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 오늘 하루는 어땠나요 아무렇지도 않았나요 혹시 후회하고 있진 않나요?
올해도 몇일 남지 않은 2012 · 12 · 23 일요일
전국에 한파주의보가 내리고 일부지역에는 폭설주의보도 발령되었다. 그래도 달렸다
엄청 추운 일요일이라지만 무장을 단디하고 달렸다
방한복 & 벙어리 장갑과 두툼한 방한화를 신고 달렸기에 그리 추운줄은 몰랐으나 이동구간 군데 군데 도로변이 얼었기에
인천대공원에서 이곳 저곳을 돌아다니며 사진 촬영하고 놀다가 집으로 돌아왔다
그래 도로보다는 차라리 공원이나 산길 들길은 오히려 덜 위험하더군요
▲ 눈위를 달리니 뽀드득 뽀드득 소리가 참 좋았습니다 ⓒ 2012 한국의산천
인디언은 12월을 이렇게 말했다
침묵하는 달 / 크리크 족
나뭇가지가 뚝뚝 부러지는 달 / 수우족
무소유(無所有)의 달 / 퐁카 족
첫 눈발이 땅에 닿는 달 / 동부 체로키 족
나무껍질이 갈라지는 달 / 수우 족, 북부 아라파호 족
하루종일 얼어붙는 달 / 벨리 마이두 족...
그래 하루종일 얼어붙으며 또 하루가 지난다.
겨울속으로 달리기 준비물.
조그만한것을 아끼면 큰것을 놓친다.
심플합니다. 이것만 있으면 혹한기 라이딩 걱정없습니다
우리가 보호해야 할것 3대 요소는 귀/ 손 / 발 ... 입니다.
▲ 겨울 라이딩을 즐겁게 하기 위한 준비물 ⓒ 2012 한국의산천
방한복 상·하의( 바지와 상의는 원단 앞면이 바람이 통하지 않습니다. 후면만 바람이 통합니다.
흔히 말하는 일명 기모바지는 방풍쫄바지와는 다릅니다
방풍바지 정말 중요합니다. / 발목이 긴 클릿 달린 고어텍스 방한화 / 두터운 장갑( 고어텍스 벙어리 장갑 참 좋습니다) / 고글 ( 눈 위를 달리려면 눈이 시렵습니다) / 귀마개 / 비니 & 라이너 & 넥워머 기타 등등...
▲ 인천대공원 백범광장 입구에서 ⓒ 2012 한국의산천
踏雪野中去(답설야중거) 눈 내린 들판을 걸어 갈 때
不須胡亂行(불수호란행) 발걸음을 함부로 어지러이 하지마라.
今日我行跡(금일아행적) 오늘 내가 걸어간 이 발자국은
遂作後人程(수인후인정) 뒷사람의 이정표가 될것이다..
서산대사 휴정스님의 시로서 근래 일각에서는 조선후기 문신인 이양연의 시라는 설도 있다.
1948년 남북협상 길에 나선 백범 김구 선생님이 38선을 넘을 때 이 시를 읊으며 자신의 의지와 각오를 다졌다고 합니다. 이후에도 김구 선생님은 이 구절을 즐겨 쓰셨다고 합니다.
▲ 이제 12월이 간다. 이천십이년하고는 헤어져야만 하나보다? 아직도 일주일 남았군요. 알차게 ... ⓒ 2012 한국의산천
2012년하고 헤어진 다음날은 어떨까? - 이현우
그대 오늘 하루는 어땠나요 아무렇지도 않았나요 혹시 후회하고 있진 않나요 다른 만남을 준비하나요
사랑이란 아무나 할수 있는게 아닌 가봐요. 그대 떠난 오늘 하루가 견딜수없이 길어요.
날 사랑했나요 그것 만이라도 내게 말 해줘요. 날 떠나가나요 나는 아무것도 할수 없어요.
어제 아침엔 이렇지 않았어요. 아무렇지도 않았어요. 오늘 아침에 눈을 떠보니 많은것이 달라져있어요.
사랑하는 마음도 함께 가져갈수는 없나요 아무일도 없던 것처럼 돌아올수는 없나요
날 사랑했나요 그것 만이라도 내게 말 해줘요. 날 떠나가나요 나는 아무것도 할수 없어요.
▲ 그대 그 무엇이 아쉬워 아직도 가을의 잔영으로 남아있는가. 그대 진정 떠나는거야? ⓒ 2012 한국의산천
사랑이란 아무나 할수 있는게 아닌 가봐요. 그대 떠난 오늘 하루가 견딜수없이 길어요.
날 사랑했나요 그것 만이라도 내게 말 해줘요. 날 떠나가나요 나는 아무것도 할수 없어요.
설야 (雪夜)
-김광균
어느 먼 곳의 그리운 소식이기에
이 한밤 소리없이 흩날리느뇨
처마 끝에 호롱불 여위어 가며
서글픈 옛 자취인 양 흰 눈이 내려
하이얀 입김 절로 가슴에 메어
마음 허공에 등불을 켜고
내 홀로 밤 깊어 뜰에 내리면
먼 곳에 여인의 옷 벗는 소리
희미한 눈발
이는 어느 잃어진 추억의 조각이기에
싸늘한 추회(追悔) 이리 가쁘게 설레이느뇨
한 줄기 빛도 향기도 없이
호올로 차단한 의상을 하고
흰 눈은 내려 내려서 쌓여
내 슬픔 그위에 고이 서리다.
▲ 몇해전에 Daum에서 만들어준.. 별로 사용할 일이 없어서 명함 2통이 아직도 그대로 남아있네 ⓒ 2012 한국의산천
성호 부근(星湖附近)
- 김 광균
양철로 만든 달이 하나 수면(水面) 위에 떨어지고,
부서지는 얼음 소리가
날카로운 호적(胡笛)같이 옷소매에 스며든다.
해맑은 밤바람이 이마에 내리는
여울가 모래밭에 홀로 거닐면
노을에 빛나는 은모래같이
호수는 한 포기 화려한 꽃밭이 되고,
여윈 추억의 가지가지엔
조각난 빙설(氷雪)이 눈부신 빛을 발하다.
2
낡은 고향의 허리띠같이
강물은 길ㅡ게 얼어붙고
차창에 서리는 황혼 저 멀ㅡ리
노을은
나어린 향수처럼 희미한 날개를 펴고 있었다.
3
앙상한 잡목림 사이로
한낮이 겨운 하늘이 투명한 기폭(旗幅)을 떨어뜨리고
푸른 옷을 입은 송아지가 한 마리
조그만 그림자를 바람에 나부끼며
서글픈 얼굴을 하고 눈둑 위에 서 있다.
외인촌
-김광균
하얀 모색(暮色) 속에 피어 있는
산협촌(山峽村)의 고독한 그림 속으로
파아란 역등(驛燈)을 달은 마차(馬車)가 한 대 잠기어 가고,
바다를 향한 산마룻길에
우두커니 서 있는 전신주(電信柱) 우엔
지나가던 구름이 하나 새빨간 노을에 젖어 있었다.
바람에 불리우는 작은 집들이 창을 내리고,
갈대밭에 묻히인 돌다리 아래선
작은 시내가 물방울을 굴리고
안개 자욱한 화원지의 벤치 위엔
한낮에 소녀들이 남기고 간
가벼운 웃음과 시들은 꽃다발이 흩어져 있다.
외인 묘지(墓地)의 어두운 수풀 뒤엔
밤새도록 가느란 별빛이 내리고,
공백한 하늘에 걸려 있는 촌락(村落)의 시계(時計)가
여윈 손길을 저어 열시를 가리키면
날카로운 고탑(古塔)같이 언덕 우에 솟아 있는
퇴색한 성교당(聖敎堂)의 지붕 우에선
분수(噴水)처럼 흩어지는 푸른 종 소리. <조선 중앙 일보>(1935)
주문한 책이 도착했다
이제 책을 읽으며 졸다가 자야겠다....
발터 보나티는 갔어도 그의 등반 정신과 궤적은 영원하리
등반을 하면서 보나티라는 장비를 사용하지 않은 사람은 드물것이다. 핔켈과 아이스햄머, 아이스 바일 스크류... 등등의 빙벽장비와 카라비너, 하강기, 하켄 심지어 헬멧과 봉봉에도 그의 이름이 붙어있던 것을 기억한다. 리카르도 케신과 함께....
▲ 내 생애의 산들 (Berge meines Lebens ) ⓒ 2012 한국의산천
책 표지 : 젊은 시절의 보나티가 로프 한 줄을 허리에 매고 알프스 빙하의 크레바스를 건너뛰고 있다.
발터 보나티는 우리 산악계에 일찍부터 알려져 있었다.(나는 월터 보니티로 기억하고있다)
보나티는 이탈리아 태생으로 알피니즘에 대해 이야기할때에 그의 이름을 떠올리지 않을수없는 인물이다. 가스통 레뷰파 그리고 머머리, 그리고 하얀거미의 하인리히 하러, 헤르만불, 그리고 월터보나티는 내가 등산을 시작하며 제일 먼저 나의 가슴에 기억된 산악인들이다.
리카르도 카신과 보나티, 이 두 거인은 하인리히 하러, 헤르만 불, 가스통 레뷔파 등과 1950~1960년대 알프스를 무대로 찬란한 ‘컨스텔레이션(constellation)’을 이루고 있었다. 그 무렵 그들이 이룩한 알피니즘의 역사를, 그들이 새로 연 눈부신 장(章)을 우리는 결코 잊지 못하는데, 그 한가운데 보나티가 우뚝 서 있었다. 라인홀트 메스너가 아직 등산에 눈을 뜨기 전의 이야기다.
그 거인들이 알프스를 독무대로 삼고 활약하던 20세기 중엽은, 아놀드 런이 그의 <등산 100년사>에 쓴 대로 히말라야에서 8,000m급 고봉들이 이제 문을 열기 시작한 ‘위대한 10년’을 기록하고 있었다.
이 위대한 10년은 모리스 에르조그의 안나푸르나 등정으로 비롯되지만, 그중에서 가장 돋보인 것은 헤르만 불의 낭가파르바트 단독 초등이다. 그것은 1953년 일인데, 바로 1년 뒤에 문제의 이탈리아 원정대의 K2 등정이 있었다. 이때 그들은 70일간의 악전고투 끝에 초등을 이루지만, 그 결정적 역할을 담당한 것이 다름 아닌 보나티였다. 24세의 최연소자인 보나티가 현지 고소 포터들이 손든 산소통 운반을 8,000m 고소의 어려움을 이겨내며 끝내 공격조를 지원했던 것이다. 그런데 보나티는 원정대에서 냉소·무시 당하고 게다가 근거 없는 모함으로 완전히 묵살당했다. 이에 대해 훗날 리카르도 카신은 당시 K2의 성공은 오로지 보나티의 공이라고 그의 손을 들어주었다.
▲ 이 글과 사진을 보며 어느해 11월 선인의 박쥐코스를 오르던중 갑자기 흰눈이 펑펑내려 아주 어렵게 하강했던 기억이 되살아 난다. ⓒ 2012 한국의산천
눈이 내리고 바람이 불며 너무 추웠다. 힘들게 하산을 하여 도봉산 할머니 가게에 들르니 죽으려고 했느냐고 아주 혼났던 기억이 난다
할머니가게에서 파전에 막걸리를 마시고 뒷방에서 군불을 넣고 한잠을 자고 집으로 귀가했던 추억이 다시금 떠오른다. 그 도봉산 할머니도 하늘나라도 가신지 꽤 오래되었다.
메스너의 세계보다 한 세대 앞서고 한 차원 더 높은 등산철학
발터 보나티 ( 1930년 ~2011년 8월13일) 81세에 암으로 세상을 떠나다.
발터 보나티를 논할 때 가장 중시되는 것은 언제나 1954년 K2 원정이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보나티의 알피니스트로서의 생애에 일대 전환기가 온다. 즉 보나티는 그 충격과 분노로 영원히 역사에 남는 드류 단독 등반에 나섰던 것이다. 몽블랑산군에서 불가능한 첨봉으로 우뚝 솟은, 일명 ‘돌의 불꽃’이라는 드류 남서릉을 보나티는 5일간에 걸쳐 단독 초등해 세상을 놀라게 했다. 그리하여 알프스 등반사에 ‘보나티릉’으로 영원 불멸한 이름을 남겼다.
이 일로 보나티는 1950년대 후엽, 이탈리아 최고의 클라이머로 널리 인정되었는데, 알피니스트로서의 그의 참모습은 1961년의 몽블랑 프레너이 중앙릉 사태에서 그대로 나타났다. 이 문제의 프레너이릉은 쿠르마이유 몽블랑에 솟은 직벽 중 하나로 붉은 주상(柱狀) 암릉인데 아무도 접근할 생각을 하지 못하던 곳이다.
보나티는 동료들과 셋이서 1961년 7월에 이곳으로 가다가 프랑스 등반대 4인조와 만나, 산악인의 우정으로 국경을 초월하고 한 팀이 되었다. 그런데 등반 중 불의의 기상 악화로 그들은 6일 동안 오도 가도 못한 채, 그야말로 악전고투했다. 그 난데없는 불행 상태에서 언제나 선도적 역할을 한 것은 보나티였는데, 그들은 결국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의 보나티의 노력과 동료들의 처참한 모습은 그가 남긴 기록을 보는 수밖에 없는데, 결국 그런 와중에서 다섯이 죽고 프랑스대의 리더였던 피에르 마조가 빈사 상태에 빠졌다. 이 무서운 지옥 속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보나티뿐이었다.
발터 보나티의 명성은 이 몽블랑 프레너이릉 사고로 알피니즘 세계에서 불멸의 자리를 차지했다. 훗날 월터 안스워스는 <북벽, 알프스의 재정복>이라는 책에서 ‘보나티는 드물게 보는 기술과 노력의 조화로 열광적인 개성을 갖추고 있다. 위대한 승리, 위대한 비극이 있는 곳에 그의 이름이 항상 붙어다닌다. 보나티의 루트를 오르는 것을 클라이머들이 자기 능력을 재는 하나의 기준으로 삼았다’고 썼다.
보나티의 타계에 즈음해 라인홀트 메스너가 "보나티야말로 천재적이고 비범한 자연 애호가"라고 말했다고 최근 독일의 시사지 <슈피겔>이 전했다. 보나티의 책 종장(終章)에 그가 다시 몽블랑을 찾아가는 글이 나오는데, 이 장면은 산행위와 달리 그의 시문학적인 산문으로, 특히 몽블랑 산록의 야생화와 전원풍경 같은 자연에 대한 묘사가 돋보인다. 평생을 거칠게 살아왔을 그에게 이런 정다운 자연인의 모습이 있었다는 것이 오히려 이상하게 느껴졌다. 이때 몽블랑은 그의 등산의 무대가 아니고 그가 그리워하던 'mother nature(마더 네이처)', 즉 어머니 같은 자연이었으리라.
▲ 이렇게 멋진 친구가(젊은날) 지난해 천수(?)를 다하고 하늘 나라로 갔다. 그 이름은 월터 보나티 향년 81세 ⓒ 2012 한국의산천
내 생애의 산들
발터 보나티 지음|김영도 옮김|조선매거진|352쪽|1만5000원
"나를 여러모로 시험해서 나 자신과 나의 힘을 알려고 하는, 누구나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는 욕구를 내 경우에는 산이 채워주었다."
지난해 타계한 이탈리아의 전설적인 산악인 발터 보나티(1930~2011)가 1994년에 펴낸 자전적 등반기. 1977년 에베레스트 원정대장을 역임한 김영도 대한산악연맹 고문이 번역했다.
보나티는 한마디로 '고집쟁이 산악인'이었다. 그에게 등산이란 "인간 능력의 범위에서"였다. 즉 '신비스럽고 미지의 것, 그리고 불가능해 보이는 것을 자신의 몸과 최소한의 장비 그리고 상상력, 관찰력, 판단력으로 헤쳐나가는 것'이었다.
그는 1930년대 무르익은 고전적 알피니즘의 신봉자였다. 보나티는 돌이나 얼음에 박아넣는 하켄과 쐐기, 로프 정도로 1950~60년대 만년설로 뒤덮인 알프스와 히말라야를 누볐다. 하지만 산악인으로서 한창때인 1965년 그는 돌연 산을 떠났다. 기술의 발달과 함께 '불가능을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불가능을 제거'하려는 산악계의 관행에 환멸을 느꼈다.
그는 과도한 첨단장비를 이용하고 스폰서가 요구하는 방식의 극단적인 등반을 하는 것은 모험이 아니라 '속임수' '사기행위' '사도(邪道)'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는 사이 그는 어느새 외톨이가 됐다.
이 책에선 그가 18세 때 처음으로 등산에 나선 이후 정복하거나 실패한 알프스의 산들과 히말라야의 산들, 그리고 산을 떠나며 남긴 글, 54세 때인 1984년 다시 몽블랑으로 돌아온 사연, 1986년 마지막으로 파타고니아로 떠났던 등반기가 20장에 걸쳐 펼쳐진다.
거대한 바위벽에 매달려서 며칠씩 보내야 하는 과정은 인간의 한계를 시험하는 무대. 생사가 손짓 한 번, 발놀림 한 번에 갈리는 순간, 로프에 매달려서 밤을 새워야 하고, 하켄을 박다가 잘못 때린 손가락에선 피가 철철 흐르고 감각도 무뎌진다. 몽블랑 정상에서 크리스마스를 맞으며 저 아래 샤모니 마을의 불빛에 상념에 젖는다. 1954년 히말라야 K2 원정대에 막내로 참가했을 때 20㎏짜리 산소통을 메고 해발 8000m 눈밭을 헤매며 "아 이놈의 산소통! 이 지긋지긋한 산소통들! 그놈의 무게 때문에 찌부러질 듯했고…"라는 극한의 순간에 다다른 사나이의 절대고독을 느낄 수 있다.
"산은 누구의 것도 아니다. 그러나 경험이라는 것은 사람에게 속해 있다. 산은 누구나 오를 수 있으나 자기의 체험은 남에게 빼앗기지 않는다"는 보나티는 "몽블랑은 나에게 아버지 같은 존재"라고 말한다. "때로는 꾸지람을 들었지만 지나치게 엄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던" 아버지라는 것. 사전지식이 없는 독자들에겐 산악·장비용어가 걸림돌일 수 있겠다. 하지만 산을 인생의 교과서 삼아 원칙을 고집했던 산 사나이의 진정성을 이해하기에는 어려움이 없다. - 김한수 기자
한 세상 같이 놀던 알프스의 거인들이 벌써 가고 보나티만 남았었는데 이제 그도 떠나고 말았다. 그리고 남은 것은 오직 알피니스트 보나티의 궤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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