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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거친호흡 몰아쉬며 ^^ 굽이치는 산맥넘어 손의 자유, 발의 자유, 정신의 자유를 찾는다. 기억은 희미해지기에 이곳에 기록을 남긴다
MTB등산여행

경복궁 답사 1

by 한국의산천 2012. 9. 10.

'하늘이 내린 큰 복'이라는 뜻을 지닌 경복궁

 

 

▲ 경복궁에 관련된 자료를 찾아서 쓰려니 시간이 많이 걸리는군요. 천천히 작성하겟습니다 ⓒ 2012 한국의산천  

 

 

수많은 백성들이 모여 살 도읍지와 나라 임금이 거처하며 만조 백관을 거느리고 정사를 보살펴야 할 궁터는 터 중에서도 가장 크고 높은 터로서 한 나라의 흥망 성쇄를 좌우한다.

풍수지리설에서 산은 용(龍)을 비유한다.

이상적인 도읍지의 형세는, 주산(主山)을 이루는 조산(助山)의 형세가 귀하고 수려한 모습을 갖추어야 하며, 조산으로부터 주산에 이르는 산줄기의 길이가 적어도 1~400리 이상은 벗어나되, 1000리를 벗어날 만큼 길면 길수록 좋다. 

 

그 맥은 마치 살아 움직이는 듯한 생룡(生龍)의 모습과도 같아서 활동하고 변화하는 형태라야 한다. 아울러 이러한 용의 형세를 한 산맥들이 세력을 떨치면서 사방에서 모두 도읍지로 집중하고 그 도읍지를 호위하는 형태를 이루어야 한다.

 

또한 주작 곧 도읍지의 앞산(안산)은 명당의 앞쪽이 되므로 따뜻한 기운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너무 크거나 너무 높아서도 안 된다. 그리고 주산에 대하여서도 마치 신하가 임금을 대하는 모습과 같은 형태를 지녀야 한다.

좌청룡, 우백호는 봉황이 양날개를 펴듯이 다정하게 도읍지를 향하여 마주보는 형태를 지녀 바람을 감싸주고 그 땅의 생기를 보호하는 형국이라야, 그 도읍지 안에 따뜻한 기운이 모여 자비 광명이 가득 넘치게 된다. 그럼으로써 임금은 바른 정치를 하고 만백성들은 편안히 태평성대를 구가할 수 있는, 아름답고 이상적인 명당의 형세를 제대로 갖춘 곳이 되는 것이다.

 

 

이러할진대, 그렇다면 정도 600년이라는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우리의 서울은 과연 어떠한가?

서울을 상징하는 산들을 살펴보면 우선 서울의 종산격인 북한산이 있다. 그리고 그 북한산에는 백운대, 국망봉(망경대), 보현봉, 문수봉, 원효봉, 의상봉, 비봉, 노적봉과 같은 빼어난 봉우리들이 제각기 그 힘찬 기세를 자랑하고 있다.

 

양주에서 바라보면 백운대, 인수봉, 국망봉, 세 봉우리가 마치 3개의 뿔이 솟아오른 것 같다 하여 일명 ‘삼각산’이라고도 한다. 조선 개국초에 무학대사가 국망봉에 올라 북한산 일대의 봉우리에 상서로운 기운이 왕성하게 서린 것을 보고 도읍지로 삼을 것을 태조 이성계에게 아뢰었다는 일화가 유명하다.

북한산의 서남쪽으로는 강하게 융기된 북악산이 북한산의 품에 안기듯 자리잡고 있는데, 그 산자락을 배경으로 궁터를 잡아 ‘만년토록 큰 복을 누린다’는 뜻을 지닌 경복궁이 조선 왕조의 정궁으로 건립되었다.

 

현재 서울의 주산격이며 경복궁과 청와대를 안고 있는 북악산(北嶽山)은 그 기세가 백두산으로부터 시작되어 금강산을 거쳐 도봉산, 북한산을 일으키고 다시 만경대로 뻗은 산맥이 기를 받아 멈춘 곳이다. 조선 시대에는 이 산 위에 삼각산 신과 백악산 신을 모셨었다고 한다.

또한 산 아래 줄기에는 청와대와 경복궁이 자리잡고 있으며, 동남쪽으로는 삼청 공원이 있고, 좌청룡에 해당하는 낙산이 있다. 서남쪽으로는 도성의 우백호에 해당하는 인왕산이 있다. 정면으로는 약간 멀리 떨어져 있는 남산이 안산격으로 나즈막히 적당한 산세로 서 있다.

 

이러한 북한산과 북악산 일대의 장엄한 형세를 보고 한국 풍수의 대가로서 최고로 정통했던 신라말 도선국사는 이 산이 장차 궁궐의 주룡(主龍)이 될 것이라 예언하면서 명산으로서 천하 제일의 명당이라 칭하였다. 고려 때부터 이곳에는 궁궐의 서기가 떠 있었다고 말할 정도었으며, 그래서 남경 이궁의 터로 잡기도 하였다.

이처럼 고려 초부터 북악산을 오덕구의 하나인 명당 길지(明堂吉地)로 보아 온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따라서 서울이 도읍지로서의 영광을 누리게 되는 것은 이미 운명지어진 것이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 때문에 무학대사는 이곳에 왕기가 서려 있다 하여 태조 이성계로 하여금 도읍지로 삼게 하였던 것이 아니겠는가. - 물처럼 출판사-

 

▲ 금천의 냇물을 타고 들어오는 잡귀를 막기위해 지키고있는 천록 ⓒ 2012 한국의산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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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터 - 신형원

저 산맥은 말도없이 오천년을 살았네  모진바람을 다 이기고 이터를 지켜왔네
저강물은 말도없이 오천년을 흘렸네  온갖 슬픔을 다 이기고 이 터를 지켜왔네

설악산을 휘휘돌아 동해로 접어드니 아름다운 이 강산은 동방의 하얀나라
동해바다 큰태양은 우리의 희망이라  이 내몸이 태어난나라 온누리에 빛나라
자유와 평화는 우리 모두의 손으로  역사의 숨소리 그 날은 오리라
그날이 오면은 모두 기뻐하리라  우리의 숨소리로 이터를 지켜나가자

한라산을 올라서서 백두산을 바라보면  머나먼 고향을 생각하니 가슴이 뭉클하구나
백두산의 호랑이야 지금도 살아있느냐?  살아있으면 한번쯤은 '어흥'하고 소리쳐봐라
얼어붙은 압록강아 한강으로 흘러라  같이만나서 큰 바다로 흘러가야 옳지않겠나
태극기의 펄럭임과 민족의 커다란 꿈  통일이여 어서오너라 모두가 기다리네
흘러라 흘러라 우리의 노래를 그날이 오도록 모두함께 부르자
무궁화 꽃내음 삼천리에 퍼져라 그날은 오리라 그날은 꼭 오리라

 

 

경복궁 (위치: 서울특별시 종로구 사직로 22 )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다섯 개의 궁궐 중 첫 번째로 만들어진 곳으로, 조선 왕조의 법궁이다. 한양을 도읍으로 정한 후 종묘, 성곽과 사대문, 궁궐 등을 짓기 시작하는데 1394년 공사를 시작해 이듬해인 1395년에 경복궁을 완성한다. ‘큰 복을 누리라’는 뜻을 가진 ‘경복(景福)’이라는 이름은 정도전이 지은 것이다. 왕자의 난 등이 일어나면서 다시 개경으로 천도하는 등 조선 초기 혼란한 정치 상황 속에서 경복궁은 궁궐로서 그 역할을 제대로 못하다가 세종 때에 이르러 정치 상황이 안정되고 비로소 이곳이 조선 왕조의 중심지로 역할을 하게 된다.

 

  경복궁은 임진왜란 때 불이 나 무너지게 되는데 조선 말 고종 때 흥선대원군의 지휘 아래 새로 지어진다. 경복궁 중건을 통해 조선 왕실의 위엄을 높이고자 하였지만 얼마 되지 않아 건천궁에서 명성황후가 시해되는 사건이 일어난다. 신변의 위협을 느낀 고종이 이곳을 떠나 러시아공사관으로 가게 되니, 단청의 색이 채 마르기도 전에 또 다시 빈집이 되어 버리는 비운을 겪는다.

 

  일제 때 중앙청이라 불렸던 조선총독부 건물을 경복궁 내에 만듦으로써 조선 왕조의 상징을 훼손하고 조선의 자존심을 무너뜨렸으며, 정문인 광화문 또한 해체해 지금의 건춘문 자리 근처로 옮겨버렸다. 광화문은 이후 1968년 복원되는데 당시 남아 있던 중앙청 자리를 기준으로 해서 세우다 보니 원래 경복궁 건물들이 이루고 있는 선상에서 벗어나 삐뚤게 놓이게 되었다. 현재 다시 제자리를 찾아 복원하였다.

 

 

택리지에는 태조가 지금의 서울에 도읍지를 정한 연휴가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있다

 

조선이 왕조를 물려받은 뒤, 태조 이성계는 중 무학을 시켜 도읍터를 정하도록 하였다. 무학이 백운대에서 산맥을 따라 만경대에 이르고, 다시 서남쪽으로 비봉에 갔다가 한개의 비석을 보니 '무학오심도차(無學誤尋到此)'라는 여섯 글자가 크게 새겨져 있었다. '무학이 맥을 잘 못찾아서 여기로 온다'는 뜻으로 곧 도선이 세운 것이었따. 무학은 길을 바꾸어 만경대에서 정남향의 줄기를 따라 바로 백악산 밑에 도착하였다. 세 곳의 맥이 합쳐져서 한 들에 모이게 된것을 보고 드디어 궁성 터로 정하였는데, 바로 그곳이 고려 때 오얏나무를 심었던 곳이었다.

 

  궁성터를 정한 뒤 외성을 쌓으려고 하였으나 성의 원근 경계를 결정지을 수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큰 눈이 내렸는데, 바깥쪽은 눈이 쌓이고 안쪽은 눈이 녹아 사라지는 것이었다. 태조가 이상하게 여겨서 눈을 따라 성터를 정하도록 명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지금의 성 모양이다. 비록 산세를 따라서 성을 쌓은 것이나, 정동방과 서남쪽이 낮고 허약하다. 또 성 위에 작은 담을 만들지도 않았고, 호도 파지 않았다. 그리하여 임진년과 병자년의 두 난리 때 모두 도성을 지켜내지 못하였다. 

 

 

숙종이 재임하던 을유년에 조정에서 도성을 고쳐 쌓기로 의논이 있었으나 "동쪽이 너무낮은데 만약에 강을 막아서 그 물을 성에다 댄다면 성 안 사람은 모두 물고기 신세가 될 것이다 라는 말이 있어 의논은 중지되고 말았다. 그렇지만 이곳은 300년 동안이나 명성과 문화의 중심지가 되어 유풍을 크게 떨치고 학자가 무리지어 나왔으니 엄연한 하나의 작은 중화를 이루었다.

 

결국 1934년 12월에 태조 이성계는 정도전에게 한양 천도 건설을 명하였다. 정도전은 한양을 건설하면서 북악 아래에 경복궁을 정남으로 향하게 지었고, 그앞에 남쪽으로 큰 도로를 내어 길 양쪽에는 의정부, 육조 등 중요 중앙관청을 세웠다. 그리고 산줄기를 따라 북악산 인왕산 남산 낙산을 잇는 도성을 쌓고 도성의 출입을 위하여 큰 문 4개와 작은 문 4개를 동서남북에 내었다. 한양을 한성이라고도 하였는데 한성은 성 안과 성 밖 10리까지가 포함되었다.

 

 

  광화문을 지나 안으로 들어서면 경복궁의 중심인 근정전을 만난다. 2층 월대 위에 장엄하게 서 있는 건물로 임금의 권위를 상징하는 건물이자 공식 행사나 조회 등에 사용한 건물이다. 근정전 월대 난간에는 주작, 백호, 현무, 청룡이 각 방위에 따라 새겨져 건물을 지키고 있다. 근정전 뒤로는 임금의 사무실이라 할 수 있는 사정전과 침실인 강녕전, 왕비가 거처하였던 교태전이 이어진다.

 

 

 

▲ 근정전 안에 있는 어좌와 일월 오봉병 ⓒ 2012 한국의산천

 

일월오봉병

어좌의 배경으로는 ' 일월오봉병 '이 있다. 일월오봉병은 하늘에 걸려 있는 붉은 해와 흰 달, 청록색의 다섯 봉우리의 산, 골짜기에서 흘러내리는 두 줄기의 폭포, 붉은 수간(樹幹)에 녹색의 무성한 잎을 가진 소나무, 그리고 파도와 포말이 출렁이는 물을 소재로 하여 그린 그림을 말한다.

 

오일월오봉병이란 국왕의 용상뒤에 치는 병풍이다. 국왕은 정전에 앉았거나 멀리 능행을 떠나도, 궁중의 실내용 뿐만 아니라, 왕이 거동하여 임시로 머무는 장소, 예컨대 전시(殿試)를 치르는 과거 시험장 등 야외에도 혹은 죽어서 빈전에 누웠거나 어진이 벽상에 걸렸을 때에도 반드시 일월오봉병을 친다. 이렇듯 일월오봉병은 왕의 주변을 장엄하는 그림으로 사용되었다. 따라서 '일월오봉병'은 왕이 임하는 장소이면 어떤 곳이든 필요에 따라 설치되었던 장엄용 그림이라 말할 수 있다

 

일월오봉병은 현재 경복궁 근정전을 비롯하여, 창경궁 명정전, 덕수궁 중화전, 창덕궁 인정전 등 각 궁의 정전(正殿)의 어좌(御座) 뒤쪽 뿐만 아니라, 창덕궁의 대조전 대청, 그리고 신선원전 감실(龕室) 등 정전이 아닌 침전이나 선왕을 모시는 영전(靈殿)과 행궁에 설치되어 있다.

 

일월오봉병을 세심히 보면 하늘 오른편에 붉은해, 왼편에 흰달이 떠있다. 자연현상이전에 원리 곧 음양이다.중앙에 다섯봉우리가 층차를 이루며 웅장하게 솟아있다. 오행을 뜻한다.  

 땅은 폭포가 쏟아져 이룬 못으로 좌우로 나뉘었다. 넉넉한 품새로 만물을 키운다. 그중 인간이 가장 신령하고 도덕적인 존재로 천지인 삼재(三才)를 이룬다. 그러므로 국왕이 병풍의 중앙에 똑바로 앉을때만 비로소 왕(王)자를 이루면서 삼재(三)를 수직으로 관통하는 우주의 질서가 완성되는 것이다.  

 일월오봉병에는 음양오행뿐만 아니라 건태리진손감간곤의 팔괘도 들어있다. 건은 하늘,태는 못, 리는 해, 진은 좌우에 솟은 붉은 소나무, 손은 파도를 출렁이게하는 바람, 감은 달, 간은 산, 곤은 땅이다.

 

 

 

 

 

근정전을 바라보고 왼편으로 긴 회랑을 통과하여 나가면 연회의 장으로 사용되었던 경회루를 보게 된다. 인공 연못 위로 지어진 2층 누각 건물로, 남아 있는 목조 건축물 중에서 크기로도 또 아름답기로도 손에 꼽히는 건물이다. 

 

 

▲ 경회루 ⓒ 2012 한국의산천 

경회루는 태종 12년에 세워졌으며 사신을 위한 연희나 여러 신하의 연회가 열렸던 곳이다. '신동국여지승람'에 " 경회루는 사정전 서쪽에 있으며 주위에는 못을 만들었다. 못은 깊고 넓으며 연꽃을 심었고 그 가운데 두섬이 있다"고 기록되어있다.

 

▲ 1970년쯤인가? 중학교 시절 겨울방학때는 이곳에서 아버지가 사주신 쎄이버 스케이트를 타곤했었다. 어언 40여년전 이야기로군요 ⓒ 2012 한국의산천  

 

 

 

 

 

 

▲ 교태전의 후원인 아미산과 아름다운 굴뚝 ⓒ 2012 한국의산천

 

경복궁에서 빠뜨리지 말고 보아야 할 것이 교태전 아미산과 자경전 장생 굴뚝으로, 굴뚝 원래의 기능적인 역할에 더하여 여성이 거주하는 공간으로 미학적인 요소도 함께 고려한 작품이다.

 

 

아미산 굴뚝보물 제811호. 아미산(峨嵋山)의 굴뚝은 왕비의 침전인 교태전의 온돌방과 연결된 굴뚝으로, 1865년(고종 2년) 경복궁을 중건할 때 만든 것이다. 현재는 4개가 남아있는데 육각형의 굴뚝 벽에는 덩굴, 학, 박쥐, 봉황, 소나무, 매화, 국화, 불로초, 바위, 새, 사슴 등의 무늬를 벽돌로 구워 배열하였고 벽돌 사이에는 회를 발라 면을 구성하였다. 십장생, 사군자와 장수 부귀 등 길상의 무늬 및 화마 악귀를 막는 상서로운 짐승들도 표현되어 있다.

굴뚝의 윗부분은 조형전으로 목조 건물의 형태를 모방하였고 그 위로 연기가 빠지도록 점토를 빚어서 만든 집 모양의 장식을 설치하였다. 굴뚝으로서의 기능을 충실히 하면서 각종 문양의 형태와 구성이 매우 아름다워 궁궐 후원의 장식적 조형물로서 훌륭한 작품이다.

 

 

 

 

 

 

 

 

 

 

 

 

 

 

 

 

 

 

 

 

▲ 궁궐내의 각가지 장류를 보관하던 장고 ⓒ 2012 한국의산천 

 

 

경복궁 후원에 해당하는 건청궁과 향원정

 

▲ 향원정 ⓒ 2012 한국의산천 

향기가 멀리까지 퍼진다는 뜻을 가진 향원정은 1867년 대원군의 강력한 의지로 경복궁을 재건할 때 세워진것으로 추정되는 2층 정자다.   

 

▲ 향원정 ⓒ 2012 한국의산천  

 

 

▲ 향원정으로 들어서는 다리 이름하여 향기에 취한다는 뜻의 취향교 ⓒ 2012 한국의산천

 

 

 

 

 

 

 

▲ 새로 복원된 건청궁 ⓒ 2012 한국의산천 

 

경복궁 후원에 해당하는 건청궁과 향원정

 

건청궁은 명성황후 시해라는 가슴 아픈 역사를 지닌 곳이다.

건청궁은 경복궁 북쪽 가장 후미진 곳에 있다. 후원으로 불린다. 고종이 아버지인 흥선대원군의 영향에서 벗어나기 위해 사비를 털어 1873년 지었다고 한다. 다른 궁궐과 달리 단청이 없고, 사랑채와 안채, 부속건물 등으로 돼 있어 양반들의 살림집과 같은 구조로 돼 있지만, 크기가 250칸에 달해 99칸인 양반가옥과는 다르다.

 

안내를 맡은 박인주 해설사는 “이곳은 내탕금, 즉 왕의 사비로 지은 곳인데, 어린고종이 아버지 흥선대원군의 섭정을 벗어나려는 의지를 표현한 것이라고 한다”며 “실제 고종은 1885년부터 10년 동안 이곳에서 지내며 정무를 보기도 했다”고 설명했다.

그러다가 1895년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가 변을 당하자 고종은 지금의 덕수궁(경운궁)으로 거처를 옮겼다. 이후 건청궁은 주인이 없는 곳이 됐고, 1907년 일제에 강제철거 당했다. 일제는 이곳에 조선총독부 미술관을 세웠다.

 

 명성황후 처소인 곤녕합 내부에는 문화재청이 복원한 자개침대 등 궁중생활용품 300여점이 있다. 

명성황후가 시해당한 곳은 곤녕합 침전이다. 건청궁의 안채인 이곳에선 명성황후가 당시 사용했을 자개침대 등 궁궐 생활용품 300여점을 볼 수 있었다. 

 

 

 

 

 

 

 

 

경복궁 다시보기 2  / 천록, 드므. 꽃담 자경전,잡상 상세보기 >>> http://blog.daum.net/koreasan/15605531

자경전(慈慶殿)
대한민국 보물 제809호. 조선 후기 흥선 대원군(興善大院君)이 경복궁 재건사업을 하던 1867년(고종4) 대왕대비 조씨를 위하여 지은 전각으로, 두 번에 걸친 화재로 불탄 것을 1888년(고종25)에 다시 지었다. 자경전의 담장은 벽돌로 모양을 내어 꾸몄는데 대왕대비 조씨를 위해 지었던 건물인 만큼 만(卍), 수(壽), 복(福), 강(康), 녕(寧) 등의 글자들과 소나무, 국화, 거북 등, 연꽃, 대나무, 모란, 국화 등의 대왕대비의 수복강녕을 기원하는 의미가 있는 문양들로 이루어져 있다. 예를들어 만(卍)의 경우 글자의 모양을 계속 그려나가면 끝이 없으므로 영원하다는 의미를 지니고, 거북 등 그림의 경우 장수하는 동물 중 하나가 거북이므로 역시 대왕대비의 장수를 기원하는 것이다. 또한 자경전의 굴뚝에는 십장생도가 그려져있는데 이 역시도 마찬가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