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전거 타고 둘러볼 길
[길을 품은 우리 동네] 경북 영양 지훈길·두들마을길
文鄕의 향취 [출처 :서울신문]
면적은 서울의 1.3배이지만, 인구는 1만 8000명. 경북 영양은 중부고속도로 입구에서 차로 1시간 30분을 더 가야 닿을 수 있는 두메산골이다. 흔한 4차선 도로나 신호등조차 이곳에선 사치다. 하지만 영양은 오일도·조지훈·이문열 등 내로라하는 대가들을 연거푸 배출한 넉넉한 ‘문향’(文鄕)이다. 옛 이름 고은(古隱)처럼 수백 년 된 고택들을 흔하게 볼 수 있다. 밤이면 마구잡이로 쏟아져 내리는 별 무리에 없던 감수성도 살포시 샘솟는 곳. 권오승 영양군 부군수는 “영양의 이런 특이점이 다른 지역보다 더 많은 문인을 배출하게 한 원인일지 모른다.”고 말했다. 조지훈의 주실마을과 이문열의 두들마을을 찾았다.
▲ 시인 조지훈이 나고 자란 주실마을 전경.
지난 9일 정오 영양 북단 일월면에 있는 주실마을. 노()신사가 발길을 멈추고 울컥, “선생님….” 외마디만 던지고 눈물을 훔쳤다. “고려대에서 문학을 가르친 조동탁(호 지훈) 선생의 흔적을 찾아 1960년대 학번 제자들이 자주 이곳을 찾는다.”고 양희 조지훈문학관 해설사가 말했다. 어디 제자들뿐이랴. 조지훈을 기억하고 그와 같은 시인이 되기를 꿈꿨던 이들에게 이 마을을 다녀간다는 건, 곧 성지순례다. 문학을 좋아하건 그렇지 않건, 한국사람이면 누구나 ‘얇은 사(紗)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네라(승무)’ 한 구절쯤은 읊는다.
시인의 생전 모습과 그가 남긴 작품에 흠뻑 취해 걷는 길. 1017m 지훈길엔 시인이 나고 자란 고택(호은종택·壺隱宗宅)과 문학 공원의 20여개의 시비가 길 따라 놓여 있다. 호은종택은 겹겹이 쌓아올린 담에 口자 모양이다. 폐쇄적인 가옥 형태다.
이에 대해 김민자 문화해설사는 “당시 경상도 양반가는 자신을 꽁꽁 감춰 남을 배려하고 체통을 지켰다.”면서 “삼불차(三不借·빌리지 않는 세 가지)는 조선중기 환란을 피해 주실마을에 온 한양 조씨의 가훈”이라고 말했다. 재(財)불차·문(文)불차·인(人)불차로 재물·문장·양자를 빌리지 않는다는 뜻이다. 수백 년을 이어져 온 이 원칙 때문에 주실마을 조씨를 ‘칼 같은 남인(南人)’이라 하여 검남(劍南)이라 불렀다. 퇴계학풍을 계승한 남인은 지금으로 치면 수백 년간 정권을 잡은 적이 없는 ‘만년야당’이라고 할 수 있다.
호은종택 뒤로는 시인이 17세까지 지냈던 ‘방우산장’(放牛山莊)이 있다. 시인은 이곳과 서울 성북동 자택은 물론 자신이 기거했던 곳은 모두 방우산장이라고 불렀다. 위치가 산도 아닐뿐더러 소를 키우지도 않아 이런 이름을 지은 까닭이 궁금하다. 그는 1953년 신천지에 기고한 ‘방우산장기’에 “설핏한 저녁 햇살 아래 내가 올라타고 풀피리를 희롱할 한 마리 소만 있으면 그 소가 지금 어디에 가 있든지 내가 아랑곳할 것이 없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 주실마을 조지훈 시공원에 있는 시 ‘낙화’와 조형물. 그가 생전에 가장 아끼던 시다.
●일월산 전설이 조지훈의 ‘석문’ 소재
그 옆 지훈 문학관. 시인의 손때 묻은 자필 원고와 담배파이프·안경·모자 등 소품들이 눈에 띈다. “꽃이 지기로소니 바람을 탓하랴 주렴 밖에 성긴 별이 하나 둘 스러지고 귀촉도 울음 뒤에 머언 산이 닥아서다(낙화의 한 부분)”. 생전에 여동생과 함께 육성으로 녹음한 시낭송도 들을 수 있다. 이 시는 창작 의도와 상관없이 한 정치인에 의해 더 널리 알려졌다. 박지원 민주당 원내대표가 2003년 구속될 때 자신의 심경을 이 시를 인용해 표현했다.
문인에게 고향이란 창작 소재이기도 하다. 일월산을 배경으로 전승되고 있는 황씨부인당 전설은 첫날밤도 치르지 않고 떠나버린 남편을 기다리다 죽은 한 규수의 안타까운 이야기다. 이 이야기가 바로 조지훈의 ‘석문’(石門)의 모티브다. 이문열의 대표 소설인 ‘젊은 날의 초상’에도 영양에서 영덕으로 넘어가는 창수령이 등장한다.
영양군 남단 석보면 두들마을은 이문열이 나고 자란 곳이다. 이 마을을 관통하는 1787m 두들마을길은 석천서당·석계고택·유우당 등 ‘문화재투성이’다. 작가가 집필하고 후학양성을 위해 지은 한옥집 광산문우(匡山文宇) 담 아래에는 백일홍이 심어져 있다. 그의 문중인 재령이씨 사람들이 대대로 좋아하는 꽃이다. “내가 이만큼 글을 쓰는 것도 고향을 잘 만났기 때문”이라는 작가의 고향사랑이 묻어난다. 이르면 올해 말 이문열이 이곳으로 영구이주할 것이라고 군의 한 관계자가 귀띔했다.
지금도 잘 보존되고 있는 재령이씨의 두들마을 전통 중 눈에 띄는 것이 바로 음식디미방이다. 조선조 대학자 석계 이시명의 정부인 장계향이 380여년 전 지은 동아시아 최초의 조리서다. 종부 조귀분(63)씨가 이 조리서에 담긴 146가지 음식을 재현했다. 꿩·해삼·전복은 물론 곰바닥까지 이용해 화려하다.
특이한 점은 조리법의 51가지가 술 빚는 법이라는 점이다. 이 중 감향주(甘香酒)는 걸쭉해서 숟가락으로 떠먹는 술이다. 찹쌀·멥쌀·누룩·물 등 4가지 재료로만 만드는데, 도수는 13~14도 정도로 적포도주와 비슷하다. 박승길 군 전통음식육성담당은 “당시 재령이씨 문중을 찾아온 손님이 많았다는 것을 알 수 있고, 또 그들에게 정성껏 술상을 차려 대접하는 것이 아녀자들에게 아주 중요한 일이었음을 알 수 있다.”고 설명했다.
어쩌면 ‘문향’에 술이 발달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조지훈도 소문난 애주가였다. 1958년 ‘신태양’에 기고한 ‘삼도주’(三道酒)라는 글에서 그는 “술의 진미를 완미(玩味·음식을 잘 씹어서 맛봄)하는 심경이면 탁주·소주·약주 할 것 없이 가위 도주라 할 것이다.”라고 밝혔다.
▲ 두들마을 전경. 이문열의 집필 및 후학양성 공간인 광산문우 담벽에 백일홍이 활짝 피었다
● 재령이씨 음식디미방 술 빚는 법이 30%
장계향은 이문열의 소설 ‘선택’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이 소설은 가부장사회인 조선시대, 시문에 뛰어났던 그가 아녀자로서 자식 양육과 집안일에 충실했던 것이 ‘강요’가 아닌 ‘선택’이었다는 것을 일생을 짚어가며 설명한다. 이 때문에 1997년 연재 당시 ‘반페미니즘 소설’로 낙인 찍혀 공격을 받았다. 작가 자신도 인정하듯 “페미니즘에 저항할 논리는 이 세상에 없다.” 하지만 작가는 “선입견 없이 읽어 보면 거기서 비판되고 있는 것은 저속하게 이해되고 천박하게 추구되는 페미니즘임을 알게 될 것”이라고 논쟁에서 단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았다.
이런 고집스러움은 1960년 4월 혁명이라는 거대한 흐름에 휩쓸리지 않고 “큰일을 위해 죽음을 공부하라.”고 한 조지훈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다. 당시 대학교수였던 시인은 학생들에게 “내가 죽음을 공부하라는 것은 군중 속에 휩싸여서 군중과 함께 여러 사람에 싸여서 죽는 공부가 아니라 혼자서라도 죽을 공부를 하라는 것이다.”라고 강조했다.
오탁번 고려대 명예교수는 “(4월 혁명이) 무질서화되고 소인배들의 명리로 전락할 기미가 보이자 강경한 어조로 그들을 깨우쳤던 것”이라면서 “선생의 위치에서 떳떳이 설 사람이 많지 않았기 때문에 지훈의 이와 같은 꾸짖음은 더욱 빛났다.”고 평가했다.
겹겹이 쌓아올린 경상도 양반가 담벼락 안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대가의 속마음을 정확히 알 순 없다. 하지만 껍질이 두꺼워 고춧가루가 많이 나오는 영양고추처럼 이곳 출신 작가들의 작품이 유난히 실하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 글 사진 영양 김양진기자 ]
Tip
▲ 조지훈 선생이 태어나고 어린 시절을 보냈던 주실마을
낙화(落花)
- 조 지 훈
꽃이 지기로서니
바람을 탓하랴.
주렴 밖에 성긴 별이
하나 둘 스러지고,
귀촉도 울음 뒤에
머언 산이 다가서다.
촛불을 꺼야 하리
꽃이 지는데
꽃지는 그림자
뜰에 어리어
하이얀 미닫이가
우련 붉어라.
묻혀서 사는 이의
고운 마음을
아는 이 있을까
저허하노니
꽃이 지는 아침은
울고 싶어라.
참고 :
우련 : 보일 듯 말 듯 은은하게.
저허하노니 : 두려워하노니. 마음에 꺼려 하노니.
조지훈 [趙芝薰 / 본명 조동탁 趙東卓]
조지훈(趙芝薰, 1920년 12월 3일 ~ 1968년 5월 17일 -47세-)은 일제 강점기 이후로 활동한 시인으로, 청록파 시인 중 한 사람이다.
본관은 한양(漢陽)이며, 본명은 조동탁(趙東卓)이다.
경상북도 영양에서 출생하였다. 독학으로 중학 과정을 마친 뒤 동국대학교(당시 혜화전문학교)에 입학하여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했다.
1939년 <문장>지에 <고풍의상>과 <승무>를 추천받아 문단에 등장하였다. 광복 후 경기여자고등학교 교사와 동국대학교 강사, 고려대학교 교수 등을 지냈다.
1961년 벨기에에서 열린 국제 시인 회의에 한국 대표로 참석하였다. 이듬해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소장에 취임하면서부터 민족문화 개발에 주력하였다. 그는 청록파의 한 사람으로 명시를 많이 남겼다.
그의 시는 주로 자연, 무속, 선 등을 소재로 한 민족적인 색채가 짙은 것이며, 불교 세계에 대한 관심은 종교의식을 일깨워 주어 작품에 반영되었다.
박목월, 박두진 등 다른 청록파 시인들이 후에 시 세계의 근본적 변혁을 가져온 데 반하여, 그는 초기의 자연 친화의 시 세계를 비교적 많이 유지하였다.
1956년 자유 문학상을 수상하였다. 시집으로 《청록집》《조지훈 시선》 등이 있으며, 수필집 《창에 기대어》, 논문집 《한국 민족운동사》 등이 있다.
제가 존경하고 꼭 만나뵙고 싶은 작가 이문열
◀ 이문열 1948년 서울 청운동 출생 (아버지의 고향인 경북 영양에서 유년시절을 보냄)
이문열은 한국 현대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다. 그의 책의 지금까지 3500만부가 넘게 팔렸다. 그의 작품은 나올 때마다 찬사와 비난을 한 몸에 받으며 한국사회 논란의 중심에 서 있었다.
1948년 서울 청운동에서 태어난 그는 6ㆍ25 전쟁이 일어나자 아버지의 고향인 경북 영양으로 돌아가 성장했다.
1965년 안동고등학교를 중퇴한 그는, 1968년 대입 검정고시를 거쳐 서울대 사범대 국어과에 진학했다. 이때부터 그는 작가의 꿈을 꾸기 시작했고, 사대문학회 등에서 활동했다.
1970년 대학을 중퇴하고 사법고시 공부를 하는 등 방황의 시기를 보내던 그는 고시도 등단도 모두 실패한 채 1973년 군입대한다.
그가 작가로서 첫 발을 내디딘 건 제대 후 1979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새하곡`이 당선되면서부터였다. 이후 `사람의 아들` `사라진 것들을 위하여` `황제를 위하여` 등을 잇따라 발표하며 문단과 서점가의 주목을 한 몸에 받았다.
▲ 요즘 다시 읽고 있는 소설 ' 사람의 아들' ⓒ 2012 한국의산천
▲ ' 사람의 아들' 본문중에서 ⓒ 2012 한국의산천
이문열 [ 李文烈 1948~ ]
대표적인 현대소설가
이문열은 경북 영양의 명문가 집안에서 태어났는데, 6.25전쟁 때 부친이 월북한 사실로 인해 그의 가족은 남한에서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이문열은 1970년 서울대 국어교육과를 중퇴하고, 1977년 대구 매일신문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나자레를 아십니까>가 가작으로 입선되었다.
1978년 대구매일신문에 입사하여 편집부에서 근무하던 중 1979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중편 소설 <새학곡>이 당선되었다. 이후 그는 활발한 창작활동으로 그 동안 침체의 늪에 빠져 있던 이 무렵의 문단에 충격을 큰 인기를 얻었다.
1979년에 <사람의 아들>로 제3회 '오늘의 작가상'을, 1982년에 중편 소설 <금시조>로 제15회 '동인 문학상'을, 1983년에 <황제를위하여>로 제3회 '대한민국 문화상'을, 그리고 1984년에는 <영웅시대>로 제11회 '중앙문화 대상'을, 1987년에는 단편소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으로 제11회 '이상 문학상'을, <시인과 도둑>으로 제37회 '현대 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1992년에는 정부에서 문화 분야에 크게 이바지한 사람들에게 수여하는 '대한 민국 문화상'을 수상하였다.
2001년엔 언론사 세무조사를 지지했던 시민단체들을 '홍위병'에 빗대어 표현, 시민단체와 갈등을 빚었으며 사회적으로 논란을 일으키키도 했으며, 이후 보수우파를 대변하는 논객이 되었다.
주요 작품으로는 <사람의 아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어둠의 그늘>, <젊은 날의 초상>, <황제를 위하여>, <레테의 연가>, <금시조>, <변경>, <아가>,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 <익명의 섬>등이 있다. 평역소설에는 <삼국지>와 <수호지>가 있다.
표출되지 못하는 욕망은 무엇일까?
▲ 지금 이시간에도 누군가는 익명의 섬을 찾아 헤메고 있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 2012 한국의산천
익명(匿名)의 섬
<익명의 섬>은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익명(匿名)의 섬이 많아지고 있음을 경계함과 동시에 또, 그것의 필요성이 대두되고 있음을 제시하고 있는 작품이다.
서울 같은 대도시에서는 자기가 살고 있는 동네에서도 익명 투성이뿐이다. 이는 각박한 사회 현실이라는 익명이 도덕적인 타락을 가져옴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익명 자체에 대한 신뢰 때문에 묵인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 작품은 동족 부락의 일례를 통해서 고립된 개인 사회에서는 더욱더 익명의 섬이 많이 생겨나게 될 것이라는 필연을 이야기하고 있다. 우리는 누구나가 익명의 섬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이 작품이 이야기하고 있는 익명성에 쉽게 공감할 수 있는 것이다
줄거리
저녁 식사 후 이 소설의 주인공은 남편과 뉴스를 시청하다가 불법 댄스홀과 관련하여 붙잡힌 여성들이 화면 속에서 이리저리 숨는 장면을 시청하게 된다. 남편은 우리 사회가 너무 쉽게 익명화 될 수 있다는 것과 그로 인해 파생되는 도덕적 타락, 특히 여자들의 성적 타락을 개탄할 때 주인공인 그녀는 섬광처럼 기억을 떠올리며 과거 교사 시절로 깊이 빨려들어 간다.
그녀가 교육대학을 갓 졸업하고 첫 부임한 곳은 군청 소재지에서도 재를 두 개나 넘어야 되는 산골이었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이고 가옥도 백여 채가 될듯 말듯한 작은 마을이었다. 그 마을에는 '깨철'이라는 떠돌이 사내가 있었다. 그런데 그 마을에서는 그가 하는일은 무엇이든지 묵인이 되고 있었다. 그리고 의식주도 이집 저집 어느 곳이든지 다니면서 해결할 수가 있었다.
남자들은 한결같이 그를 반편이나 미치광이 취급을 했지만, 그 뒤에는 어딘가 그가 정말은 그렇지 않을는지도 모른다고 의심을 애써 감추려는 어떤 꾸밈이나 과장 같은 것이 엿보였다. 여자들도 그를 반편이나 미치광이 취급하는 것은 남자들과 다름없었지만, 그런 그녀들을 지배하는 심리 뒤에는 단순한 동정 이상 어떤 보호 본능에 가까운 것이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여교사는 개울가에서 무심코 엿듣게 된 그 동네 아낙네들의 수군거림을 통해서 깨철이의 존재를 어렴풋이 알게 된다. 아낙들은 누가 깨철이를 닮은 애를 나았다는 등의 음담을 나누고 있었던 것이다. 더욱이 말을 맺을 때에는 어딘지 모를 공범자끼리의 은근한 눈길도 엿보였다.
이러한 깨철의 존재를 끊임없이 관찰하던 나는 여름방학 중 알게 된 지금의 남편과 열애(熱愛)를 하던 동안에는 '깨철'이란 존재를 잊고 있었다.
그러다가 깨철이가 느닷없는 충격으로 나를 덮친 것이다. 당시 지금의 남편인 약혼자는 군에 있었다. 나는 약혼자가 휴가 나오기만 기다렸으나 아파서 오지 못한다고 했다. 남자를 그리워하며 기다리다가 그 기대가 무너지던 날, 억제된 성(性)과 허탈감으로 집으로 오던 중 소나기를 피하려고 길가 어느 집 창고로 들어갔는데, 그곳에서 깨철이가 나를 범한 것이다. 그때 깨철이는 여자들이 언제 자기를 원하는지를 안다고 했다.
이 일이 있고 난 뒤 여교사는 한동안 걱정스런 나날을 보낸다. 먼발치서 보게 되는 깨철이의 행동은 언제나처럼 변함이 없었고 마을은 평상시와 다를 게 없었지만 깨철이가 혹 소문이나 내지 않을까 조마조마하게 된다. 그러나 깨철이는 오히려 신통하리만큼 그녀의 주위에는 얼씬도 하지 않았으며 그녀에 관한 어떤 이야기도 마을에 흘리지 않았다.
이 일로 인해 나는 그 동안 숨겨져 있던 동네의 아낙들과 깨철이의 관계를 알게 되었다. 이 동족 부락의 폐쇄성이 가져다 주는 여자들의 성적 불만은 익명의 사내를 필요로 하게 되었고 그것이 깨철이라는 사내를 통해 구현될 수 있었기 때문에 그를 묵인하고 있음을 알게 된 것이다.
그 후, 같이 근무하는 남자 교원에게 그 동안 관찰해 온 깨철이란 존재를 확인하게 되었는데, 그 교원도 깨철이의 존재를 인정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마을의 남자들 역시 동족들 사이에서의 체면을 위해서 또, 익명의 사내 깨철이의 뒤끝 없음을 믿고 그를 묵인해 준다는 것이었다.
지금의 남편과 결혼하기 위해 이 마을을 떠나던 날, 정류소로 나오던 나는 깨철이를 만나게 된다. 나의 후임으로 오는 여자 교원에게 깨철이의 일을 이야기해 주려고 하다가 그만두기로 한다. 그것은 그도 언젠가 깨철이가 필요할 지 모른다는 생각에서였다. 견디지 못할 만큼 폐쇄되고 억제된 성(性)이 있다면, 역시 그 익명의 섬은 필요할지도 모를 것이라 생각하며 여교사의 회상은 끝을 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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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가 이 소설에서 말하고 싶었던 것음 무엇일까? 마을 사람들과 '깨철'이 사이에도 룰이 라는것이 적용되었다. '젊은 남자의 아내는 피할것', '나이든 남편의 아내라도 되풀이 되는 일은 없어야 할것' 등이다. 만약 이 두가지 둘이 지켜지지 않을때에는 그녀들의 남편으로 부터 심한 매질을 당하기도 한다.
마을 사람들은 어떤 악마적인 침입을 두려워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 불안을 즐기는 일종의 피학성향이나, 자신들의 결코 떨쳐 버릴 수 없는 도덕과 인습의 굴레에서 자유로운 '깨철이"와 동일시 함으로서 얻어지는 보상심리를 즐기고 있다는 해석을 내린 주인공의 생각처럼 '깨철'은 폐쇄된 마을 사람들의 폐쇄된 성적 타락의 탈출구인 셈이다.
만약 우리에게도 '깨철이'와 같은 익명성이 존재해 준다면 과연 누가 그 욕망의 분출을 억누르고 있기만 할것인가. '깨철이'는 그 마을에서 거의 모든 여자와 관계를 맺었으며 마을 사람들도 알고있을것이다. 하지만 '깨철이'는 끄떡없이 생활을 유지하고 마을은 언제나 평온을 유지한다. 그 이유는 '깨철' 스스로 익명속에 숨어있고 마을 사람들에 의해 익명의 섬으로 묵인되고 있기 때문이다.
영양군(英陽郡)
영양군은 경상북도 북부에 있는 군으로, 도서 지역인 울릉군을 제외하고 전국에서 가장 인구가 적은 기초자치단체이다(1만 9천여 명).
경상북도 동북부 태백산맥의 내륙지역에 위치하여 동쪽은 울진군과 영덕군, 서쪽은 안동시, 남쪽은 청송군, 북쪽은 봉화군 등 5개 시군과 경계하고 있는 산세로 인해 각종 나물의 산지로 유명하다. 태백산맥이 동남 방향으로 뻗어 많은 대소 계곡을 형성, 북고남저의 산간분지 모습을 이루고 있으며, 해발고도가 경북에서 가장 높다.
영양군은 '지조론'으로 유명한 청록파 시인 조지훈과 보수주의 소설가 이문열의 고향으로도 유명하며, 특산물로 고추가 잘 알려져 있다.
옛날에는 이곳에 신호등이 없었으나 최근 들어 신호등이 딱 1개만 설치되어 '스펀지퀴즈'로도 나올 정도였다.
영양(英陽)의 옛 이름으로 '고은(古隱)'이라는 별칭을 가지고 있다. 고은은 흔히 '풍광이 수려해 선비가 숨어살기 좋은 곳'으로 풀이한다. <정감록>의 10승지(十勝地)에 나올 법한 말이다. 봉화·청송과 더불어 경상북도의 3대 오지 중 하나이니 이런 이름이 생겼을 것으로 보인다.
참고 : 십승지지(十勝之地)
풍기(豊基)의 금계촌(金鷄村), 안동(安東)의 춘양면(春陽面), 보은(報恩)의 속리산(俗離山), 운봉(雲峰)의 두류산(頭流山), 예천(醴泉)의 금당동(金堂洞), 공주(公州)의 유구(維鳩)와 마곡(麻谷), 영월(寧越)의 정동상류(正東上流), 무주(茂州)의 무풍동(茂豊洞), 부안(扶安)의 변산(邊山), 성주(星州)의 만수동(萬壽洞)을 가리킨다.
[봉감모전오층석탑(鳳甘模塼五層石塔)]
경북 영양군 입암면 산해리 강가의 밭 가운데에 서 있는 탑으로, 이 마을을 '봉감'이라 부르기도 하여 '봉감탑'이라 이름 붙여졌다. 국보 제187호. 석탑 주변의 논밭에 기와조각과 청자조각이 많이 흩어져 있어 이 일대가 절터였음을 알 수 있다. 탑은 벽돌 모양으로 돌을 다듬어 쌓아올렸으며, 1단의 기단 위에 5층의 탑신을 올린 모습이다. 기단은 흙과 돌을 섞어 낮게 바닥을 깔고, 10여 개의 길고 큰 돌을 짜서 쌓았다. 그 위의 탑신은 몸돌과 지붕돌 모두 벽돌 모양의 돌로 쌓았다. 1층 몸돌에는 불상을 모시는 감실(龕室)을 두었는데, 감실 양쪽에 둔 2개의 화강암 기둥과 이맛돌의 섬세한 조각이 장식적인 효과를 더해주고 있다. 2층 이상의 몸돌은 독특하게도 중간 정도의 높이마다 돌을 돌출되게 내밀어 띠를 이루고 있다. 지붕돌은 전탑의 양식에 따라 아래 윗면 모두 계단 모양의 층을 이루고 있으며, 처마의 너비는 좁아져 있다. 1단 기단의 모습과 돌을 다듬은 솜씨, 감실의 장식 등으로 미루어 보아 통일신라시대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전체적인 균형과 정연한 축조방식을 갖추고 있으며, 장중한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있는 우수한 작품이다.
전통정원 서석지는 전남 완도군 보길도에 있는 윤선도의 부용동, 전남 담양군의 소쇄원과 더불어 우리나라 3대 민가 전통정원의 하나입니다.
[서석지(瑞石池)] 정영방이 광해군 5년(1613)에 조성한 것으로 전해지는 연못과 정자이다.
자양산의 남쪽 완만한 기슭에 위치한 연못을 중심으로 경정·주일재·수직사·남문 등의 건물들이 자리 잡고 있다. 경정은 넓은 대청과 방 2개로 되어 있는 큰 정자이며, 주일재는 '운서헌'이라고 쓴 현판이 걸려있는 서재이다. 주일재 앞에는 연못 쪽으로 돌출한 석단인 '사우단'을 만들고 소나무·대나무·매화·국화를 심었다.
연못은 사우단을 감싸는 'U'자형의 모양을 하고 있다. 연못의 동북쪽 귀퉁이에는 산에서 물을 끌어들이는 도랑을 만들었고, 반대편의 서남쪽 귀퉁이에는 물이 흘러나가는 도랑을 만들었다. 각양각색으로 솟아있는 연못 안의 크고 작은 돌을 '서석군'이라 하는데, 이 연못의 이름은 서석군에서 유래하였다. 돌 하나하나에 모두 이름이 있어 정영방 선생의 학문과 인생관은 물론, 은거생활의 이상적 경지와 자연의 오묘함과 아름다움을 찬양하고 심취하는 심성을 잘 알 수 있다. 중요민속문화재 제108호.
청양고추
청송(靑松)의 청(靑)과 영양(英陽)의 양(陽)을 따서 "청양고추"라고 명명하여 품종 등록이 되었다.
청양고추(靑陽 고추, 영어: Chungyang Red Pepper)는 한국에서 재배되는 고추 중 가장 매운 고추 품종 중의 하나이다.
1983년 《중앙종묘》의 유일웅 박사에 의해 개발되었으며, 청송, 영양지역 고추재배 농가를 대상으로 3년간 연구 및 시험재배를 했기 때문에 청송(靑松)의 청(靑)과 영양(英陽)의 양(陽)을 따서 “청양고추”라고 이름지었다.
청양고추의 매운 정도는 4000~1만2000 스코빌에 이른다. (※ 충남에도 칠갑산이 자리한 청양郡이 있다)
청양(靑陽)고추는 종묘 업체인 중앙종묘에서 1983년 개발한 고추 품종으로, 중앙종묘는 청양 외에도 청명, 청복, 조은, 조향, 조홍 등 수십 종의 고추 품종을 개발하여 등록하였다. 그러나 1998년 IMF 사태로 인해, 세미니스가 한국의 《흥농종묘》와 《중앙종묘》를 인수합병하여 청양고추의 개발사 흡수되었고, 개발자들은 회사를 떠나게 되었다.
개발자인 중앙종묘는 자사 홈페이지의 게시물을 통해 '1970년대 말부터 1980년대 초에, 소과종이 대과종보다 가격이 높고 특히 국내 최대 주산지인 경상북도 북부 지방의 청송, 영양지역에서 소과종이 주로 재배되어 이 지역에 적합한 품종을 육성하고자 하였다'고 적시하여 명칭의 유래가 청양군과는 무관함을 밝힌 바 있다. 다만, 1998년 중앙종묘가 세미니스에 인수된 이후 홈페이지의 개편을 거치며 해당 게시물이 수록된 게시판은 사라진 상태이다.
국립종자관리소에 청양고추의 품종개발자로 등록되어 있는 '유일웅'은 '청양고추 품종은 제주산과 태국산 고추를 잡종교배하여 만든 것으로 경상북도 청송군과 영양군 일대에서 임상재배에 성공하였으며, 현지 농가의 요청에 의해 청송의 청(靑), 영양의 양(陽)자를 따서 청양고추로 명명하여 품종등록하였다'고 밝힌 바 있다. 그러나 지금은 충남 청양에서 출하되는 고추도 맵기만 하더군요. 아이러니한 현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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