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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거친호흡 몰아쉬며 ^^ 굽이치는 산맥넘어 손의 자유, 발의 자유, 정신의 자유를 찾는다. 기억은 희미해지기에 이곳에 기록을 남긴다
MTB등산여행

화성 당성 제부도 둘러보기

by 한국의산천 2016. 3. 27.

오늘은 장모님 뵈러 가는 날

[ 2016 · 3 · 27 · 하늘 파란 일요일 봄날 · 한국의산천 http://blog.daum.net/koreasan ]


  라이딩 스케줄에 불참을 전하고 집사람과 함께 올해로 백수(白壽 : 99세)를 맞으신 장모님을 찾아뵙고 나는 당성과 제부도를 둘러보았다.

 

  장모님은 올해로 백수(壽 : 99세)를 맞으셨지만 아파트에서 혼자 식사를 챙겨드시고 계신다. 물론 아파트 옆동에 처제와 처형도 가까이 계시기에 식사와 반찬은 잘 챙겨서 가져다 드린다. 


  여기서 '백()'은 '일백 백()'에서 '한 일()'을 뺀 것으로, 100-1=99가 되기 때문에 백수()는 100세에서 한 살이 모자라는 99세를 말하는것이다.

아직까지는 건강하신 장모님께 깊은 감사를 드린다.  


봄 축제 알림








▲ 당성과 제부도를 둘러보며 전곡항에서 ⓒ 2016 한국의산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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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 그리고 나

                 - 소리새 6집 바다로 가자


푸른 파도를 가르는 흰 돛단배처럼 그대 그리고 나
낙엽 떨어진 그길을 정답게 걸었던 그대 그리고 나
흰 눈 내리는 겨울을 좋아했던 그대 그리고 나

때론 슬픔에 잠겨서 한없이 울었던 그대 그리고 나
텅 빈 마음을 달래려 고개를 숙이던 그대 그리고 나
우린 헤어져 서로가 그리운 그대 그리고 나







당성(당항성) : 화성 당성 [華城 唐城]

경기도 화성시 서신면 상안리 구봉산(九峰山) 위에 있는 삼국시대의 석축 산성.  


사적 제217호

지정일 1971년 04월 15일

시대 : 삼국시대

종류/분류 : 산성

소재지 : 경기도 화성시 서신면 상안리 산 32 지도

 

  당성은 둘레 1,200m로, 당항성(黨項城)이라고도 한다. 1971년 사적 제217호로 지정되었다.

테뫼형(山頂式)과 포곡형(包谷形)을 결합한 복합식으로, 현재 동문·남문·북문의 터와 우물터, 건물지가 남아 있다. 원래 백제의 영역에 속하였던 지역는데, 한때 고구려가 점령하여 당성군이라는 지명을 붙였다. 백제시대에 테뫼형 산성이 축조된 후 신라가 이 지역을 점령하였을 때, 백제의 영향을 받아 복합형 산성으로 축조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산성의 테뫼형 부분은 다시 2구(區)로 나누어진다. 현재 형태가 뚜렷한 것은 포곡형인데, 그 평면은 대략 긴 네모꼴을 이루고 있다. 북서쪽으로 면한 성벽의 길이는 약 1,030m이다. 이 성의 문터로 남문터와 북문터가 있으나, 수구(水口) 부분에 있어야 할 북동문의 위치는 확실하지 않다. 단지 사적 보수로 신축한 산성 진입로 통과지점을 동문터로 추정하고 있다. 성의 북서쪽에서 남동쪽으로 약 60m 지점에 위치한 북문터의 넓이는 약 4㎡이다. 이 문터를 통과하는 부분의 성벽높이는 약 2.5m, 밑부분의 너비는 7∼8m이다. 성 안에는 《읍지(邑誌)》에 전하는 조선시대 망해루(望海樓)로 추정되고 있는 건물 터의 초석이 남아 있다.


  테뫼형 산성은 남서쪽의 제일 높은 곳을 둘러서 축조한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이 성의 둘레는 230m이나, 포곡식 산성이 축조된 후 흡수되어 그 기능을 잃은 것으로 짐작된다. 또 하나의 테뫼형 산성은 남서쪽의 제일 높은 곳에서 밖으로 연장된 높이 140m의 언덕 위에 길이 90m, 너비 50m, 둘레 250m로 축조되어 있다. 당항성이 있는 지역은 지금은 화성시이지만 신라 경덕왕 때는 당은군(唐恩郡)이었다. 이곳은 신라가 황해를 통해 중국과 교통했던 중요한 출입구 구실을 하였다.

출처 :  두산백과




'화성 당성'에서 '唐' 새긴 기와 등 유물 1천점 나와 [2016년 1월]

  

한양대 문화재연구소 "당성 진위 논란 풀어줄 결정적 증거"
 

(서울=연합뉴스) 고은지 기자 = 경기도 화성시 당성 일대에서 '唐'(당)자가 새겨진 기와 등 유물 1천여점이 출토됐다.

한양대 문화재연구소는 문화재청의 허가를 받아 '화성 당성 3차 발굴조사'를 시행한 결과 삼국시대 축조된 1차 성벽, 망해루, 집수시설, 연못지 등 유구와 유물 1천여점을 발견했다고 14일 밝혔다.

 

  사적 제217호인 화성 당성은 원래 백제의 영역에 속해 있었지만 한때 고구려가 점령해 당성군이라는 지명을 붙였고, 이후 신라가 이 지역을 점령해 산성을 축조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학계 일각에서는 해당 성이 진짜 당성이라는 확실한 증거가 부족하다며 진위 논란이 일기도 했다.

연구소는 "이번에 출토된 '唐'자문이 찍힌 기와는 당성의 역사적 사실을 확실하게 입증하는 대단히 희귀한 자료"라면서 "삼국시대에서부터 이 성이 당성으로 불렸을 가능성을 확인해준다"고 설명했다.



  이번 조사에서 함께 발견한 망해루지의 하부구조는 고대 신라가 고구려 척(尺)을 사용해 건물의 초석 기반을 조성하고 이를 고려시대에 재사용한 것으로 밝혀졌다.

앞서 연구소는 2002년 2차 발굴에서 고려시대의 유구가 고대 삼국시대 유구 위에 중복된 것으로 추정했지만, 이번 발굴로 망해루는 삼국시대 이래 성이 축조된 이후 지속적으로 사용된 것으로 확인됐다.


  또 망해루에서 출토된 다량의 토제마는 해상교통과 관련된 의례에 제물로 사용됐을 가능성이 있다. 이는 상당한 규모의 의례행위가 반복적으로 있었으며 당성이 당시 전략적 거점이었음을 보여준다.


방형의 집수시설과 연못지에서는 중국 교역품 일부가 발굴됐다.

집수시설 규모는 가로 14m·세로 9m로 크지 않지만, 주변에 철과 관련 유구와 유물들이 수습됐고 별도의 연못지가 발견된 점을 미뤄볼 때 이 지역에서 철기생산과 관련된 작업을 비롯한 다양한 생산 작업이 이뤄졌음을 알 수 있다.


  연구소는 "이번 발굴은 당성이 한국 내 실크로드의 관문이었음을 확실하게 해준다"면서 "앞으로 실크로드 세계유산 지정구간에 포함될 가능성을 높이는 중요한 근거를 제공한 것으로 평가된다"고 말했다.


 

당성

  화성시 서신면 구봉산에 있는 당성(唐城)은 신라와 고려가 주력한 해상무역의 무대였다. 당성 역시 본래 고구려 영토였다가 백제가 차지했으며 후에 신라가 차지했다. 이처럼 작은 토성 하나에도 세 나라의 문화와 역사가 겹쳐있는 매우 의미깊은 곳이다.


▲ 10년만에 다시 찾은 당성 ⓒ 2016 한국의산천

2007년 답사 후 거의 10년만에 다시 찾아왔지만 옛 성터는 그대로 있구나. 

◆ 2007년 답사보기 >>> http://blog.daum.net/koreasan/12591382


서울신문 [씨줄날줄]

화성 당성/서동철 논설위원 입력 : 2016-01-24 23:44 


  삼국시대 한강 유역은 고구려 백제 신라의 격전지였다. 한성백제는 근초고왕(346~375 재위) 시절 전성기를 이루었지만 광개토대왕(391~412 재위) 이후 줄곧 고구려의 위협에 시달린다. 결국 고구려 장수왕(413~491 재위)에 쫓겨 지금의 충남 공주인 웅진으로 천도할 수밖에 없었다. 신라도 남한강 상류의 충북 충주 일대까지 고구려에 내주어야 했다.

    

  하지만 신라 진흥왕(540~576 재위) 시대가 되면 세력 판도는 다시 짜인다. 고구려는 북쪽 돌궐의 침입으로 골머리를 앓고 있었던 데다가 내분도 심각했다. 반면 백제는 538년 오늘날의 부여인 사비로 천도한 뒤 국가 체제가 다시 공고해진 시점이었다. 진흥왕은 백제 성왕(523~554)과 동맹을 맺어 고구려를 충주 일대에서 쫓아낸 데 이어 동맹을 파기하고 백제가 회복한 한강 유역마저 차지한다.


  신라가 한강 유역을 지배할 수 있었던 배경에 남한강이 있다. 지금은 댐과 보(洑)에 막혀 물길이 끊어진 지 오래다. 하지만 고려 시대와 조선 시대에도 남한강은 경상도와 강원도의 세곡(稅穀)을 개경이나 한양으로 나르는 통로였다. 경상도 세곡은 육로로 새재를 넘어 남한강 상류 충주에서 배에 실렸고, 세곡선은 빠른 물살을 타고 순식간에 마포나루에 닿았다.


  충주가 중원경이라는 이름으로 신라 제2의 도시로 떠오른 것도 이 때문이다. 한강 유역을 방어하는 배후도시로 충주의 중요성은 말할 것도 없었다. 충주에 집중 주둔시킨 병력과 장비는 유사시 물길로 한나절 만에 한강 유역으로 실어 나를 수 있었다. 반면 육로에 의존했던 고구려나 백제는 아무래도 기동력이 떨어졌다.


  신라는 서해에 면한 한강 유역을 차지하고 나서야 중국과 직접 소통할 수 있었다. 하지만 고구려와 대치하던 한강 하구를 전진기지로 삼기는 너무 위험했을 것이다. 결국 지금의 경기 화성 당성(唐城)이 떠올랐다. 당나라를 오가는 외교선과 무역선이 이곳에서 출발했으니, 당성이 없었다면 신라의 삼국통일도 없었다.


  원효가 의상과 함께 당나라로 떠나려다 해골 물을 마시고 ‘모든 것은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의 이치를 터득한 곳도 당성 주변이었을 것이다. 임오군란(1882) 이후 청군에 납치된 흥선대원군이 청나라로 끌려가는 배에 올랐던 곳도 당성 주변 마산포였다. 불과 100년이 조금 넘은 한말까지도 대중국 교류의 거점이었음을 알 수 있다.


  한양대 문화재연구소가 당성터 발굴 조사에서 당(唐)자가 새겨진 기와를 비롯한 중요 유물을 확인했다고 한다. 지금 당성으로 알려지고 있는 곳이 신라의 당성인지 증거가 부족했던 상황에서 논란을 잠재울 수 있을 것으로 기대를 모은다. 그렇지 않아도 동서양을 잇는 실크로드의 출발점으로 의미가 확장되고 있는 당성이다. 역사 복원에 한 걸음씩 다가가게 하는 조사단의 노력에 박수를 보낸다. - 서동철 논설위원 



중부일보
한반도 실크로드 관문, 당성(唐城)

서정문 2016년 02월 19일 금요일  


  한양대 문화재연구소가 화성시에 있는 당성(사적 제217호) 3차 발굴조사에서 삼국시대 축조된 성벽, 망해루(望海樓), 집수시설, 연못지 등 잔존물과 당(唐)자가 새겨진 기와 등 유물 1천여점을 출토했다고 지난 달 14일 발표했다.


  연구소에 따르면 “이번 발굴로 당성이 한국 내 비단길(Silk Road)의 관문이었음을 확실하게 해준다”면서 “앞으로 실크로드 세계유산 지정구간에 포함될 가능성을 높이는 중요한 근거를 제공한 것으로 평가된다”고 밝혔다.


  화성시 서신면 상안리 구봉산에 위치한 당성은 역사적으로 백제-고구려-신라가 한반도를 지배하기 위해 서로 확보하고자 각축전을 벌이던 전략적 요충지였다. 뿐만 아니라 삼국시대는 물론 통인신라, 고려, 조선시대까지도 세계와 소통하는 관문으로서 당시 선진문물이 수입되고 우리문화가 수출되는 시발점의 역할을 했다.


   신라가 당성을 확보하면서 내륙국가에서 해외로 뻗어나가는 해양국가의 기틀을 마련하고 당과의 교류를 통해 군사적 우위를 확보하여 삼국을 통일시킬 수 있었으며, 고려, 조선시대에도 당성은 해양방어의 중요한 거점이었다.


  실크로드는 물건만 오간 것이 아니다. 서방과 동방의 문화, 경제, 정치 모든 분야의 것들이 오고간 곳이다. 또한 실크로드가 중국 중원 지방에서 시작하여 허시후이랑을 가로질러 타클라마칸 사막의 남북변을 따라 파미르고원, 중앙아시아초원, 이란고원을 지나 지중해 동안과 북안에 이르는 길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터키의 이스탄불에서 신라 경주까지 이어져 ‘실크로드는 신라의 길(정용석 지음)’로 낙타군단이 있었다는 주장도 제기됐다.


  화성시 당성이 신라의 당성인지에 대한 논란이 아직은 남아있지만, 당시에 중국으로 열린 한반도의 중요한 관문이었음을 말해주는 역사적인 단편들이 전해져 내려오는 것은 사실이다.


  원효대사(元曉大師, 617~686)가 의상(衣裳)과 함께 당나라 유학을 위해 당성에 다다라서 밤중에 목말라 마신 물이 아침에 일어나 보니 해골에 고인 물이라는 것을 발견하고 대오각성(大悟覺醒)하여 ‘진리는 밖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서 찾아야 한다’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의 깨달음을 터득했다고 한다.


  고려의 충신으로 죽어간 목은 이색(牧隱 李穡, 1328~1396)은 당성을 소재로 ‘남양부 망해루기’를 남겼다. 삼봉 정도전(三峰 鄭道傳, 1342~1398)은 남양부사로 임명되고는 임금에게 해향(海鄕)을 지키게 돼 감격스럽다는 서한을 올렸다. 정조의 문체반정 강요에 시종일관 맞섰던 이옥(李鈺, 1760~1815)은 남양(南陽)에서 칩거하며 글을 지으며 여생을 보냈는데, 100여척의 함선과 1천여 명 군사가 훈련하는 소리를 들렸다고 했다.


  지금은 시화, 대선, 불도, 탄도방조제로 둘려싸여 생명의 원천이자 보고인 바다와 갯벌이 매립되고 축성된 돌들은 허물어져 흔적만 남아있지만, 당성은 오랜 역사동안 당나라를 통해 세계로 뻗어가는 실크로드의 관문이었다. 역사속에 살아 있는 유산은 현대인을 위한 에코뮤지엄의 훌륭한 컬렉션이다.


  당성에 올라 흥선대원군이 청나라로 잡혀갔던 마산포를 바라보며 바닷길을 다시 열어 배들이 오가는 것을 상상하는 것은 미친 나만의 헛된 꿈일까?


서정문 경기창작센터장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원효스님께서 중국의 당나라에 유학을 갈 때 이곳 당성 주변에서 잠을 자다가 갈증이 나기에 어둠 속에서 물을 마셨는데, 다음 날 깨어보니 전날 밤 자신의 갈증을 해소했던 그물이 죽은 사람의 두개골속에 고인 물이었다는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의 모든 것은 그 대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어떻게 먹느냐에 따라서 변화될 수 있는 것이라고 깨달았다고 합니다.


  원효스님께서 유학을 갈 때 도중에서 깨달은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心生故  種種法生  心滅故  龕墳不二 (심생고  종종법생  심멸고  감분불이)

마음이 일어나므로 갖가지 현상이 일어나고,마음이 없어지므로 동굴과 무덤이 둘이 아니다.

 

三界唯心 萬法唯識  心外無法 胡用別求 (삼계유심 만법유식  심외무법 호용별구)

삼계는 유심이요, 만법은 유식이다. 마음 밖에 아무것도 없는데 무엇을 어찌 따로 구하겠는가?
 

  이 내용을 불교의 화엄경에서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즉, 사람의 행복과 불행이 다 마음의 생각에 달렸다는 뜻으로, 사람이 어떤 생각을 갖느냐에 따라서 일이 잘되기도 하고, 안되기도 한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좋은 생각을 하면 좋은 일이 생기고, 나쁜 생각을 하면 나쁜 일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불행하다'고 생각하면 불행해지는 것이고, '행복하다'고 생각하면 행복해지며, '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할 수 있게 되고, '할 수 없다'고 생각하면 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과연 옳은 이야기라 생각되어집니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의 생각이나 마음이 항상 좋은 생각을 하고 항상 행복하다고만 생각할 수 있는 능력과 자질을 가지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마음과 감정은 변화무쌍합니다.


  그렇습니다. 나에게 다가오는 대상이나 사람에 따라서 수시로 변하는 나의 마음을 가지고서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를 이루어 내기에는 참으로 어려운 것이 사실입니다.



마음의 길 하나 트면서

                        

                                  - 이 태 수

 

마음을 씻고 닦아 비워내고
길 하나 만들며 가리.

 

이 세상 먼지 너머, 흙탕물을 빠져나와
유리알같이 맑고 투명한,
아득히 흔들리는 불빛 더듬어
마음의 길 하나 트면서 가리.

 

이 세상 안개 헤치며, 따스하고 높게
이마에는 푸른 불을 달고서,








              - 이 영 춘

 

문득문득 오던 길을
되돌아본다
왠가 꼭 잘못 들어선 것만 같은
이 길

 

가는 곳은 저기 저 계곡의 끝
그 계곡의 흙인데
나는 왜 매일매일
이 무거운 다리를 끌며
가고 있는 것일까

 

아, 돌아갈 수도
주저앉을 수도 없는
이 길.



원효대사가 깨달음을 얻은 곳 당성 (?)

  원효대사가 해골에 괸 물을 마시고 깨달음을 얻은 장소가 화성시 서신면 상안리의 당성(唐城) 일대라는 학설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중앙대 역사학과 진성규 교수가 문헌 기록과 대중 교역현황 분석 등을 통해 이같은 주장을 제기하며 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모으고 있다. 진 교수는 지난 8일 수원대학교에서 화성시, 화성문화원, 해외민족연구소가  '당성의 어제, 오늘 그리고 내일'을 주제로 공동주최한 학술회의에서 중국 송대(宋代)의 승려인 찬녕(贊寧)의 저술 송고승전(宋高僧傳)을 인용해 "원효가 의상과 같이 당나라로 유학을 떠나기 직전에 잠을 청했던 곳은 당성 즉, 지금의 남양만 일대이다"고 주장했다.


  그는 "송고승전에 의상이 바다의 바다의 관문인 당주(唐州) 지역에 도착해 큰 배를 구해 창파를 건네려고 했다는 기록이 보이는데, 여기서 당주는 당성을 말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진 교수는 또 삼국사기의 기록을 토대로 "원효가 의상과 함께 당 유학길에 올랐던 661년, 당성은 신라가 중국과 왕래하는 교통의 요충지였다"면서 "원효는 이곳에서 배를 타고 당나라로 건너갈 예정이었다"고 말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현재 당성이 있는 화성시 서신면을 비롯한 남양만 일대는 본래 백제 땅이었으나 고구려 장수왕이 한성을 점령하면서 당성군(唐城郡)이라고 하였고, 이후 신라의 영토로 바뀐뒤 경덕왕때 당은군(唐恩郡)으로 개명됐다.










이 길을 가자꾸나, 가는 대로 가자꾸나.
흐르는 물줄 따라 나는 새 벗이 되어
가다가 해 저물거든 돌베개에 쉬자꾸나.
나 바람은 내 그림자, 창천(蒼天이 내 뜻인저
공명(功名)이 허망커니 부귀(富貴) 그 더 믿을 것이
초야(草野)에 지기(知己) 많으니 복지(福地) 옌가 하오.
                      - 김홍섭 전원풍물첩(田園風物妾)



길처럼

            -  박 목 월


머언 산 구비구비 돌아갔기로
山 구비마다 구비마다

절로 슬픔은 일어...


뵈일 듯 말 듯한 산길

산울림 멀리 울려나가다
산울림 홀로 돌아나가다
어쩐지 어쩐지 울음이 돌고
 
생각처럼 그리움처럼...

길은 실낱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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