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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거친호흡 몰아쉬며 ^^ 굽이치는 산맥넘어 손의 자유, 발의 자유, 정신의 자유를 찾는다. 기억은 희미해지기에 이곳에 기록을 남긴다
MTB등산여행

당진 필경사 가는 길

by 한국의산천 2018. 12. 29.

당진 심훈의 필경사 가는 길


2018년 12월의 마지막 토요일

매섭게 쌀쌀한 날씨지만 하늘은 푸르고 공기는 맑았다


▲ 필경사 / 붓으로 (정신의) 밭을 일군다



사람이 여행을 하는 것은
도착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여행하기 위해서이다. - 괴 테



필경사는 충청남도 당진시 송악읍 상록수길 97 (부곡리 251-12)에 있다.

동남향으로 자리 잡아 집 앞으로 넓은 들과 동북쪽으로는 서해가 인접해 있다.

필경사 마당 앞에는 경기도 안성에서 이장한 심훈의 묘소와 상록수 문화관, 심훈 기념관이 나란히 배치되어 있다.


▲ 택호 필경사 유래 ⓒ 2018 한국의산천

택호 '필경사'는 1930년 발표한 심훈의 시 <필경(筆耕)>에서 비롯한 것으로,

조선인들의 마음을 붓으로 논밭 일구듯 표현하고자 하는 심훈의 의지를 담아

'붓으로 원고지에 농사 짓는 집'이라는 뜻으로 지었다.


▲ 한파가 몰아친 겨울이지만 고택 뒤켠의 대숲은 푸르기만 하다


필경(筆耕)

우리의 붓끝은 날마다 흰 종이 위를 갈[耕]며 나간다.

한 자루의 붓 그것은 우리의 쟁기요, 유일한 연장이다.

거칠은 산(山)기슭에 한 이랑의 화전(火田)을 일려면

돌뿌리와 나무 등걸에 호미 끝이 부러지듯이

아아 우리의 꿋꿋한 붓대가 몇 번이나 꺾였었던고?

- 筆耕舍雜記 중에서



  심훈은 <필경사잡기>에서 필경사를 짓게 된 연유를 솔직하고 담담히 이야기한다.

"일생일대의 결심을 하고 <직녀성(織女星)>의 원고료로 엉터리를 잡아(본인이 직접 설계했다는 의미) 가지고

풍우를 피할 보금자리를 마련했노라."라고 말하고 있다.


또 필경사가 있는 송악면 부곡리를

‘도회의 소음과 온갖 문화의 시설과는 완전히 격리된 원시 지대’,

혹은 ‘비속한 유행가와 라디오 스피커를 울려 나오는 전파의 잡음으로 안면이 방해될 염려는 조금도 없는, 별유천지’로 표현하고 있다.


  심훈은 어려서부터 문예에 뜻을 두고 살았음을 상기하며, 작가의 길을 되새겨 본다.

살을 저미고 뼈를 깎아 내는 듯한 노력과 수련의 시간이 필요함을 깨닫고,

필경사에서 진정한 문학 청년으로 성장하길 소망하며 글을 마무리하고 있다.



한 밤

               - 심 훈


소리 없이 내리는 눈


한 치 두 치 마당 가득 쌓이는 밤엔


생각이 길어서 한자 외다 한치이외다


편편히 흩 날리는 저 눈 송이처럼

 

편지나 써서 온 세상에 뿌렸으면 합니다


▲ 세월을 거스를 수는 없는것

지인들이 흰머리가 보이는데 염색하면 어떠냐고 묻지만

나이가 들어가는것을 가식적으로 숨기고 싶지 않다

어쩌면 때에 따라 염색도 할 수있겠지만

일단은 내가 늙어 가는 모습을 모두에게 보여주고 싶다

그래야지 어느날 친구들도 나를 보고 크게 놀라는 일이 없을테니 말이다   




▲ 필경사 / 심훈(沈熏)[1901~1936]은 일제의 탄압이 심해지자

1932년 서울에서 부모가 있는 충청남도 당진군 송악면 부곡리로 내려와서 직접 설계하고 지은 집이다


  당진에 내려온 심훈은 창작 활동에 전념하면서 

1934년 장편 소설 <직녀성(織女星)>을 조선 중앙 일보에 연재하고

그 원고료를 받아 손수 설계하고 집을 지어 '필경사(筆耕舍)'라 하였다.


심훈은 필경사에 살면서 둘째 아들 심재광과 셋째 아들 심재호를 낳았고,

1935년 5월 4일 기고한 장편 소설 <상록수>를 53일 만에 탈고해

동아 일보 창간 15주년 기념 장편 소설 현상 공모에 응모하여 당선되었다.




심훈

1915년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였고,

1917년 왕족인 이해영(李海暎)과 혼인하였다.

1919년 3·1운동에 가담하여 투옥, 퇴학당하였다.

1920년 중국으로 망명하여 1921년 항저우(杭州) 치장대학(之江大學)에 입학하였다.

1923년 귀국하여 연극·영화·소설집필 등에 몰두하였는데 처음에는 특히 영화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1924년 이해영과 이혼하였고 같은 해 동아일보사에 입사하였다.

1925년 조일제(趙一齊) 번안의 「장한몽(長恨夢)」이 영화화될 때 이수일(李守一)역으로 출연하였고,

1926년 우리 나라 최초의 영화소설 「탈춤」을 『동아일보』에 연재하기도 하였다.

이듬해 도일하여 본격적인 영화수업을 받은 뒤 귀국하여

영화 「먼동이 틀 때」를 원작집필·각색·감독으로 제작하였으며 이를 단성사에서 개봉하여 큰 성공을 거두었다.

식민지 현실을 다루었던 이 영화는 「어둠에서 어둠으로」라는 제목이 말썽을 빚자 개작한 작품이며 영화제작은 이것으로 마지막이었다.


그 뒤 1928년 조선일보사에 다시 입사하였고,

1930년 안정옥(安貞玉)과 재혼하였다.

1931년 경성방송국(京城放送局)으로 옮겼으나 사상 문제로 곧 퇴직하였다.

1932년 고향인 충청남도 당진으로 낙향하여 집필에 전념하다가 이듬해 상경하여 조선중앙일보사에 입사하였으나 다시 낙향하였다.

1936년 장티푸스로 사망하였다.


영화 「먼동이 틀 때」가 성공한 이후 그의 관심은 소설 쪽으로 기울었다.

1930년 『조선일보』에 장편 「동방(東方)의 애인(愛人)」을 연재하다가 검열에 걸려 중단 당하였고,

이어 같은 신문에 「불사조(不死鳥)」를 연재하다가 다시 중단 당하였다.

같은 해 시 「그날이 오면」을 발표하였는데

1932년 향리에서 시집 『그날이 오면』을 출간하려다 검열로 인하여 무산되었다(이는 1949년 유고집으로 출간되었다.).


1933년 장편 「영원(永遠)의 미소(微笑)」를 『조선중앙일보(朝鮮中央日報)』에 연재하였고,

단편 「황공(黃公)의 최후(最後)」를 탈고하였다(발표는 1936년 1월 신동아).

1934년 장편 「직녀성(織女星)」을 『조선중앙일보』에 연재하였으며

1935년 장편 「상록수(常綠樹)」가 『동아일보』창간15주년 기념 장편소설 특별공모에 당선, 연재되었다.


「동방의 애인」·「불사조」 등 두 번에 걸친 연재 중단사건과 애국시 「그날이 오면」에서 알 수 있듯이

그의 작품에는 강한 민족의식이 담겨 있다.

「영원의 미소」에는 가난한 인텔리의 계급적 저항의식, 식민지 사회의 부조리에 대한 비판정신,

그리고 귀농 의지가 잘 그려져 있으며

대표작 「상록수」에서는 젊은이들의 희생적인 농촌사업을 통하여 강한 휴머니즘과 저항의식을 고취시킨다.

행동적이고 저항적인 지성인이었던 그의 작품들에는 민족주의와 계급적 저항의식 및 휴머니즘이 기본정신으로 관류하고 있다.

특히, 농민계몽문학에서 이후의 리얼리즘에 입각한 본격적인 농민문학의 장을 여는 데 크게 공헌한 작가로서 의의를 지닌다.

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심훈 [沈熏]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필경사는

심훈이 충청남도 당진으로 내려와 작품 창작에 전념하던 중에

당진군 송악면 부곡리 일대에서 농촌 계몽 운동에 헌신하고 있던 맏조카 심재영과

경기도 수원군 반월면 샘골에서 농촌 교육에 헌신하다 과로로 숨진 최용신을 모델로 하여 쓴

일제 강점기 농촌 계몽 소설의 대표작 <상록수>를 탈고한 심훈 문학의 산실로 평가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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