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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거친호흡 몰아쉬며 ^^ 굽이치는 산맥넘어 손의 자유, 발의 자유, 정신의 자유를 찾는다. 기억은 희미해지기에 이곳에 기록을 남긴다
MTB등산여행

상록수 최용신 기념관

by 한국의산천 2012. 5. 20.

상록구 본오동 샘골에 위치한 최용신 선생 기념관 

 

라이딩 코스  ( 맑은샘님, 흰구름님 그리고 저 한국의산천 3명)

부천 상동 호수공원에서 차량이동 ~ 안산 원곡동 화랑유원지 ~ 화정천 ~ 안산 호수공원 ~ 시화호따라 갈대습지공원 ~ 경기 화성 비봉면 해망산(남이장군묘) 답사 ~ 안산시 상록구 본오동 최용신 선생 기념관 답사 ~ 원곡동 화랑유원지 원점회기. (52km) 

 

상록수역 이름이나 안산시 상록구는 바로 심훈의 소설 상록수의 무대가 되었던 이곳이기에 그 이름이 탄생하였다.

 

 

상록수 최용신 

사계절 언제나 푸른나무를 우리는 상록수라고 부른다. 그 이름처럼 지금까지도 우리곁에 상록수로 존재하시는 분 최용신 선생님

 

상록수

심훈이 '상록수'에서 `청석골`이라 부른 마을이 바로 경기도 안산시 상록구 본오동의 샘골마을이다. 또한 농촌의 문맹퇴치를 위해 야학에 온힘을 기울이는'채영신'이란 여자주인공은 일생을 농촌계몽운동에 헌신한 최용신(崔容信)의 실제인물이다. 
 

최용신은 서기1909년 8월 함경남도 원산읍 두남리에서 최창희(崔昌熙)의 둘째딸로 태어났다. 그의 어린시절은 대단히 곤궁한 생활속에서 살았지만 신앙심이 깊어 열심히 교회를 다녔으며, 그로인해 루씨(樓氏) 여자보통학교와 루씨여자고등학교를 나왔다. 서울에 있는 감리교 협성신학교 졸업을 1년 앞둔 1931년 10월 최용신은 학업을 중단하고 샘골마을로 농촌계몽운동을 하기 위해 내려왔다.

농촌계몽운동과 유학중에 얻은 병과 과로가 겹쳐 학생들과 학부모 그리고 샘골마을 주민들의 지극한 병간호를 외면하고 1935년 1월 23일꽃다운 나이 26세에 이세상을 하직했다. (1935년 1월23일 장중첩증으로 수원도립 병원 운명)


그 후 많은 세월이 지난 1974년 11월 30일 루씨동문과 천곡교회에서 상록수 최용신 선생을 기리기 위한 기념비를 세웠으며,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다.

- 최용신 선생의 묘 
- 소 재 지 : 안산시 상록구 본오동 879-4
- 지정번호 : 안산시 향토유적 제18호

 

▲ 경기도 화성에 위치한 남이장군묘 답사 후 안산 상록구 본오동에 있는 채용신 선생 기념관으로 이동하기 ⓒ 2012 한국의산천  

 

 

 

 

 

 

▲ 높은 첨탑을 보며 교회가 진정으로 가야 할 길이 무엇인가를 생각해봤다.ⓒ 2012의산천

문득 이문열씨의 소설 사람의 아들이 떠올랐다. 과연 인간을 구원해줄 이는 누구인가...

 

100년 역사의 샘골교회.(川谷.천곡교회)

샘골은 일제시대를 지나는 동안에 한자로 천곡(川谷)으로 불려지다가 광복이 된 후에도 한참 후에야 다시 샘골로 부르기 시작했다는데 그곳 사람들은 아직도 샘골교회보다는 천곡교회라는 이름에 더 익숙하다고 한다.

 

▲ 꼭 100년 전 이곳에 자리 잡은 기독교 대한감리회 샘골교회  ⓒ2012 한국의산천

 

1907년 7월 6칸짜리 작은 교회로 출발한 샘골 교회. 지금으로부터 꼭 100년전 이곳 터에 자리잡은 교회이다.

샘골 감리교회 뒤편 야트막한 동산에 최용신 선생의 묘가 자리하고 있다. 

 

최용신의 농촌계몽운동은 기독교계통의 농촌운동의 일환으로 계획되고 추진된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 YWCA의 농촌파견교사로 임명되어 1931년 10월 경기도 화성군 반월면 천곡리(샘골:현재 안산시 본오동)에 파견되면서 그녀는 농촌을 사랑하고 농민의 아픔을 함께 하면서 농촌 아동을 민족의 동량으로 키우는 구국교육운동에 발벗고 나섰던 것이다. 

 

신여성으로서의 자긍심과 처녀로서의 수줍음과 부끄러움도 버린 채 직접 발을 벗고 논에 들어가 모를 심고 김을 매며 농촌부녀자들과 함께 밭을 매면서 구슬땀을 같이 흘리고, 밤에는 가갸거겨의 한글강습의 야학을 열고 아동들과 한글·산수·재봉·수예 등을 가르치는 강습소를 운영하는 등 1인 4역 또는 5역을 몸소 실천하였던 것이다. 그녀가 천곡(샘골)에서 우선 실행한 것은 가르치고 배우고자 하여도 마땅한 교육장이 없는 것을 절감하고 강습소 설립에 온 힘을 경주하였다.

천곡에 온지 8개월만에 강습소 인가를 받아 내고 1년 3개월만에 강습소를 신축하여 110명의 아동들을 교육시키는 학교로 발전시켰다. 이와 같이 최용신의 천곡에서의 활동은 천곡강습소의 교장 겸 교사로서, 마을 주부들의 주부회 지도자로서, 마을 청년회의 후원자로, 천곡교회의 종으로서 천곡의 온 마을에 그녀의 손길과 마음이 아니 거친 데가 없을 정도로 그녀는 천곡의 산 선지자였다고 전한다.

 

 

▲ 샘골의 유래 ⓒ 2012 한국의산천

이곳 샘골은 1931년 최용신 선생이 농촌 계몽운동 지도자로 부임하여 교육을 펼친곳이다.

 

신은 바르게 사는 자를 시험한다.

 

성서에 나오는 랍비 요나한의 말이다.

"도공은 이미 망가진 그릇을 손가락으로 두드려 시험해보지 않는다. 그러나 잘 만들어진 그릇은 이리저리 두드리면서 시험해본다.

이처럼 신께서도 이미 잘못된 악함은 시험하지 않고, 바르게 살아가는 선인을 시험해보는 것이다."

 

랍비 벤 허니나도 비슷한 말을 했다.

"자기가 팔고 있는 베가 좋다고 생각하는 삼베 장사는 그 삼베를 계속 다듬이질하여 윤기를 낼 것이다. 그러나 자기 베의 품질이 나쁘다면 그러지 않을 것이다. 두들겨봐야 곧 해져버리기 때문이다. 이처럼 신도 바르게 사는 인간만 골라 시험해본다."

 

랍비 에레아잘도 이런 말을 했다.

"튼튼한 소와 병약한 소 두 마리를 가진 농부가 있다면, 그 농부는 건강한 소에게 쟁기를 채울 것이다. 이처럼 신은 건강하고 바르게 사는 자에게 무거운 짐을 지게 한다."

 

그렇다 바람을 마주 보고 서 있으면 역풍이 되지만 바람을 등지고 서면 순풍이 된다. 생각의 방향을 바꾸면 인생의 방향도 바뀐다

 

▲ 상록수의 실제 주인공이었던 최용신 선생 기념관 돌아보기 ⓒ 2012 한국의산천


학창시절 필독서 이광수의 유정 ,무정, 흙, 심훈의 상록수...

소설 상록수의 실제 모델 최용신

  

심훈의 소설 상록수(常綠樹)는 동아일보 창간 15주년 기념 장편소설 특별공모에 당선되며 연재되었다.  

그 이전인 1932년 춘원 이광수는 동아일보에 재직하면서 장편소설 '흙'을 연재해 전국 농촌계몽운동에 활력소을 불어넣기도 했다.

 

심훈이 '상록수'에서 `청석골`이라 부른 마을이 바로 경기도 안산시 상록구 본오동의 샘골마을이다. 또한 농촌의 문맹퇴치를 위해 야학에 온힘을 기울이는'채영신'이란 여자주인공은 일생을 농촌계몽운동에 헌신한 최용신(崔容信)의 실제인물이다. 

 

 

막걸리 한잔 부어놓고 암울했던 시기에 짧은 생을 살다간 그분의 숭고한 정신을 기려본다

 

세월은 가도 아픔은 남아

나그네는 그저 못다 이룬 사랑의 기억만 가지고 갈 뿐이다 

 

 

 

▲ 샘골교회 뒤편 언덕에 자리한 최용신 선생의 묘 ⓒ 2012 한국의산천

(지금은 없어진) 강습소가 잘 보이는 곳에 묻어달라는 유언에 따라 강습소 바로 옆에 마련된 최용신 선생의 묘소

 

 

최용신(崔容信)선생 연보

1909년 8월 12일 함경남도 덕원군 현면 두남리에서 崔昌熙씨 차녀로 출생
2남 3녀( 언니 - 시풍 - 시항 - 용신 - 용경)
두남리는 동해 바다가 보이고 원산읍에서 10리 거리에 있는 마을로 일찍 기독교가 들어왔음.

1918년 3월 20일(9세) 두남학교 입학
1920년 4월(11세) 元山 樓氏女子普通學校로 전학
1924년 3월(15세) 원산 루씨여자보통학교 졸업
1924년 4월(15세) 元山 樓氏女子高等普通學校 입학
1925년(16세) 한동네 건너 살고 교회 회장이던 김학준군과 약혼
1928년 3월(19세) 원산 루씨여자고등보통학교 최우등 졸업. 선교사 루씨 컨닝킴(Lucy Cuinggim)의 이름을 따 세워진 우리나라 5대 여자 사립(배화,이화,호수돈,숭의여고)중의 하나
1928년 4월(19세) 서울 여자협성신학교 입학(현 감신대). 학제가 변경(4년제,남녀공학)됨에 따라 1929년 새로이 뽑은 남학생과 이미 입학한 여자신학생이 합해져 남녀공학이 된 협성신학교 다님
1929년(1학년) 황해도 수안군 천곡면 용현리 농촌 실습
1930년(2학년) 강원도(경상도란 주장도 있음) 포항 옥마동 농촌 실습
1931년 4월(3학년) 교내 스트라이크 사건 주도
1931년 10월(22세) 경기도 수원군 반월면 샘골(현 경기도 안산시 본오동)에 옴
※35.1.23 운명까지 3년 3개월, 일본 유학 기간을 빼면 샘골 활동 기간은 총 2년 9개월임
1931년 10월 11일 샘골 예배당을 빌려 한글, 역사, 산술, 초보의 재봉, 수예 가사, 노래공부, 성경공부 등 시작.
1932년 5월 샘골 학술 강습소 창설인가 받음
1932년 7월 경성 YWCA회관에서(제10회 Y전국대회) 샘골활동 보고
1932년 8월 학원건축 발기회 조직. (샘골부인 친목계, 염석주 등 지역 유지, YWCA 재정후원)
1932년 10월 강습소 짓는 계기 마련을 위해 추석놀이 개최
1932년 10월 27일 강습소 정초식 거행
1933년 1월 15일 2개월여만에 강습소 낙성식
1933년 7월 13일 수원경찰서 호출. (기록은 남아있지 않으나 주재소, 경찰서로 자주 호출돼 여성으로서는 감당하기 힘든 고문 등의 심한 고통을 당했다고 생존 지인들 증언)
1933년 10월 5일 학부형, 지역유지들이 참석한 운동회 개최
1933년 10월 YWCA의 재정 후원 절반으로 삭감
1934년 3월(25세) 일본 유학, 고베여자신학교 사회사업과 입학. "이 땅을 농촌 운동의 도화선으로 만들자면 새로운 지식과 구상이 필요하다"고 생각함. 덴마크 그룬트비, 약혼자 김학준을 만남.
1934년 7월 고베신학교 학내잡지인 푸른 하늘에 나의 소감 기고
1934년 9월 각기병의 악화로 6개월만에 귀국
1934년 YWCA의 재정 후원 완전히 끊김
1934년 10월 30일 '여론' 잡지에 도움을 호소하는 '농민의 하소연' 기고
1935년 1월 장중첩증으로 수원도립 병원 입원.

1935년 1월 23일 0시 20분 운명(26세, 만 25년 6개월)

 

 

▲ 최용신 선생의 약혼자 였던 김학준 교수의 묘 ⓒ 2012 한국의산천

소박한 최용신 선생 묘소 오른쪽에는 1926년 최용신 선생과 약혼자 였던 故 김학준 교수(장로)의 묘가 있다.(최용신 선생 곁에 묻히기를 ...김학준 교수의 유언에 따른것이다) 

 

 

 

소설 상록수

박동혁과 채영신은 여름방학을 이용해서 농촌계몽운동에 참여했다가  00일보사에서 주최한 보고회 겸 위로회 석상에서 만나 동지가 된다. 동혁은 수원 고등 농림 학생이고 영신은 여자 신학교 학생이다.

 

1935년 6월 최용신선생을 모델로 한 沈薰의 소설. 常綠樹(여주인공 채영신으로)발표
1936년 YWCA는 비석을 세워 Y정신의 실천자, 농촌사업가의 산 표본으로서의 최용신선생을 기리고 선생의 사업과 정신을 계속하기로 총회에서 결정.
1936년 9월 16일 오전 8시 상록수 저자 심훈 서울대병원에서 36세의 일기로 운명(병명 장티프스)

1964년 한국여성단체협의회 용신봉사상(容信奉仕賞) 제정
1974년 11월 최용신 기념비 제막
1975년 3월 11일 약혼자 김학준교수 타계
1976년 루씨 상록 회관 준공( 최직순 동문 등 루씨동창회 기금 모금)
1990년 경기도 안산시 최용신봉사상 제정
1991년 11월 2일 안산시 최용신묘 향토유적 18호 지정
1993년 8월 24일 안산시 상록수공원(4064평) 향토보호구역 지정고시
1994년 11월28일 국가보훈처에 독립유공자 추서 청원(지역신문 金明玉記者)
1995년 8월 15일 국가독립유공자(建國勳章 愛族章) 추서
2001년 2월 문화관광부 이달의 문화인물 선정
2001년 2월 20일 감리교신학대학교 명예졸업장 수여 

 

 

 

 

 

▲ 최용신 기념관 앞에 세워진 상록수의 작가 심훈 기념비 ⓒ 2012 한국의산천

 

 

▲ 충남 당진에 있는 필경사 (2005년 촬영) ⓒ 2012 한국의산천

필경사의 옥호는 상록수 집필에 앞서인 34년 11월에 쓴 그의 고백수기 '필경사 잡기'에서 나왔다고 합니다. 1930년에 <그날이 오면>이란 제목으로 시집을 내려다가 일제의 검열에 걸려 못냈는데 그 시집 원고 중에 있는 필경이란 시의 제목에서 딴 것이라고 그의「필경사 잡기」란 글에서 밝히고 있다.

 

심훈은 <직녀성>을 조선 중앙일보에 연재하여 그 고료로 부곡리에 집을 지어 '필경사'라고 불렀다. 이 필경사에서 쓴 <상록수>가 1935년 동아일보 15주년 현상모집에 당선되어 상금 5백원을 받아 그 중에서 상록학원을 설립한다. 1936년 9월 6일 대학병원에서 급서(急逝)하여 심훈의 문학은 더 펼치지 못하고 만다.

 

필경사는 심훈 문학의 산실이다. 심훈은 1933년 서울 생활을 청산하고 그의 아버지가 살고 있는 이곳 당진군 송악면 부곡리로 내려와 한 동안 아버지와 한 집에서 살면서 영원의 미소, 직녀성 등을 집필하였다. 1934년에 독립하여 살집을 직접 설계하여 지은 집이 필경사이다.
필경사를 지을 터를 잡기 위해 이곳 저곳을 돌아다녔는데 그러는 둥에 아끼던 상아 빨뿌리를 잃어버렸다. 그것을 찾기위해 돌아다닌 곳을 되짚어 다니다가 빠트렸던 상아 빨뿌리를 찾는 곳이 지금의 필경사 자리였다 한다. 빨뿌리를 찾아 담배를 피워물고 앉아 살펴보니 사람들이 길들일만 한 터더라는 생각에 지은 집이 필경사라고 전한다.
필경사는 한때 교회로 사용되기도 하였는데 그의 장조카인 고 심재영옹이 되사가지고 관리하다 당진군에 희사하였다.
우리나라 농촌소설의 대표작 중 하나인 '상록수'는 1935년에 이 집에서 집필된 소설이다. 가옥의 형태는 아담한 건물로서 18.7평이며 앞에는 상록수문화관이 있다.

 

▲  필경사 오른쪽에 자리한 심훈 상록수 문학 기념관  ⓒ2012 한국의산천

필경사는 충남 당진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필경사 잡기'는 그 시기에 그가 인생의 방향을 확정짓기 위해 고뇌했던 흔적과 그 사상을 보여준다.

「...나는 어려서부터 문예에 뜻을 두었었다. 시를 쓰는 체, 각본을 꾸미는 체하고 영화박이는 흉내도 내고 여러해 보람없는 저널리스트 노릇도 하다가 최근에는... 장편소설을 쓰고 있다. 바늘구멍으로 낙타를 끄집어 내려는 대담함에 식은 땀이 등어리를 적심을 스스로 깨달을 때가 많다. 동시에 더욱이 문예의 길이란 가시밭을 맨발로 밟고 나가는 것이나 다름없이 가난한 것을 깨달았다...적어도 한 십년하고 살을 저미고 뼈를 깎아내는 듯한 노력과 수련을 쌓는 시기가 있어야 비로소 제일보를 내어 디딜수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방랑성을 다분히 타고난 나는...오늘날까지 정신생활에 있어서도 비현실적인 몽환경을 더듬으며 헤매어 왔다. ...어줍지 않은 사회봉사, 입에 발린 자기희생,그리고 그어떤 주의(이념)에 노예가 되기전에 맨 먼저 너 자신을 응시하여라!  새로운 생활에 말뚝을 모래성 위에 꽂지 말고 질척질척한 진흙 속에다가 박아라. 떡메질을 해서 깊이 깊이 박아라.」(「필경사 잡기」중)

 

▲  심훈 선생의 부조 ⓒ 2012 한국의산천

 

심훈(沈熏)
1901∼1936. 소설가·시인·영화인. 본명은 대섭(大燮). 본관은 청송(靑松). 호는 해풍(海風). 아명으로 삼준 또는 삼보가 있고 아버지 상정(相珽)의 3남1녀 중 3남으로 서울 노량진에서 출생하였다. 

 

1915년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였고, 1917년 왕족인 이해영(李海暎)과 혼인하였다. 1919년 3·1운동에 가담하여 투옥, 퇴학당하였다.
1920년 중국으로 망명하여 1921년 항저우(杭州) 치장대학(之江大學)에 입학하였다.
1923년 귀국하여 연극·영화·소설집필 등에 몰두하였는데 처음에는 특히 영화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1924년 이해영과 이혼하였고 같은해 동아일보사에 입사하였다. 1925년 조일제(趙一齊)번안의 〈장한몽 長恨夢〉이 영화화될 때 이수일(李守一)역으로 출연하였고, 1926년 우리나라 최초의 영화소설 〈탈춤〉을 동아일보 연재하기도 하였다.

 

이듬해 도일하여 본격적인 영화수업을 받은 뒤 귀국하여 영화 〈먼동이 틀 때〉를 원작집필·각색·감독으로 제작하였으며 이를 단성사에서 개봉하여 큰 성공을 거두었다. 식민지 현실을 다루었던 이 영화는 〈어둠에서 어둠으로〉라는 제목이 말썽을 빚자 개작한 작품이며 영화제작은 이것으로 마지막이었다.
1928년 조선일보사에 다시 입사하였고, 1930년 안정옥(安貞玉)과 재혼하였다. 1931년 경성방송국(京城放送局)으로 옮겼으나 사상문제로 곧 퇴직하였다. 

 

1930년 조선일보에 장편 〈동방(東方)의 애인(愛人)〉을 연재하다가 검열에 걸려 중단당하였고, 이어 같은 신문에 〈불사조 不死鳥〉를 연재하다가 다시 중단당하였다. 같은해 시 〈그날이 오면〉을 발표하였는데 1932년 향리에서 시집 《그날이 오면》을 출간하려다 검열로 인하여 무산되었다(이는 1949년 유고집으로 출간되었다.).
 

1932년 고향인 충청남도 당진으로 낙향하여 집필에 전념하다가 이듬해 상경하여 조선중앙일보사에 입사하였으나 다시 낙향하였다.

 

1933년 장편 〈영원(永遠)의 미소(微笑)〉를 (조선중앙일보 朝鮮中央日報)에 연재하였고 단편 〈황공(黃公))의 최후(最後)〉를 탈고하였다(발표는 1936년 1월 신동아).
1934년 장편 〈직녀성 織女星〉을 조선중앙일보에 연재하였으며 1935년 장편 〈상록수 常綠樹〉가 동아일보 창간 15주년 기념 장편소설 특별공모에 당선, 연재되었다. 

 

1936년 장티푸스로 사망하였다. 

 

<동방의 애인>,<불사조> 등 두번에 걸친 연재 중단사건과 애국시 <그날이 오면>에서 알 수 있듯이 그의 작품에는 강한 민족의식이 담겨 있다. 

 

<영원의 미소>에는 가난한 인텔리의 계급적 저항의식, 식민지 사회의 부조리에 대한 비판정신, 그리고 귀농의지가 잘 그려져 있으며 대표작 <상록수>에서는 젊은이들의 희생적인 농촌사업을 통하여 강한 휴머니즘과 저항의식을 고취시킨다. 행동적이고 저항적인 지성인이었던 그의 작품들에는 민족주의와 계급적 저항의식 및 휴머니즘이 기본정신으로 관류하고 있다.
특히, 농민계몽문학에서 이후의 리얼리즘에 입각한 본격적인 농민문학의 장을 여는 데 크게 공헌한 작가로서 의의를 지닌다. 

 

문화관광부 선정 1996년 8월의 문화인물로 선정되었다. 

 

▲ 1996년 한국문인협회가 세운 시비(그날이 오면)  ⓒ 2012 한국의산천

 

그날이 오면

                       - 심훈-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며는
삼각산이 일어나 더덩실 춤이라도 추고
한강 물이 뒤집혀 용솟음칠 그날이
이 목숨이 끊지기 전에 와 주기만 하량이면
나는 밤하늘에 날으는 까마귀와 같이
종로의 인경을 머리로 들이받아 울리오리다
두개골은 깨어져 산산조각이 나도
기뻐서 죽사오매 오히려 무슨 한이 남으오리까

 

그날이 와서 그날이 와서
육조 앞 넓은 길을 울며 뛰며 뒹굴어도
그래도 넘치는 기쁨에 가슴이 미어질 듯하거든
드는 칼로 이몸의 가죽이라도 벗겨서
커다란 북을 만들어 들쳐 메고는

여러분의 행렬에 앞장을 서오리다.
우렁찬 그 소리를 한번이라도 듣기만 하면
그 자리에 꺼꾸러져도 눈을 감겠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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