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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거친호흡 몰아쉬며 ^^ 굽이치는 산맥넘어 손의 자유, 발의 자유, 정신의 자유를 찾는다. 기억은 희미해지기에 이곳에 기록을 남긴다
MTB등산여행

해명산 해망산 study

by 한국의산천 2012. 5. 18.

일요라이딩 

갈대습지공원~남이장군묘 ~해망산 가는 길 study

 

둘러볼 곳

1.소설 상록수의 실제인물 최용신 선생 묘

2. 남이장군 묘

3. 갈대습지공원

4. 해망산 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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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록구 본오동에 자리한 최용신의 유택 ⓒ 2012 한국의산천

 

상록수 최용신

사계절 언제나 푸른나무를 우리는 상록수라고 부른다. 그 이름처럼 지금까지도 우리곁에 상록수로 존재하시는 분 최용신 선생님

 

상록수

심훈이 '상록수'에서 `청석골`이라 부른 마을이 바로 경기도 안산시 상록구 본오동의 샘골마을이다. 또한 농촌의 문맹퇴치를 위해 야학에 온힘을 기울이는'채영신'이란 여자주인공은 일생을 농촌계몽운동에 헌신한 최용신(崔容信)의 실제인물이다. 
 

최용신은 서기1909년 8월 함경남도 원산읍 두남리에서 최창희(崔昌熙)의 둘째딸로 태어났다. 그의 어린시절은 대단히 곤궁한 생활속에서 살았지만 신앙심이 깊어 열심히 교회를 다녔으며, 그로인해 루씨(樓氏) 여자보통학교와 루씨여자고등학교를 나왔다. 서울에 있는 감리교 협성신학교 졸업을 1년 앞둔 1931년 10월 최용신은 학업을 중단하고 샘골마을로 농촌계몽운동을 하기 위해 내려왔다.

농촌계몽운동과 유학중에 얻은 병과 과로가 겹쳐 학생들과 학부모 그리고 샘골마을 주민들의 지극한 병간호를 외면하고 1935년 1월 23일꽃다운 나이 26세에 이세상을 하직했다. (1935년 1월23일 장중첩증으로 수원도립 병원 운명)


그 후 많은 세월이 지난 1974년 11월 30일 루씨동문과 천곡교회에서 상록수 최용신 선생을 기리기 위한 기념비를 세웠으며,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다.

- 최용신 선생의 묘 
- 소 재 지 : 안산시 상록구 본오동 879-4
- 지정번호 : 안산시 향토유적 제18호

 

 

남이장군 유택

 

▲ 2005년에 찾아갔던 남이장군 유택 ⓒ 2012 한국의산천

남이섬 남이나라에 남이장군의 묘는 없다.

북한강 자락에 있는 강원도 춘성군의 섬은 이름하여 '남이섬'이다. 예전부터 남이장군 무덤이라는 불리는 묘가 한기 있다. 그러나 남이섬의 묘는 전해내려오는 허묘라는 이야기가 있다.

 

 

경기도 화성군 비봉면 남전2리에는 남이장군의 묘가 자리잡고 있다. 부인과 나란히 묻혀 쌍분을 이루고 있는데, 1971년에 묘역 정화작업이 있었다고 한다. 처음부터 무관으로 벼슬을 시작하였는데, 석인상은 장군석이 아니라 문인석으로 마련된점이 특이하다.

 

사실 진짜 묘가 어디에 있던 나에게는 그리 큰 문제는 아니다. 단지 다시 한번 남이 장군의 그 기상과 나라사랑 정신을 다시금 되새기면서 그것으로 만족할 수 있기에... 

 

비운의 장군 남이 南怡 : 1441 ~ 1468 시호는 충무.
 

남이는 1441년(세종23)에 남휘의 손자로 어머니는 태종의 넷째 딸인 정선공주이다. 17세 때인 1457년(세조3)에 무과에 장원 급제한 남이는 세조의 사랑을 한몸에 받으며 벼슬에 올랐다. 그리고 세조의 신임이 두터운 권람의 딸과 혼인을 하였다.

1467년 남이는 세조의 명을 받아 포천, 영평 등지의 도적을 토벌했다. 같은 해에 세조가 왕권을 강화하여 지방에 관리를 파견하자, 이에 불만을 품은 이시애가 함경도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우대장이 된 남이는 싸움터로 나아가 반란군을 물리쳤다. 그리고 그 공을 인정받아 적개공신 1등에 오르고 의산군에 봉해졌다.

이어서 서북쪽 국경 부근에 있는 여진족의 본거지를 정벌할 때에도 선봉으로 적진에 쳐들어가 적의 기세를 꺽었다. 이때 남자의 기개를 드높이 세우겠다는 결의를 담아 읊은 남이의 시는 유명하다.

 

北征 (북정)

 

白頭山石 磨刀盡 (백두산석 마도진)
豆滿江水 飮馬無 (두만강수 음마무)
男兒二十 未平國 (남아이십 미평국)
後世誰稱 大丈夫 (후세수칭 대장부)


백두산 높은 봉은 칼을 갈아 다 없애고
두만강 깊은 물은 말을 먹여 다 없애리라
남아 이십 세에 나라를 평정 못하면

누가 대장부라 일컬으리.

 

세월이 지나면서 간악한 간신배로 자리매김한 유자광이 비판되면서 남이의 역모사건은 오로지 유자광 한사람의 무고에 의한 억울한 죽음으로 사람들은 결론을 내렸고, 드디어 1818년(순조18)에는 그의 후손인 우의정 남공철의 주청으로 강순과 함께 관작이 복 되었다. 또 서원이 난립하던 때에는 창녕의 구봉서원과 서울 용산의 용문사 및 서울 성동의 충민사에 배향되어 충무라는 시호도 받게 된다.

 

사람은 죽어 이름을 남긴다고 하지만, 뜻을 제대로 펴보지도 못하고 그 젊은 나이에 죽어 훗날 아무리 높은 관작이 주어지고 수십개의 사당에 배향된다 한들 본인에게는 아무 소용없는 다 부질없는 일 아닐까 싶은 서글픈 생각에 잠기게 하는 곳이다. 
 
남이의 용맹을 높이 평가한 세조는 27세라는 젊은 나이에 국방을 책임지는 병조 판서라는 중책을 맡겼다. 한계희를 비롯한 일부 신하들이 외척에게 병권을 맡기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주장하였지만 세조는 이를 귀담아 듣지 않았다.

그러나 남이를 총애하던 세조가 죽고 예종이 즉위하자, 형조 판서 강희맹과 한계희 등이 남이에게 병권을 맡기는 것이 적합하지 않다고 주장하여 남이는 병조 판서에서 해직되었다.

이 무렵 남이는 궁궐에서 숙직을 서다가 혜성이 나타난 것을 보고 무심결에 '옛것은 사라지고 새로운 것이 나타날 징조'라고 말했는데, 평소에 남이를 시기하던 유자광이 이 말을 엿듣고는 남이가 역적 모의를 꾸민다고 모함하였다. 더구나 남이의 유명한 시조 가운데 '나라를 평정 못하면'이라는 말을 '나라를 얻지 못하면'으로 바꾸어 남이를 대역 죄인으로 몰았다. [男兒二十未平國 (남아이십미평국)을 男兒二十未得國 (남아이십미득국)으로 바꾸어 남이가 역모를 꾀하였다 하여 모함하여 죽음까지 이르게 하였다 전한다]

이 일로 남이는 28세의 젊은 나이로 억울하게 처형을 당하고 말았다. 그 뒤 400여 년이 지난 1818년(순조18)에 남이는 억울한 누명을 벗고, 벼슬과 '충무'라는 시호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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