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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거친호흡 몰아쉬며 ^^ 굽이치는 산맥넘어 손의 자유, 발의 자유, 정신의 자유를 찾는다. 기억은 희미해지기에 이곳에 기록을 남긴다
MTB등산여행

면천읍성 돌아보기

by 한국의산천 2019. 5. 1.

당진 면천읍성 

 

개심사 가는 길에 중간에 면천읍성을 둘러보았다

요즘 성벽 일부를 복원하는 작업이 진행되고 있었다

군자정 주변에는 겹벚꽃이 만개하였다


▲ 면천읍성 ⓒ 2019  한국의산천


면천읍성

위치 충청남도 당진군 면천면 성상리에 있는 조선시대의 성.
충남기념물 제91호

분류 성지(성곽)
지정연도 1993년 12월 31일
소재지 충남 당진군 면천면 성상리 821-6 외 9필.

 

조선시대 초기에 쌓은 전형적인 평지 읍성으로,

기록에 따르면 성의 둘레는 3,235자(약 986m), 높이는 15자(약 4.5m)이고

적대(敵臺 :망루)가 7곳, 문이 3곳, 옹성(甕城)이 1곳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면천은 문화유산을 면면히 이어와 국가지정 보물 제409호인 영탑사 금동삼존불과

도지정 유형문화재인 영탑사약사여래상을 비롯해 기념물인 면천 은행나무,

면천읍성은 그 웅장함을 과시하고 문화재로는 면천향교, 영탑사법종, 영탑사 7층 석탑,

풍악루(豊樂樓)와 골정지(骨井池)의 건곤일초정(乾坤一艸亭)등이 있어

문화유산의 가치를 한층 높여 당진군의 역사를 입증하고 있다






면천은 일제시대까지만 해도 당진에 맞먹는 중요한 지방행정의 중심지였다.

예당(예산과 당진)평야의 중심에 있어 당진, 신창, 덕산, 예산을 잇는 교통의 요지였다.



조선실록 등의 문헌을 면밀히 살펴보면 조선 세종21년(기미년)조에 쌓은 성이다.
지금은 버스정류장 앞에서 면천시장 남쪽입구 부근까지만 돌성으로 약간 남아있고

나머지 부분은 토성 형태로 남아있으며 현재 복구중이다.
성둘레는 900m에서 1㎞정도가 된다.

면천읍성은 조선초에 많이 쌓은 평지성의 전형적인 형태라는 점에서 귀중한 유적이라 할 수 있다.  



면천읍성(唐津沔川邑城)

충청남도 기념물 제91호 .


당진군 면천면 성상리 781번지 외에 위치하고 있으며, 평면이 원형에 가까운 평지성으로서 면천면 소재지의 거의 전역에 해당되고 있다.

북으로는 배후에 몽산성(일명 면천산성)을 두고 있으며, 남쪽으로는 일부 경작지가 형성되어 있고 ‘순원저수지’가 위치하고 있다.

이 읍성의 둘레는 약 1,568m로 성석이 많이 유실되었으나, 그 성체는 비교적 잘 남아 있는 편이다.


현재 서벽과 남벽의 보존상태가 그 중 양호한 편인데, 서벽의 경우 높이가 3.6m로 계측된다.

지대석은 지대석 받침과 면을 맞추어서 155×60㎝, 95×60㎝, 107×72㎝, 100×47㎝의 대형 석괴를 치석하여 구축하고

기단석부터는 지대석에서 20㎝ 정도 물려서 네모막돌바른층쌓기수법으로 축조하였으며 쐐기돌로 틈 사이를 메웠다.

이 서벽의 내탁부는 토사로 다져서 경사면을 이루고 있는데 기저부 너비는 6.8m이고, 상부 너비는 2.4m이다.


동벽은 풍화암반을 깎아내고 석괴를 내탁하여 축조한 듯하나, 현재는 성석이 유실되어 토성같이 보이고 있으며

높이가 3.3m, 상부 폭이 4.4m이다. 동문지 부근은 파괴가 심하여 성체 자체를 찾기 힘들 정도이다.

북벽은 거의 면천초등학교 뒷담으로 이용되고 있는데 성석은 대부분 유실된 상태이고 높이가 2.9m, 상부 폭이 2.5m이다.


성문에 관하여 『동국여지지(東國與地志)』에는 오직 남문 1개소만을 개설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으며,

『여지도서(輿地圖書)』에는 동·서·남문 3개소에 시설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어 문지는 3개소이었을 것으로 보이나,

현재에는 남문지만이 잔존하고 있다.


남문지는 반원형 편문식 옹성으로 문폭은 8.8m인데

남문지의 서쪽측벽에서 1.1m의 거리에서부터 길이 15.7m, 너비 3.5m, 높이 3.1m의 옹성이 동주하여 시설되어 있다.

그러나 옹성부근이 잘 남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무분별하게 민가가 자리 잡고 있어 원형이 훼손될 위기에 처해 있다.


한편 북벽 밖으로 흐르고 있는 소류가 성내로 연결되고 있는데, 북벽과 소류천이 교차되는 부분은 성벽이 끊어져 있다.

그러나 부근에는 매우 큰 성석이 흩어져 있어 수문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서벽에는 평면이 7.1×9.5m인 치성이 있으며, 서북모서리에도 치성이 남아 있는데 평면이 7.5×7.2m이고 높이가 3.2m인데 파괴가 심하다.

동북 모서리의 치성은 성석이 거의 유실된 상태이다. 성내 시설물로는 연못이 있는데 문헌에 나타나는 군자지로 추측된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면천현 고적조에는 객사 앞에 있는 군자지를 비롯하여

군 남쪽 1리 지점의 구준대와 군 동쪽 1리지점의 강구정, 군 서쪽 1리 지점의 치의당을 지군사 곽충룡이 이룩해 놓은 것이라 하고 있는데,

곽충룡은 공민왕 7년에 이 지역에 침입한 왜구와 싸워 적선 2척을 획득한 공이 있는 인물로, 성내의 시설 중 일부가 고려말에 이루어진 것임을 짐작케 한다.


읍성에 관한 기록으로는『문종실록(文宗實錄)』원년 9월 경자조에 “성 둘레가 3,225척이고,

높이가 11척, 여장의 높이가 3척이며, 적대는 7개소에 있으며, 문은 3개소인데 그 중 2개소는 옹성이 아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여장은 56, 우물이 3곳에 있으며, 해자는 혹은 판 곳도 있고 파지 않은 곳도 있다고 하였다.

성 둘레 3,225척은 세종대의 포백척의 기준치인 46.73㎝를 적용할 경우 약 1,507m로 환산된다.


출처 : 국립 문화재 연구소/ 한국의 읍성연구(심정보, 학연문화사, 1995)

















▲ 면천읍성 축조 실명제 ⓒ 2019 한국의산천

 

지금은 서쪽 성벽 일부의 성돌만이 남아 있으며,

성돌에 기미년(己未年)이라 새겨져 있는 것과 1439년(세종 21)에 이 성을 쌓았다는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으로 미루어, 성돌에 새겨진 기미년은 이 성을 쌓은 연대임을 알 수 있다.

현재 면천사무소, 보건지소, 노인정, 면천초등학교 등을 둘러싸고 있다. 조선시대 관방 시설 연구의 귀중한 자료이다. 


▲ 면천읍성의 시면석. ⓒ 2019 한국의산천

기미년에 4치 크기의 돌로 길이 6천자의 성을 쌓기 시작한 면이라는 뜻으로

마을별로 쌓아야되는 성의 길이가 있어서

어느 구간에 어느 마을 사람들이 쌓았는지 알 수 있었다 전한다.   









사람은 사랑한 만큼 산다

                  

                    - 박 용 재


사람은 사랑한 만큼 산다
저 향기로운 꽃들을 사랑한 만큼 산다
저 아름다운 목소리의 새들을 사랑한 만큼 산다.

숲을 온통 싱그러움으로 만드는
나무들은 사랑한 만큼 산다


사람은 사랑한 만큼 산다.
이글거리는 붉은 태양을 사랑한 만큼 산다
외로움에 젖은 낮 달을 사랑한 만큼 산다.
밤하늘의 별들을 사랑한 만큼 산다.


사람은 사랑한 만큼 산다
홀로 저문 길을 아스라이 걸어가는
봄, 여름, 가을, 겨울의 나그네를 사랑한 만큼 산다


예기치 않은 운명에 몸부림치는 생애를 사랑한 만큼 산다
사람은 그 무언가를 사랑한 부피와 넓이와 깊이만큼 산다
그 만큼이 인생이다


출처 박용재 시집 <사람은 사랑한 만큼 산다> 中에서


▲ 군자정 ⓒ 2019  한국의산천

 

군자정은 고려 공민왕때 읍성 객사옆에 지은 정자로 1800년대 후반에 나온 면천읍지에 계해년(1863)년에 새로 지었다고 나와있다.

그리고 같은 문헌의 누정시기를 보면 <군자정기>가 있는데 이에 따르면 1863년 당시의 면천군수 유한재가 피폐해진 군자지를 보수하면서 못가운데 둥글게 섬을 만들고 그 위에 8각의 정자를 짓고 못에 연꽃을 심고 고기를 넣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뒤 다시 허물어져 주춧돌만 남았는데 면천복씨 종친회장 복진구가 원래의 주춧돌을 그대로 둔채 규모를 축소하여 6모종을 지었는데 그것도 퇴락하여 1994년 당진군에서 6모정을 헐고 8모정으로 다시 지었다.


















계속해서 서산 개심사로 이동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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