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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거친호흡 몰아쉬며 ^^ 굽이치는 산맥넘어 손의 자유, 발의 자유, 정신의 자유를 찾는다. 기억은 희미해지기에 이곳에 기록을 남긴다
MTB등산여행

연미정 가는 길

by 한국의산천 2017. 11. 4.

강화도 연미정 가는 길(2017 · 11 · 4 · 하늘색 파란 토요일 /조금 쌀쌀한 날씨)


조금은 쌀쌀한 날씨

11월의 첫번째 토요일 친구들과 강화도 연미정을 다녀왔다

강화도에는 아직도 가을의 전설처럼 은발의 억새와 노란 빨간~단풍이 남아있었다

들판의 남은 아쉬운 가을을 보며 즐겁게 달렸다   


'자전거를 타고 저어갈 때, 세상의 길들은 몸 속으로 흘러 들어온다.


땅 위의 모든 길을 다 갈 수 없고

땅 위의 모든 산맥을 다 넘을 수 없다해도

살아서 몸으로 바퀴를 굴려 나아가는 일은 복되다


▲ 왼쪽부터 한국의산천 / 소풀 / 김영배 / 스티브 박 (4명)

일상에서 또 다른 한가지에 심취 할 수 있다는것은 무한한 幸福이다.


11월 첫번째 휴일을 맞으며 내 자신을 되돌아 본다.

환갑을 넘어서도 죽마고우들과 이렇게 함께 달릴 수있어서 너무 좋다

크나 큰 행복이고 축복이다   


인생(시간)을 낭비한 죄


독방에 수감된 빠삐용이 꿈을 꾼다

그는 사막 한가운데로 걸어나 간다.

저편엔 배심원들과 재판관이 기다리고 있다.



빠삐용은 말한다.

"나는 결백합니다

나는 사람을 죽이지 않았습니다.

증거도 없이 죄를 뒤집어 쒸운것입니다.

나는 무죄입니다라고..."

 

재판관은 말한다.

"그래 그건 맞다. 너는 살인죄로 기소된게 아니다.

네가 저지른 죄는 인간으로서의 가장 큰 중죄다.

너를 기소한다.

네 인생(시간)을 낭비한 죄로!"

 

빠삐용의 눈빛이 흔들리며 힘없이 아래로 떨어진다.

유죄,유죄,유죄...

그는 체념한 듯 뒤돌아서 사막 너머로 사라져간다.


무죄를 주장하는 빠삐용에게 재판관은 “인생을 낭비한 죄”를 들어 유죄 판결을 내린다.

정곡을 찌른 판결에 망연자실해진 빠삐용은 더 이상 항변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는 탈출을 시도하여 자유의 몸이 된다. 이 영화는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다


영화는 묻는다.

진정한 삶과 인간이 보람있게 살아간다는것은 무엇일까?

나 역시 시간을 낭비한 죄인이 되지는 말아야겠다 



라이딩은 중독이다


자전거를 왜 타느냐는 설문조사에서 누가 그렇게 말했다

"자전거를 안 타면 자살충동이 오기에..." 물론 진실은 아니겠지만

나 역시 자전거를 못타는 날에는 우울해진다.

라이딩은 중독이다. 



 

달려라 달려

우울증과 자전거타기는 절대 공존하지 않는다


“구르는 바퀴 위에서, 바퀴를 굴리는 몸은 체인이 매개하는 구동축을 따라서 길 위로 퍼져나간다.

몸 앞의 길이 몸 안의 길로 흘러 들어왔다가 몸 뒤의 길로 빠져나갈 때, 바퀴를 굴려서 가는 사람은 몸이 곧 길임을 안다.”







자전거에 관한 명언

1. 라이딩은 숙명이다. 자전거를 구입하라. 자전거를 사지 않으면 후회가 남고 지르면 자전거가 남는다

2. 우울증과 라이딩은 절대 공존하지 않는다

3. 행복을 살 수는 없지만 자전거를 타면 행복에 이를 수 있다

4. 자전거 타기는 삶과 같다 끊임없이 움직여야 한다

5. 안넘어지고 안다치고 타는 사람이 제일 잘 타는 사람이다

6. 업힐은 개처럼 다운힐은 정승처럼

7. 클릿은 내일 장착하면 늦고 져지는 한번도 안 입어본 사람은 많아도 한번만 입어본 사람은 없다

8. 라이딩에서 가장 힘든일은 아침에 일어나서 현관문을 나설때 뿐이다

9. 자전거를 타는 즐거움과 비교대상이 되는 것은 이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10. 내가 소유하고 있는 재산중에서 제일 소중하고 가치있는 재산은 역시 나의 낡은 자전거이다

자전거타기는 건강, 행복, 열정이고 젊음 그 자체이다.  


▲ 오랜 시간 변함없이 유장하게 흐르는 염하강을 따라서 가을 속으로 달립니다




가을에 아름다운 것들
             

                 -  정유찬


가을엔
너른 들판을 가로 질러
노을지는 곳으로
어둠이 오기 전까지
천천히 걸어 보리라

 

아무도 오지 않는
그늘진 구석 벤치에
어둠이 오고 가로등이 켜지면
그리움과 서러움이
노랗게 밀려 오기도 하고

 

단풍이
산기슭을 물들이면
붉어진 가슴은
쿵쿵 소리를 내며
고독 같은 설렘이 번지겠지

 

아, 가을이여!
낙엽이 쏟아지고 철새가 떠나며
슬픈 허전함이 가득한 계절일지라도
네게서 묻어오는 느낌은
온통 아름다운 것들뿐이네


▲ 늦가을로 접어들며 자신의 씨를 날리고 점점 여위어 가는 억새 ⓒ 2017 한국의산천


가을 억새

                                 - 정일근


때로는 이별하면서 살고 싶은 것이다.
가스등 켜진 추억의 플랫홈에서
마지막 상행성 열차로 그대를 떠나보내며
눈물 젖은 손수건을 흔들거나
어둠이 묻어나는 유리창에 이마를 대고
터벅터벅 긴 골목길 돌아가는
그대의 뒷모습을 다시 보고 싶은 것이다.
 

사랑 없는 시대의 이별이란
코끝이 찡해오는 작별의 악수도 없이
작별의 축축한 별사도 없이
주머니에 손을 넣고 총총총
제 갈 길로 바쁘게 돌아서는 사람들
사랑 없는 수많은 만남과 이별 속에서
이제 누가 이별을 위해 눈물을 흘려주겠는가
이별 뒤의 뜨거운 재회를 기다리겠는가

 

하산길 돌아보면 별이 뜨는 가을 능선에
잘 가라 잘 가라 손 흔들고 섰는 억새
때로는 억새처럼 손 흔들며 살고 싶은 것이다.
가을 저녁 그대가 흔드는 작별의 흰 손수건에
내 생애 가장 깨끗한 눈물 적시고 싶은 것이다.



님께서 부르시면

                            - 신석정

 

가을날 노랗게 물들인 은행잎이
바람에 흔들려 휘날리듯이
그렇게 가오리다
임께서 부르시면......

 

호수에 안개 끼어 자욱한 밤에
말없이 재 넘는 초승달처럼
그렇게 가오리다
임께서 부르시면......

 

포근히 풀린 봄 하늘 아래
굽이굽이 하늘가에 흐르는 물처럼
그렇게 가오리다
임께서 부르시면......

 

파아란 하늘에 백로가 노래하고
이른 봄 잔디밭에 스며드는 햇볕처럼
그렇게 가오리다
임께서 부르시면......








오늘의 행복을 위하여

세상을 사노라면
둘이지만 하나임을 느낄 때가 종종 있다.

부부 사이에서,
친구 사이에서,
교우 사이에서...
마치 하나의 막대기 양 끝을 잡고 있었던 것을
발견하듯, 외모는 달라도 생각이 같을 때
그런 순간을 느낀다.
살맛나는 순간이기도 하다.

내가 행복할 때
남을 행복하게 하는 것처럼,
내가 슬프면 그 끝을 잡고 있는 상대도 슬프기에,
되도록이면 나는 언제나 행복해야 한다.

어떤 이유를 대서라도
행복하기 위해 최선을 다 해야 한다.
오늘 하루의 행복을 위하여 목숨을 걸자

민주현 - "가슴에 묻어둘 수 없는 사랑" (가톨릭 출판사)











▲ 늦가을 단풍의 아름다움이 가득한 길


길처럼

                    -  박 목 월


머언 산 구비구비 돌아갔기로
山 구비마다 구비마다

절로 슬픔은 일어...


뵈일 듯 말 듯한 산길

산울림 멀리 울려나가다
산울림 홀로 돌아나가다
어쩐지 어쩐지 울음이 돌고
 
생각처럼 그리움처럼...

길은 실낱 같다









▲ 연미정에서 보이는 유도 ⓒ 2017 한국의산천

가운데 섬을 중심으로 왼쪽에 보이는곳은 북한땅이며 오른쪽에 보이는 땅은 남한땅 김포이다

 

옛날에는 세곡을 실은 조운선은 이 앞을 지나 마포로 향해야 했다. 한양으로 들어갈 선박들이 이 앞에서 모여 쉬었다가 만조를 기다려 한강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한강과 임진강이 합해진 물줄기는 연미정 앞 유도에서 한줄기는 남쪽으로 갑곶나루로 흘러가고 또 한줄기는 서쪽으로는 승천포로 흘러가는 중심에 연미정이 자리 잡고 있다. 물줄기가 나뉘어 흐르는 형세가 제비꼬리를 연상하기에 연미정이라 지칭했다.

 

  물줄기의 중심에 위치하여 사방이 훤히 트였기에 "빗장처럼 한양을 보호하고 적을 막아내는 형세가 이 연미정보다 뛰어난 것이 없다"며 강화 유수 김로진이 기문을 남기기도 했다

 

 이곳은 강화로 부터 서울로 들어오는 모든 배를 볼 수 있는 곳이라 항몽 시기부터 군사 요충지였으며 지금도 이곳에서 북한 개풍 땅이 손에 잡힐듯 가까이 보인다. 또한 인조 때 일어난 정묘호란 당시 강화조약을 체결했던 비운의 역사 현장이다.

 

▲ 월곶 돈대 내에 자리한 연미정 ⓒ 2017 한국의산천 

강화8경 : 갑곶돈대 / 광성보 / 초지진 / 마니산 / 보문사 / 연미정 / 적석사 /  전등사

 

  연미정은 그 위에 올라 수려한 자연경관을 보며 풍류를 즐기거나 학문을 공부하던 정자이다. 언제 처음 연미정을 지었는지는 정확히 알지 못한다. 그러나 고려 고종(재위 1213∼1259)이 사립교육기관인 구재(九齋)의 학생들을 이곳에 모아놓고 공부하게 했다는 기록이 있다. 연미정 주변에는 500년된 노거수 느티나무가 당당하게 둘러 서있다.

 

  조선시대에 들어 와서는 중종 5년(1510) 삼포왜란 때 큰 공을 세워 병마절도사와 공조판서 등을 역임한 황형(黃衡, 1459~1520)에게 이 정자를 주었다 한다.

  강화군 강화읍 월곶리에 위치한 연미정은 1995년 3월 1일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24호로 지정된 정자이다. 최초 건립연대는 정확히 나와 있지 않으며 임진왜란, 병자호란, 6.25 전쟁을 거치며 여러 차례 시련을 겪고 파손된 것을 현재와 같이 복원하였다.  

  팔각지붕의 겹처마로 돌기둥 위에 10개의 기둥을 얹어 건축한 민도리집이다. 임진강과 염하강의 모양이 제비 꼬리 같다하여 연미정이라 이름이 붙여졌으며 월곶돈대 꼭대기에 세워져 있어 파주, 김포시와 북한의 황해도 개풍군 일대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

 

  얼마전까지만해도 연미정은 군사보호 구역으로 지정되어 일반인의 출입이 엄격히 제한되었으나 2008년 2월 12일 민간인 통제선이 뒤로 조금 물러나며 언제던지 출입이 가능한 지녁이 되었다.

 


정묘호란과 강화조약

호란 (오랑케 호: 胡  / 난리 난 亂)

 

1627년 1월 아민이 이끄는 3만의 (청나라의 전신)후금군은 앞서 항복한 강홍립 등 조선인을 길잡이로 삼아 압록강을 건너 의주를 공략하고 이어 용천, 선천을 거쳐 청천강을 넘었다. 계속해서 안주, 평산, 평양을 점령하고 황주를 장악하였다. 조선에서는 장만을 도원수로 삼아 싸웠으나 평산에서부터 후퇴를 거듭, 그 본진이 개성으로 후퇴하였고 인조 이하 조신들은 강화도로 피하고 소현세자는 전주로 내려가서 분조 활동을 했다.

 

  1616년 만주에서 세워진 후금은 명과 전쟁을 시작하면서 명나라와의 무역이 중단되며 생필품 조달에 극심한 어려움과 가뭄으로 인한 심각한 경제적 위기에 직면하고 있었다. 그동안 광해군의 명과의 중립 외교 덕분에 조선은 한동안 전쟁의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나 인조 반정(1623년)이 일어나 광해군이 임금에서 폐출되고 서인 정권이 들어서면서 후금을 멀리하고 명나라와 가까워지려는 친명배금 정책을 추진하면서 조선과 후금의 관계는 다시 악화되었다.


  조선은 명나라에 대한 사대주의의 길을 걸으며 공공연히 명나라를 지원하며 후금과의 전쟁에서 패퇴한 명나라 장수 모문룡과 군사들을 보호해 주기도 하였다. 조선의 배금 정책은 결국 후금을 자극하였고, 조선이 이괄의 난으로 국방이 허술해지자 후금은 3만의 군사를 동원하여 침략해 왔다.

 

  정묘호란은 바로 이런 이유와 후금의 경제적 위기를 타계하고 경제적 원조를 조선으로 부터 강제적으로 얻어내기 위해 의도적으로 자행된 공격이였다. 후금의 원래 의도는 조선의 정벌이 아니라 화친을 통한 경제적 이득의 강제 징수에 있었고 복속이나 신종관계도 아닌 "명과의 관계를 끊고 후금과 형제관계를 맺으라" 는 형식적인 주문을 하며 경제적인 요구를 원하였던 것이다.

 

  황주까지 이른 후금군은 2월 9일 부장 유해를 강화도에 보내 명나라의 연호 '천계(天啓)'를 쓰지 말 것, 왕자를 인질로 보낼 것 등의 조건으로 화의를 교섭하게 하였다. 이에 양측은 화약 후 후금군은 즉시 철병할 것, 후금군은 철병 후 다시 압록강을 넘지 말 것, 양국은 형제국으로 정할 것, 조선은 후금과 화약을 맺되 명나라와 적대하지 않을 것 등을 조건으로 하여 조선은 매년 목면 1만 5천필 , 면주 2백필 , 백저포 250필을 받치는 선에서 3월 3일 강화조약(정묘조약)을 맺고 이에 따라 조선측은 왕자 대신 종실인 원창군(성종의 아들 운천군의 증손)을 왕의 동생으로 속여 인질로 보내고 후금군도 철수하였다.

 


병자호란과 남한산성, 삼전도 치욕

 

병자호란(丙子胡亂)은 1636년 병자년 12월부터 1637년 1월까지 조선과 청 사이에 벌어진 전쟁이다.

  사실 후금은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으나 3만이라는 적은 병력으로 침략해 왔기에 내부 고립의 위험이 있어 빨리 화약을 맺을 필요성이 있었고, 이로 인해 화약의 내용은 후금 입장에선 충분히 만족할 만한 것은 아니었다.

 

  이후 후금은 자신들의 세를 불려 나가며 1632년에는 '형제의 맹'에서 '군신의 의'로 양국관계를 수정할 것을 요구하면서 많은 세폐를 요구했다. 이에 조선은 경제적 부담이 되어왔던 세폐에 대해서는 절충을 시도했지만, 오랑캐와 형제관계를 맺은 것도 굴욕적으로 여기는 분위기에서 '군신의 의'로 전환하는 것은 결코 받아들일 수 없다며 절화의 태도를 굳히게 되었다.

 

  그러다가 1636년 다시 후금은 국호를 청이라 고치고 홍타이지가 명을 공격하기 이전에 배후의 안전을 확보할 목적을 포함하여 사신을 보내 청태종의 존호를 알리고 신사를 강조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홍타이지가 조선에 의견을 구하는 사신을 보냈을 때 조정이 사신의 접견조차 거부하고, 즉위식에 참석한 조선 사신이 홍타이지에게 배례하지 않는 등 친명정책을 변경할 의사가 없는 것을 확인하자 명과의 전면전에 앞서 조선을 확실히 굴복시켜 배후의 위협을 제거하고자 1636년 12월 2일, 10만 군사로 조선을 침략했다.

 

  인조와 조정이 남한산성에서 항전하였으나 청의 포위로 인한 굶주림과 추위, 왕실이 피난한 강화도의 함락 등으로 말미암아 곧이어 삼전도의 굴욕이라는 치욕적인 항복의 역사를 남기고 만다.

 

조선으로서는 짧은 전쟁 기간에도 불구하고 전쟁 포로로 수십 만명의 백성이 청으로 끌려가 그 사회적 피해가 유례없이 막심하였다.
















              - 이 영 춘

 

문득문득 오던 길을
되돌아본다
왠가 꼭 잘못 들어선 것만 같은
이 길

 

가는 곳은 저기 저 계곡의 끝
그 계곡의 흙인데
나는 왜 매일매일
이 무거운 다리를 끌며
가고 있는 것일까

 

아, 돌아갈 수도
주저앉을 수도 없는
이 길.















 

▲ 해가 일찍 떨어진다 라이트와 보온상의는 꼭 준비하고 다녀야 한다

오늘 함께 달린 친구들께 감사하며 하루를 마무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