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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거친호흡 몰아쉬며 ^^ 굽이치는 산맥넘어 손의 자유, 발의 자유, 정신의 자유를 찾는다. 기억은 희미해지기에 이곳에 기록을 남긴다
MTB등산여행

충주 비내길 목계나루

by 한국의산천 2012. 8. 13.

이번 주말에도 비가 오려나?

날씨가 맑으면 유장하게 흐르는 남한江을 따라 충주까지 달려볼까? [정리 : 한국의산천  http://blog.daum.net/koreasan ]

 

▲  업무차 원주가는 길에 푸른 하늘과 흰구름을 보며 ⓒ 2012 한국의산천  

 

 

▲ 성산대교의 Sunset ⓒ 2012 한국의산천  

석양이 만들어 내는 붉은 노을이 참 장려하구나

 

노 을
     

      - 조 병 화 ( 1921-2003)

 

해는 온종일 스스로의 열로
온 하늘을 핏빛으로 물들여 놓고
스스로 그 속으로 스스로를 묻어간다

 

아, 외롭다는 건
노을처럼 황홀한 게 아닌가.

 

아래 사진 3장은 2005년 7월 8일 고삼저수지와 미리내 성지 다녀오며 잠시 들렸던 시인 조병화 문학관 (편운재 / 片雲齋 : 구름한 조각?)입니다 

 

▲ 안성에 자리한 조병화 문학관 편운재(片雲齋) ⓒ 2012 한국의산천

 

조병화 (1921.5.2 - 2003.3.8)

경기도 안성 출신. 경성사범학교를 졸업하고 1945년 일본 동경고등사범학교 물리화학과를 수료하였다. 1959년 경희대학교 조교수를 시작으로 부교수·교수로 있으면서 1972년 경희대학교 문리대학장, 경희대학교 교육대학원장을 지내고 1981년 인하대학교 문과대학장, 1982년 인하대학교 대학원장을 역임하였다. 그 사이 시인협회 심사위원장, 세계 시인대회장, 문인협회 이사장 등을 지냈다.

작품으로는 시집 《버리고 싶은 유산(遺産)》《먼지와 바람 사이》 《밤의 이야기》 《어머니》, 시선집 《꿈》 등이 있고, 수필 《왜 사는가》 《나보다 더 외로운 사람에게》가 있다.

국민훈장 동백장·모란장, 금관 문화훈장을 받고, 아시아 자유문학상, 서울시 문화상, 예술원상, 삼일문화상, 대한민국문학상 등을 수상하였다.(두산백과 참고)

 

그분은 지금 의자를 물려주시고 행복의 나라로 가셨다.

편운재... 한조각 구름.

산다는것이 드넓은 하늘을 정처없이 떠돌다 가는 한조각 구름이 아니던가?

 

아래의 이 詩는 내가 중학교 시절 국어책의 권두시로 나왔던 기억이 있다.

 

의 자
                                      -  조 병 화

 

지금 어드메쯤 아침을 몰고 오는 분이 계시옵니다
그분을 위하여 묵은 의자를 비워 드리지요

지금 어디 메쯤에 아침을 몰고 오는 어린 분이 계시옵니다
그분을 위하여 묵은 의자를 비워 드리겠어요

먼 옛날 어느 분이
내게 물려주듯이

지금 어디 메쯤에 아침을 몰고 오는 어린 분이 계시옵니다
그분을 위하여 묵은 의자를 비워 드리겠습니다

 

 

찔레꽃

                   - 조 병 화

  

찔레꽃이 한창 피어서

냄새가 가득히 감도는 이 산장의 길을

혼자 걷는다는 것은 서운한 일이어라

 


하얗게 찔레꽃이 피어서

냄새가 만발하는 이 산장의 길을

혼자 걷는다는 것은 허전한 일이어라

 


오월도 늦어 여름으로 접어드는

푸른 이 계절, 송이송이 하얗게 피어서

냄새가 진동하는 이 찔레 핀 길을

혼자 걷는다는 것은 황홀한 고독이어라

 


시를 쓰며, 시를 사는 사람에게

찔레꽃은 하늘의 맑은 선물이려니

 


서운함도, 허전함도, 황홀한 고독도

하늘의 맑은 은총이려니

아, 시인은 하늘이 보살펴 주는

맑은 나그네이련가.

 

▲ 2005년 7월 8일 이곳을 방문하였지만 조병화 문학관은 토,일요일에만 개방한다는 문구가 적혀있다. 아쉬움을 뒤로 한채 발길을 돌렸다 ⓒ 2012 한국의산천  


하루만의 위안
      

                  -  조 병 화

 

잊어버려야만 한다
진정 잊어버려야만 한다
오고 가는 먼 길가에서
인사 없이 헤어진 지금은 누구던가
그 사람을 잊어버려야만 한다
온 생명은 모두 흘러가는데 있고
흘러가는 한줄기 속에
나도 또 하나 작은
비둘기 가슴을 비벼대며 밀려가야만 한다
눈을 감으면
나와 가까운 어느 자리에
마지막 하늘을 바라보는 내 그날이 온다
그날이 있어 나는 살고
그날을 위하여 바쳐온 마지막
소리를 생각한다
그날이 오면
잊어버려야만 한다
진정 잊어버려야만 한다
오고 가는 먼 길 가에서
인사 없이 헤어진 시방은 누구던가
그 사람으로 잊어 버려야 한다


▲ 나는 매일 아침과 저녁 퇴근할때 이곳 성산대교를 건넌다. 석양의 노을이 아름답다. ⓒ 2012 한국의산천

앞쪽 가양대교 방향으로 월드컵공원에서 염창동으로 이어지는 다리의 초석이 벌써 물위로 올라왔군요. 새 다리가 건설되면 퇴근할때 정체가 조금 풀리겠지요  

 

노을이 질때까지 그 江을 따라 달리고 싶다.

유구한 세월을 변함없이 유장하게 흐르는 그강을...  그래 이번 주말에 달리는거야 ~

 

황혼이 질 무렵

                        - 홍 수 희

석양을 보면
떠나고 싶다

 

이름 석 자 내 이름은 벗어버리고
의자에 앉았으면 앉았던 그 모습으로
언덕 위에 섰으면 서 있던 그 모습대로
바람이 불어오면 나부끼던 머리카락 그대로 두고

 

항상 꿈보다 더 깊은 꿈속에서
나를 부르던 아, 이토록 지독한 향수!

 

걸어가면 계속하여 걸어가면 닿을 것 같은
보이지 않는 그곳이 있어 아, 이토록 지독한 향수!

 

[강 따라 걷기] 강 따라 흐르는 오솔길… 낭만 속을 걷다. 한강 충주 비내길 

 

▲ 강 따라 닦인 오솔길을 따라 가을 풍광이 아름답게 흐른다. 남한강 하류 지역인 충주 앙성면 비내섬 주변에 있다. / 유창우 영상미디어 기자

 

가을 햇살에 반짝이는 강물을 따라 훌쩍 떠나고 싶은 계절이다. 호젓한 강변길 옆으로 산들이 같이 흐른다. 

 

<걷기코스>

원점 회귀코스: 약 7㎞, 2~3시간 소요

능암온천광장→할미바위→능암리섬→조타골마을→조대고개→능암온천광장

산길코스: 약 8㎞, 3~4시간 소요

비내마을을 출발해 새바지산 옆으로 돌아 능암온천광장까지 가는 숲속 임도길. 비내섬 전망대 200m 전 지점에서 오른쪽 컨테이너 상자가 보이는 길로 들어선다. 산새들의 합창에 취해 걷다 보면 능암온천광장에 도착한다.

 

 

가을이면 은빛으로 물결치는 갈대·억새밭으로 이름난 충주 비내섬. ‘비내길’은 비내섬 앞 남한강 강변을 따라 새롭게 만들어진 걷기 코스이다. 남한강 하류지역인 충주 앙성면에 있다. 강을 따라 흐르는 오솔길과 숲을 관통하는 산길, 논·밭·과수원이 어우러진 평화로운 농촌 모습을 한꺼번에 구경할 수 있다. 

 

▲ 충주 앙성농협 한우 직판장 '참한우마을'의 살치살.

 

◇1코스: 능암온천광장~자전거도로~할미바위~대평교
비내길은 출발점은 능암온천광장이다. ‘능암맑은물센터’ 표지판 방향을 따라 왼쪽 좁은 길로 들어선다. 전형적인 시골 풍광이 펼쳐진다. 누렇게 익어 가을걷이를 기다리는 논과 이미 추수가 끝나고 볏짚더미가 여기저기 놓인 논이 조각보처럼 섞여 알록달록하다. 조그만 시냇물을 한 번 건너 개울과 나란히 걷는다. 여기서부터 자전거도로를 따라 할미바위 방향으로 걷는다. 새로 깐 자전거도로가 깔끔하고 걷기 편하다. 얼마 걷지 않은 것 같은데 벌써 능암리섬이 눈에 들어온다. 능암리섬은 비내섬 못잖게 아름답다. 원래 있던 수풀과 습지를 복원하고 나무다리와 관찰데크를 설치하는 등 생태학습장으로 만드는 공사가 한창이다.

 

◇2코스: 대평교~강변 산책로~조타골마을

할미바위를 지나면 대평교가 오른쪽에 나온다. 이 다리를 건너 조금 걸으면 강변을 따라 조성된 걷기 코스가 나타난다. 여기서부터 비내섬이 보이기 시작하는 지점까지 약 1.7㎞가 비내길의 백미이다. 오른쪽으로는 강, 왼쪽으로는 산을 끼고 걷는다. 숲으로 우거진 봉환산 아래 난 길로, 강변에서 가장 가깝다. 마사토를 깔아 걸을 때 발바닥에 폭신하게 와 닿는 감촉이 기분 좋다. 한강 합수머리라서 그럴까, 새들이 유난히 많이 보인다. 원앙·큰고니 서식처가 비내섬 바로 뒤에 있다. 강 표면을 미끄러지듯 헤엄치던 청둥오리 무리가 오랜만에 나타난 인기척에 놀랐는지 퍼더덕 정적을 깨고 하늘로 날아오른다.

 

걷다 보니 평평한 마사토길이 넓고 큼직한 판석을 깐 내리막 계단으로 변한다. 이어 통나무를 깐 길로 바뀐다. 강가에 더욱 가까워지면서 길은 좁아진다. 길 강쪽 변으로 나무를 심은 게 특이하다. 화살나무와 조팝나무, 명자나무를 심었다. 화살나무는 잎과 줄기가 신기하게도 진짜 화살처럼 생겼다. 가을이면 단풍처럼 붉게 물드는 잎사귀가 아름답고, 겨울에는 줄기에 눈이 쌓여 꽃이 핀 것처럼 보인다. 봄이면 조팝나무의 하얗고 몽글몽글 자그마하게 피어나는 꽃이 장관이다. 명자나무는 봄과 여름에 빨간색 또는 분홍색 꽃을 피우는데, 그 자태가 은은하고 청초하다고 해서 ‘아가씨나무’라는 별명을 얻었다. ‘꽃나무의 여왕’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3코스: 조타골마을~조대고개~능암온천광장

강변길이 끝나고 넓고 평평한 땅이 시작되는 지점이 조타골마을이다. 맞은편에 갈대와 억새가 가을바람에 이리저리 물결처럼 휩쓸리는 모습이 장관인 섬이 보인다면 바로 비내섬이다. 조타골마을은 과거 충주 앙성면과 강 맞은편 소태면을 잇던 나루터가 있었던 아담하고 정겨운 마을이다. 마을을 뒤로하고 야트막한 조대고개를 넘으면 시끌벅적한 음악 소리가 들린다. 능암온천랜드이다. 능암온천랜드를 뒤로 하고 조금 더 걸으면 이 걷기 코스의 출발점이자 종착점인 능암온천광장이다. 피곤하면 온천에서 몸을 풀고 광장 맞은편 참한우마을에서 한우맛을 보는 것도 좋겠다.

 

▲ 드넓은 갈대숲을 자랑하는 충주 앙성면 '비내섬' 풍경 © 충청일보 편집부
 

  갈대와 철새도래지로 유명한 충주 앙성면에 '비내섬'이 사진작가들의 단골 촬영지에서 드라마와 영화 촬영지로 부상하고 있다.

kbs 1tv 대하사극 '근초고왕' 후속작품인 '광개토대왕' 제작팀은 비내섬에서 현지촬영을 실시해 현장의 아름다운 경치을 작품속에 담았다.

남한강변의 비내섬은 드넓은 갈대숲과 백로, 천둥오리 등 계절따라 찾아오는 철새들로 최고의 풍광을 자랑하고 있으며, 주말이면 가족단위 관광객들이 많이 찾고 있는 관광지이다.

또한 앙성면 능암리~조천리 10km 구간에 전망대와 쉼터, 체험공간 등이 갗춰진 '비내길' 트레킹 코스가 조성되어서 탐방관광객도 꾸준히 증가할 전망이다.

 

<여행수첩>

(지역번호 043)충주공용버스터미널 850-5114, 충주공용버스터미널 856-7000, 충주교통(시내) 845-5176

탄산온천수와 유황온천수가 나오는 온천장이 능암 지역에 있다. 탄산온천은 한국은 물론 세계적으로도 드물다. 뜨겁지 않아 처음 들어가면 조금 한기를 느낄 정도다. 탕에 들어앉아 조금만 기다리면 온몸에 작은 기포가 몽글몽글 들러붙으면서 차츰 따뜻해진다. 한결 피부가 매끈해지고 피로가 풀린 느낌이다. 능암온천랜드가 대표적 탄산온천장이다. 입장료 어른 6000원. 능암온천랜드 855-8877 www.neungam.com

 

한우가 싸고 맛있다. 온천광장 앞에 있는 앙성농협 직영 참한우마을 매장에선 앙성면에서 생산된 한우를 판매한다. 100g 기준 등심 7000원, 갈비살 8000원, 살치살 8500원. 앙성농협 855-5808~9 www.charmhanoo.com

고기를 사다가 인근 10여 개 식당에 가져가면 1인당 3000원씩 받고 고기를 구워주고 반찬과 채소로 상을 차려준다. ‘돌집식당’이 맛있는 청국장과 김치찌개로 이름났다. 청국장 6000원, 김치찌개 8000원, 돼지갈비 8000원. 855-2226

 

충주종합관광안내소 842-0532, 충주시청 관광과 850-6732 www.cj100.net  [충주 : 김성윤 기자]

 

 

▲ 목계나루터 표석 ⓒ 2012 한국의산천 

    

충주땅 들머리 목계교에 서있는 목계나루 기념비.

목계나루는 충주 역사여행의 출발점이다. 목계교 옆엔 신경림의 ‘목계장터’ 시비가 서 있다. 예로부터 남한강 수운 물류교역의 중심지였으며 내륙항 가운데 가장 큰 규모를 자량했던 남한강 목계나루. 지금은 '목계나루터'라는 입석이 그 옛날의 번창했던 그 곳의 위치를 알려주고 있을뿐이다.

 

  목계 충주구간의 남한강은 딱히 빼어나거나 유명한 관광지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사시사철 풍광이 좋은 드라이브 코스로 손꼽히는 곳이다. 문막에서 섬강을 따라 남한강이 만나는 법천리에서 목계구간도 일품이다. 탄금대까지 이어지는 드라이브 코스는 문화유적지를 돌아보며 다니는 볼거리도 많은 곳이다.

 가을이 다가오는 길목에서 다시 한번 달리고 싶은 곳이다.

 

▲ 목계나루 碑곁에서 딸아이의 포즈 ⓒ 2012한국의산천

 

목계나루   
여주에서 산척방면으로 38번 자동차 전용도로를 타고 가다가 19번 도로로 접어들기 위해서 오른쪽으로 새로 길게 지어진 목계대교가 지나는 남한강 상류를 보며 목계교를 건너니 오른쪽으로 목계나루터라는 커다란 입석이 서있다. 번창했던 그 예전의 나루 <목계나루터>라는 표석과  그옆에는 이곳 가까운 노은면 출생이신 신경림 시인의 詩 <목계장터> 詩碑가 서있다.  

 

남한강의 목계나루는 나라의 세금을 거둬들이는 수곡선이 들어갈 수 있는 남한강 수운의 종점이었다. 곡식 사백 가마니를 실은 배 20여 척이 서로 교차할 수 있었고, 나루 건너편에 세금으로 거둬들인 곡식을 보관하는 가흥창이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사과나무 몇그루만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다시쓰는 택리지>를 읽으며 

1권 후반부에 (344-347쪽)에 "남한강변의 나루들"에서 목계 장터 이야기가 나옵니다.

 

조선 후기 5대 하항중의 하나였던 목계는 전성기때 호수가 800호 이상 되었던 큰 도회지로서 100여척의 상선이 집결하던 곳이다.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목계는 동해의 생선과 영남 산간지방의 화물이 집산되며, 주민들은 모두 장사를 하여 부자가 된다”고 하였다. 서울에서 소금배나 짐배가 들어오면 아무 때나 장이 섰고, 장이 섰다 하면 사흘에서 이레씩이었다고 한다. 

 

그처럼 번성했던 목계장터는 1920년 후반 서울에서 충주 간 충북선 열차 개통으로 남한강의 수송기능이 완전히 끊어지면서 규모가 크게 작아졌다. 

 

1973년에 목계교가 놓이면서 목계나루의 나룻배도 사라져 목계장터는 쇠퇴의 길로 접어들었다. 오직 목계교회,목계반점,목계슈퍼 등 상호만 남아 그 옛날의 목계나루를 떠올리게 할 뿐이다. -다시쓰는 택리지 중에서 -   

 

▲ 목계나루에 세워진 목계대교 ⓒ 2012 한국의산천

 

정약용이 쓴 글 중 한강 가에서 살기 좋은 몇 곳을 꼽은 것이 있다. 청담(淸潭) 이중환이 쓴 <택리지>를 읽고 쓴 발(跋)이 그것이다. 그 자신도 한강에 잇대어 있는 소내(苕川)에 살지만 그곳은 오로지 풍광만이 아름다울 뿐 생활하기에는 적당하지 않은 곳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북한강에서는 춘천의 천포(泉浦)와 지금의 설악면 일대인 미원(迷源), 그리고 남한강에서는 여주의 백애(白厓)와 충주의 목계를 꼽았다. 

 

산이 뒤를 막았는가 하면 앞으로는 여울소리 아름다운 강이 흐르고 큰 배가 닿을 수 있는 마지막 나루터였기에 장터는 언제나 북적거렸으니 그 아니 좋았겠는가. 

 

전해 오는 이야기  막흐래기

목계에서 선창벼루를 지나가면 소태면 양촌부락이 나오고 다시 강변을따라 내려가면 <막흐래기>라는 마을이 있으며 그 앞의 강물은 물살이 세기로 유명한 곳인데 소위<막희락탄 (莫喜樂灘)>이다. 

 

옛날 내륙의 삼대하항이라면 경기도 양평, 여주 그리고 목계를 지칭 했었다. 그중 대형선박이 출입할 수 있는 종착항으로 목계나루가 가장 중심을 이루고 있었다고한다.

옛날 충청북도는 물론 경상북도나 강원도 일부까지도 한양에 가려면 충주지방을 거쳐야 했는데 말이나 당나귀 등을 이용한다는 것은 보통사람들은 어렵고 거의가 목계에 와서 배를 타고 갔던 것이다.
사람뿐만 아니라 내륙과 경인지방과의 교역물품도 이곳이 중심이 되고 있었다. 따라서 이곳은 출입하던 배들은 지금 우리들이 보고 있는 나룻배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큰 배였다고 하는데 서울쪽으로 가는 배는 강 가운데를 운행하고 목계쪽으로 오는 배는 강가를 통해하도록 되어 있어서 많은 배들이 규칙적으로 운행되어 장관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큰 문제는 가끔 부딪치는 여울 때문인데 여울을 잘못 운행하다가 큰 사고가 나게 마련이어서 가장 조심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중에서도 막흐래기 앞에 있는 막희라기 여울이 가장 유명했다고 하는데 각 여울마다 끌패라고 해서 배를 끌어 넘겨주고 임금을 받아 먹고 사는 사람들인데 이곳 막흐레기 여울에 있는 끌패들이 제일 많고 벌이도 제일 잘됐다고 한다.

 

막흐래기란 뜻은 한자로 말막자, 기쁠희자, 즐거운락자를 써서 莫喜樂인데 글자대로 풀이한다면 희희낙낙하지 말라는 뜻이 된다. 그러니까 이 여울이 너무도 어려운 장소이니 희희낙낙하다가는 큰일난다는 말이다  그래서 옛날 목계항의<도선별장>은 막흐래기 나루의 사고가 안 나도록 하는데 항시 힘을 기울였다고 한다.  

 

▲ 이곳 가까운 노은면 출생이신 신경림 시인의 詩 <목계장터> 詩碑 ⓒ 2012 한국의산천

 

일제 시대까지만 해도 목계나루엔 인천항에서 소금, 건어물, 젖갈류, 생활 필수품 등을 싣고 온 황포돛배가 수십 척씩 붐볐다. 이런 물건들은 내륙 지방인 충청도와 강원도, 그리고 백두대간 너머 경상도의 문경과 상주 각지로 팔려 나갔다.

당시 뱃일하는 인부만도 500여 명이나 되었다 하니, 나루와 이어진 목계장터는 언제나 시끌벅적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젠 모두 옛 일에 불과하다. 위용을 자랑하던 조창은 모두 허물어졌고, 주변엔 주춧돌 몇 개와 깨진 기왓장만이 뒹굴고 있을 뿐이다. 강나루의 흔적마저도 모래를 퍼내고 강 언덕에 축대를 쌓으면서 형편없이 변했다. 또 늘상 인파로 북적거렸을 목계장터는 지금은 매운탕집과 수석 가게들만이 한적한 풍경화를 연출할 뿐이다.

 

목계나루에서 20리쯤 떨어진 노은면 연하리에 태를 묻은 신경림 시인에게 목계나루는 소중한 추억의 장소다. 시인은 광복 이듬해인 초등학교 4학년 때 목계나루 솔밭으로 소풍을 갔다가 목계장터를 보곤 강렬한 인상을 받게 된다. 당시까지만 해도 목계나루는 제법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는 시인의 기억 속에 오랫동안 이어지다가 마침내 ‘목계장터’라는 명시로 열매를 맺는다.

 

 

목계장터 

 

                   - 신 경 림

 

하늘은 날더러 구름이 되라 하고
땅은 날더러 바람이 되라 하네
청룡 흑룡 흩어져 비 개인 나루
잡초나 일깨우는 잔바람이 되라네
뱃길이라 서울 사흘 목계 나루에
아흐레 나흘 찾아 박가분 파는
가을볕도 서러운 방물장수 되라네
산은 날더러 들꽃이 되라 하고
강은 날더러 잔돌이 되라 하네
산서리 맵차거든 풀속에 얼굴 묻고
물여울 모질거든 바위 뒤에 붙으라네
민물 새우 끓어넘는 토방 툇마루
석삼년에 한 이레쯤 천치로 변해
짐부리고 앉아 쉬는 떠돌이가 되라네
하늘은 날더러 바람이 되라 하고
산은 날더러 잔돌이 되라 하네  

 

▲ 시비의 글씨는 판화가 이철수님의 쓰셨다. ⓒ 2012 한국의산천

 

<정선 아리랑>에 관한 글 참고

 

정선 뗏목의 이동은 정선아리랑을 한강 주변 곳곳에 울려 퍼지게 했다. 정선 아우라지를 출발해 서울의 광나루와 마포나루에 이르는데 보름 남짓 걸리는 한강은 정선아리랑이 흘러가는 거대한 물줄기였다. 

 

정선에서 일천 이백 리 한강 물길을 타고 내려가는 동안 떼꾼들은 적막감을 달래고 무사한 운행을 속으로 빌며 아리랑을 불렀다. 타고난 소리기질을 갖춘 떼꾼의 눈에 보이는 세상은 또 다른 소재가 되어 아리랑 가사로 술술 이어져 나왔다. 강가의 주막에 들러서 거나한 술판을 벌이며 불러대던 소리도 정선아리랑이었다.

“황새여울 된꼬까리 떼 무사히 지났으니 만지산 전산옥이야 술상차려 놓게”라는 가사가 생겨날 정도로 이름난 영월읍 거운리의 만지 전산옥이 머물던 주막에서부터 영월 덕포, 단양 꽃거리, 제천 청풍, 충주의 목계 달천, 여주의 이포, 양평의 양수리, 팔당 광나루 뚝섬 서빙고 노량진 마포 등지는 밤만 되면 정선아리랑이 울려 퍼지던 곳이었다.

 

한 때는 이곳 목계나루에서도 정선에서 내려오는 뗏목의 수가 얼마나 많았는지 먼발치에 뗏목의 모습이라도 보이면 객주 여자들은 언제 배웠는지 정선아리랑을 불러대며 유혹하는 진풍경이 벌어지기도 했다고 전한다.

 

한반도를 동서로 가르는 남한강을 수놓았던 떼꾼과 나루를 중심으로 형성된 경제권은 정선아리랑이 우리나라 수많은 아리랑과 민요에 영향을 준 주인공이요 터전이 되었다.

스스로 넘어 가기에도 벅찰 만큼 느껴지던 고개를 넘기 위해 시름겨워 부르던 정선아리랑은 어느덧 아리랑 아리랑 고개를 잘도 넘어가고 있다.

 

눈이 올라나 비가 올라나 억수장마 질라나
만수산(萬壽山) 검은 구름이 막 모여든다.
명사십리가 아니라면은 해당화는 왜 피며
모춘삼월(暮春三月)이 아니라면은 두견새는 왜 울어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고개로 날 넘겨주게

아리아리랑 스리스리랑 아라리가났네
아리랑 고개고개로 나를 넘겨주게

정선읍내 물레방아는 물살을 안고 도는데
우리 집에 저 멍텅구리는 날 안고 돌줄 왜 몰라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고개로 나를 넘겨주게 

 

 

신라와 고구려를 지난 남한강 물줄기는 장미산성을 크게 휘돌아 흐르며 목계나루로 이어진다. 목계나루는 강물이 말라붙은 갈수기에도 언제나 배가 드나들 수 있는 남한강 수운의 가항종점(可航終点)이었다. 조선 시대에 재정 확보를 위해 거둔 쌀과 베 따위를 보관하는 창고인 가흥창(可興倉)도 이 곳에 있었다.  

 

생선이 있으면 파리가 날아들고 나락이 쌓여 있으면 쥐가 들끓듯이 이곳 가흥창도 예외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선산부사를 지낸 점필재 김종직이 이곳을 지나며 ‘가흥참(可興站)’이라는 시를 남겼는데 경상도 백성들이 세곡을 바치는데 따른 고통과 부패한 가흥참 관리들의 실상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어 읽어 볼 만하다.

 

우뚝이 솟은 저 계립령은

예로부터 남북의 한계가 되었는데

북인들은 호화로운 생활을 탐하여

남인들의 기름과 피를 달게 여기네

우마차로 험난한 산길을 통해라

들판에는 장정 남자가 전혀 없네

밤이면 강가에서 서로 베고 자노니

아전들은 어찌 그리도 탐획한고

시장에선 생선을 가늘게 회치고

모점에는 술이 뜨물처럼 하얀데

돈 거두어 노는 계집 불러오니

머리꾸미개에 연지를 발랐네.

백성들은 심장을 깎는 듯 괴로운데

아전들은 방자히 취해서 떠들어대며

또 두곡(斗斛)의 여분까지 토색을 하니

조사(漕司)는 의당 부끄러울 일이로다

관에서 부과한 건 십분의 일인데

어찌하여 이분 삼분을 바치게 하나

강물은 스스로 도도히 흘러서

밤낮으로 구름과 아지랑이를 뿜어내는데

배 돛대가 협곡 어귀에 그득히

북쪽에서 내려와 다투어 실어가니

남인들의 얼굴 찡그리고 보는 것을

북인들이 누가 능히 알겠는가.  [출처: 이지누 한강을 걷다] 

  

조선시대만 하더라도 강을 끼고 있는 마을에 선비들이 사는 경우가 많았다. 그것은 물길이 확보되어 교통이 편리했기 때문이다. 정약용이 1796년 4월16일 가흥 앞강에 배를 띄웠는데 그 까닭을 말하기를 "험준한 산길 싫증이 나서(久厭山谿險)/편리한 뱃길로 바꾸기로 했다네(翻思水路便)"로 하고 있는 것만 봐도 그런 것이다. 물길이 발달했을 때의 목계는 강원도와 경상도 내륙의 산물이 모여들어 한양으로 향하고 서해에서 싣고 오는 새우젓이나 소금을 나누기에 알맞은 곳이었다. 더구나 강을 끼고 형성된 넓은 백사장은 장이 서기에 안성맞춤이었으니 크게 발전했던 곳이다.

 

가흥창이 있었던 곳은 목계교를 지나 38번 국도로 채 2㎞를 가지 않아 만나는 삼거리 근처이다. 599번 지방도로와 갈라지는 3거리의 오른쪽 가흥마을의 과수원 일대가 창고 자였다. 그러나 아무런 흔적이 없어 허망하다. 가흥창은 좌수참(左水站)이었으며 수참이란 것은 해운 이외에 배가 통행할 만한 강가에 창을 설치하여 조운을 편리하게 하는 것이다. 고려 때 정몽주가 처음 건의하여 설치했다고 한다.  -이지누-

 

 

 

▲ 국보 제6호 중원 탑평리 칠층석탑 (일명 중앙탑) ⓒ 2010 한국의산천

우리 국토의 한가운데라고 말하는 중원(中原) , 중원문화권의 중심에 우뚝 서있는 탑평리 칠층석탑 (일명 중앙탑). 문화사적 공원으로 조성되면서 그 한가운데 우똑 솟아있는 칠층석탑은 2층의 기단위에 7개의 탑신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절제된듯한 심플한 느낌을 주며 미끈하게 솟아있다

 

중원 탑평리 7층 석탑 (국보 제6호)

 

소재지 충주시 가금면 탑평리 11번지 (중앙공원內)
수 량 : 1기
규 모 : 높이 14,5m
자 료 :석조(화강암)
시 대 : 통일신라
지 정 : 국보 제 6 호(1934년 8월 27일 지정)

 

신라가 삼국통일 후 옛 고구려의 세력을 진압한다는 목적으로 세웠다는 탑평리7층탑으로 중앙탑으로도 불린다. 이 탑은 통일 신라 때 이곳이 나라의 중앙임을 나타내기 위해 탑을 세웠다는 유래담이 전해오는 이곳은 충주일대 중원문화권의 한 중심으로 자리잡고 있다.  

현존 신라 석탑 중에서 규모가 가장 크다.'탑평리 칠층석탑'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국보 제6호로서 신라 원성왕 1년에 건립된 석탑으로 높이 14.5m로, 현재 남아 있는 신라의 석탑으로 최고의 석탑이며 통일신라 때의 중앙에 건립하였다 하여 중앙탑이라고도 부른다.

 

 

삼국시대의 중원(中原) 남한강 유역의 중원(中原) 지방은 본래 마한에 속한 지역이었다. 근초고왕 때 백제가 마한을 평정하고 이 지역은 백제에 복속되어 '낭자곡성(娘子谷城)'으로 불리웠다. 그런데 고구려의 광개토대왕(혹은 장수왕) 때에 고구려의 영토로 편입되었고, 장수왕 63년(A.D 475)에 고구려에 전속되어 '국원성(國原城)'이라고 불렸다. 이에 대하여 <삼국사기> 지리지에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중원경(中原京)은 본시 고구려의 영토로 이름을 국원성이라 하였다. 이를 신라가 평정하여 진흥왕 때 소경(小京)을 설치하였다. 문무왕 때 성을 쌓았는데 주위가 2천5백92보이다. 경덕왕 때 이를 고치어 중원경이라 하였으니 곧 지금의 충주이다.” 즉, 그 후 신라의 북진 정책으로 진흥왕 14년(A.D 553) 신라에 편입되어 경주의 귀척 자제와 6부 호민을 옮겨 살게 하였고, 진흥왕 34년(A.D 573)에는 소경부(小京府) 또는 사천성(四川省)이라 칭하여 큰 번영을 이루었고, 신라 경덕왕 원년(A.D 742)에 '중원경(中原京)' 또는 '태원(太原)'이라 칭하여 신라의 중앙임을 표방하였다.
 

중원(충주)은 남북의 요충지로서 고구려, 백제, 신라가 서로 차지하려고 각축을 벌인 곳이며 예로부터 양질의 철이 생산된 우리나라 3대 철산지 중의 한 곳이었다. 정치, 경제적으로 중요한 고장이라는 이유로 삼국의 각축장이 되었던 충주는 아직도 그 주변에 많은 흔적을 간직하고 있다.

 

▲ 중원 고구려비 누각 앞에서 ⓒ 2012  한국의산천  

 

충주시 가금면 용전리 입석부락 입구에 있는 이 비는  이곳 주변에서 방치되어 굴러다니던것을 1979년 2월 예성동호회원들에 의해 발견되어 학계에 알려지고, 1979년 4월 8일 단국대학교 학술조사단에 의하여 고구려비임이 고증된 국내 유일의 고구려비이다.

 

 이 비는 남한의 현존 고구려 유적으로서 그 존재만으로도 그 역사적 가치가 대단하며, 국내에서 발견된 유일한 고구려비로서 규모는 작지만(높이 2.03m), 만주 집안현의 광개토대왕비(높이 6.39m)와 매우 닮아있다.

이 비는 오랜 세월의 풍화로 비문이 심하게 마멸되어 분명하게 확인할 수는 없으나 장수왕 때 고구려가 남한강 유역의 여러 성을 공략하고 개척한 후 세운 기념비로서 5세기 후반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4면비로서 전면 10행 23자씩으로 된 230자의 명문이며 향 좌측면에 155자가 새겨졌는데 뒷면과 우측면은 9행과 6행의 명문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고구려와 신라 백제 삼국의 관계를 밝혀주는 귀중한 금석문이다. 처음 입비 당시부터 대석과 개석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비의 모양이 만주 즙안현에 있는 광개토대왕비의 축소된 형상이다. 

 

▲ 정토사지(淨土寺址) 법경대사자등탑비(法鏡大師慈燈塔碑) ⓒ 2012 한국의산천   

동량면 하천리에 있는 정토사지(淨土寺址) 법경대사자등탑비(法鏡大師慈燈塔碑)는 시원하게 펼져진 충주호를 바라 보고 서있습니다.

이 비의 크기는 비신 높이 3.15m, 폭 1.42m로서, 충주댐 건설로 인하여 수몰지에 있던 것을 1983년에 현 위치로 옮겼다. 충주호가 만들어지기 전에는 저 아래 어디엔가 있었지만 수몰이 되면서 이곳 언덕으로 옮겨왔습니다.  우리는 청풍단지, 수산리에서 이곳을 오기에는 너무 넓은 호수가 가로막혀 험로를 돌아 돌아 왔습니다.

 

법경대사는 879년 1월1일 오시에 태어나 898년에 가야산사(伽倻山寺)에서 구족계를 받고 906년에 당나라로 가는 배를 얻어 타고 구법의 길을 떠났다. 구봉산(九峯山)의 도건(道乾)대사를 만나 법을 구하고 세간(世間)과 출세간(出世間)은 물론 천태산(天台山)을 비롯한 명산의 선백(禪伯)들을 두루 만나 공부를 이루고 924년에 귀국한 인물이다. 귀국하자마자 고려의 태조인 왕건은 국사의 예로 대사를 맞이했으며 대사를 정토난야(淨土蘭若)에 머물게 했는데 그곳이 바로 정토사이다. 그러나 정토사는 어느덧 폐사가 되고 우리 인간이 만든 커다란 호수로 인하여 본래의 자리를 잃었지만 그 자리가 그리운듯 드넓은 충주호를 바라보며 의연히 서있습니다.

 

 

▲ 집사람과 딸이 비의 규모를 보고 놀랍니다 ⓒ 2012 한국의산천

 

규모가 큰 비입니다. 이 비의 규모는 비신 높이 3.15m, 폭 1.42m로서, 충주댐 건설로 인하여 저기 산아래 수몰지에 있던 것을 1983년에 현 위치로 옮겼다.

이 비는 고려(高麗) 태조(太祖) 26년(943) 법경대사(法鏡大師)의 공덕(功德)을 칭송하기 위하여 세운 것으로 글은 최언위(崔彦위)가 짓고 글씨는 명필로 알려진 구족달(仇足達)이 썼다.

법경대사(法鏡大師)는 신라, 고구려의 고승으로 신라시대에는 정토사(淨土寺)를 창건하였고 고려조(高麗朝)에 이르러 태조(太祖) 7년(924)에 국사(國師)의 대우를 받고 태조 24년(941)에 63세로 입적하니 시호(諡號)를 법경(法鏡), 탑명(塔名)을 자등(慈燈)이라 하였다. [문화재청 참고]

 

 

 

 

 

 

◀ 문막에서 충주로 가는 길

 

영동고속도로 문막IC에서 나온 후 왼쪽방향으로 틀어서 남쪽으로 이어지는 49번 도로를 따라 내려가노라면 법천리를 거쳐 목계나루를 지나 남한강을 끼고 탄금대까지 나란히 달리는 이길은 이를 때 없는 베스트 드라이브 코스다. 

 

국보와 보물이 산재한 문화유적지는 길따라 곳곳에 있어 자녀를 동반한 가족 나들이코스로서도 손색이 없는길입니다.

 

이곳에 올려진 유적지는 모두 한길로 이어지는 선상에 있기에 찾아가기 쉬운 곳으로 문화재 답사 드라이브코스로 적극 추천드립니다. 

    

 

 

 

답사순서  (목계교를 지나면 충주 문화재 유적지 이정표가 줄줄이 나타납니다)

국보 59호 지광국사 현묘탑비 법천사지 >>> http://blog.daum.net/koreasan/12777492

보물 78호. 750호 거돈사지 >>>>>>>>>>>>http://blog.daum.net/koreasan/12777482

국보 197호.보물656호.보물658호 청룡사지 > http://blog.daum.net/koreasan/12777457

아름다운 시비가 있는 목계나루 >>>>>>>>>http://blog.daum.net/koreasan/12777438

보물 1401호 중원 봉황리마애불>>>>>>>>> http://blog.daum.net/koreasan/11441186

사적400호 장미산성 >>>>>>>>>>>>>>>> http://blog.daum.net/koreasan/11441193

국보205호 중원 고구려비 >>>>>>>>>>>>> http://blog.daum.net/koreasan/11441227

국보 제6호 중원 탑평리 칠층석탑(중앙탑) >>http://blog.daum.net/koreasan/11441421

창동 5층석탑 창동 미륵 >>>>>>>>>>>>>> http://blog.daum.net/koreasan/11441218

사적463호 누암리 고분>>>>>>>>>>>>>>> http://blog.daum.net/koreasan/11441212

탄금대 >>>>>>>>>>>>>>>>>>>>>>>>> http://blog.daum.net/koreasan/11441232

 

충주 비내길 '명품 걷기코스'
행안부, 우리마을 녹색길 베스트 10 선정 

충주 앙성의 '비내길'이 전국 녹색길 베스트 10에 선정돼 아름다운 걷기 코스로서 가치를 공인받았다.

충주시는 남한강변의 수려한 풍광을 담고 있는 비내길이 행전안전부가 발표한 '우리마을 녹색길 베스트 10'에 포함됐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비내길은 앞으로 국가 차원에서 인터넷 포털에 정보를 게재하고 동호회 참여 걷기대회 개최와 홍보책자에 소개되는 등 다양한 홍보와 걷기 붐 조성에 활용될 전망이다.

 

▲ 남한강변의 수려한 풍광을 따라 조성된 충주 앙성의 '비내길'에 걷기를 즐기는 관광객들의 발길이 모아지고 있다. © 충청일보 편집부

 시는 앙성탄산온천휴양축제 기간 중인 지난 5월 27일 열린 비내길 걷기행사에서 행안부의 현지실사를 받았으며, 이때 행안부 관계자로부터 '매우 친환경적이고 때 묻지 않은 아름다운 길'이라는 호평을 받았다.

 지난해 조성된 비내길은 앙성온천광장에서부터 남한강변을 따라 총 연장 17㎞에 이르는 오솔길을 이용해 만든 아름다운 길이다.

 

비내길은 2시간에서 3시간 30분까지 걸리는 2개 코스가 남한강을 끼고 강변을 따라 산과 논밭, 과수원 등 산수화 같은 전원풍경을 즐기며 걸을 수 있도록 조성돼 있다.

 특히 드넓은 억새 군락으로 유명한 비내섬을 경유하는 코스는 가을 정취가 빼어나 사진 동호인들의 출사지나 드라마 촬영지로 급부상하고 있다.

 인근에는 앙성 탄산온천과 가흥 민속공예품 거리, 충주 고구려비, 중앙탑, 고구려천문과학관, 충주댐 등 볼거리가 풍부하고 국토종주 자전거길(남한강 자전거길)과 연결된다.

 이번 행안부의 녹색길 베스트 10 선정에는 지난해 조성된 전국의 녹색길 80곳 가운데 53곳이 경합했다.

 베스트 10에는 비내길과 △두물머리 물래길(양평) △무등산 자락 다님길(광주) △영남 알프스 하늘 억새길(울주) △소이산 생태숲 녹색길(철원) △서산 아라메길(서산) △백제가요 정읍사 오솔길(정읍) △금오도 비렁길(여수) △삼강-회룡포 강변길(예천) △지리산 자락길(함양)이 이름을 올렸다. /충주=이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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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으로 그린 강줄기와 물방울 마을… 그림 속을 걷다 [예천=글·사진 윤문기 한국의길과문화 사무처장]

삼강~회룡포 강변길

 

▲ 비룡산 능선의 회룡대 전망대에서 내려다본 회룡포 마을. 내성천 물줄기가 삼면을 둘 러 싸고있어 '육지 속 섬마을'로 불린다.낙동강
 

삼강~회룡포 강변길

 

"와! 마을이 완전 물방울 다이아네."

 

예천 내성천 물줄기가 무려 350도를 휘감아 도는 회룡포마을은 금방이라도 육지에서 똑 떨어져 나올 듯 강줄기 속에 위태롭게 매달려 있다. 아홉 가구가 옹기종기 모여 사는 '육지 속 섬마을' 회룡포는 우리나라 최고의 '물돌이' 마을이다. 전국의 내로라하는 물돌이 마을도 회룡포마을 앞에선 감히 명함을 못 내민다.

이 기묘한 지형을 배후로 삼은 길이 예천군이 만든 '삼강~회룡포 강변길'이다. 이 길은 회룡포를 부드럽게 감싼 내성천과 더불어 낙동강의 유장한 흐름에 순응하는 수변길이다. 강물은 '흐름'이 아니라 '이음'이라고 했던가. 세 개의 강물이 하나로 이어져 흐르는 삼강(三江) 합수머리의 유려한 물잔치도 이곳에서 볼 수 있다. 물길이 이어지는 삼강나루는 예로부터 물자수송의 요충지가 될 수밖에 없는 천혜의 조건을 갖추었다. 과거시험을 보러 가던 선비들이 배를 타고 와서 문경새재를 넘어 한양으로 오가던 길목이기도 했다.

 

'삼강~회룡포 강변길'은 내성천과 낙동강 언저리를 휘돌아 다시 원점으로 돌아오는 10.1㎞ 회귀코스를 기본으로 삼았다. 여기에 비룡산 능선을 따라 걸으며 회룡포를 굽어보는 3.5㎞ 능선 연계코스가 추가로 만들어졌다. 원래 계획은 낙동강 건너 삼강주막을 출발지로 하지만 삼강주막과 용포마을을 잇는 낙동강 도보교가 내년 10월 완공될 예정이어서 그전까지는 회룡마을까지 차를 타고 들어와서 걸을 수밖에 없다. 자가운전자라면 용주팔경시비 앞에 있는 주차장에 차를 놓고 시계 반대방향으로 걸어보는 것이 좋겠다. 한 바퀴 걸어서 돌아오는 데 4시간 정도 잡으면 넉넉하다. 곳곳에 갈림길 안내판이 갈 길을 알려준다.

 

첫발을 채 떼기도 전에 길 정면으로 진경산수화에 등장할 듯한 기암절벽이 내성천 물줄기에 뿌리를 박은 채 나그네를 맞는다. 꼿꼿하지만 위압적이지 않은 절벽은 푸른 소나무를 잔뜩 끌어안았고, 그 사이사이에서 불어오는 듯한 강바람이 걷는 이의 속을 시원하게 훑어낸다. 폭이 50m는 족히 될 듯한 고운 모래톱 위를 신발을 벗어들고 걸어도 좋다. 강가 모래 속에는 미생물들이 살며 유기물을 분해해 강물을 깨끗하게 만든다고 한다. 내성천 강기슭에 오래 고인 물도 속이 다 비쳐 보일 만큼 깨끗한 이유다. 갈 길은 제쳐두고 모래톱 위에서만 한나절 놀고 가도 좋으리라.

 

성저마을을 지나면 이제부터 원산성 숲길이다. 제초작업을 하지 않았다면 한발자국도 떼기 힘들었을 원시림이다. 오른쪽으로는 낙동강을 원산지로 하는 물바람이 산바람과 뒤섞이며 시원함과 청신함을 고루 뿜어낸다. 물과 산과 바람이 필터링한 공기로 들숨과 날숨을 채워 허파를 닦아내고, 강 쪽으로 열린 시원한 조망으로 두 눈을 씻는 길이다.

 

◀ 위 : 삼강주막에서 내놓는 부침개와 막걸리./아래 : 삼강주막 뒤로 강물이 어슴푸레 보인다.

 

삼강교와 함께 삼강 일대가 훤히 조망되는 삼강앞봉 조망대에서는 그 옛날 삼강나루를 오가던 보부상과 사공들이 허기진 배를 달래고 지친 몸을 쉬던 삼강주막이 삼강교 옆으로 조그맣게 보인다. 110년 전통의 삼강주막 2대 주모(酒母)였던 유옥연 할머니가 2005년 89세의 나이로 세상을 뜨자 2007년 허물어져 가던 주막을 현대식으로 복원해 다시금 강가를 지나던 길손들을 불러들인다.

 

지금은 마을부녀회에서 맡아 운영한다. 생배추전과 손두부, 메밀묵, 막걸리 한 주전자가 곁들여진 한상차림(1만2000원)이 단연 인기다. 내년 10월 완공예정인 낙동강 도보교가 놓이면 주막에서 낙동강을 건너 회룡포강변길을 걷고 다시 주막으로 돌아올 수 있게 된다. 다리가 놓이기 전까지는 회룡포에서 삼강주막을 가려면 차를 타고 빙 돌아서 가야 한다.

 

 

회룡포마을의 명물 중에는 물방울 다이아몬드 지형에서 살아가기 위해 만들어 놓은 '뿅뿅다리'가 있다. 원래 섶다리(섶나무를 엮어서 놓은 다리)로 되어 있던 것을 구멍이 뚫린 철판과 쇠파이프로 이어 지금의 다리를 만들었다. 뿅뿅다리는 수위가 오르면 발판 구멍으로 물이 퐁퐁 솟는다고 해서 '뿅뿅다리'로 불린다.

 

육지 속 섬마을 회룡포를 바깥세상과 이어주는 두 개의 뿅뿅다리를 건너면 처음 출발했던 곳으로 돌아온다. 걷기를 마쳤다면 차를 운전해 25분 거리에 있는 삼강주막(054-655-3132)에 들러 아삭한 생배추전과 손두부를 곁들인 한상차림의 호사로 하루 여행을 입가심하는 것도 좋다.


 

<여·행·수·첩> (지역 번호 054)

회룡포 용주시비까지 하루 3번 버스가 운행된다.

예천터미널 출발 오전 8시 30분→용주시비 오전 9시 도착,

용궁면터미널 출발 오후 2시 20분→용주시비 오후 2시 40분 도착,

용궁면터미널 출발 오후 4시 20분→ 용주시비 오전 4시 40분 도착. 예천시내버스 654-4444

 

숙박(회룡포마을) : 황토민박(655-3973), 여울마을(655-7120), 회룡포쉼터(655-9143)

예천군청 문화관광과 : 650-6394

 

<걷기코스>

원점회귀 기본코스: 10.1㎞, 3~4시간 소요

삼강주막→보도교(내년 10월 설치예정)→뿅뿅다리→회룡포→뿅뿅다리→용주팔경시비→회룡교→성저교→내성천제방→원산성→보도교(설치예정)→삼강주막

연계 능선코스: 3.5㎞, 1시간30분~2시간 소요

회룡교→장안사→봉수대→비룡산→보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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