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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원군 척화비와 이와쿠라 사절단

by 한국의산천 2019. 4. 20.

 

[박종인의 땅의 歷史] 1871년 조선은 척화비를 세웠고 일본은 근대를 향해 떠났다

조선일보    박종인 여행문화 전문기자 입력 2019.04.10 03:01 

[160] 세상을 바꾼 서기 1543년

⑩대원군 척화비와 이와쿠라 사절단


  
박종인의 땅의 歷史
 
  경상북도 구미 구미국가산업 2단지에는 석현이라는 고개가 있고 그 고개 옆 언덕 잔디밭에는 큰 바위가 있다. 높이 1m75, 너비 1m86이다.

이렇게 적혀 있다.

'洋夷侵犯 非戰則和 主和賣國(양이침범 비전즉화 주화매국·서양 오랑캐가 쳐들어오는데 싸우지 않으면 화평이요, 화평은 즉 매국이다)'.

이 글을 지은 해는 1866년 병인년이고, 비석을 세운 해는 1871년 신미년이다.


  조선이 나라 문을 또 한 번 단속한 바로 그 1871년 일본은 고위 관료로 구성된 근대 견학단을 서양으로 보냈다.

두 달 빠지는 2년 동안 세계를 일주하며 근대 문물을 배 터지게 들이마신 이 사절단 이름은 '이와쿠라사절단(岩倉使節團)'이다.

실세 정치가와 국장급 공무원이 대거 사절단원으로 나가버려 그 2년 동안 정부는 '유수(留守) 정부'라 불렸다.

'남아서 자리 지키고 있는' 정부라는 뜻이다. 기시감(旣視感)이 느껴지지 않는가.

한쪽은 철포(鐵砲)를 받아들이고 한쪽은 그 철포를 거부했던 300년 전 아찔한 장면이.


"글자는 같은 줄 알았네"


  1801년 8월 이국인 5명이 제주에 표류했다. 얼굴과 몸이 모두 검고 말을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해 10월 조정에 말도 글도 안 통해 정체불명이라는 보고가 올라왔다.

수렴청정 중이던 대왕대비 정순왕후가 이리 물었다. "(말만 아니라) 문자(文字)도 다르다고?"(1801년 10월 30일 '순조실록')

자그마치 8년 동안 파악 못 한 정체는 문순득에 의해 밝혀졌다.


▲ 경북 구미 국가산업 2단지 돌고개(석현) 언덕에 서 있는 척화비(斥和碑).

'오랑캐가 침범하는데 싸우지 않으면 화평하는 것이요, 화평은 매국이다'라고 새겨져 있다.

1866년(병인년) 프랑스군이 강화도를 침입했을 때 흥선대원군이 제시한 국정 지표였다.

1871년(신미년) 강화도에서 미 해군을 '격퇴한' 뒤 대원군이 전국 교통 요지에 세웠다.

조선 정부가 척화비를 세운 바로 1871년 일본에서는 미국과 유럽 12개국 근대 문명을 견학하는 이와쿠라 사절단이 요코하마항을 떠났다.

외무부 장관을 단장으로 한 각 부처 국장급 공무원과 유학생 등 107명은 1년 10개월 동안 근대국가를 견학했다.
 
  문순득은 1802년 홍어를 잡으러 나갔다가 표류해 오키나와~필리핀~마카오~북경 경로로 귀국한 흑산도 어민이다.

2년 뒤 그가 귀국했을 때 정약전이 그의 표류기 '표해시말'을 썼다. 이 사실을 정부가 파악하고 표류기에 적힌 여송국(呂宋國·필리핀) 말로 이들을 조사하니

"미친 듯이 바보처럼 정신을 못 차리고 울기도 하고 외치기도 하다가"(1809년 6월 26일 '순조실록') 청나라를 통해 돌아갔다.

8년 만에 귀국했다는 소식에 문순득은 "부끄러워 땀이 솟는다(可愧汗)"라고 했다.('표해시말') 부끄러운 일이 어디 이뿐이었겠는가.


"본디 우리는 외교가 없으니"


  1832년 6월 26일 영국 상선 암허스트호가 공충도(公忠道·충청도) 홍주 고대도에 들어와 통상을 요구했다.

실록에는 이들이 누구며 원하는 바가 뭔지가 육하원칙에 따라 자세하게 기록돼 있다.(1832년 7월 21일 '순조실록')

홍주목사 이민회와 서울에서 온 역관 오계순은 이리 답했다.

"번신은 외교가 없다(藩臣無外交)." 사대(事大)에 근거한 거듭된 통상 거부에 암허스트호는 "글러먹었다(evidently fruitless)"고 결론 내리고 철수했다.

조선 정부가 이 사실을 청 황실에 보고했다.

이듬해 청 황제는 "대의를 크게 밝혀 가상하다"며 번신인 조선 국왕에게 갖가지 비단 30필을 상으로 내렸다.(1833년 양력 2월 14일 '순조실록')


  7년 뒤 아편전쟁이 터졌다. 서양 함대에 대청(大淸) 제국은 발톱도 이빨도 없는 늙은 호랑이임이 폭로됐다.

일본 막부와 각 번은 기민하게 강병(强兵) 모드에 돌입했다.

조선 도공이 자기 가마를 만든 원천 기술로 용광로를 만들어 대포와 군함을 생산했고 국내외로 그릇 팔아 모은 돈을 군비로 투입했다.

조선의 왕과 공무원들은 문순득보다 훨씬 더 땀이 나야 했고, 기민하게 대처해야 옳았다. 그러했는가.


권력 유지를 위한 천주교 탄압


1866년 병인년 1월 11일 좌우 포도청은 '눈은 우묵하게 들어가고 콧마루는 덩실하게 높은' 7척 거인을 체포했다고 조정에 보고했다.

거인 이름은 장경일(張敬一), 밀입국해 선교 중이던 프랑스 외방전교회 신부 베르뇌(Berneux)였다. 그날 이후 1871년까지 8000명 넘는 천주교도가 처형됐다.

 


▲ 신미양요 때 강화도 광성보에서 미군이 노획한 장군 깃발 '수(帥) 자기'. /폴게티박물관
 
  흥선대원군은 원래 천주교를 이용해 당시 두만강을 넘나들던 러시아를 견제하려 했다.

아내 민씨도 천주교도였고, 아들 명복(고종)의 유모 마르타 또한 세례 신도였다.

1864년 양력 8월 18일 베르뇌가 북경 외방전교회 조선교구 주교에게 보낸 편지에 따르면

대원군은 운현궁에서 신도인 전(前) 승지 남종삼을 만나 "러시아인을 몰아내면 종교 자유를 주겠다"고 제안했다.

남종삼이 "수도에 세울 큰 교회 짓는다"며 흥분할 정도였다.(강상규, '대원군의 천주교 탄압에 대한 정치학적 고찰')


그런데 청나라에서 천주교 탄압사건이 발생하고 이를 빌미로 반대원군파가 이의를 제기하자 상황이 돌변했다.

성리학과 노론의 상징인 만동묘를 철폐한 이후(1865년 3월 29일) 권력 집단 틈에 반대원군파가 급증한 터였다.

사학(邪學)인 서학(西學)을 탄압해야 정통성이 회복될 수 있었다. 조선 역사에서 또 한 번 국내 정치가 개방의 기회를 압살한 순간이었다.

남종삼이 첫 타자로 죽었고 전국에서 색출된 프랑스 신부 9명이 목이 잘려 죽었다.

이에 프랑스 함대가 벌인 복수전이 1866년 여름 벌어진 병인양요다.


정신 승리한 병인양요


청나라 조정이 조선에 긴급 전문 '비자(飛咨)'를 보냈다. '프랑스가 곧 군사를 소집할 듯하니 심사숙고하라.'

대원군은 "수만 리 떨어진 프랑스에 누군가가 알려준 것"이라며 천주교도 색출 강화령을 내렸다.(1866년 7월 8일 '고종실록')

9월 11일 프랑스 함대가 강화도에 도착했다. 강화도 순무영이 "도륙되기 전에 돌아가라"고 경고했다.

이날 대원군이 의정부에 글을 내렸다. "화친은 나라를 팔아먹는 행위다(若和親則是賣國也)." 전쟁은 벌어졌고, 강화도는 섬 전역이 불탔다.


프랑스군은 경미한 인적, 물적 피해와 함께 왕실 도서와 은괴를 훔쳐 철수했다.

11월 5일 뒤늦게 두 번째 청나라 비자가 도착했다.

'군사를 일으키겠다는 프랑스 말은 거짓말이 아니다(法國用兵 明知非空言).' 청나라는 겁에 질려 있었다.

2차 아편전쟁(1860) 때 서양연합군에 북경까지 탈탈 털린 터였다.


▲ 1872년 1월 23일 미국 샌프란시스코 사진관에서 촬영한 이와쿠라 사절단 수뇌부(왼쪽).

가운데 대표인 이와쿠라 도모미는 서양 구두에 일본 전통 의상과 상투를 하고 있다.

한 달 뒤인 2월 26일 시카고에 도착한 이와쿠라는 상투와 전통 복장을 버렸다(오른쪽).

근대가 던진 충격이었다. 메이지 정부의 실세들로 구성된 이와쿠라 사절단은 1년 10개월 동안 12개국을 순방하며 부국강병의 각론(各論)을 배웠다.
 
조선은 승리했다! 순조 때처럼 비단 포상은 못 받았지만, 조선은 '어떤 곤란에도 서양 오랑캐에게 문을 열지 않겠다'고 답했다.

그리고 아주, 아주 많이 대국(大國)스러운 행동을 했다.


"일본이여 서양 조심하시게"


"서양 배 30여 척이 백성을 살해하고 책들을 약탈해 갔다. 여러 성을 습격했는데 성을 지키는 장수들에 의해 격퇴당했다. 저 오랑캐들이 장차 사달을 일으키려는 것이다."(1866년 10월 15일 '고종실록') 양요 종료 사흘 뒤 조선 정부가 일본 막부에 보낸 전문이다. 1811년 끝난 통신사 외교 이후 55년 만에 이뤄진 공식 통보였다. 전문이 이렇게 이어졌다.


"귀국은 방비를 갖추고 변란에 대처하고 있는가(貴國 設備而待變歟)?"


부끄럽고 땀이 솟구치는 질문이었다.

이미 12년 전 일본이 개항했다는 사실도, 대포와 군함으로 무장한 사실도, 미국과 유럽으로 청년들이 집단으로 유학을 간 사실도 조선 수뇌부는 모르고 있었다.


1871년 미국 함대가 통상을 요구하다 강화도에 포격을 하고 돌아갔다.

섬에는 '9인치 포에 맞아 숯처럼 타버렸거나 흰옷 위로 선혈 낭자한 200여 조선 병사 시신이 흩어져 있었다.'(1871년 6월 27일 미 해군 대위 매클레인 틸턴이 아내에게 보낸 편지)

미국은 개항에 실패했고 조선은 쇄국에 성공했다. 조선의 정신 승리였다.

전투가 한창인 어느 날 조선 정부는 전국 교통 요지에 5년 전 대원군이 선언한 척화의 뜻을 새겨 비석을 세우도록 지시했다. 그날이 1871년 음력 4월 25일이다.


7개월 뒤인 11월 12일(양력 12월 23일) 일본 요코하마항에서 미국 국적 화륜선 아메리카호가 샌프란시스코로 출발했다.

배에는 외무대신 이와쿠라 도모미(岩倉具視)를 비롯한 고위 관료와 유학생 107명이 타고 있었다.

그때 일본 한 해 예산은 5773만 엔이었고, 이들의 여행 예산은 50만 엔이었다.

국가 예산 1%가 투입된 이 고관대작 호화 여행단 이름은 '이와쿠라 사절단(岩倉使節團)'이다.


근대국가의 문, 이와쿠라사절단


1854년 미국을 시작으로 일본이 서양과 맺은 조약은 불평등했다.

이와쿠라사절단의 공식 목적은 역사적인 기독교 박해에 대한 오해 해소와 조약 개정이었다. 그런데 당시 태정대신(국무총리) 산조 사네토미(三條實美) 송별사에는 비장미가 배어 있다. "앞날의 대업 성공 여부가 이 출발과 그대들에게 달려 있다. 사명을 완수해야 한다.

가라. 바다에서 증기선을 옮겨 타고 육지에서 기차를 갈아타며 만리 각지를 돌아 그 이름을 사방에 떨치고 무사히 귀국하기를 빈다."(허동현, '19세기 한일 양국의 근대 서구 문물 수용 양태 비교연구')


젊은 천황 메이지(明治)를 구심점으로 근대국가 건설 작업이 시작된 때였다.

지역 영주들이 권력을 쥐던 각 번(藩)을 행정 단위인 현(縣)으로 격하하고 일본은 중앙집권국가가 되었다.

이들은 샌프란시스코에서 미 대륙을 횡단하고 대서양을 건너 영국과 프랑스와 벨기에와 네덜란드와 독일과 러시아와 덴마크와 스웨덴과 이탈리아와 오스트리아와 스위스 12개국을 돌아보고 1873년 9월 13일 요코하마로 돌아왔다.


외무부 장관을 비롯해 국장급 공무원 46명이 사절단으로 출국했다. 수뇌부 절반이 빠져나갔다.

그만큼 일본은 이 사절단에 사활을 걸었다. 장장 1년 10개월에 걸친 여행에서 조약 개정은 실패했다. 대신 사절단은 근대의 풍경에 충격을 받았다.

대표인 이와쿠라는 샌프란시스코에서 일본 전통 복장과 상투를 하고 기념사진을 찍었다.


한 달 뒤인 2월 26일 대륙 동쪽 시카고에서 이와쿠라는 상투를 잘라버리고 양복을 입었다. 난생처음 본 근대의 충격은 그렇게 거대했다.

사절단은 자기 분야의 충격을 꼼꼼하게 관찰하고 묻고 기록했다.

영국 신문 더 타임스는 "세계에서 전례가 없는 중대한 실험을 하고 있다"고 했다.(이영석, '이와쿠라사절단이 바라본 영국의 산업도시')


정부에 복귀한 지도자들은 영국의 산업과 미국의 언론과 스위스의 교육과 독일의 법률을 그대로 정책에 적용했다.

1878년 사절단은 '미구회람실기(米歐回覽實記)'라는 100권짜리 보고서를 만들어 '국민의 일반적 이익과 개발을 위해' 공개 출판했다.

적합한 일본어가 없어 그림을 많이 쓴 덕에 오히려 이해가 쉬웠다.


조선 정부는 그런 나라에 방비가 돼 있냐고 물은 것이다.

300년 추론 학습을 마치고 미적분을 끝낸 수험생에게 이제 막 인수분해 공식을 암기한 동급생이 공부 잘하라고 충고를 던지고 자기는 교과서를 덮어버린 것이다.

그리고 그 수험생은 '2000년 이상 지켜온 사회 모델을 해체하고 지위를 스스로 포기한 채 중대한 사회혁명을 시작할 참이었다.'

('더 타임스' 1872년 9월 5일, 이영석) 이름은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이다.

 
출처 : 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