”
“다시는… 세상에 태어나고 싶지 않아요.”
“넌 선업을 많이 쌓아 윤회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부디 이번 생의 몸이 마지막 몸이 되어라. 니르바나로 들어가 해탈하여라.”
“그 말… 다시 듣고 싶어요. 인생은….”
“연꽃잎에 내리는 빗방울과 같다…. 인생은 연꽃잎에 내리는 빗방울과 같다….”
선사는 봉이와 이렇게 마지막 대화를 나누고는 숨이 끊어진 봉이를 업고 탑돌이를 멈추지 못한다.
조선 역사상 가장 슬픈 운명을 타고난 비운의 왕 인간 철종의 숨겨진 사랑과 비극적 삶을 그린 소설 <이몽(異夢)>(전2권, 은행나무 펴냄)중에서
255. 곶내동(串內洞536))
- 화남(華南) 고재형(高在亨)
世世崔居串內洞 곶내동에 대대로 살고 있는 최씨 가문,
童蒙敎授兩旌門 동몽교수 그 집안에 정려문이 두 개 섰네.
朝耕暮讀承承業 아침 밭갈이 저녁 독서가 대를 이은 가업이라,
勉使兒孫覺有源 자손들에게 연원이 있음을 깨닫도록 면려한다네.
○ 불은면 고릉리 아침가리마을.
곶내동(串內洞)은 작은 지명으로 조경리(朝耕里)이다. 최사과(崔司果)의 가문이 한 마을을 이루었는데 그 고조, 5대조는 일찍이 효행으로써 정려문을 내려받았다.
강화도 인정면(仁政面1)
1. 두두미동(斗頭尾洞2)
- 화남 고재형(高在亨)
斗頭我步帶春風 봄바람 맞으며 두두미를 걷노라니,
一府山川兩眼中 온 마을의 산과 내가 한 눈에 들어오네.
明月綠楊諸具榻 밝은 달 푸른 버들 여러 구(具)씨 탁상에서,
滿杯麯味使人雄 잔 가득한 술맛이 힘을 내게 하는구나.
○ 두두미동(斗頭尾洞)은 강화부 관아로부터 남쪽으로 20리 떨어진 곳에 있으며 인정면(仁政面)에 속한다. 우리 집안이 대대로 살아 온 곳이다. 병오년(1906) 봄에 내가 비록 병이 있는 몸이지만 강화부 전체의 산천을 다시 관람하면서 고적을 살펴보기 위해 길을 떠났다.
3) 옛날부터 전해오는 이야기를 따라 걸음을 옮겼으니, 두두미를 출발하여 다시 두두미로 돌아오려는 계획이었다. 오랫동안 사귄 친구 구(具) 씨 집에서 술을 몇 잔 마신 후에 서쪽을 향하여 길을 떠났다.
○ 구씨 친구는 능성(綾城)의 세족(世族)으로, 문과(文科)를 거쳐 한림 전랑과 대각을 역임한 강암공(江菴公) 구강(具綱)4)의 후손이다.강암공은 판안동공(判安東公) 구성량(具成亮)5)의 아들이다.
1) 인정면(仁政面)은 두두미동을 비롯하여 백운동, 삼동암동, 서문동, 마장동, 석성동 등이 속해 있었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불은면에 통합되었다.
2) 두두미동(斗頭尾洞)은 현재의 두운1리이다. 두두미동의 ʻ두ʼ자와 백운동의 ʻ운ʼ자를 합하여 1914년부터 두운리라 하였다. 두도미라고도 한다.
3) 저자 화남 고재형(高在亨 1846∼1916)선생은 제주고씨로 1888년(고종25)에 식년시(式年試) 진사(進士) 3등에 합격하였으며 관직에 나아가지는 안았다. 아버지 고창환(高昶煥)은 행용양위부호군(行龍驤衛副護軍)을 지냈다. 대대로 강화군 불은면 두운리 두두미 마을에 살았다.
256. 두두촌(斗頭村*)
- 화남 고재형(高在亨)
四月淸風返舊居 4월의 맑은 바람 맞으며 옛집에 돌아오니,
終頭至尾摠如如 머리(頭)부터 꼬리(尾)까지 모두가 한결같네.
倚窓坐讀江都賦 창가에 기대 앉아 강도부를 읽다가,
呼覓楮毛更一書 종이와 붓을 가져다가 다시 글을 쓰노라.
○ 내가 두두촌(斗頭村)에서 시작하여 강화부의 산천과 고적을 관람한 후에 다시 두두미(斗頭尾)로 돌아왔으므로 머리부터 꼬리까지였다고 할 수가 있다. 닥나무(楮)와 털(毛)은 곧 종이와 붓을 말한다.
철종외가 가는 길 1편보기 >>> http://blog.daum.net/koreasan/15606889
'스치는 바람' 카테고리의 다른 글
두 바퀴에 스치는 바람 30 교동도 라이딩 2 (0) | 2019.06.22 |
---|---|
두 바퀴에 스치는 바람 29 심도기행 철종외가 가는 길 1 (0) | 2019.06.01 |
두 바퀴에 스치는 바람 28 심도기행 안파루 남장대 첨화루 강화향교 선원비각 연무당 민진원송덕비 (0) | 2019.05.18 |
두 바퀴에 스치는 바람 28 심도기행 고려궁지 외규장각 진송루 망한루 (0) | 2019.05.18 |
두 바퀴에 스치는 바람 27 강화 나들길 6코스 화남생가 가는 길 선원사지 남산대 (0) | 2019.05.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