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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거친호흡 몰아쉬며 ^^ 굽이치는 산맥넘어 손의 자유, 발의 자유, 정신의 자유를 찾는다. 기억은 희미해지기에 이곳에 기록을 남긴다
MTB등산여행

남이장군묘 찾아가기

by 한국의산천 2012. 5. 21.

남이장군 묘 찾아가기

 

라이딩 코스  ( 맑은샘님, 흰구름님 그리고  한국의산천 3명)

부천 상동 호수공원에서 차량이동 ~ 안산 원곡동 화랑유원지 ~ 화정천 ~ 안산 호수공원 ~ 시화호따라 갈대습지공원 ~ 경기 화성 비봉면 해망산(남이장군묘) 답사 ~ 안산시 상록구 본오동 최용신 선생 기념관 답사 ~ 원곡동 화랑유원지 원점회기. (52km) 

 

 

 

경기도 화성군 비봉면 남전2리 해망산 자락에 자리한 남이장군 묘 답사 후 해망산 라이딩. 

 

 

남이섬 남이나라에 남이장군의 묘는 없다.

북한강 자락에 있는 강원도 춘성군의 섬은 이름하여 '남이섬'이다. 예전부터 남이장군 무덤이라는 불리는 묘가 한기 있다. 그러나 남이섬의 묘는 전해내려오는 허묘라는 이야기가 있다.

 

  경기도 화성군 비봉면 남전2리에는 남이장군의 묘가 자리잡고 있다. 부인과 나란히 묻혀 쌍분을 이루고 있는데, 1971년에 묘역 정화작업이 있었다고 한다. 처음부터 무관으로 벼슬을 시작하였는데, 석인상은 장군석이 아니라 문인석으로 마련된점이 특이하다.

 

사실 진짜 묘가 어디에 있던 나에게는 그리 큰 문제는 아니다. 단지 다시 한번 남이 장군의 그 기상과 나라사랑 정신을 다시금 되새기면서 그것으로 만족할 수 있기에... 

 

비운의 장군 남이 南怡 : 1441 ~ 1468 시호는 충무.
 남이는 1441년(세종23)에 남휘의 손자로 어머니는 태종의 넷째 딸인 정선공주이다. 17세 때인 1457년(세조3)에 무과에 장원 급제한 남이는 세조의 사랑을 한몸에 받으며 벼슬에 올랐다. 그리고 세조의 신임이 두터운 권람의 딸과 혼인을 하였다.

1467년 남이는 세조의 명을 받아 포천, 영평 등지의 도적을 토벌했다. 같은 해에 세조가 왕권을 강화하여 지방에 관리를 파견하자, 이에 불만을 품은 이시애가 함경도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우대장이 된 남이는 싸움터로 나아가 반란군을 물리쳤다. 그리고 그 공을 인정받아 적개공신 1등에 오르고 의산군에 봉해졌다.

이어서 서북쪽 국경 부근에 있는 여진족의 본거지를 정벌할 때에도 선봉으로 적진에 쳐들어가 적의 기세를 꺽었다. 이때 남자의 기개를 드높이 세우겠다는 결의를 담아 읊은 남이의 시는 유명하다.

 

北征 (북정)

 

白頭山石 磨刀盡 (백두산석 마도진)
豆滿江水 飮馬無 (두만강수 음마무)
男兒二十 未平國 (남아이십 미평국)
後世誰稱 大丈夫 (후세수칭 대장부)


백두산 높은 봉은 칼을 갈아 다 없애고
두만강 깊은 물은 말을 먹여 다 없애리라
남아 이십 세에 나라를 평정 못하면

누가 대장부라 일컬으리.

 

 

충무공 남이 장군 우리나라 역사상 최연소 27세 국방부장관 

충무공 남이(南怡) 장군의 아픈 역사

 

“백두산 돌은 칼을 갈아 다 없애고, 두만강 물은 말을 먹여 없어졌네, 사나이 스무 살에 나라 평정 못한다면, 뒤 세상에 누가 대장부라 하리요“

 

위의 시는 인조 때 이조 판서를 지낸 이수광의 「지봉유설」속에 기록되어 전해지는 남이 장군의 4편의 시중 「백두산 웅시(雄詩)」 또는 「북정(北征)」시로 불리우는 대표적인 시로, 젊은 장군의 호방한 기개가 잘 표현되어 있다.

그러나 이시는 야사에서는 남이가 역심을 품었다는 대표적인 증거로 제시되어, 26세의 젊은 나이로 그의 생을 마감 하게하는 한 원인이 되었다고도 전해진다.

 

1. 불세출(不世出)의 명장 남이장군

남이의 본관은 의령이고 조선 개국공신 의령 부원군 남재(南在)의 현손이요, 태종대왕의 넷째 따님인 정선공주와 결혼한 보국숭록대부 의산군 남휘(南暉)의 장손자로 태종대왕의 외증손이다.

 

아버지 남빈(南份)과 어머니 홍여공의 딸 사이에 1443년 지금의 서울 종로구 연건동 126번지에서 출생하였는데, 어려서 부터 용력이 뛰어나고 기상이 남달리 출중하여 역사상 가장 최연소인 약관 17세(1459)에 무과에 장원급제하여 세조의 총애를 받으면서 여러 무관직을 역임하였다.


1467년 명을 받아 포천 양평 등지에서 도적을 토벌하였고, 함경도 일대에서 이시애가 반란을 일어키자 군관으로 출전하여 첫 전투인 북청전투에서 큰 공을 세워 반군의 기세를 제압하고 토벌군이 공세로 주도권을 잡게 되어,  토벌 작전 중에 벌써 당상관(堂上官 : 장군반열)에 임명된 이후 파격적인 승진을 계속하였다.

이어서 이시애의 난 평정이 완료되기도 전에 세조는 직접 남이장군을 불러 여진족정벌에 관한 전략을 의논 한 후 강순, 어유소 등과 함께 만주 일대의 여진족을 정벌하게 하여 우상대장으로 출전하여 혁혁한 공을 세웠다.


이러한 공로로 세조 13년 11월2일에 <적개 1등 공신>으로 의산군에 봉해지면서 공조판서 겸 오위도총관(지금의 참모총장 격)을 거쳐 이듬해 8월23일에는 역사상 전무후무하게도 26세에 병조판서(오늘날의 국방장관)에 임명되어 병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2. 남이의 옥사(獄事)

당시 정국은 한명회로 대표되는 원로훈구파와 귀성군 이준(李浚)으로 대표되는 종친세력, 그리고 이시애의 난 진압 후 입지가 크진 남이와 같은 신흥 무인 세력들 간에 권력 투쟁의 양상이 나타나고 있었다.

 

이에 세조는 자신의 병세가 호전되기 어려움을 느끼고 예종대에서는 병권은 남이(병조판서)에게, 의정부는 이준(영의정)이 장악케 되는 하는 새로운 체제로 변환시키고자 하였으나, 정국을 완전히 수습하지 못하고 승하하고 만다.

 

결국 남이를 총애하던 세조가 승하하고 예종이 왕위에 오르자 한계희등 훈구파에서는 “남이의 사람됨이 군사를 장악하기에는 마땅하지 않다”는 탄핵을 받고 해직되어 한직인 겸사복장(兼司僕將)으로 밀려나고 만다.

한명회, 신숙주등 원로대신들은 남이, 강순, 이준 등 새로운 주류세력으로 떠오른 인물들을 견제하기 시작하였으며, 특히 젊은 나이로 병권을 장악한 남이가 중심 타켓이 되었다.

 

한직에서 밀려난 그가 어느 날 궁궐에서 숙직을 하던 중 혜성이 나타나자 “묵은 것을 없애고 새것을 나타나게 하는 징조다”라고 말하였는데, 이것을 병조 참지 유자광이 역모를 꾀한다고 모함하므로서, 무자비한 국문 끝에 1468년(예종 원년)10월 27일 그의 말대로 26세의 젊은 나이에 남아의 웅지를 펴보지도 못하고 억울하게 처형당하고 만다.

이와 함께 강순 등 38명이 연류시켜 처형되었고, 처형된 38명의 부자(父子), 형제, 숙질, 사위가지 합치면 그 수는 100여명에 이르는 처참한 옥사였다. 이를 두고 “연려실 기술”에서는 “남이의 옥사(獄事)”라고 기록하고 있다.

 

3. 훈구 세력에 의한 신진 무인세력들의 제거

세조의 절대 총애를 받았던 남이는 예종에 의해 병조판서에서 해임되어 권력의 중심에서 멀어지자 기득권 세력인 훈구세력에게 강한 불만을 표시했고, 이에 위협을 느낀 훈구대신들의 선제공격에 의해 제거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그 공격의 빌미는 유자광이 제공하였다.

 

실록이 일반에 공개되어 보편화되기 까지는 야사에 전하는 바대로 유자광의 고변에 의한 단순한 사건으로 인식되어 왔다.

예종 실록에는 연려실 기술 등 야사의 기록과는 달리 유자광이 고발한 내용에 대해 “남이는 지금 왕이 분경을 엄히 단속 적에 일을 꾸며 김국광 노사신 등을 처단하고자 했으며, 아울러 한명회를 제거하려 하였다‘고 기록하여 훈구파에 대한 남이의 도전을 직설적으로 언급하였다. 남이역시 권력투쟁에서 만만치 않는 인물이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문제는 바로 임금을 능가 할 만치 무소불위의 권력을 쥔 당대의 실력자 한명회를 공개적으로 제거되어야 할 인물로 지목하여 비판한데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다.

 

한명회! 그는 세조, 예종, 성종실록을 다 망라하여 보면 수양대군을 세조로 등극시키면서 김종서, 황보인 등을 주살하였고, 성삼문등 사육신을 처단하였으며, 남이의 옥사 이후 귀성군 이준도 역시 남이와 같은 비슷한 수법으로 제거되었고, 그는 임금의 장인으로서 다시금 영의정에 복귀하게 된다.

두 번이나 영의정에 오른 일은 조선왕조 창업 이래 처음 있는 일이였다. 

예종은 남이의 옥사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처형된데 대해 많은 후회를 하였으나, 훈구세력들 속에 제대로 왕권을 행사하지도 못하고, 일종의 의문사와 같이 갑자기 승하하고 말았다.

그 다음 보위를 누가 이을 것인가?  마땅히 월산대군이 되어야 하나, 이를 제치고 동생인 한명회의 사위되는 자산군이 성종으로 추대되었다. 이미 세조 때부터 권력의 포스트를 구축해온 한명회, 신숙주를 정점으로 하는 훈구 대신들이었는데, 이를  대적하기에는 무장의 기개만으로는 이들을 압도할 수 없었던 것이다.

 

4. 역모가 아니라는 증거

예종실록의 편찬 작업은 한명회, 신숙주의 감수아래 강희맹 등 익대 공신위주로 편찬되어 승자에 유리하도록 편찬 되었고, 남이와 좀 친하다는 이유하나만으로도 모조리 처형되고 말았으니 조정은 온통 훈구파 세상이었으니, 누구하나 이의를 제기할 사람이 없을 정도로 승자에 유리하도록 쓰여졌던 것이다.

  

그리고 국문 시 얼마나 가혹한 형벌이 가해 졌는지, 중종 실록에 “남이 때의 낙형(달근질)과 압슬형 같은 고문은 하지 말도록 지시”하는 기록이 보일 만치 천하장사라도 당해내지 못하는 가혹한 형벌이 가해져, 허위자백을 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더욱이 왕으로 옹립하려 했다던 보성군과 그 아들 춘양군은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았고, 강순의 아들 강공이의 처는 태비와 가까운 친척이라 하여 살려주는 등 역모혐의 그 자체에 무게를 두지 않고, 남이를 비롯한 그 일파의 정적을 제거하는데 목적이 있었던 것이다.

 

조정에서는 남이일파를 역적으로 몰아 처형한 후 문초를 할 때 예종과 함께 입시했을 뿐인데도 공교롭게도 처형당한 38명과 거의 같은 37명을 익대 공신에 책록하고, 이때의 일을 다스린 <무정보감>이란 책을 펴내, 두고두고 후세에 까지 입에 오리내지 못하도록 하였다. 

민심(民心)은 천심(天心)이라 하였던가?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남이장군이 보여준 영웅적인 남아의 기상을 잊을 수 가 없었고, 그의 무한한 가능성이 단절된데 대해 애석해 마지 않았던 것이다.

마치 항우(項羽)와 홍길동(洪吉童)의 얘기와 같이 장군의 초능력을 말하려는 것과 같이 설화, 사당, 허묘 등으로 수 백년에 걸쳐 끊임없이 전래 되어 왔던 것이다.

조정에서는 역모혐의로 처형하였지만 , 민간에서는 무언의 항변으로 수긍할 수 없었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는 것이다. 

 

5. 드디어 신설되어 충무공 시호를 받다

남이장군의 억울한 죽음이 일찍 풀릴 수 있었던 기회가 있었던 것은 성종이 김종직 등 영남 사림세력들을 등용하여 훈구 척신 세력들을 견제할 때 이었다.

김종직은 함양 군수로 부임할 때 유자광의 시가 걸려있는 현판을 보고 이를 철거케 하면서, 남이를 죽인 모리배>라고 노골적으로 멸시하였고, 단종폐위에 대해서도 세조 때의 훈신들을 비판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추세라면 신설될 기회도 있었지만 연산군이 등극하자, 유자광에 의한 <무오사화>로 대대적인 숙청을 당해 그 기회를 잃고 만다.

 

다음 성삼문 등 사육신이 선조 때 거론되어 숙종 때 와서 신설(伸雪)되었고, 이에 영의정을 지낸 남구만 공에 의해 남이장군의 묘역을 정화하고 <남이장군 묘제문>을 약천 집에 남겼다.

그후 정조 때에 다산 정약용과 가까운 예문관제학에 이른 정범조(정범조 : 1723~1801년)가 <남장군 怡전>을 그의 해좌집 제19권에 썼는데, 남이 장군의 출생과 행적 등을 정확하게 밝히고 있으며, 이것이 신설(伸雪)되는 데에 많은 영향을 기쳤을 것으로 여겨진다.

이러한 사회적적 분위기가 성숙되어가자 이에 힘입어 188년 순조 18년 3월 당시 우의정이었던 남공철(南公轍)공이 상소하여 윤허 받게 되었다.

실로 350여년이란 장구한 세월 끝에 역사 속에 재등장하게 되었고, 그를 모함 한 유자광은 그 후에도 계속해서 <무오사화>와 <갑자사화>를 일으켜 간신으로 낙인이 찍혀 중종2년4월 모든 훈작을 삭탈 당함과 동시에 평해(平海)로 귀양 가, 그 귀양지에서 2~3년간 눈도 멀고 추하게 늙어 마침내 중중7년 6월 숨을 거두었고, 그의 두 아들도 귀양가 죽어서 후사가 없게 되었다.

역사는 말한다. 그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남을 모함하면서 까지 추구했던 영화는 영원하지 않다는 것. 불의(不意)한자의 종말은 비참하다는 것. 그리고 그가 저질은 악명은 만세에 남아서 전해진다는 사실을.... 

 

6. 요구되는 진정한 역사적 복원

1818년(순조18)에 가서야 신설(伸雪)되어 관작이 복구되고 후에 충무공(忠武公)이란 시호도 받게 되었지만, 후손들에게는 350여년이란 장구한 세월 동안 엄청난 폐해를 가져다 주었다.

그 후손들은 과거 시험에도 응시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역적의 후손들로 숨어살다 시피하여 왔다.  그러니 장군에 대한 기록도 단편적인 야사 얘기만 전해져 왔을 뿐, 장군의 업적에 대한 역사적인 사실도 잘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연려실 기술에 계대(繼代)가 잘못 기록된 것을 후대 사가들은 여과없이 그대로 인용하다 보니 해석하는 과정에서 엄청난 오해를 불러 일으키게 하는 소지도 있었고, 이시애의 난 평정과 특히 대외 정벌사인 여진족 정벌에 있어서의 중요한 전공(戰功)은 역사가들 조차 잘 모르고 있는 실태이다.

이에 상세히 다 열거하지는 못하지만 바로 잡아 나가야 할 기록들과 묻혀 왔던 역사적 사실 들을 욧점만 골라서 논하고자 한다.

그래야만 신설이후 진정한 역사적 복원이 되는 것이요, 이것이 진정 우리 후손들이 해야 할 몫이요, 의무이기도 한 것이기 때문이다.       

 

가.  바로 잡아나가야 할 기록들

(1) 계보(系譜)와 출생년도에 관한 문제

예종 실록 1월9일 기록에 “남이의 조모(祖母) 정선공주의 노비를 내수사에 도로 붙이라”라는 기록과, 남이 장군이 최후 진술 시에 “나 같은 사람은 나이 겨우 26세 인데 , 참으로 애석하다!”라는 대목이 모든 것을 밝혀 준다.

그런데 최근에 나오는 여러 간행물에서 까지 정선공주가 어머니이고, 28세에 병조 판서를 하였다고 하고 있다.

이는 사가(史家)들이 흔히 인용하는 <연려실 기술>에서 잘못된 것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족보상에 정선공주와 혼인한 의산군 南暉-份-怡로 이어지는 계대가 부정되어 “南怡之獄”을 해석하는데 엄청난 오해를 하도록 되어있다.

같은 야사이더라도 정조 때 예문관제학을 지낸 정범조가 쓴 <남장군 怡전>이 족보와 일치하느니 만치 이를 인용하는 것이 더욱 권위있는 일로서 마땅히 바로 잡아나가야 할 일이다.

 

(2) 되찾지 못한 출생지에 관한 문제

남이 장군이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젊은 나이에 돌아가시고 보니, 세인들이 추모해 마지않던 나머지 수많은 얘기와 함께 사당, 지명, 허묘 등이 전국에 산재해 있다.

이와 함께 출생지가 강원도 춘성군 <남이섬>부근이라 하여 그곳이 사실인양 그렇게 알고 있는 분들도 많다.

실록에 근거하면 남이장군의 할아버지 의산군 남휘는 정선공주와 혼인한 후 수강궁(지금의 창경궁)에서 살다가, 정선공주 사후(死後)에 세종 7년 7월 세종대왕이 하사한 영숙택주(寧淑宅主)란 집에서 11세 까지 할아버지 슬하에서 자랐다.

94년 12월에 종로구청에서 발행한 <종로의 명소>란 홍보 책자에 “연건동 126번지가 남이장군의 생가 터”라고 명확히 밝혀주고 있다.

지금의 한국국제 협력단과 주택가가 경계하고 있는 곳이다. 70연대까지만하여도 빈터로 남아있었는데 그곳이 주거환경개선지구로 지정되어 지금은 3층 빌라 건물이 들어서 있다.

후손들이 활용할 수 있는 귀l중한 유산이 없어지고 말아, 안타까운 마음 금할 수 없다.

 

(3)병조 판서 임명 날짜에 관한 문제

화성군에 있는 묘비와 남이장군 실기(94.11.2 남상달 저)등에 세조14년 9월7일에 병조판서에 올랐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잘못 전해진 야사를 인용한데 기인한다.

그날은 세조가 사경을 헤매다가 붕어하기 하루 전이고, 이날은 예종이 즉위하여 남이장군을 해임시킨 날이다.

그러니 하루밖에 못했다는 얘기가 된다.

실록에 세조 14년 8월23일이니 만치 고쳐나가야 할 대목이다. 한번 잘못 전해진 기록이 얼마나 후대에 영향을 미치는지를 단적으로 말해 주고 있는 것이다.

남이장군은 병조 판서 이전에 세조 13년12월27일에 이미 공조판서(工曹判書)있었지만, 우리 후손들로서는 우리나라 역사상 전무후무하게도 26세에 오늘날 국방장관 격인 병조판서가 되었다는 것이 자랑꺼리인데 여기에 착오가 있어서는 안된다.

 

(4) 남이 장군 묘소에 관한 문제 

남이장군의 묘는 그 전에도 구전되어 왔었겠지만, 공식적으로 처음 알려진 것은 남구만 공에 의해서다.

그는 숙종 때 영의정을 두 번씩이나 지내고, 낙향하여 83세로 죽기 1년 전인 1710년(숙종36년) 10월9일에 쓴 <남이장군 묘제문>에서 비롯된다. 

이는 그의 저서 약천집 24권에서 전해지고 있지만, 이에 의해서 묘소가 단장되고 경계선도 확정 되었던 것이다.

오늘날 경기도 화성시 비봉면 남전2리에 있는 경기도 기념물 제15호로 지정되어 있는 곳이다. 그런데 가평의 남이섬과 논산에도 허묘(墟墓)가 있는데, 거기가 진짜인 양 시련의 극복이란 중고교 반공교과서에 기록되어 있고, 남이섬을 관광하고 온 남씨들 조차도 그곳에 참배하고 자랑삼아 애기하고 있으니, 시정해야 될 문제이다.

함경남도 북청지역에도 비석이 있다는데 확인되지 않고 있다.

 

나. 묻혀왔던 역사적인 사실들 발굴

 

(1) 이시애의 난 평정시의 일정별 활약상

세조 13년 5월 함길도에서 일어난 이시애의 난은 그동안 그 지방의 사람으로 관리를 임명해 왔던 것을, 중앙집권체제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조정에서 임명하여 파견하는 것이, 함길도 지방민을 탄압하는 것이라고 선동하여 일어난 사건이다.

그때 함길도는 완전히 이시애의 편에 서게 되어 토벌군이 감히 진입하지도 못하는 지경이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 남이 장군은 강순과 함께 1000여명의 선봉부대로 6월19일 북청지역으로 진입하여 진지를 구축하는데 성공하게 되었다.

이에 이시애 반군은 6월24일 밤 1만 6천명의 군사로 진지를 완전히 포위한 체 파상공격을 계속해와 날이 밝은 정오까지 공방전이 계속되었는데, 이 전투에서 남이 장군은 몸에 화살을 4~5개를 맞아 부상한 상태에서도 용전분투하여 적을 격퇴하므로서 승기를 잡게 되었던 것이다.  

 

(2) 건주 여진족 정벌시의 전황 발굴

이 대목 역시 어덯게 싸웠는지에 대해서는 이해하기 부족하다.

다만 역사가들은 이시애의 난을 평정한 군사들을 그대로 방향 전환하여 만포로부터 올미부로 공격하였다고 하나 올미부(兀彌府 : 지금의 환인현 괴마자진  동고성자 촌)가 어디인지 역사가들도 잘 모르고 있는 실정이다.

이 지역은 세종대왕 때 최윤덕 장군이 정벌한 바 있었으나, 남이장군 이후 한번도 정벌한 적이 없었는데 그만큼 지형이 험준하여 작전을 펼치기가 어려운 지역이고 기상 또한 극복하기 어려운 지역이다.

중국에서도 꺼려하는 험난한 이 지역에서 많은 전과를 올리면서 적진을 소탕하였다는 것은 대단한 성과이었다.

이에 남이 장군의 이름이 중국에 까지 진동하였는데, 실록에 명나라의 사신이 황제의 칙서를 받들고 와서, 남이장군의 전공을 치하하고 예물을 하사하면서 남이장군의 활쏘는 모습을 보고 싶어 하였고, 그 활을 기념으로 얻어가 “이 활은 남이장군이 여진족을 정벌할 때 쏘던 활이다”라고 자랑하고 싶어 할 정도였다.

당시 상방의 무기와 전술 등은 오늘날 전사를 연구하는데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3) 고토회복(古土回復)의 정신 고취

만주지역은 고대로부터 우리 민족의 강역이였음은 역사적으로 익히 알고 있는 터이요, 최근 이곳에서 출토되는 유물로 봐서도 이를 증명하고 있다. 이러한 북방 지역에 대해 남이 장군은 남달리 여러 차례 이곳을 완전히 정벌하여야 한다고 주장해 왔던 분이었다.

세조14년 7월15일 세조와 담론시 “신은 젊어서부터 뜻이 오랑캐를 평정하는데 있었습니다. 신은 최근 분에 넘치는 임금의 은덕을 입었으나, 보답할 길이 없었는데, 다시 북변이 시끄럽다하니, 신은 밤에 잠을자지 못하고 칼을 어루만지면서 한번에 쳐부수고자 생각하여 왔습니다....” 라고 말한 대목이 기록되어 잇고, 국문을 받을 때도 북방에 관한 일을 말하는 것을 보면 줄 곳 잃었던 우리의 강토를 다시 찾겠다는 포부를 안고 있었던 것이다. 


후에 광해군 때에 여진족의 세력이 강성해져 명나라에서 다시 협격을 요청해 오자 광해군이 말하기를 “ 예날 건주 여진족을 정벌했던 남이장군과 같은 장수가 지금은 왜 없는가?...”하면서 한탄하는 기록이 나온다. 결국 여진족들은 전 만주를 통일하여 후금이 되었다가 청나라로 발전하여, 우리나라에 정묘, 병자호란시에 우리나라가 이에 항복하고, 중국 명나라까지 멸망시켜 전 중국을 통일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때 여진족을 완전히 정벌하여 만주지역을 차지하였더라면 오늘날 우리의 강역은 옛 고구려와 발해의 영토였던 만주지역이 우리의 영토가 되었음은 물론이다.

그래서 더욱 남이 장군의 죽음이 세인의 가슴에 더욱 아쉬움이 남게한다.       

 

7. 맺는 말

남이장군의 억울한 죽음을 신설(伸雪)하는데 있어, 조정의 여론을 환기시키는데 공헌한 분이 정범조의 <남장군 怡전>이었다는 사실을 아는 분은 그리 많지 않다.

거기에 남씨 후손들에게 찔리는 다음과 같은 말을 상기해 보지 않을 없다. 즉 남이의 옥사에 있어서 그를 무고(誣告) 한자와 고문을 가한 자들은 모두 녹훈을 받아 그 후손들이 모두 이익을 얻었는데, 남이의 죽음에 대해서 지금까지 그 억울함을 변명한자가 없으니 슬픈 일이다....라고 끝을 맺고 있다.

얼마나 가슴 아픈 말인가? 그렇다면 지금에 와서는 그렇치 아니한가?

남이장군의 후손들은 350여년이나 지나 신설은 되었지만, 그 여파는 오늘날 까지도 이어져 내려와 인구 수(數)도 적고 힘이 약해서, 후손 된 도리를 다하지 못하고 있음이 사실이다.

앞서 기술한 바와 같이 실록에 근거하여 바로 잡아 나가야 할 부분들을 바로 잡고, 묻혀왔던 역사적인 사실들을 발굴하여 하루 빨리 남이장군 전기를 발간하는 한편, 한세대(30년)가 지난 족보도 발간하여 뿌리 교육을 강화 해 나가야 할 일이 시급하다.

     

출생지에 대해서도 신설이후 그 터를 보전해 왔더라면 기념사업도 할 수 있었고, 상당한 재산적 가치도 있었을 것인데, 정작 그 후손들은 몰라왔고, 지금은 그 터가 어디였다고 전해오고 있을 뿐이다.

서울시 대표 축제인 <남이장군 대제> 행사도 시가행진을 하면서 일주일간씩이나 진행하고 있어도 참여해 오지 못해 왔고, 서울시 성동구 사근동에 있는 사적지에도 힘이 미치지 못하고 있다.

이와 같이 남들은 애석하게 여기고 흠모해 오던 나머지 각종 행사를 벌여오고 있는데 비해, 정작 우리 후손들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이니, 이 또한 슬픈 일이다.

1818년에 신설은 되었지만 진정한 역사적 복원은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는데, 이것이 진정 오늘날 우리 후손들이 해야 할 몫인 것이다. [글쓴이 : 인천 시민대학교 복지학과 남수현]

 

 

사람은 죽어 이름을 남긴다고 하지만, 뜻을 제대로 펴보지도 못하고 그 젊은 나이에 죽어 훗날 아무리 높은 관작이 주어지고 수십개의 사당에 배향된다 한들 본인에게는 아무 소용없는 다 부질없는 일 아닐까 싶은 서글픈 생각에 잠기게 하는 곳이다. 
 
남이의 용맹을 높이 평가한 세조는 27세라는 젊은 나이에 국방을 책임지는 병조 판서라는 중책을 맡겼다. 한계희를 비롯한 일부 신하들이 외척에게 병권을 맡기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주장하였지만 세조는 이를 귀담아 듣지 않았다.

그러나 남이를 총애하던 세조가 죽고 예종이 즉위하자, 형조 판서 강희맹과 한계희 등이 남이에게 병권을 맡기는 것이 적합하지 않다고 주장하여 남이는 병조 판서에서 해직되었다.

 

이 무렵 남이는 궁궐에서 숙직을 서다가 혜성이 나타난 것을 보고 무심결에 '옛것은 사라지고 새로운 것이 나타날 징조'라고 말했는데, 평소에 남이를 시기하던 유자광이 이 말을 엿듣고는 남이가 역적 모의를 꾸민다고 모함하였다. 더구나 남이의 유명한 시조 가운데 '나라를 평정 못하면'이라는 말을 '나라를 얻지 못하면'으로 바꾸어 남이를 대역 죄인으로 몰았다. [男兒二十未平國 (남아이십미평국)을 男兒二十未得國 (남아이십미득국)으로 바꾸어 남이가 역모를 꾀하였다 하여 모함하여 죽음까지 이르게 하였다 전한다]

이 일로 남이는 28세의 젊은 나이로 억울하게 처형을 당하고 말았다. 그 뒤 400여 년이 지난 1818년(순조18)에 남이는 억울한 누명을 벗고, 벼슬과 '충무'라는 시호를 받았다.

 

세월이 지나면서 간악한 간신배로 자리매김한 유자광이 비판되면서 남이의 역모사건은 오로지 유자광 한사람의 무고에 의한 억울한 죽음으로 사람들은 결론을 내렸고, 드디어 1818년(순조18)에는 그의 후손인 우의정 남공철의 주청으로 강순과 함께 관작이 복 되었다. 또 서원이 난립하던 때에는 창녕의 구봉서원과 서울 용산의 용문사 및 서울 성동의 충민사에 배향되어 충무라는 시호도 받게 된다.

 

 

 

 

 

 

 

 

 

 

 

 

 

 

 

 

 

 

 

 

 

 

 

 

 

 

 

 

 

 

 

 

 

 

 

 

 

 

 

 

 

 

 

 

 

 

 

 

 

 

 

상록수 최용신 

사계절 언제나 푸른나무를 우리는 상록수라고 부른다. 그 이름처럼 지금까지도 우리곁에 상록수로 존재하시는 분 최용신 선생님

 

상록수

심훈이 '상록수'에서 `청석골`이라 부른 마을이 바로 경기도 안산시 상록구 본오동의 샘골마을이다. 또한 농촌의 문맹퇴치를 위해 야학에 온힘을 기울이는'채영신'이란 여자주인공은 일생을 농촌계몽운동에 헌신한 최용신(崔容信)의 실제인물이다. 
 

최용신은 서기1909년 8월 함경남도 원산읍 두남리에서 최창희(崔昌熙)의 둘째딸로 태어났다. 그의 어린시절은 대단히 곤궁한 생활속에서 살았지만 신앙심이 깊어 열심히 교회를 다녔으며, 그로인해 루씨(樓氏) 여자보통학교와 루씨여자고등학교를 나왔다. 서울에 있는 감리교 협성신학교 졸업을 1년 앞둔 1931년 10월 최용신은 학업을 중단하고 샘골마을로 농촌계몽운동을 하기 위해 내려왔다.

농촌계몽운동과 유학중에 얻은 병과 과로가 겹쳐 학생들과 학부모 그리고 샘골마을 주민들의 지극한 병간호를 외면하고 1935년 1월 23일꽃다운 나이 26세에 이세상을 하직했다. (1935년 1월23일 장중첩증으로 수원도립 병원 운명)


그 후 많은 세월이 지난 1974년 11월 30일 루씨동문과 천곡교회에서 상록수 최용신 선생을 기리기 위한 기념비를 세웠으며,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다.

- 최용신 선생의 묘 
- 소 재 지 : 안산시 상록구 본오동 879-4
- 지정번호 : 안산시 향토유적 제18호

 

계속해서 상록구 본오동에 자리한 최용신 선생 기념관으로 이동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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