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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거친호흡 몰아쉬며 ^^ 굽이치는 산맥넘어 손의 자유, 발의 자유, 정신의 자유를 찾는다. 기억은 희미해지기에 이곳에 기록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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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 다시보기 2 천록, 드므. 꽃담 자경전,잡상,

by 한국의산천 2012. 9. 9.

경복궁 다시보기 2 [ 2012 · 9 · 9 · 하늘 파란 일요일 한국의산천] 

(경복궁 다시보기 1편은 내일 올립니다)

 

과거의 사실이 햇빛을 받으면 역사가 되고 달빛을 받으면 신화가 된다.

역사란 긴 세월에 걸쳐서 쌓여진 빛나는 금맥(金脈)이다. 그 금맥은 미래를 내다볼수있는 황금사다리가 되어준다.

과거가 없는 현재가 없고 역사가 없는 미래를 생각 할 수는 없다. 역사를 단순히 지나간 일로 치부할 때 미래는 보이지 않는다.

우리가 조상의 역사와 문화유산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역사를 바로 알고 우리 후손에게 물려 줄때에 우리의 미래는 빛날것이다.

 

▲ 오후가 될수록 더 많은 참관인이 입장하였다. 대부분은 외국인이었다 ⓒ 2012 한국의산천

요즘 이곳을 찾는 외국인들이 감사하고 반가울 다름이다. 부디 부디 많이 찾아주시고 즐거운 시간되시기를 바랍니다.

 

 

1392년 개성 수창궁(壽昌宮)에서 왕위에 올라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는 1394년 8월에 고려 남경(南京)의 이궁(離宮) 터에 王都를 정하고 같은 해 10월에 한양으로 천도(遷都)를 하였다. 이 때 창건한 조선의 정궁(正宮)이 경복궁(景福宮)이다.

 

▲ 메롱? 천록은 아주 선한 짐승이다. 왕의 밝은 은혜가 아래로 두루 미치면 나타난다"고 하는 전설상의 서수(瑞獸)이다 ⓒ 2012 한국의산천

 

경복궁 영제교 축대에 있는 천록(天鹿)입니다. 천록은 〈예문유취(藝文類聚)〉등 옛 문헌을 보면 "천록은 아주 선한 짐승이다. 왕의 밝은 은혜가 아래로 두루 미치면 나타난다"고 하는 전설상의 서수(瑞獸)이다라고 되어있습니다.

정수리에 뿔이 달린 천록이 혓바닥을 쏙 내민 채 아래쪽을 내려다보고 있습니다. 물을 통해 귀신이 들어오지 못하게 지키는 것이라고 하네요

 

영제교 바깥쪽 좌우에는 금천 바닥을 노려보는 짐승 4마리가 업드린 형상이 조각되어 있다. 매섭게 바닥을 노려보고 있는 듯하지만 얼굴에는 장난기가 가득한데 이 짐승들은 혹시라도 물길을 타고 잠입할 지도 모르는 사악한 것들을 물리쳐 궁궐과 왕을 수호하는 임무를 수행하고 있는 중이다.

 

천록은 머리에 뿔이 하나 돋아있고 온 몸이 비늘로 덮여 있으며 겨드랑이와 뒷다리 부근에 갈기가 선명하게 나 있는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유본예의 한경지략에 실린 경복궁 유관기에 이렇게 생긴 상상속이 동물을 천록이라 부른다고 서술되어 있다.

 

▲ 경복궁에 들어서면서 만나는 금천에 있는 '천록(天鹿)' ⓒ 2012 한국의산천

 

조선 영조 때 선비인 유득공의 아들 유본예의 <경복궁 유관기>의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날 경복궁 남문 안으로 들어갔다. 남문 안쪽에 다리가 있는데, 다리의 동쪽에 천록 두 마리가 있고 다리 서쪽에 한 마리가 있다. 비늘과 갈기가 꿈틀거리는 것처럼 완연하게 잘 조각 되어 있다. 남별궁 뒤뜰에 등에 구멍이 파인 천록이 있는데, 이와 똑같이 닮았다. 그런 관례가 없음에 비추어 필시 다리 서쪽에서 옮겨온 것이 틀림없다."  이 글의 내용으로 보면 영제교를 찾았을 때는 서수가 세마리만 있었던 것 같으나 현재는 동서로 놓여있는 다리 모퉁이에는 네마리의 서수가 있다.

 

둥글게 말린 눈썹에 머리털을 휘날리며 매서운 표정으로 물속을 노려보고 있는 석상, 머리 뒤쪽으로 뻗친 서기와 왕방울 같은 눈, 날카로운 발톱을 보면 아무리 사악한 악귀라도 도망치지 않고는 배겨낼 수가 없었을것 같은데, 이런 진지한 분위기 속에 장난질을 치는 놈이 하나 있는데, 북서쪽에 있는 천록입니다. 혀를 쑥 내밀고 있는 모양으로 조각되어 있어 웃음이 납니다. 엄숙한 궁궐에 혀를 날름 내미는 천록을 보초로 세울 수 있는 우리 조상의 혜학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천록(天鹿)' ( 참고 : 유홍준교수의 글)

우리는 경복궁의 상징적인 조각으로 해태(獬豸)상은 익히 알고 있으면서 천록(天祿 또는 天鹿)이라는 조각상에 대해서는 잘 모르고 있다. 근정문 앞 금천(禁川)을 가로지르는 영제교(永濟橋) 양옆 호안석축(護岸石築·강변의 흙이 무너지는 것을 막기 위해 돌로 쌓은 축대)에 있는 네 마리의 돌짐승이 바로 천록이다.

이 돌짐승을 혹은 해태, 혹은 산예(狻猊·사자 모습을 한 전설상의 동물)라고 하지만, 해태는 털이 있어야 하고, 산예는 사자 모양이어야 하는데 그런 특징이 보이지 않는다. 뿔이 하나인 데다 비늘이 있는 것을 보면 전형적인 천록상이다.

 

  이 돌조각은 경복궁 창건 당시부터 있었던 것으로 조선시대 뛰어난 조각 작품의 하나로 손꼽을 만한 명작이다. 다만 그 중 한 마리는 이상하게도 등에 구멍이 나 있고, 또 한 마리는 일찍부터 없어져 2001년 영제교를 복원할 때 새로 조각하여 짝을 맞춰 둔 것이다.

그런데 실학자 유득공(柳得恭·1749~?)이 영조46년(1770) 3월3일 스승인 연암 박지원(朴趾源), 선배 학자인 청장관 이덕무(李德懋)와 함께 서울을 나흘간 유람하고 쓴 〈춘성유기(春城遊記)〉에 이 돌짐승 이야기가 나온다.

 

"경복궁 옛 궁궐에 들어가니 궁 남문 안에는 다리가 있고 다리 동쪽에 천록 두 마리, 서쪽에 한 마리가 있다. 비늘과 갈기가 완연하게 잘 조각되어 있다." 그리고 이어 말하기를 "남별궁(南別宮) 뒤뜰에 등이 뚫린 천록이 있는데 이와 매우 닮았다. 필시 영제교 서쪽에 있던 하나를 옮겨다 놓은 듯한데 이를 증명할 만한 근거는 없다"고 했다. 남별궁은 지금 조선호텔 자리에 있던 별궁이었으니 이제 와서 그 돌조각을 다시 찾아낼 길은 없다.

 

 

〈예문유취(藝文類聚)〉등 옛 문헌을 보면 "천록은 아주 선한 짐승이다. 왕의 밝은 은혜가 아래로 두루 미치면 나타난다"고 하는 전설상의 서수(瑞獸)이다. 옛 궁궐에는 임금의 은혜가 백성에 미치는지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는 천록이 있었다.

 

  나는 백제 무령왕릉의 서수도 천록이 아닌가 생각하고 있다. 다만 같은 천록상이라도 무령왕릉의 천록은 이미 세상에 나타나 당당히 왕릉을 지키고 있는 모습이지만, 경복궁의 천록은 앞발에 턱을 고이고 넙죽 엎드려 있으면서 나타날까 말까 궁리중인 것 같은 형상이다.(유홍준 교수)

 

 

 

 

 

▲ 경복궁 근정전의 '드므' /  '드므'는 궁궐 건물 네귀에 설치되어있다.ⓒ 2012 한국의산천 

 

'드므'를 사투리로 '두멍'이라고도 합니다. 제 집사람은 동네 들판에 웅덩이를 '두멍'이라고 불렀다 합니다 (제 집사람 고향은 '충남 공주 이인면'입니다)

'드므'는 순우리말로 국어사전에는 "넓적하게 생긴 큰 독"이라고 나온다.이 드므는 궁궐의 화재를 막기 위해 상징적으로 비치한 물건이다. 

 

궁궐이 목재로 만들어져서 당연히 화재에는 취약하기 마련이다. '드므'는 그곳에 실제로 물을 담아 놓았기에 작은 불에는 방화용수로 사용할 수 도 있지만 실재로 방화용수로 사용되기 보다는 상징적으로 '드므'에 물을 담아 놓음으로써 불의 귀신인 화마(火魔)가 왔다가 '드므'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고 놀라서 도망친다는 속설에 따른 것이다.

 

고대 중국에서도 비슷한 물건을 비치했다고 전하는데, 이것을 '문해(門海)'라고 불렀다고 한다. 즉 문 앞에 있는 큰 바다라는 뜻으로 화재를 예방한다는 상징적인 의미로 만들어 놓았다는 것이다. '드므'와 비슷한 것으로 '부간주'라는것도 있다. 

 

 

 

 

▲ 강령전 ⓒ 2012 한국의산천

  강령전과 교태전의 지붕 하늘금에는 용마루가 없이 기와가 이쪽에서 저쪽으로 넘어간다. 용마루가 없는 이유인즉은 용(龍=임금)께서 이 집안에 계시는데 어찌 지붕에 용마루가 있을소냐?    

 

  강령전은 전각의 규모에 어울리지 않게 월대(月臺)가 무척 높고 넓습니다. 임금의 침소 앞뜰에서도 통치행위가 이루어졌다는 증좌일 것입니다. 왕비와 세자가 석고대죄를 청하던 곳이기도 하고 임금의 잘못된 정책에 대하여 조정대신들이 그 부당함을 목숨을 내놓고 바로잡기 위해 읍소하던 곳도 바로 강령전 월대였습니다.

 

▲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추녀마루에 보이는 잡상(토우) ⓒ 2012 한국의산천 

 

잡상(雜狀)

숭례문 ,덕수궁, 경복궁, 등 궁의 옛 건축물이나 성문의 추녀마루를 보면 한줄로 죽 늘어서 있는 작은 장식 인형같은것이 보인다. 엎드려 절하는 사람같기도하고 무슨 동물의 형상 같기도 하다. 바로 그것은 진흙으로 빚어 만든 여러 가지 형상의 토우(土偶·흙인형).즉 잡상(雜像)이라고 말한다. 

 

잡상은 궁전·궁궐과 관련이 있는 건물에 설치되며 궁궐이나 관아의 건물, 도성의 성문이야말로 왕조의 기강을 보여주는 것이기에 하늘에 떠도는 잡귀를 물리쳐 건물을 지키는 일. 목조 건물의 화재예방 등 잡귀를 막고자 주술적인 효과를 바라는 것으로 민간신앙의 하나라고 해석한다.

 

▲ 가까이 당겨본 잡상 ⓒ 2012 한국의산천

 

조선시대에 성행 했던 잡상은 3마리부터 11마리 까지 대개 3, 5, 7, 11의 홀수로 앉혀진다. 음양오행과 관련이 있는것일까? 음력 3월 3일(삼월 삼짇날), 5월 5일(단오端午), 7월 7일(칠월 칠석) 처럼 모두 홀수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나 맨앞에는 삼장법사의 머리같은 스타일의 인물상 (손행자)이 자리잡아 뒷자리의 잡상을 이끄는 선두가 되고 있다. 그래서 이를 삼장법사(?)라고 말하기도 한다.

잡상이 있으므로 해서 높이 솟은 추녀의 멋을 한층 더 멋지게 해주는것이 아닐까? 

 

 

 

▲ 교태전 ⓒ 2012 한국의산천 


조선 태조가 건국한 지 3년 후인 1394년에 지은 왕비의 침전으로 중앙에는 대청을, 동서 양쪽에는 온돌방을 두었다. 교태전 후원의 아미산 굴뚝은 조형미가 뛰어나 보물 811호로 지정, 보호되고 있다. 

 

▲ 왕비가 산책을 즐겼던 교태전 후원 아미산  ⓒ 2012 한국의산천 

   

교태전 뒤쪽에는 인공으로 조성된 작은 언덕이 있는데 이곳을 중국의 가장 아름답다는 산의 이름을 빌어 '아미산'이라 하였다.

아미산에는 다양한 화초를 심어 화계를 꾸미고 교태전 온돌에서 나오는  연기가 빠져 나오는 굴뚝을세웠다.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마당에 화원을 꾸미지 않아 후원이 발달하였다. 

 

▲ 교태전의 후원 아미산 ⓒ 2012 한국의산천 

교태전 안에 들어 뒷 창문을 통해 본 후원(아미산)과 아름다운 굴뚝.

 

 

 

▲ 굴뚝의 십장생 문양 ⓒ 2012 한국의산천

후원의 아미산 굴뚝은 조형미가 뛰어나 보물 811호로 지정, 보호되고 있다. 

누가 이것을 보고 굴뚝이라고 말하겠는가? 우리 선조께서 창조하신 위대하고 아름다운 예술품이 아닌가? 

 

 

▲ 아미산에 있는 아름다운 굴뚝 (보물 810호)  ⓒ 2012 한국의산천

 

왕비의 침소인 교태전 아미산峨嵋山의 굴뚝 (보물 810호)    

 
조선 태종은 경복궁 서쪽에 큰 연못을 파고 경회루를 세우고 연못에서 파낸 흙으로 교태전 뒤뜰에 인공동산을 세웠는데 이를 아미산이라 하였다. 아미산의 굴뚝은 왕비의 생활공간인 교태전 온돌방 밑을 통과하여 연기가 나가는 굴뚝으로, 지금 남아 있는 것은 고종 2년(1865) 경복궁을 고쳐 세울 때 만든 것이다. 현재 4개의 굴뚝이 서 있는데 6각형으로 된 굴뚝 벽에는 덩굴무늬, 학, 박쥐, 봉황, 소나무, 매화, 국화, 불로초, 바위, 새, 사슴 따위의 무늬를 조화롭게 배치하였다.

 

각 무늬는 벽돌을 구워 배열하고 그 사이에는 회를 발라 면을 구성하였다. 십장생, 사군자와 장수, 부귀를 상징하는 무늬, 화마와 악귀를 막는 상서로운 짐승들이 표현되어 있다. 굴뚝의 위쪽 부분은 목조건물의 형태를 모방하였고 그 위로 연기가 빠지는 작은 창을 설치하였다. 굴뚝의 기능을 충실히 하면서 각종 문양 형태와 그 구성이 매우 아름다워 궁궐 후원 장식 조형물로서 훌륭한 작품으로 평가 받고 있다.     

 

▲ 아미산의 아름다운 굴뚝 (보물 811호) ⓒ 2012 한국의산천   

 

아미산은 궁전의 깊은 후원으로 아무나 드나들 수 없는 곳이었다. 경사면에서 길게 다듬은 돌을 4단으로 쌓아 화계(花階)를 만들고 단 위에는 매화, 모란,앵두,철쭉 등의 꽃나무와 소나무와 팽나무, 느티나무를 심어 원림(圓林)을 이루며, 이 사이에는 석분, 일경대, 석연지 세심정 등의 조형물을 두었다.   

 

▲ 아미산의 아름다운 굴뚝 ⓒ 2012 한국의산천

 위 우뚝솟은 건축물은 왕비의 침전이었던 교태전 일곽의 구들과 연결되었던 굴뚝이다.

교태전 일곽의 뒤에 경회루의 연못을 판 흙을 쌓아 작은 산을 만들고 아미산이라 하였다. 여기에 2단씩의 장대석 석축을 네 층으로 쌓고 그 위에 괴석의 석분과 석지 등 석조물을 배치하였으며 주위에 화초들을 심어 후원을 조성했다.

가장 특징적인 요소는 4기의 육각형의 굴뚝이다. 굴뚝들은 화강석 지대석 위에 벽돌로 30단으로 쌓고 육각의 각면에는 네 가지 종류씩의 무늬를 구성하였다. 

 

제일 아랫부분은 벽사상을 부조한 사각형의 벽돌을 끼웠고, 그 위의 직사각형 회벽에 십장생, 사군자 또는 만자문을 조각했다. 그 위에 다시 봉황과 귀면 등이 부조된 네모 반듯한 벽돌을 끼웠고, 윗부분은 회벽에 당초문으로 구성하였다.

이들 무늬 위로는 목조 건축물의 소로와 창방, 첨차 형태로 만든 벽돌을 쌓고 기와지붕을 이었으며, 정상부에는 점토로 만든 연가를 두어 연기가 빠지도록 하였다. 물론 기능은 연기를 배출하는 굴뚝이지만, 그 형태나 위치가 마치 정원과 어울어진 환경조각품과 같이 뛰어난 조형미를 이루고 있다.

 

▲ 아미산 ⓒ 2007 한국의산천

 

교태전 후원의 굴뚝 몸통이 이렇게 굵은 이유는 굴뚝 제일 상단에 있는 연가(燃家)를 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연가가 4개이므로 4군데의 아궁이에서 나오는 연기를 내보내는 것을 각각 한군데로 모아서 만들어 놓은것이다. 

 

불과 열기 연기의 이동 순서

아궁이에서 불을 지피면 열기와 연기가 부넘이(솥을 건 아궁이의 뒷벽)를 지나 구들 고래와 구들장을 지나가며 방이 뜨거워지고 방구들 윗목에 깊게 파놓은 개자리에서 한참을 머물다가 연도를 따라 굴뚝으로 가서 연가를 통하여 바깥으로 나간다. 

 

 

 

 

 

▲ 예술적이고 아름다운 담장입니다 ⓒ 2012 한국의산천 

 

▼ 위의 담장 문양을 접사촬영해보겠습니다 ( 아래) ⓒ 2012 한국의산천  

 

▲ 입체감이 생생히 느껴지는 담벼락의 문양이군요 ⓒ 2012 한국의산천  

 

 

▲ 교태전 후문을 나오면 보이는 너른 광장과 꽃문양이 아름다운 자경전 담장이 보인다 ⓒ 2012 한국의산천

 

▲ 위 사진에서 오른쪽으로 자경전을 둘러싼 아름다운 꽃담이 보인다 ⓒ 2012 한국의산천

 

자경전 ( 보물 제 809호)

자경전은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재건하면서 교태전 동쪽 자미당 터에 조대비 (양어머니 신정황후)를 위하여 지었다.

고종10년(1873) 에 화재로 그 일대 건물들과 함께 불타 없어졌다. 이 화재 직후 곧 다시 지었으나, 1년 반쯤 뒤인 고종13년 (1876) 또 불이나서 타 버렸다. 현재의 건물은 고종 25년(1888)에 다시 지은 것이다.

 

자경전은 44칸 규모이며 서북쪽에 필요할 때만 불을 때서 난방을 할 수 있는 침방인 福安堂과 낮 시간에 거처하는 중앙의 자경전과 여름에 시원하게 지낼 수 있는 동남쪽의 다락집인 淸연樓로 구성되어 있다. 둘레에 긴 집채인 行閣수십 칸과 一角門들이 있다. 

 

자경전 후원에 십장생 무늬를 새기고 집모양을 한 굴뚝이 있는 담과 서쪽의 꽃담은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아름다운 담이다.

주변에는 수십 개의 집과 담장, 문들이 있었으나 대부분 없어졌다. 지금은 장수를 기원하는 뜻을 가진 글자와 꽃·나비·대나무 형태를 흙으로 구워 새겨 넣은 아름다운 꽃담장과 동식물 무늬인 십장생을 조화있게 새겨 넣은 집 모양의 굴뚝이 남아 있다.

조선시대 정궁이라 할 수 있는 건물로 경복궁 안에 남아 있는 유일한 대비전이다.  

 

▲ 자경전 서쪽의 꽃담은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아름다운 담이다.  ⓒ 2012 한국의산천

 

자경전의 서쪽 담은 주황색의 전(塼)으로 축조한 꽃담이다. 담 내벽에는 만수의 문자와 격자문(格子紋), 육각문(六角紋), 오얏꽃 등이 정교하게 장식되었고, 외벽에는 매화, 천도(天桃), 모란, 국화, 대나무, 나비, 연꽃 등을 색깔이 든 조형전(造形塼)으로 구워 배치하였다. 조선 시대 꽃담의 높은 수준을 엿보게 한다.

 

▲ 바로 위 사진의 네잎 꽃잎을 접사해서 보겠습니다 ( 아래 사진 참고 ) ⓒ 2012 한국의산천 

 

▲ 위의 네잎 꽃잎을 다시 옆에서 촬영을 해보겠습니다 ⓒ 2012 한국의산천

 

▲ 예전 장인들은 일일이 저렇게 손으로 문양을 새겨 넣고 그리고 벽돌을 구웠겠지요? ⓒ 2012 한국의산천

오랜 세월에 깎이고 결정만 남은 문양에서 세월의 흔적이 느껴집니다    

 

  ▲ 자경전의 섬세한 꽃담 ⓒ 2012 한국의산천

 

 

 

 

 

 

 

 

 

 

 

 

▲ 너무나 아름다운 경복궁 자경전 십장생굴뚝(보물 제 810호) ⓒ 2012 한국의산천    
 

자경전의 뒤뜰에는 실용적인 시설물인 굴뚝을 아름답게 꾸며놓은 십장생 굴뚝이 있어 궁중 여인네들의 침소를 아름답고 따스하게 꾸며주고 있다. 

 

담의 한편을 한 단 앞으로 나오게 하여 전벽돌로 굴뚝을 만들었으며 굴뚝 벽면 중앙에 십장생 무늬를 조형전으로 만들어 배치하고 그 사이에는 회를 발라 면을 구성하였다. 무늬의 주제는 해,산,물,구름,바위,소나무,거북,사슴,학,불로초,포도,대나무,국화,새,연꼿 등이며 둘레에는 학,나티,불가사리,박쥐,당초무늬 등의 무늬전을 배치하였다. 배,바위,고북등 십장생은 장수, 포도는 자손의 번성, 박쥐는 부귀,  나티/불가사리 등은 악귀를 막는 상서로운 짐승이다.
 
굴뚝 윗부분 역시 모양을 낸 벽돌로 목조 건물의 형태를 모방하였고 꼭대기에는 점토를 빚어서 만든 집 모양의 장식인 연가(煙家)를 10개를 올려놓아 자경전 건물의 10개 아궁이에서 불을 때면 연기가 빠지도록 하였다. 굴뚝의 기능을 충실히 하면서 꽃담의 조형미도 살려 조선시대 궁궐 굴뚝 중 가장 아름답다.

 

 

 

 

 

 

 

 

 

 

 

 

 

▲ 인조반정 후 이곳에서 칼(劍)을 씻고 정자를 세웠다 그 이름하여 세검정(洗劍亭) /  서울시 지정 기념물 4호 ⓒ 2012 한국의산천 

신라 태종 무열왕(654∼660)이 삼국 쟁패 과정에서 죽어간 신라의 화랑과 수많은 장졸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 현 세검정초등학교 자리에 대찰 장의사(壯義寺)를 지으며 세검정이라는 정자도 장의사(藏義寺)의 부속 건물인 정자터라고 전해진다. 

 

연산군(1500~1505년경)때에 들어서며 사찰은 쇠락의 길을 걸으며 연산군은 탕춘대를 마련하고 수각(水閣)으로 사용되었으며, 일설에는 숙종때 북한산성을 수비하기 위하여 병영 총융청을 마련하였는데. 이것에 있는 군인들의 휴게시설로 세웠다는 말도 있다. 이후 영조 24년 (1748 ) 중건하였으며 이때 세검정 현판을 달았다.

 

광해군 15년(1623)에 인조가 능양군(綾陽君)으로 있을 때 이귀, 김류등과 함께 광해군의 폐위를 의논하고 인조반정에 성공한 후 이 정자 아래로 흐르는 홍제천(모래내) 맑은 물에 칼을 씻었다 하여 세검정이라 이름하였다. '세검이라 함은 칼을 씻어 칼집에 넣고 태평성대를 맞이하게 되었다는 뜻으로 '세검정은 인조반정을 의거로 평가하여 이를 찬미하는 상징으로 만들어 진것이다.

 

 

▲ 씻을세(洗) / 칼검(劍) / 정자정(亭) ⓒ 2012 한국의산천  

인조반정 후 이곳에서 칼을 씻었다 하여 정자를 세우고 그 정자 이름을 세검정(洗劍亭)이라 하였기에 그 후 이 일대를 세검정이라 부르게 되었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긴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한국의산천 올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