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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거친호흡 몰아쉬며 ^^ 굽이치는 산맥넘어 손의 자유, 발의 자유, 정신의 자유를 찾는다. 기억은 희미해지기에 이곳에 기록을 남긴다
MTB등산여행

안중근 공원

by 한국의산천 2011. 7. 12.

안중근 공원 (부천 중동에 위치)

 

지리한 장마의 연속이다

차를 타고 가면서 하염없이 내리는 비를 쳐다본다

차창 앞 저멀리 내리는 빗물은 현실이고

지금 바로 차창에 떨어지는 빗물은 추억이었다.

되돌아 갈수없는 빗속에서의 많은 추억을 떠올려 보았다. 

 

7월 12일 오후 비가 그치기에 조금 일찍 퇴근하여 집에서 가까운 단골 MTB # 에서 자전거 정비를 하고 체인에 기름을 친 다음 다시 깨끗이 닦아내고

그리고 안중근 공원으로 잔차를 타고 나갔습니다. 하루라도 잔차를 안타면 엉덩이에 뿔이 날것만 같아서...

  

 

안중근 의사의 유언

내가 죽은 뒤에 나의 뼈를 하얼빈 공원 곁에 묻어두었다가 우리 국권이 회복되거든 고국으로 반장해다오. 나는 천국에 가서도 또한 마땅히 우리나라의 회복을 위해 힘쓸 것이다. 너희들은 돌아가서 동포들에게 각각 모두 나라의 책임을 지고 국민된 의무를 다하며 마음을 같이 하고 힘을 합하여 공로를 세우고 업을 이르도록 일러다오. 대한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

 

 

안중근(安重根)
태어난 곳 조선 황해도 해주부 (1879년 9월 2일 ~ 1910년 3월 26일)
순국장소 일본 제국 료준

사인 포로(사형)
복무  대한제국
복무 기간 1907년 ~ 1909년
최종 계급 참모중장, 특파독립대장, 아령지구군사령관
근무 의병
서훈 내역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1962년)

 
별칭 응칠(아명), 토마스(세례명)
학력 한학 수학
직업 교육자, 군인, 독립운동가, 사상가
종교 천주교
배우자 김아려
부모 안태훈, 조마리아

 

안중근은 만주의 여순(旅順:중국식 발음으로는 뤼순) 감옥에서 많은 글씨를 남겼다. 이것들 중 몇몇이 보물 제569호 안중근의사유묵(安重根義士遺墨)으로 지정됐다. 국제적으로 의로운 사람에 기록되고 있는 안중근은 1905년 조선을 사실상 일본의 식민지로 만든 을사조약이 체결된 것에 저항해, 독립 운동에 투신하였고 1909년 10월 26일에 중국 하얼빈 역에서 침략 야욕의 원흉이었던 이토 히로부미를 7발의 총탄중 3발의 관통으로 저격에 성공했던 기개있는 대한제국의 남아였다.

여순감옥에서 담담히 사형선고를 기다리던 안중근은 필체가 좋아 많은 이에게 글씨도 남겼지만 감옥에서 의연하게 '동양평화론'을 집필하여 일본 간수마저 고개를 떨구게 하였다.

 

 

안중근

 

안중근 (安重根, 1879년 9월 2일 ~ 1910년 3월 26일)은 대한제국의 교육가, 사상가, 독립운동가, 대한의군 참모중장이자 특파독립대장이다. 어려서 안응칠(安應七)이라는 아명으로 불렸으며, 천주교 세례명은 토마스이다. 본관은 순흥, 고려조 명현 안향의 26대손이다.

 

동학 농민 운동 당시 아버지 안태훈이 동학군을 정벌하는 데 함께 참여하였고, 구한 말에는 학교 설립과 교육운동과 국채보상운동을 하였으며 한때 복권 사업과 비슷한 채표회사(彩票會社) 활동을 하기도 했다.

 

 1905년 대한제국을 사실상 일본 제국의 속국으로 만든 제2차 한일 협약이 체결된 것에 저항해, 독립 운동에 투신한 그는 1909년 10월 26일에 청나라 길림성 하얼빈 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 사살했다.

 

출생과 가계

안중근은 황해도 해주부 수양산 아래에서 진해현감 안인수의 손자이자 진사 안태훈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안중근의 할아버지 안인수는 해주 일대에서 미곡상을 경영하여 상당한 재산을 축적하였다. 1911년 한국을 방문하여 안태훈 일가의 활동지를 답사한 베네딕토수도원의 노베르트 베버 신부가 작성한 여행기에 따르면 안인수와 그의 아들 6형제와 가족 36인이 해주에서 일가를 이루고 살았을 당시에 안인수는 4백석의 토지를 지니고 있었다고 한다. 할아버지가 대지주에 미곡상으로 거부가 되어 재산을 축적하였으므로 그는 어렵지 않은 유년기를 보낼 수 있었다.

 

뒤에 일본은 안인수가 "항상 미곡 매입 대금을 지불하지 않는 등 각종 간악한 수단을 부려 재물을 모다 거부를 이루었다"거나, 안인수는 "성품이 탐욕하고 배부름을 모르고 일상 간계를 써서 타인의 재산을 수중에 넣으려고 하였으므로 당시인들이 안억핍(安億乏)이라고 다르게 불렀다"고 말한 반면, 안중근은 "조부가 자산가로서 도내에 이름이 높았다."고 회고하였다.

 

 

초기 활동

태어날 때 배에 검은 점이 7개가 있어서 북두칠성의 기운으로 태어났다는 뜻으로 어릴 때에는 응칠(應七)이라 불렀는데, 이 이름을 해외에 있을 때 많이 사용했다. 1884년 갑신정변 이후 개화당 정객의 식객으로 있었던 아버지 안태훈이 척신 정권에 의해 죽임을 당할 위기에 놓이자 할아버지 안인수는 영특한 셋째 아들을 살리기 위해 일가를 이끌고 황해도 신천군 두라면 청계동으로 피신했다. 안중근도 가솔을 따라 신천 청계동으로 이주하였고, 이곳에서 아버지가 세운 서당에서 훈장을 초빙하여 공부를 했으나 사서오경에는 이르지 못하고 통감 9권까지만 배웠다고 한다.

 

소년기

  동학 농민군 진압 활동말타기와 활쏘기를 즐겼고, 집 안에 자주 드나드는 포수꾼들의 영향으로 사냥하기를 즐겨 명사수로 이름이 났다. 아버지 안태훈은 산채에 개인적으로 사병들을 양성하고 있었는데, 1894년 동학 농민 운동이 일어나 각지에서 동학도들과 농민들이 봉기를 하자 안태훈은 자발적으로 창의를 하여 동학 농민군을 토벌하여 승리를 거뒀다. 그 뒤 황해도관찰사의 요청으로 아버지가 산포군(山砲軍)을 조직해 농민군을 진압작전을 펼치자 소년 안중근 역시 동학군 토벌에 참가하여, '박석골전투' 등에서 기습전을 감행하는데 참여하였다.

 

  김구가 동학군으로 활동하고 있을 때 안태훈이 김구를 보호한 적이 있으며 그 시기에 안중근도 그와 안면이 있었으나 그리 친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안중근의 집안은 천주교 성당 건축에 참여할 정도로 독실한 신앙심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10], 안중근 자신도 1895년 천주교학교에 입학하여 신학과 프랑스어를 배웠다. 1904년 평양에서 석탄 장사를 하다가, 1905년 조선을 사실상 일본의 식민지로 만든 을사늑약이 체결되는 것을 보고 이를 저항해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이어 삼흥학교를 세우고 돈의학교를 인수해 교육에 힘쓰다가 1907년 연해주로 건너가 의병에 가담하였다.

 

  1895년 아버지를 따라 천주교에 입교하여 토마스(도마, 다묵)라는 세례명을 받았다. 천주교를 통해서 신학문에 관심을 가졌으며 신부에게 프랑스어를 배우기도 했다. 그 뒤 잠시 교회의 총대(總代)를 맡았고 뒤에 만인계(萬人契:1,000명 이상의 계원을 모아 돈을 출자한 뒤 추첨이나 입찰로 돈을 융통해주는 모임)의 채표회사(彩票會社:만인계의 돈을 관리하고 추첨을 하는 회사)를 설립하고 사장이 되었다. 그러나 복권형식의 채표의 추첨 결과에 승복하지 않는 사람들이 나타나면서 난리가 생긴 것이다.

채표의 추첨날에 벌어진 군중들의 항의소동을 겨우 진정시켰다. 이후 사업은 진전을 보지 못하고, 그는 채표 사업을 곧 그만두었다.

 

 

청인 난타 사건

1904년 아버지 안태훈과 청나라 의사 사이에 벌어진 싸움에 휘말렸다가 외교 문제로 비화되기도 했다. 아버지 안태훈은 1904년 4월 20일 안악읍에 사는 청나라 의사 서원훈(舒元勛)과 시비가 있었다. 아버지 안태훈은 병을 치료하기 위해 친우 이용일(李龍一)을 데리고 서원훈을 찾아갔다. 양측이 필담을 나누는 사이에 안태훈측이 어떤 실수를 했는지 서원훈이 갑자기 일어나 안태훈의 가슴을 발로 걷어찼다. 이에 안태훈은 서원훈에게 화해를 청하고 물러나왔다. 그러나 이 소식을 들은 안중근이 4월 29일 이용일 등 10여 명과 함께 무기를 들고 야밤에 서원훈을 잡아다가 길가에서 무수히 난타하여 거동이 어렵게 만들었고, 이에 대한 반발로 1904년 5월 2일 청국인 7~8명이 이용일의 집에 난입하여 그를 마구 구타하고 잡아가려고 하였다.

 

  한중 양국민 사이에 분쟁이 발생하자 삼화항의 청나라 영사가 한국 정부에 공식 문제제기를 하였다. 이에 따라 삼화항 재판소 감리가 순검을 보내 안중근과 이용일을 체포하여 압송토록 하였다. 그런데 중도에 나타난 괴한들이 순검들을 난타하고 안중근과 이용일을 구하여 사라졌다. 이때 순검 한 명은 안면에 총을 맞아 중태에 빠졌다. 체포령이 내려진 상황에서 7월 10일 전후에 안중근과 이창순은 각기 외부에 청원서를 올려 자신들의 부친이 억울하게 청국인에게 당했다고 호소하였다. 그러나 대한제국 외무부는 다시 자체 조사를 거친 끝에 안중근과 이용일의 죄상이 중하다는 점을 인정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지방 정부는 안중근 등의 체포를 명하였고, 7월 22일 황해도관찰사 이용필(李容弼)은 안중근과 이용일이 기미를 알고 미리 도주하여 체포하지 못했다는 보고서를 외무부대신에게 올렸다.

 

▲ 하루라도 책을 읽지 않으면 입안에 가시가 돋힌다 - 안중근 - ⓒ 2011 한국의산천

안중근은 옥중에서 많은 글씨를 남겼다. 이것들 중 몇몇이 보물 제569호 안중근의사유묵(安重根義士遺墨)으로 지정됐다. 이 가운데 유명한 것으로는 보물 제569-2호인 "一日不讀書口中生荊棘 (일일부독서구중생형극) 하루라도 책을 읽지 않으면 입속에 가시가 돋는다." 등이 있다.

 

계몽 운동과 의병운동 , 국채 보상 운동

1905년 을사 늑약이 체결되자 외교권을 일본에게 빼앗겼다는 소식을 듣고 국권 회복 운동을 하기 위해 여비를 마련하고 상하이(上海)로 갔으나 기대를 걸었던 상하이의 유력자들과 천주교 신부들로부터 협조를 거절당하여 실망하고 되돌아온다. 이무렵 아버지가 죽어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3년상을 마치기도 전에 1906년 3월에 평안남도 진남포로 이사했다. 이사한 곳에서 생계를 위해 한때 석탄상회를 경영하였으나 사업이 되지 않았으며, 교육을 통한 깨달음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여 석탄회사를 정리하고 삼흥학교(三興學校)를 설립하여 교육운동을 시작했다. 그 뒤 황해남도의 천주교 계열의 학교인 남포 돈의학교(敦義學校)를 인수하였으며 안중근 자신도 교사로 아이들을 가르쳤다.

1907년에는 대구의 유생 서상일 등의 주도로 전국적으로 전개되던 국채보상운동에 적극 호응하여 국채보상기성회에 가입하여 회원이 됐고, 열심히 활동하여 인정을 받으면서 국채보상기성회 관서지부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국채 보상 운동 역시 일본의 방해로 실패로 돌아간다.

 

 의병 활동1907년 고종이 헤이그 밀사 사건의 책임을 지고 강제퇴위를 당한 뒤 한일신협약의 체결, 군대해산에 따라 전국적으로 의병이 일어나자 그는 노선을 바꾸어 독립 전쟁 준비가 필요하다는 생각으로 강원도에서 의병을 일으키는데 가담하였다. 그뒤 의병대의 한사람으로 일본군과 싸우다가 자신이 직접 국외에서 의병부대를 창설하기 위해서 블라디보스토크로 건너가서 계동청년회(啓東靑年會)에 가입하고, 곧 계동청년회의 임시사찰(臨時査察)에 선출되었다.

 

 1908년에는 소수의 의병을 이끌고 함경북도 경흥군으로 2차례 진입하여 일본군 수비대를 습격하여 승리하였으나, 석방한 포로에 의해 위치가 노출되어 회령군 인근에서 일본군의 기습을 받아 부대가 와해되었다. 안중근은 산악지대를 통과하여 구사일생으로 귀환하였으나 이 패배로 인해 연해주 한인 사회에서 입지가 줄어들었다. 1908년 6월 안중근은 특파독립대장 겸 아령지구군사령관으로 출정하여 함경북도 경흥군 노면에 주둔하던 일본군 수비대를 기습공격하여 전멸시켰다. 그뒤 본격적인 국내 진공작전을 계획, 감행하여 함경북도 경흥군과 신아산 부근의 야산에서 일본군과 교전하여 전과를 올렸으나, 얼마 후 일본군의 기습공격을 받아 처참하게 패배했다. 이때 기습공격을 받은 이유는 다른 의병대원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안중근 혼자의 뜻으로 전투에서 사로잡은 일본군 포로를 국제공법에 의거해서 석방해주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 일로 의병의 신임을 잃은 그는 블라디보스토크로 건너가 새로이 의병을 다시 일으키려고 했으나 많은 사람들의 비판을 받고 부대는 곧 해체되었다.

 

 1909년 초, 안중근은 뜻이 맞는 동지 11인과 함께 동의단지회(同義斷指會)를 결성하고 의병으로 재기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안중근은 이때 왼손 넷째 손가락 한 마디를 끊어 결의를 다졌다. 안중근의 수인(手印)은 이때부터 찍기 시작한 것이다.

 

 

이토 히로부미 저격 사건 
사용된 권총과 같은 모델. 벨기에 FN M1900 권총. 중화인민공화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생산되었다.1909년 10월 이토 히로부미가 러시아 제국의 재무장관 코코프체프와 회담하기 위해 하얼빈에 오게 되었다. 이 소식을 대동공보사에서 전해들은 안중근은 이토 히로부미 암살에 자원하였다. 10월 21일에 대동공보사 기자 이강(李剛)의 지원을 받아 블라디보스토크를 떠난 안중근은 우덕순과 조도선, 유동하와 함께 하얼빈에 도착했다. 당초 계획은 동청철도(東淸鐵道)의 출발지인 창춘의 남창춘(南長春), 콴청쯔(寬城子)역과 도착지인 하얼빈, 차이쟈거우(蔡家溝) 역의 4개 지점에서 암살을 시도하려 하였으나 자금과 인력이 부족하여 도착지인 하얼빈과 차이쟈거우에서 암살하기로 계획을 변경하였다. 이에 따라 우덕순과 조도선은 차이쟈거우 역으로 이동하였으며 안중근은 하얼빈 역에서 공격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차이쟈거우 역에서의 계획은 이를 수상하게 여긴 러시아 경비병에 의해 실패하였다.

 

10월 26일 오전 9시, 이토 히로부미가 탄 기차가 하얼빈에 도착하였다. 이토 히로부미는 러시아 재무대신 코코프체프와 열차 안에서 회담을 가진 후 9시 30분경 러시아 군대의 사열을 받기 위해 하차하였다. 안중근은 사열을 마치고 열차로 돌아가던 이토 히로부미를 브라우닝제 반자동권총 M1900으로 저격하였다. 이외에도, 일곱 발의 저격 총알 중, 나머지 네 발 중 세 발은 각각 옆에 있던 수행비서관, 하얼빈 주재 일본 제국 총영사, 만주 철도 이사를 맞혔다.

 

저격 후, 안중근은 러시아어로

“ 코레야 우라! (Корея! Ура!) ” (한국 만세라는 뜻)라고 크게 외쳤다.

 

  저격 30분만인 오전 10시경, 이토 히로부미는 피격당한 직후 열차로 옮겨졌다. 죽기 직전에 브랜디(옛날에는 각성제로 종종 사용) 한 모금 마시고 "범인은 조선인인가?"하고 물었으며, 주변에서 그렇다고 대답하자 "바보 같은.."이라고 뇌까리며 죽었다고 한다. 이는 당시 사건 현장에 있던 주변인물들의 증언에 의한 것이지만 조작이라는 주장이 있다. 총을 세 발이나 맞고 그런 말을 남길 수 있느냐는 것이다. 하지만 당시 동행한 의사의 증언으로는 분명히 열차 내로 옮길 때까지 살아있었다고 한다. 다만, 다른 책에서는 죽을 당시에 "난 틀렸다... 다른 부상자는?"이란 말을 남기고 죽었다고도 기록되어 있어 전반적으로 정확하지 않은 감이 있기 때문에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

  안중근은 곧바로 러시아 제국 공안들에게 체포되어 일본 제국 정부에 넘겨져 뤼순 감옥에 갇혀 1910년 2월 14일 사형 선고를 받고, 같은해 3월 26일 처형되었으며, 유해는 오늘날 현재까지도 찾지 못했다. 같이 거사한 우덕순은 징역 3년, 조도선과 유동하는 각각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받았다. 한편 법관양성소 출신 변호사 안병찬(安秉瓚)이 안중근을 위해 무료 변론을 하였다. 안중근은 체포되어 처형되기까지 재판과정에서 재판소내의 어떤 기세에도 굴하지 않고 이토 히로부미를 죽인 이유를 당당히 밝혔다.

 

▲ 황금 백만냥도 자식 하나 가르침만 못하다 -안중근 -  ⓒ 2011 한국의산천

 

내가 이토를 죽인 이유 15가지.

1. 한국의 명성황후를 시해한 죄
2. 고종황제를 폐위시킨 죄
3. 5조약과 7조약을 강제로 맺은 죄
4. 무고한 한국인들을 학살한 죄
5. 정권을 강제로 빼앗은 죄
6. 철도, 광산, 산림, 천택을 강제로 빼앗은 죄
7. 제일은행권 지폐를 강제로 사용한 죄
8. 군대를 해산시킨 죄
9. 교육을 방해한 죄
10.한국인들의 외국 유학을 금지시킨 죄
11.교과서를 압수하여 불태워 버린 죄
12.한국인이 일본인의 보호를 받고자 한다고 세계에 거짓말을 퍼뜨린 죄
13.현재 한국과 일본 사이에 경쟁이 쉬지 않고 살육이 끊이지 않는데 태평 무사한 것처럼 위로 천황을 속인 죄
14.동양 평화를 깨뜨린 죄
15.일본 천황 폐하의 아버지 태황제를 죽인 죄

 

내가 이토를 죽인 이유는 이토가 있으면 동양의 평화를 어지럽게 하고 한일간이 멀어지기 때문에 한국의 의병 중장의 자격으로 죄인을 처단한 것이다. 그리고 나는 한일 양국이 더 친밀해지고, 또 평화롭게 다스려지면 나아가서 오대주에도 모범이 돼 줄 것을 희망하고 있었다. 결코 나는 오해하고 죽인 것은 아니다.

안중근의 체포와 수감 소식이 접해지자 당시 국내외에서는 변호모금운동이 일어났고 안병찬과 러시아인 콘스탄틴 미하일로프, 영국인 더글러스 등이 무료변호를 자원했으나 일제는 일본인 관선 변호사 미즈노(水野吉太郞)와 가마타(鎌田政治)의 변호조차 허가하지 않으려 했다. 수감 중에도 그는 동양 평화론의 저술을 하였으나 끝내 완성시키지 못했다.

 

 

마지막 행적

2008년 3월 25일 국제한국연구원은 안중근이 사형선고를 받은 2월 14일부터 순국한 3월 26일까지의 행적에 대한 새로운 자료를 공개하였다.

 

1910년 2월 14일 : 오전 10시 30분 뤼순 관동도독부 지방법원에서 사형 선고를 받음. 안중근은 당시 천주교 조선대목구(현재 천주교 서울대교구)장 뮈텔 주교에게 전보를 보내 사제를 보내줄 것을 요청함.
1910년 2월 17일 : 안중근은 고등법원장을 면담하여 한 국가의 독립을 위한 의병장으로서의 행동을 살인범으로 심리한 것에 이의를 제기함.
1910년 3월 9일 : 고해성사를 조제프 빌렘 당시 황해도 천주교 신천본당 주임신부에게서 받음.
1910년 3월 10일 : 빌렘 신부의 집전으로 마지막 미사를 봉헌.
1910년 3월 25일 : 사형 집행 연기. 세계적으로 성탄절, 정월 초하루, 국왕의 탄신일에는 사형이 없다는 관례와 대한제국내의 의병활동이 강하게 전개되고 있어 통감부에서 이를 고려, 사형을 연기 요청. 이날은 대한제국 황제 순종이 태어난 건원절이었음.
이에 안중근은 면회를 온 두 동생에게 당부를 남김. 당부 내용은 노모의 안부를 묻고, 불효의 죄를 용서를 청하였고, 장남을 천주교 사제로 길러 달라고 부탁. 동생 안정근에게는 한국의 발전을 위해 공업 또는 식림 같은 한국을 위한 일에 종사토록 부탁.
1910년 3월 26일 : 오전 10시 사형 집행. 참석자: 미조부치 검찰관, 구리하라 감옥장.
당시 안중근을 지원한 사람은 거부 최재형이었는데, 최재형은 안중근의 체포에 대비, 변호사와 상의할 정도로 안중근을 현실적으로 도왔다. 한편 안중근은 글씨가 뛰어나, 뤼순 감옥 수감 때 많은 유묵을 남겼고 보물 569호로 지정되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에 추서되었다.

옥중에서 미완으로 끝난 저서《동양평화론(東洋平和論)》을 남겼다. 2008년 3월 중국 랴오닝(遼寧)성 다롄(大連)시 뤼순(旅順) 감옥 뒤편 야산 일대 등지에서 유해 발굴작업을 벌였지만 실패하였다.

 

 

유언

안중근 의사의 마지막 유언은 자신의 시신을 고국에 묻어달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사형된 그날 밤 한 일본 간수가 그의 시신을 뤼순 감옥 터 뒤에 황급히 매장했다고 한다. 이후 1945년 11월 중국에서 돌아온 백범 김구는 순국한 독립운동가의 유골을 찾아 국내에 봉환하기로 한다. 이듬해 6월,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등 세 분의 독립운동가의 유골을 일본에서 찾아온 후 효창공원에 안장하지만 안중근 의사를 위해서는 네 번째 '허묘'를 만든다. 이것은 안중근 의사의 시신을 꼭 찾겠다는 김구의 결심을 보여준다. 하지만 1949년 김구 역시 안두희의 암살로 사망하고 2008년 남북 정부는 광복이후 처음으로 안중근 의사 유해 공동 발굴에 나섰지만 유해는 찾지 못하고 위치 또한 찾지 못했다.

 

안중근 의사의 마지막 유언

내가 죽은 뒤에 나의 뼈를 하얼빈 공원 곁에 묻어두었다가 우리 국권이 회복되거든 고국으로 반장해다오. 나는 천국에 가서도 또한 마땅히 우리나라의 회복을 위해 힘쓸 것이다. 너희들은 돌아가서 동포들에게 각각 모두 나라의 책임을 지고 국민된 의무를 다하며 마음을 같이 하고 힘을 합하여 공로를 세우고 업을 이르도록 일러다오. 대한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

 

[편집] 안중근은 자신이 사형 당하면 조국에 운구하여 매장해줄 것을 최후로 당부했다. 그러나 사형당한 그의 시신은 뤼순 감옥의 죄수 묘역에 묻혔다. 그러나 일제는 뒤에 안중근의 정확한 매장지를 알려 주지 않아 그의 매장지를 찾을 수 없었고, 현재까지도 유해가 묻힌 곳을 찾지 못하고 있다.

 

1962년 3월 1일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중장(뒤에 대한민국장으로 개정)이 추서되었다.

 

▲ 하루라도 자징거를 안타면 엉덩이에 뿔난다 ⓒ 2011 한국의산천

 

저서 및 유묵

안중근은 옥중에서 《동양평화론(東洋平和論)》을 집필하였다. 이 책에는 일본이 3국 간섭으로 인해 뤼순을 청나라에 돌려준 뒤 한·중·일 3국이 공동으로 관리하는 군항으로 만들어 세 나라에서 대표를 파견하고 평화회의를 조직하고 3국 청년으로 구성된 군단을 편성하고, 이들에게 2개국 이상의 언어를 배우게 하며, 은행을 설립하고 공용 화폐를 만들자는 주장이 들어 있다.

또한 《안응칠역사(安應七歷史)》라는 제목으로 자서전을 집필하였다. 이 자서전의 원본은 현재 전하지 않으며 일본어 번역본과 한문 등사본이 전해진다. 이 자서전을 저본으로 하여 1970년에 출판된 《안중근 자서전》이 있다.

 

 

연보

1879년 9월 2일: 황해도 해주부 광석동에서 부 안태훈 모 조마리아 사이에서 출생.
1894년: 16세에 김아려와 혼인. 김구와의 첫 만남.
1896년: 부친 안태훈이 천주교에 입교.
1897년: 19세에 천주교에 입교.
1898년~ 1904년: 천주교 전교 사업. 천주교대학 설립을 추진하였으나 불발.
1905년: 부친 안태훈 사망
1906년: 삼흥학교, 돈의학교를 운영하였으며 서북학회에 가입.
1907년: 석탄회사 삼합을 설립하였으나, 같은해 8월 1일 대한제국의 군대가 해산되자 만주로 망명했다.
1908년: 대한의병 참모중장으로 국내 진공 작전을 추진.
1909년: 단지동맹 결성(동지 11명).
1909년 10월 26일: 거사
1910년 2월 14일: 일본제국 재판부는 안중근에게 사형을 선고.
1910년 3월 26일: 오전 10시 15분 순국.

 

 

사상과 신념

  이토 히로부미 사살의 영향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사살은 당시 동아시아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중국에서는 1927년부터 장쉐량의 지시로 동북 각지의 36개 모범소학교에서 수업 전에 안중근의 노래를 합창하였으며, 중일 전쟁 발발 이후엔 저우언라이와 궈모뤄 등이 무한, 장사 등지에서 화극 《안중근》을 연출해 반일 투쟁을 고무 격려했다. 안중근이 사용한 권총은 중국과 북한에서 64식 권총으로 생산되었다. 또한 일본에서는 이토를 사살한 조선인을 적대하는 감정이 가속되었으며, 조선의 강점을 주장하는 논리로 발전하였다. 이토를 사살한 것이 한일합방을 가속화했다는 견해가 있으나, 1909년 4월 이토와 고무라 외무대신은 이미 한일 합방에 대한 의견의 일치를 보았고, 이토는 도쿄에서 한일 합방에 대한 의도를 드러낸 연설을 한 바 있어, 일본 정부 내에서 한일합방을 반대하는 세력은 없었다.

 

동양평화론안중근이 옥중에서 집필한 '동양평화론'에서 하얼빈 의거를 동양 평화를 위한 전쟁이라고 했는데 동양평화론이란 한·중·일 3국이 각각 독립을 유지하면서 서로 상호 부조하여 서세동점(西勢東漸)의 서구 열강의 식민주의에 대응하는 체계를 만들 수 있다는 사상이었다.

 

 

가족 관계

할아버지 : 안인수, 진해 현감 역임
아버지 : 안태훈(泰勳), 진사
어머니 : 조마리아(趙마리아)
부인  : 김아려(金亞麗)
여동생 : 안성녀 누시아(1881~1954), 독립운동가, 부산 천주교 묘지에 안장.
남동생 : 안정근, 독립운동가, 1949년 상하이에서 사망.
남동생 : 안공근, 독립운동가, 1939년 사망 추정.
큰아들 : 안분도, 연해주로 피신하였다가 병으로 사망.
작은아들 : 안준생(俊生), 1952년 11월 폐결핵으로 사망. 혜화동 천주교 공원묘지에 안장.
둘째며느리 : 정옥녀
딸: 안현생(1902 - 1960), 1953년 4월 ~ 1956년 3월 효성여자대학교 (현 대구가톨릭대학교) 불문학 교수로 재직함. 그녀의 남편은 한교민단(韓僑民團) 단장으로서 활동했었다고 한다. 안중근 순국 100주기가 되는 2010년 3월 26일, 그녀가 쓴 수기가 발견되었다는 소식이 알려졌다.
조카 : 안진생, 미얀마 대사 역임
조카 : 안우생, 안공근의 아들 안우생의 묘는 북조선의 애국열사릉에 있다.
조카 : 안춘생, 초대 육사 교장, 국회의원 역임
손녀 : 안현생의 딸 황은주, 황은실과 안준생의 딸 안연호(2011년 2월 사망), 안선호(2003년 사망)가 있다.
손자 : 유일한 손자로, 안웅호(雄浩)는 안준생의 아들이다.
4촌  : 안홍근, 사회주의계열 독립운동가
증손자 : 토니안

 

 

김구와의 인연

백범 김구가 동학 농민 운동에 참여했다가 실패한 후 안중근의 아버지 안태훈이 청학동으로 이사하여 살게 되었을 때 처음 대면하였으며, 김구는 그가 총으로 사냥을 잘하며 남자다웠다고 평하였다. 또한 이토 히로부미 처단 후 그의 부인 등의 유족을 김구가 돌보았으며 안중근의 동생인 안공근은 상하이에서 김구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 百忍堂中有泰和(백인당중유태화) 지정번호 보물 제569-1호(1972년 8월 16일 지정) 
백인당중유태화(百忍堂中有泰和)은 '사람이 멀리 생각하지 않으면 큰 일을 이루기 어렵다'라는 뜻이다. 인내를 강조한 내용으로 선현들의 구전글귀중 하나이다. "한결같이 부지런히 일하는 세상에는 어려움이 없다(一勤天下無難事)"와 짝을 이루는 말이다. 1910년 2월 안중근이 옥중에서 남긴 글씨이다.

말미에 '庚戌二月 於旅順獄中 大韓國人 安重根 書'(경술이월 어려순옥중 대한국인 안중근 서)라는 낙관이 있고 그 아래 장인이 찍혀있다.

 

◆ 一日不讀書口中生荊棘(일일부독서구중생형극) 대한민국의 보물 지정번호 보물 제569-2호 (1972년 8월 16일 지정)
소재지 서울 중구 필동3가 26 동국대학교 박물관 / 제작시기 1910년(순종 융희 4)

일일부독서구중생형극{一日不讀書口中生荊棘}은 논어에 나오는 말로 '하루라도 책을 읽지 않으면 입속에 가시가 돋는다'라는 뜻이다.

말미에 "경술3월 어여순옥중 대한국인 안중근 서(庚戌三月 於旅順獄中 大韓國人 安重根 書)"라는 낙관이 있고 그 아래 장인이 찍혀있다.

 

◆ 年年歲歲花相似歲歲年年人不同(년년세세화상사세세년년인부동) 대한민국의 보물 
지정번호 보물 제569-3호 (1972년 8월 16일 지정) 소재지 서울특별시 용산구 리움미술관(이건희소유) / 제작시기 1910년(순종 융희 4) 2월

년년세세화상사 세세년년인부동(年年歲歲花相似歲歲年年人不同)은 '해마다 계절따라 같은 꽃이 피건만 해마다 사람들은 같지 않고 변하네' 자연의 섭리는 그대로이나, 세월따라 사람들은 변하고 있다는 당시의 암울한 현실을 걱정하는 구절이다. 1910년 2월 안중근이 옥중에서 남긴 글씨이다.

말미에 '庚戌二月 於旅順獄中 大韓國人 安重根 書'(경술이월 어려순옥중 대한국인 안중근 서)라는 낙관이 있고 그 아래 장인이 찍혀있다.

 

◆ 恥惡衣惡食者不足與議(치악의악식자부족여의) 대한민국의 보물 지정번호 보물 제569-4호 (1972년 8월 16일 지정)
소재지 서울특별시 종로구 세종로 1번지 청와대 제작시기 1910년(순종 융희 4) 2월  

치악의악식자부족여의(恥惡衣惡食者不足與議)은 '궂은 옷, 궂은 밥을 부끄러워하는 자는 더불어 의논할 수 없다'라는 뜻이다. 가난하고 천한것을 결코 부끄러워하지 않는 안의사의 인생관이 반영된 말이다. 1910년 2월 안중근이 옥중에서 남긴 글씨이다.

말미에 '庚戌二月 於旅順獄中 大韓國人 安重根 書'(경술이월 어려순옥중 대한국인 안중근 서)라는 낙관이 있고 그 아래 장인이 찍혀있다.

 

◆ 東洋大勢思杳玄有志男兒豈安眠(동양대세사묘현유지남아기안면)
和局未成猶慷慨政略不改眞可憐(화국미성유강개정략불개진가련)

대한민국의 보물 지정번호 보물 제569-5호 (1972년 8월 16일 지정) 소재지 서울특별시 동작구 상도동 1-1 숭실대학교 박물관
제작시기 대한제국 순종 융희 4년(1910년) 3월

 

동양대세사묘현유지남아기안면화국미성유강개정략불개진가련(東洋大勢思杳玄有志男兒豈安眠和局未成猶慷慨政略不改眞可憐)은 1910년 3월 안중근이 옥중에서 남긴 글씨로 칠언절구의 자작시를 쓴 것이다.

"암담한 동양의 대세를 생각해보니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 기개있는 남아가 편안하게 눈을 감을 수가 없구나, 게다가 아직 동양 평화의 시국을 이루지 못한 것이 더욱 개탄스럽기만 한데, 이미 야욕에 눈이 멀어 정략 즉 침략정책을 버리지 못하는 일본이 오히려 불쌍하다"는 역설적인 표현이다.

 

 

◆ 見利思義見危授命(견리사의견위수명) 대한민국의 보물 지정번호 보물 제569-6호 (1972년 8월 16일 지정)
소재지 부산광역시 서구 부민동 2가 1번지 동아대학교 박물관 제작시기 1910년(순종 융희 4) 2월

견리사의견위수명(見利思義見危授命), 이익을 보거든 정의를 생각하고 위태로움을 보거든 목숨을 바치라) 여기서 견리사의(見利思義)와 견위수명(見危授命)은 안중근 의사가 100년 전에 여순 감옥에서 나라의 앞날을 걱정하며 자신의 철학과 심경을 피력하였던 간절한 마음이 읽혀지는 내용이다.

견리사의는 이익 보는 것을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이익을 얻는 과정이 정당한 것인지 아닌지를 따져보라는 뜻이다. 이익이 된다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익을 쫓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1910년 2월 안중근이 옥중에서 남긴 글씨이다.

말미에 '庚戌二月 於旅順獄中 大韓國人 安重根 書'(경술이월 어려순옥중 대한국인 안중근 서)라는 낙관이 있고 그 아래 장인이 찍혀있다.

 

◆ 庸工難用連抱奇材(용공난용연포기재) 대한민국의 보물 지정번호 보물 제569-7호 (1972년 8월 16일 지정)
소재지 서울특별시 용산구 용산동 6가 국립중앙박물관 / 제작시기 1910년(순종 융희 4) 2월

용공난용연포기재(庸工難用連抱奇材, 서투른 목수는 아름드리 큰 재목을 다루기가 어렵다) 자신의 능력을 생각하지 못하고 설쳐대는 사람에게 경계가 되는 말이다. 배움이란 거져 되는 것이 아니다.

현대를 사는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능력을 과대포장하고 과신하기에 겸손한 마음을 갖고 노력과 끈기로 자신의 능력을 넓혀가는 사람들이 드물다. 자신의 능력을 정확히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의미이다.

겸손이 미덕이던 시대에는 자신을 낮출 줄 알았는데 세월이 갈 수록 겸손함이 바보처럼 여겨지는 세태가 되어가고 있다. 이것을 경계하는 문구이다. 1910년 2월 안중근이 옥중에서 남긴 글씨이다.

말미에 '庚戌二月 於旅順獄中 大韓國人 安重根 書'(경술이월 어려순옥중 대한국인 안중근 서)라는 낙관이 있고 그 아래 장인이 찍혀있다.

 

◆ 人無遠慮 難成大業(인무원여 난성대업) 대한민국의 보물 지정번호 보물 제569-8호 (1972년 8월 16일 지정)
소재지 서울특별시 동작구 상도동 1-1 숭실대학교 박물관 / 제작시기 1910년(순종 융희 4) 2월

인무원여 난성대업(人無遠慮 難成大業, 사람이 멀리 생각하지 않으면 큰 일을 이루기 어렵다) '사람이 멀리 생각하지 않으면 큰 일을 이루기 어렵다'는 것이다.

마치 논어 위령공 편에서 '사람이 멀리 생각하지 않으면 필히 가까운 근심이 있게 된다'는 구절을 응용한 듯하다. 즉, 먼 장래를 내다보는 원대한 계획이 없이 그저 눈앞의 것만을 생각하면 필히 아침저녁으로 급박한 걱정이 생길 것이며, 그러면 결코 대업을 이루기 어렵다는 뜻이다.

또 좌씨전 양공 편에 '자는 멀리 생각하고 소인은 가까운 것을 좇는다'라는 구절도 있듯이 먼 장래를 생각하는 군자의 도리를 언급한 것이다. 1910년 2월 안중근이 옥중에서 남긴 글씨이다.

말미에 '庚戌二月 於旅順獄中 大韓國人 安重根 書'(경술이월 어려순옥중 대한국인 안중근 서)라는 낙관이 있고 그 아래 장인이 찍혀있다.

 

◆ 五老峯爲筆靑天一丈紙三湘作硯池寫我腹中詩(오로봉위필청천일장지삼상작연지사아복중시) 대한민국의 보물 지정번호 보물 제569-9호 (1972년 8월 16일 지정)
소재지 서울특별시 마포구 상수동 72-1 홍익대학교 박물관 / 제작시기 대한제국 순종 융희 4년(1910년) 2월

 

오로봉위필청천일장지삼상작연지사아복중시(五老峯爲筆靑天一丈紙三湘作硯池寫我腹中詩)는 1910년 2월 안중근이 옥중에서 남긴 글씨로 자작시 오언절구 한 수를 쓴 것이다. 시에 나오는 오로봉은 다섯 명의 노인이 나란히 서있는 듯한 중국 여산 근처의 산이며, 삼상은 중국 남부의 양자강·상강·원강의 세 강을 가리킨다. '오로봉·청천·삼상과 같은 광대한 자연을 필기도구로 삼아 마음속의 시를 쓰겠다'는 포부이다. 당나라 이백의 망여산오로봉이란 시에서 차용한 것이지만 대한 남아의 기개를 꺾지 않았던 안 의사의 활달한 기개와 원대한 흉금을 느끼게 한다.

말미에는 '庚戌二月 於旅順獄中 大韓國人 安重根 書'(경술이월 어려순옥중 대한국인 안중근 서)라는 낙관이 있고 그 아래 장인이 찍혀있다.

 

◆ 丈夫雖死心如鐵義士臨危氣似雲(장부수사심여철의사임위기사운) 대한민국의 보물 지정번호 보물 제569-12호 (1972년 8월 16일 지정)
소재지 서울특별시 동작구 상도동 1-1 숭실대학교 박물관 제작시기 1910년(순종 융희 4) 3월

장부수사심여철의사임위기사운(丈夫雖死心如鐵義士臨危氣似雲)은 1910년 3월 안중근이 옥중에서 남긴 글씨이다. '장부는 비록 죽더라도 마음은 쇠와 같으며, 의사는 위태로움에 닥치더라도 기운은 구름과 같다'라는 뜻이다. 즉, 조국의 독립과 동양의 평화를 염원하는 자신은 죽는다 하더라도 쇠처럼 단단한 마음을 가질 것이며, 어떤 곤란과 위험에 처한다 하더라도 구름처럼 초연할 것이라는 스스로의 다짐이었을 것이다. 큰 장부이요 의로운 선비의 꿋꿋한 모습이 옷깃을 여미게 하는 유묵이다.

앞쪽에 '증맹경시(贈猛警視)'라 쓰여있는데 '타케시'라는 일본 경관에게 써준 듯하다. 말미에 '庚戌三月 於旅順獄中 大韓國人 安重根 謹拜'(경술삼월 어려순옥중 대한국인 안중근 근배)라는 낙관이 있고 그 아래 장인이 찍혀있다.

 

▲ 안중근 의사의 숭고한 희생 정신을 다시 생각하며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 2011 한국의산천

역시 위인은 어릴적부터 뭐가 다르군요...

 

◆ 博學於文 約之以禮(박학어문 약지이례) 대한민국의 보물 지정번호 보물 제569-13호 소재지 서울특별시 종로구 신문로
서울역사박물관 제작시기 1910년(순종 융희 4) 3월

박학어문 약지이례(博學於文 約之以禮, 글을 널리 배우고 예로써 요약하라)는 안중근 옥중에서 남긴 글씨로 서울시 종로구 신문로에 위치한 서울역사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안중근 의사는 1909년 10월에 이토 히로부미을 사살하고 여순감옥에서 순국할 때까지 옥중에서 많은 붓글씨를 남겼으며 이 글씨도 그 중의 하나이다.

이 글은 박학어문 약지이례(博學於文 約之以禮)[3]의 여덟 글자이며 가로 약 33cm, 세로 약 138㎝ 크기의 족자로 되어 있다.

글 왼쪽에는 '경술삼월어여순옥중 대한국인안중근서' 라고 쓰여 있어 1910년 3월에 여순감옥에서 쓴 것임을 알 수 있다.

 

◆ 第一江山( 제1강산) 대한민국의 보물 지정번호 보물 제569-14호 (1972년 8월 16일 지정)
소재지 서울특별시 동작구 상도동 1-1 숭실대학교 박물관 제작시기 조선시대 말기

제1강산(第一江山)은 1910년 2월 안중근이 옥중에서 남긴 글씨이다. 가볼 수 없는 조국강산에 대한 그리운 심정이 나타나 있다. 안중근이 금강산을 비롯한 조국강산을 천하제일의 강산으로 생각하고 있음을 엿 볼 수 있다.

이 글씨는 평양 대동강 가의 연광정에 걸려있던 제일강산(第一江山) 편액을 기억하고 쓴 듯한 필치이다. 말미에는 '경술2월 어여순옥중 대한국인 안중근 서(庚戌二月 於旅順獄中 大韓國人 安重根 書)'라는 낙관이 쓰여있고 그 아래 장인이 찍혀있다.

 

◆ 極樂(극락) 대한민국의 보물 지정번호 보물 제569-19호 (1972년 8월 16일 지정)
소재지 서울특별시 성북구 정릉동 산1-86 제작시기 1910년(순종 융희 4) 3월

극락(極樂)은 1910년 3월 안중근이 옥중에서 남긴 글씨로 더없이 안락해서 아무 걱정이 없는 경우와 처지 또는 그런 곳을 바라는 마음으로 "극락(極樂)"을 쓴 것으로 보여진다. 흔히 극락은 죽어서 가게되는 것으로 인식되지만 살아서 생각할 수 있는 극락은 과연 무엇이고 안중근이 생각하는 극락이 과연 무엇인지 궁금하게 하는 글씨이다.

말미에 "경술3월 어여순옥중 대한국인 안중근 서(庚戌三月 於旅順獄中 大韓國人 安重根 書)"라는 낙관이 있고 그 아래 장인이 찍혀있다.

 


◆雲齋(운재) 대한민국의 보물 지정번호 보물 제569-20호 (1972년 8월 16일 지정)
소재지 서울특별시 종로구 효자동 172-1 제작시기 1910년(순종 융희 4) 3월

운재(雲齋)는 1910년 3월 안중근이 옥중에서 남긴 글씨이다. '운재(雲齋)'라는 재호(齊號)를 쓴 것인지는 알길이 없으나 운재(雲齋)는 구름이 걸려있는 누정(樓亭, 누각(樓閣)과 정자(亭子)를 의미)을 나타내는 것으로 여름날 비온 뒤에 가끔 볼 수 있는 흔치 않은 모습이다.

운재라는 이런 모습은 운치있게 보여 사람들의 아호(雅號)로 사용되기도 하지만 여기서는 누정으로 보인다. 안중근이 옥중에서 창가로 보인 누정일 수 있고 고향을 그리면서 써 본 모습일 수 있다. 하지만 조국을 그리면서 아름다운 모습중에 하나인 운재를 늘 마음속에 담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말미에 '경술3월 어여순옥중 대한국인 안중근 서(庚戌三月 於旅順獄中 大韓國人 安重根 書)'라는 낙관이 있고 그 아래 장인이 찍혀있다.

 

◆ 欲保東洋先改政略時過失機追悔何及(욕보동양선개정략시과실기추회하급) 대한민국의 보물 지정번호 보물 제569-21호 (2000년 2월 15일 지정)
소재지 경기도 용인시 수지구 죽전동 126 단국대학교 석주선기념박물관 / 제작시기 1910년(순종 융희 4) 3월

욕보동양선개정략시과실기추회하급(欲保東洋先改政略時過失機追悔何及)은 1910년 3월 안중근 의사가 옥중에서 남긴 글씨이다. 이 유묵(遺墨:살아있을 때 남긴 글이나 그림)은 러일전쟁(露日戰爭) 당시 전의(典醫:대한제국 때 태의원에 딸린 주임의 벼슬. 네 명이 있었음)로 종군했다가 전쟁이 끝나자 만주 여순(旅順:중국식 발음으로는 뤼순) 감옥으로 전근되어 근무하던 오리타 타다스(折田督)가 1910년 3월 안중근(1879∼1910) 의사의 친필을 옥중에서 받아 간직해오던 것을 1945년 8월 15일 광복이 되자 그의 가족들이 일본으로 귀국할 때 조카인 오리타 간지(折田幹二)에게 넘겨주었으며 이것이 오리타 간지의 손에 의해 1989년 2월 20일 단국대학교에 기증된 것이다.

이 유묵에는 “동양을 보존하기를 바란다면 우선 침략정책을 버려야 한다. 때가 지나고 기회를 잃으면 후회한들 무엇하랴!”라는 내용을 담아, 일본 정책의 잘못을 지적하여 고칠 것을 촉구하였으며, 일본인 집정자들에게 경각심을 일깨우고 있다. 안중근의 동양평화론과 연관이 되는 글귀이다. 이것을 중국 안위성 선성현에서 만들어진 품질이 우수한 선지(宣紙)에 2행 16자를 쓰고, 그 왼쪽에 “경술삼월(庚戌三月) 여순옥중(旅順獄中) 대한국인(大韓國人) 안중근서(安重根書)”라고 묵으로 쓴 글씨와 장인(掌印:손바닥으로 찍은 도장)이 찍혀 있다.

 

오리타 간지는 일본 대학병원 중 유명한 것으로 알려진 오카야마 대학(岡山大學)병원의 암 진료 권위자로, 1989년 2월 20일에 천안의 대학병원 개원을 위해 일본을 방문했을 때 당시 단국대학교 장충식 총장에게 기증되었던 유목이다. 장충식 현재 단국대학교 명예총장은 “오리타 간지 씨를 단국대학교 병원 개원 기념으로 초청하자 고마움의 인사로 유묵을 기증했다”며 “독립운동가의 후손으로서 개인이 소장할 수 없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밝혔다. 이렇게 해서 중국 뤼순감옥의 안 의사 유묵은 일본을 거쳐 단국대학교에 오게 됐다.

장충식 단국대학교 명예총장은 이것을 “정치권력에 단 한 번도 아부하지 않은 의연한 대학”에 안 의사의 담대한 영혼이 찾아온 것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안중근 의사는 적국이었던 일본에서 숭모의 대상이 되어 있다. 한시준 단국대학교 교수에 따르면 일본에서는 100년이 다 된 지금까지도 매 달 정기적으로 모여 토론을 하는 모임이 있을 정도다. 현재 단국대학교 석주선기념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는데 이것은 안중근 개인사 및 독립운동사 연구의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대한민국 문화재정보센터, 단대신문(1260호) 2009년 10월 14일 (수) 6면 참조)

 

 

◆ 國家安危 勞心焦思(국가안위 노심초사) 대한민국의 보물 지정번호 보물 제569-22호 (1993년 1월 15일 지정)
소재지 서울특별시 중구 남대문로5가 471 안중근의사기념관 제작시기 1910년(순종 융희 4) 3월

국가안위 노심초사(國家安危 勞心焦思)는 안중근이 1910년 3월 옥중에서 쓴 행서 글씨 두 폭이다. 그 가운데 한 폭은 오른쪽 위에 "증안강검찰관"이라 쓰여 있듯이 안중근 의사가 이곳에 있을 때 자신의 취조를 담당했던 여순검찰청 야스오카 세이시로 검찰관에게 써준 것이다. 야스오카는 사망하기 직전 이 유묵을 큰딸 우에노에게 물려주었고, 그 뒤 동경 국제한국연구원의 최서면 원장을 통하여1976년 2월 11일 안중근의사숭모회에 기증되었다.

선지에 모두 여덟 글자를 한 줄에 썼는데, 내용은 "국가의 안위를 걱정하고 애태운다"라는 뜻이다. 말미에 "경술년 3월 여순 감옥에서 대한국인 안중근(庚戌三月 於旅順獄中 大韓國人 安重根)"이라 낙관하고 왼쪽 손바닥으로 장인을 찍었다.

 

 ◆ 爲國獻身 軍人本分(위국헌신 군인본분) 대한민국의 보물 지정번호 보물 제569-23호 (1993년 1월 15일 지정)
소재지 서울특별시 중구 남대문로5가 471 안중근의사기념관 제작시기 1910년(순종 융희 4) 3월

위국헌신 군인본분(爲國獻身 軍人本分)은 안중근이 공판정을 왕래할 때 경호를 맡았던 일본헌병 치바 도시치 간수에게 써준 것으로 전한다. 치바는 안중근 의사가 처형된 뒤 자진하여 제대했는데, 그가 사망하자 안 의사의 유묵은 그의 부인과 조카딸 미후라에 의해 보관되었다가1980년 8월 23일 도쿄 국제한국연구원 최서면 원장을 통해 안중근의사숭모회에 기증되었다.

내용은 '나라를 위해 몸바침이 군인의 본분이다'라는 뜻이다. 여덟 글자를 한 줄에 쓴 것으로 낙관·장인은 앞의 것과 같고 다만 낙관 말미에 '삼가 올림'을 덧붙였을 뿐이다.

 

 ◆ 志士仁人 殺身成仁(지사인인 살신성인)는 논어에 나오는 말로, '뜻있는 선비와 어진 사람은 몸을 죽여서 인을 이룬다'라는 뜻이다.

1910년 3월 안중근이 옥중에서 남긴 글씨이다. 말미에 '庚戌三月 於旅順獄中 大韓國人 安重根 書'(경술삼월 어려순옥중 대한국인 안중근 서)라는 낙관이 있고 그 아래 장인이 찍혀있다.

 


일본 위해 이토 쐈다” 안중근 의사 친필 발견

[중앙일보 2011.07.07 00:11]

 
독립기념관, 자료집 펴내

1910년 2월 22일자 일본 오사카마이니치 신문 7면에 보도된 ‘안중근 의사 친필’.1910년 2월 22일자 일본 ‘오사카마이니치신문(大阪每日新聞)’ 7면에 보도된 ‘안중근 의사 친필’이 발견됐다. ‘안중근의 필적’이란 제목이 붙어 있다. 독립기념관(관장 김주현)이 안 의사의 하얼빈 의거 관련 해외 언론 보도를 수집해 6일 펴낸 『일본신문 안중근 의거 기사집』(전2권) 제2권에 수록했다.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윤소영 연구원은 “안중근 의사가 사형 선고를 받은 뒤 일본인 미즈노 기치타로(水野吉太郞) 변호사의 수첩에 기록한 것”이라며 “안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사살한 하얼빈 의거를 중국 고사에 비유했다”고 말했다. 전문은 다음과 같다.

 ‘曲突徙薪無見澤(곡돌사신무견택)/焦頭爛額爲上客(초두난액위상객)/爲楚非爲趙(위초비위조)/爲日非爲韓(위일비위한)’(굴뚝을 구부리고 섶을 치운 이는 혜택이 없는데/머리를 태우고 이마를 덴 이가 상객이 되었구나/초(楚)를 위한 것이지 조(趙)를 위한 것이 아니라네/일본을 위한 것이지 한국을 위한 것이 아니라네).

 앞의 두 줄은 중국 역사책인 『한서(漢書)』 ‘곽광전(藿光傳)’에 나오는 내용이다. ‘曲突徙薪(곡돌사신)’이란 ‘굴뚝을 구부려 놓고 굴뚝 가까이에 쌓아 놓은 섶을 다른 곳으로 옮겨 놓는다’는 뜻인데, 화근을 미리 없애 재앙을 예방한다는 의미다. 뒤의 두 줄에서 ‘곡돌사신’ 고사에 대한 안 의사 자신의 생각을 직접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신문에는 이 글에 대한 안 의사의 해설도 실려 있다. 안 의사가 글의 의미를 미즈노 변호사에게 설명한 내용이라고 한다.

 “이것은 집에서 불이 났을 때 일이다. 화재의 근원인 굴뚝은 화도(火道)를 구부려서 만들고 모닥불은 □□□□(※확인 안 되는 글씨) 서서히 지펴야 하는데, 누군가가 큰 섶나무를 가져다 놓은 것을 빨리 알아채서 화재를 미연에 방지한 선각자는 아무런 상도 혜택도 없다. 오히려 마침내 큰일이 난 다음에야 머리를 태우고 이마를 데며 허풍스럽게 불을 끈 구경꾼들이 상객이 되어 크게 대접받는다는 것이다. 거기에서 이를 비유하기를 동양의 대화재는 아직 불길이 하늘을 태우고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데에까지 이르지 않았다. 나는 이토라는 섶을 치워 한국이라는 굴뚝에 불이 나지 않도록 하였고 나아가서 동양이라는 하나의 가옥을 태우지 않도록 한 선각자이다. 즉 하얼빈의 거사는 정치범이라든가, 복수적이라든가라고 불릴 이유가 없고 동시에 비단 한국을 위해서뿐 아니라 일본을 위해서 한 것이다.”

윤 연구원은 “안 의사의 의거가 한국을 위해서뿐 아니라 궁극적으로 일본과 동양평화를 위한 거사였음을 당당히 밝히고 있는 내용”이라고 설명했다.

 

▲ 부천 터미널 소풍 전경 ⓒ 2011 한국의산천

앞으로 장거리 라이딩때에 자주 이용하게 될 부천 소풍터미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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