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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거친호흡 몰아쉬며 ^^ 굽이치는 산맥넘어 손의 자유, 발의 자유, 정신의 자유를 찾는다. 기억은 희미해지기에 이곳에 기록을 남긴다
MTB등산여행

영월여행 장릉 청령포 관풍헌 자규루 선암마을

by 한국의산천 2011. 5. 13.

영월여행 [2011 · 5 · 12 · 목요일 · 날씨 영월지방 오전에는 비 오후에는 조금씩 개임 · 멤버 : 맑은샘, 한국의산천 2명] 

 

새벽 4시에 일어나 라이딩 준비를 하고 맑은샘님을 5시에 만나서 자전거를 차에 매달고 영월로 향했습니다. 서울을 벗어나니 비가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아니 여주 이천 영월쪽은 계속해서 비가 내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영월까지 이동 코스는 88도로~중부고속도로 영동고속도로를 타고 만종분기점에 이르러 중앙고속도로를 타고 가다가 신림 인터체인지에서 나간 다음 바로 앞에 있는 기사식당에서 아침 식사를 하고 계속해서 영월 방향으로 가는 88번 지방도로를 타고 주천을 지나고 군등치를 지나서 선암마을 한반도 지형을 둘러보고 계속해서 소나기재를 넘어 내려 온 후 장릉에 들린다음 청령포로 갔습니다. 청령포를 둘러보고 관풍헌을 지나서 김삿갓 묘역을 둘러보고 라이딩을 시작하여 소백산 국립공원내에 있는 백두대간 마구령을 넘어 부석을 지나서 고치령을 넘어왔습니다   

 

※ 글 내용과 사진은 계속해서 아래 웹페이지에 연결됩니다 

 

▲ 영월로 접어 들수록 비는 더욱 세차게 내립니다 ⓒ 2011 한국의산천

▲ 영월로 가는 길 계속해서 비가 내린다. 영월은 풍경이 아름다운 고장이다 그러나 또한 17세 어린 나이에 숙부였던 세조에게 사약을 받고 승하하여 잠들어 있는 장릉이 있는 슬픈 사연이 깃든곳이기도 하다. 영월로 가며 주현미의 노래 태평무를 흥얼 거리며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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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노래] 태평무 - 주현미

 

월악산 깊은골에 밤새가 울어 갯창에 비친달이 너무 섧구나 꽃그림자 내려밟고 님 떠날 때 울 밑에 귀뚜리도 슬피 울었지

아 나그네 나그네 사연 사무친 옛 생각에 눈물 삼키며 재너머 강건너 흘러가는 나그네

 

월악산 영마루에 달이 떠오르면 들려오는 피리소리 애달프고나  떠난님 그리워 잠못 이룰 때 추풍에 지는 낙엽 함께 울었지

아 나그네 나그네 사연 한서린 옛 생각에 가슴 적시며 강너머 전송길로 사라지는 나그네

 

▲ 한반도 지형이 보이는 전망대로 가는 길 ⓒ 2011 한국의산천

▲ 영월 선암마을 한반도 지형. 서해안의 개벌까지도 흡사하다 ⓒ 2011 한국의산천

사진 피사체의 구도를 어떻게 잡느냐에 따라 사진의 느낌은 달라진다. 이곳에서는 망원렌즈보다는 화각이 넓은 광각렌즈가 훨씬 효과적인 촬영을 할수있는 곳이다.  

다음에 갈때는 18mm 광각렌즈를 가지고 가서 촬영해보고 싶다.

 

 

▲ 한반도 지형에 구름이 끼어있듯 실재 지금도 비가 많이 내리는 상황입니다 ⓒ 2011 한국의산천

 

▲ 한반도 지형과 선암마을이 보이는 전망대에서 한국의산천

계속해서 비가 내리기에 영월의 주요 문화유적지를 돌아보고 비가 그치면 김삿갓 묘에서 라이딩을 시작하기로 하였습니다.

  

▲ 오늘 라이딩 멤버 맑은샘님 ⓒ 2011 한국의산천

 

▲ 한국의산천 ⓒ 2011 한국의산천

  

▲ 비가 내리는 군등치(君登峙)를 넘어서 소나기재를 향하여 ⓒ 2011 한국의산천

황둔에서 영월 방향으로 가다가 처음 만나는 고개가 군등치. 영월군 주천면 거안리와 서면 신천리 사이에 있다. 군등치는 깎아지른 듯한 절벽을 굽이굽이 휘어서 올라간다. 단종께서 유배를 가면서 이 고개를 오르때 물었다 "이 고개는 무슨 고개인 데 이다지도 험한가"라고 물으니 수행하던 왕방연이 "노산군(단종)께서 오르시니 군등치(君登峙)라 하옵지요"라고 대답했다. 임금이 오른 고개라 하여 군등치라는 이름이 붙었다.

 

▲ 소나기재 정상에는 서강을 배경으로 아름다운 선돌이 서있지만 비가 와서 그곳 답사는 생략. ⓒ 2011 한국의산천

▲ 서울에서 가장 먼곳에 자리한 조선 6대 왕 단종릉 장릉. ⓒ 2011 한국의산천

영월의 호장 엄흥도가 지게에 단종의 시신을 지고와서 산길을 오르다 보니 노루가 한마리 튀어 도망가기에 그곳을 보니 눈이 녹아있어 이곳에 암매장하고 도망을 쳤다고 한다.

 

영월의 호장 엄흥도

爲善被禍 吾所甘心(위선피화 오소감심 )  좋은 일 하고도 화를 당한다면 달게 받겠다[ 엄문(嚴門)의 家憲)]

 

조선 제6대 단종대왕이 노산군으로 강봉되어 강원도 영월에 유배되었을 때 충의공은 이 고장 호장직(戶長職)에 있었다.
밤낮으로 대왕의 거소(居所) 청령포를 바라보고 대왕이 무사하기를 기원하던 중 어느날 달 밝은 고요한 밤에 청령포 대왕의 거소에서 슬프고 애끊는 비명의 곡성이 들려오므로 황급히 강을 건너가 진배하니 대왕은 울음을 멈추고 "이 심야엔 웬 사람이 나를 찾는가?" 하고 물으니, "소신은 이 고장 영월호장 엄흥도이옵니다"라고 대답하고 옥안을 바라보니 대왕은 "육지고도(陸地孤島)인 이곳 청령포에 유배된 이후 밤마다 꿈속에서 신하들을 보고 추억을 회상하며 탄식하고 지내던 중 비조불입인 이곳에서 너를 보니 육신을 상봉한 것 같구나. 그대는 실로 초야에 묻힌 선인이로구나!" 하고 반갑게 맞이 하였다. 

 

그후 호장 엄홍도는 매일 밤 풍우를 가리지 않고 문안을 드렸으며 그해 여름 큰 장마로 인하여 대왕은 청령포 어소에서 영월읍 영흥리 관풍헌에 침소를 옮기게 되어 밤마다 객사 동편에 있는 자규루(子規樓)에 올라 자규시를 읊으면서 지내던 중 금부도사 왕방연(王邦衍)이 가지고 온 사약을 받고 승하하니, 그 옥체는 동강물에 던져지고 시녀는 동강절벽(후일에 낙화암이라고 함)에서 투신절사(投身節死)하였는데 이 때가 매우 추운 겨울이었다.
 

엄흥도는 단종이 관풍헌에서 사약을 받고 승하하자 단종의 시신을 거둔 이로 유명하다. 단종이 서거하자 세조의 명에 의해 단종의 시신은 동강에 버려졌다. 세조는 단종의 시신을 거두는 이는 삼족을 멸한다고 엄명했기 때문에 아무도 단종의 시신을 거두지 못했다.

 

호장 엄흥도는 군수에게 성장(聖裝)을 청하였으나 세조를 두려워하므로 성사치 못하자 즉시 서강과 동강이 합류하는 곳으로 달려가 죽음을 무릎 쓰고 아들 삼형제와 함께 밤에 단종의 시신을 몰래 거두어 달려가 그곳에서 대기하였다가 옥체를 인양하여 미리 준비한 관에 봉안하고 운구하여 영월군 서북쪽 동을지산(冬乙支山)지금의 장릉에 암장하고 자취를 감추었다.

1759년 (영조 34년) 그 벼슬을 공조판서로 추봉하여 사육신 정렬에 배향하고 육신사(六臣祠)에 봉안·치제케 했다.

그후 1516년 (중종 11년)에 어명으로 노산묘를 찾아 수축하고 능전사청을 후인
1791년 (정조 15년)에 어명으로 노산료를 찾아 수축하고 능전사청을 건립
1791년 (정조 15년)에 어명으로 장릉배식단(莊陵配食壇 )에 배합향배(配合享배)케 하고 정려치제(旌閭致祭)케 하였으며, 1833년(순조 33년) 공조판서에 추증되고 고종 13년(1876)에 충의공 시호를 내렸다. 묘소는 영월읍 팔괴리 창평산 186번지에 있다.

 

▲ 장릉에서 한국의산천 ⓒ 2011 한국의산천

보덕사
장릉을 나와 마을로 난 작은 길을 따라가다 보면 작지만 풍광이 좋은 보덕사라는 작은 사찰이 나온다. 보덕사는 668년 의상조사가 창건했는데 처음에는 발본산 지덕사라고 불리웠다고 한다. 1161(고려) 설허선사와 원경국사가 극락보전, 사성전, 심운루 등을 증축하였으며, 1456년 단종이 노산군으로 이곳에 유배되자 사찰명을 노릉사라 개칭하였다가 단종이 승하한 후에는 장릉 보덕사, 태백산 보덕사 등으로 고쳐 불렀다. 지난번 답사때 들려보고 아서 또 들려보고 싶었으나 세차게 내리는 비로 인하여 생략.

 

▲ 단종의 유배지 청령포 ⓒ 2011 한국의산천

 

청령포 귀향

열두 살 어린 나이에 조선왕조 여섯 번째 임금자리에 오른 단종. 그는 수양으로 상징되는 왕족과 집현전으로 대표되는 대신들 사이의 권력암투 희생양이다. 임금자리에 오른 세 해 뒤인 1457년 단종은 노산군으로 강봉되어 의금부 도사 왕방연과 중추부사 어득해가 이끄는 군졸 50여명의 호송을 받으며 유배 길에 올랐다.

한 여름으로 접어드는 음력 6월 22일, 단종은 한양을 출발하여 일주일만인 6월 28일 영월 청령포에 도착했다. 단종이 피눈물을 흘리며 거쳐 온 유배 길 700리 한양~하남시 배알미리를 거쳐 여주군 대신면 상구리 어수정을 거쳐 그리곤 초현리의 원통고개와 원주시 부론면 단강리와 귀래면 운남리 뱃재를 넘었다. 다시 발길을 재촉하여 제천시 박달재와 원주시 신림면의 황둔고개를 또 넘었다. 영월군 주천면 신일리의 어음정을 지나 서면 광전리의 군등치와 신천리의 배일치를 힘겹게 넘었고, 영월읍 나들목 소나기재를 지나 청령포까지 7일만에 도착했다.

 

 신림과 황둔을 잇는 황둔고개는 가파르고 험준해 겨울철엔 눈이 조금만 와도 차량통행이 어려웠으나 이제는 터널이 뚫려 수월하게 오갈 수 있다. 황둔에서 영월 방향으로 가다가 처음 만나는 고개가 군등치. 영월군 주천면 거안리와 서면 신천리 사이에 있다. 군등치는 깎아지른 듯한 절벽을 굽이굽이 휘어서 올라간다. 고개를 오르면서 단종이 "이 고개는 무슨 고개인 데 이다지도 험한가"라고 물으니 수행하던 왕방연이 "노산군께서 오르시니 군등치(君登峙)라 하옵지요"라고 대답했다. 임금이 오른 고개라 하여 군등치라는 이름이 붙었다.

 

 군등치를 지나면 서면 면사무소가 있는 신천리가 나온다. 단종이 이곳을 지난다는 소문을 듣고 마을사람들이 몰려나와 단종의 행렬을 향해 통곡했다. 그래서 옛 지명은 울 명(鳴)자 벌일 라(羅)자를 써서 명라곡이라 불렀다. 명라곡 마을은 서면 면소재지로 변했다. 배일치(拜日峙)는 신천면사무소와 남면 북쌍리 사이에 있다. 유배지가 가까워지자 단종은 불안한 마음을 가누지 못한 채 서산에 기우는 해를 향해 절을 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이규섭 칼럼 참고)

 

▲ 삼면이 강으로 둘러 싸인 청령포 ⓒ 2011 한국의산천

영월 서강 청룡포의 물줄기는 동ㆍ남ㆍ북 삼면으로 둘러 흐르고, 서쪽은 험한 산이 절벽을 이루어 배가 아니면 건너갈 수가 없는 창살 없는 감옥이다

 

단종은 청령포에서 2달 정도 머물다 서강에 홍수가 나는 바람에 영월 동헌의 관풍헌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리고 그 다음해인 세조 3년(1457년), 순흥으로 귀향을 가 있던 금성대군이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 다시 발각이 되어 금성대군은 죽음을 맞게 되고 단종은 서인으로 강등되었다가 그해 10월 사약을 받고 죽었다. 이때 단종의 나이 17세였고, 영월로 유배된 지 1년 5개월만이었다.

 

청령포

영월군 남면 광천리 남한강 상류에 위치한 단종의 유배지로, 1971년 강원도 기념물제5호로 지정되어 있다. 조선 제6대 왕인 단종이 숙부인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찬탈당하고 상왕으로 있다가,그 다음해인 1446년 성삼문 등 사육신들의 상왕복위의 움직임이 사전에 누설됨으로써 상왕은 노산군으로 강봉되어 중추부사 노득해가 거느리는 군졸 50인의 호위를 받으며 원주, 주천을 거쳐 이곳 청령포에 유배되었다.
청령포는 동, 남, 북 삼면이 물로 둘러싸이고 서쪽으로는 육육봉이라 불리는 험준한 암벽이 솟아있어 나룻배를 이용하지 않고는 밖으로 출입할 수없는 마치 섬과도 같은 곳이다. 단종은 이 적막한 곳에서 외부와 두절된 유배생활을 했으며, 당시에는 이곳에 거처할 수 있는 집이 있어 호장 엄흥도는 남몰래 밤이면 이곳을찾아 문안을 드렸다고 전한다.그러나 그 해 뜻밖의 큰 홍수로 강물이 범람하여 청령포가 물에 잠기게 되니 단종은 영월 동헌의 객사로 처소를 옮겼다.
지금 청령포에는 단종 유배시에 세운 금표비(禁標碑)와 영조때 세운 단묘유지비(端廟遺址碑)가 서있어 옛일을 전하고 있다. 또한 망향탑, 노산대, 관음송이 있다. 

 

▲ 청령포에서 맑은샘님 ⓒ 2011 한국의산천

강을 건너 들어가면 노송숲속에 금표비가 서 있다.

이 비석에는 "東西三百尺 南北四百九十尺 此後泥生亦在當禁"(동서삼백척 남북사백구십척차후니생역재당금)이라 기록되어 있다. 

강봉된 노산군이 이 청령포에서 동서로는 삼백 척을, 남북으로는 사백 구십 척을 벗어날 수 없다는, 이른바 행동 반경을 제한하는 금지령 팻말인 것이다.

 

 

청령포에 갇힌 어린 임금 단종은 서울 하늘을 바라보며 비탄에 잠기곤 했다. 실제로 단종이 이곳에 유배된 기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홍수로 물이 차는 바람에 곧 영월 읍내의 객사인 관풍헌으로 옮겨져 여기서 사약을 받게 된다.

 

▲ 관풍헌 ⓒ 2011 한국의산천

단종은 청령포에서 약 2개월을 머물다가 장마로 물이 불어 영월읍내에 있는 관풍헌에서 거처를 옮기셨고 이곳에서 사약을 받았다.

 

관풍헌
조선 초기의 동헌터가 관풍헌인데 이 곳에서 1457년 세조가 보낸 사약을 받았다. 한때는 동헌. 그리고 영월군청, 영월중학교가 들어서기도 하다가 지금은 보덕사의 포교당으로 쓰이고 있다. 보덕사는 현재 장릉근처의 작은 사찰이지만 신라 문무왕 8년에 의상대사가 창건했다는 설화를 가진 오래된 절이다. 또한 1698년 노산군이 단종으로 다시 복위되었을 때 단종의 원한을 달래는 원찰이 되었던 내력을 가지고 있다. 바로 옆에 누각이 하나 있는데 원래 명칭은 매죽루였는데 이 곳에서 단종이 그 유명한 자규시를 읊었다 하여 자규루로 불리어 지고 있다. 관풍헌 앞 농협사거리에는 영화 "라디오스타"의 촬영지인 '청록다방'이 있다.

 

단종(端宗) 1441. 7. 23생

조선 제 6대 왕(재위 1452~1455)
이름은 홍위(弘暐).
12세 왕위 등극
14세 결혼
15세 세조의 왕위 찬탈, 상왕으로 밀려남
17세 1456.  6. 28일 유배
17세 1457. 10. 24일 승하

제 5대왕 문종의 아들로 어머니는 현덕왕후 권씨이고 비는 정순왕후 송씨이다. 1448년(세종30) 왕세손, 1450년 세자에 책봉되었고 52년 문종의 뒤를 이어 12세에 즉위하였으나, 연소하여 숙부인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1455년 상왕, 1457년 노산군으로 강봉되었다가 다시 서인에 떨어졌다가 1457년 유배지인 영월에서 죽음을 당하였다.
1681년(숙종7) 대군으로 추봉, 1698년(숙종24) 왕위에 복위되었다.

 

단종의 비 정순왕후

 

본관은 여산(礪山)이고, 여량부원군 송현수(宋玹壽)의 딸이다. 1454년(단종 2년) 정월 왕비에 책봉되었고, 1455년 세조가 즉위하고 단종이 상왕에 봉해지자 의덕왕대비(懿德大王妃)에 봉해졌으나, 1457년(세조 3년) 단종이 영월로 유배되면서 부인으로 강등되었다.


정순왕후에 대한 일화. 정순왕후와 동망봉·영도교·자줏골의 유래

단종이 영월로 유배된 후, 궁궐에서 추방된 정순왕후는 동대문 밖 숭인동 동망봉(東望峰) 기슭에 초막을 짓고 살았다. 단종의 억울한 죽음을 안 왕후는 아침 저녁 이 산봉우리에 소복하고 올라 단종의 유배지인 동쪽을 향해 통곡을 했는데, 곡소리가 산 아랫마을까지 들리면 온 마을 여인들이 땅 한 번 치고 가슴 한 번 치는 동정곡(同情哭)을 하였다고 한다. '동망봉'이라는 이름도 정순왕후가 동쪽을 향해 통곡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한다. 청계천에 있는 영도교(永渡橋)에도 단종과 정순왕후의 사연이 전한다. 단종과 정순왕후는 그 다리에서 이별한 후 다시는 못 만났다 하여 사람들이 '영 이별 다리'로 불렀는데, 그 말이 후세에 와서 '영원히 건너가신 다리'라는 의미로 영도교로 불린 것이다.

 

정순왕후는 초막집에서 시녀 셋과 함께 살며, 시녀들이 동냥해오는 것으로 끼니를 이었다. 이 소문을 들은 세조가 근처에 영빈전이라는 집과 식량을 내렸으나 정순왕후는 끝내 거부하였다. 그리고 자줏물을 들이는 염색업으로 여생을 때묻히고 살지 않았다고 해서 그 골짜기를 지금도 '자줏골'이라고 부른다. 또 『한경지략(漢京識略)』에 보면 영도교 인근에 부녀자들만 드나드는 채소시장이 있었다고 전한다. 송비(宋妃, 정순왕후 송씨)를 동정하여 끼니 때마다 채소를 가져다주려는 한 부녀자들이 많아 긴 행렬을 이룰 정도여서, 궁에서 이를 못하게 말리게 되었다. 그러자 여인들이 지혜를 모아 송비의 초막에서 멀지 않은 곳에 채소를 파는 척하고 모여들어 송비에게 가져다준 것이 채소시장을 이루는 계기가 되었다는 것이다.

 

정순왕후가 1521년(중종 16년) 6월 4일 세상을 떠나자, 대군부인의 예우로 양주(楊州, 현재의 남양주시) 남쪽 군장리(群場里, 현재의 사릉리)에 모셔졌다. 그후 후 숙종 24년(1698년) 11월 6일단종 복위와 함께 정순왕후로 다시 올려져, 종묘에 신위가 모셔지고 능호는 사릉(思陵, 사적 제209호)이라 했다.

 

▲ 관풍헌 ⓒ 2011 한국의산천

단종이 청령포에서 유배생활을 하던 중 그해에 큰 홍수가 나는 바람에 이곳으로 거쳐를 옮기고 이곳에서 단종은 1457년 10월 24일 세조가 내린 사약을 받고 한 많은 짧은 생을 마감하게 되었다. 단종.그의 나이 열일곱, 열두살에 왕위에 올라 3년 있다가 영월로 내몰려 다시 3년 뒤 쓸쓸한 최후를 마치었다.

또한 김삿갓이 20세 되던해에 조부의 행적을 모르고 조부를 신랄하게 탄핵하는 글을 지어 장원을 한곳도 바로 이곳 관풍헌이다.  

 

▲ 관풍헌 ⓒ 2011 한국의산천

 

▲ 관풍헌 자규루 ⓒ 2011 한국의산천 

 

단종이 청령포에서 유배생활을 하던 중 그해에 큰 홍수가 나는 바람에 이곳으로 거쳐를 옮겼다. 이곳에서 단종은 1457년 10월 24일 세조가 내린 사약을 받고 한 많은 짧은 생을 마감하게 되었다. 이곳에서 사약을 받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오나 한편으로는 (강요에 의해)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이야기와 금부도사가 약사발을 드밀지 못하자 본읍에서 달려온 무지한 통인 하나가 큰 상이라도 탈줄알고 활시위를 구하여 올가미를 만들어 문틈으로 잡아당겼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그때 단종을 옭아죽인 통인은 돌아서서 몇발자욱 못가서 입과 코에 피를 토하고 쓰러져 죽었다고 한다.

단종.그의 나이 열일곱, 열두살에 왕위에 올라 3년 있다가 영월로 내몰려 다시 3년 뒤 쓸쓸한 최후를 마치었다.

 

또한 김삿갓이 20세 되던해에 조부의 행적을 모르고 조부를 신랄하게 탄핵하는 글을 지어 장원을 한곳도 바로 이곳 관풍헌이다.  

관풍헌은 본래 고을의 객사로 쓰던 건물로 영월읍의 중심에 있다.  고색창연한 큰 건물 세 채가 나란히 잇닿아 있는데 해방 전에는 영월군청이 썼고, 해방 후에는 영월중학교가 들어 서기도 했으나 지금은 단종 복위 후 단종의 원찰(願刹) 이었던 보덕사(保德寺)의 포교당으로 쓰고 있다.
동헌 동쪽에 있는 누각을 자규루(子規樓)라 하는데 이 누각은 세종 때 영월군수였던 신근권이 세워서 매죽루(梅竹樓)라고 했던 것을 단종이 이에 올라 '피를 토하듯 운다' 는 두견새(杜鵑: 一名 子規)의 한을 담은 시를 읊었다고 하여 그 시를 자규시라 하고 이 누을 자규루라고 부른다.

 

子規詞(자규사)단종(1441-1457)

月白夜蜀魄 (월백야촉백추)달밝은 밤에 두견새 울음소리 더욱 구슬퍼
含愁情依樓頭(함수정의루두) 수심많은 이내 목 누 머리에 의지하노라
爾주悲我聞苦(아주비아문고) 슬피우는 네 목소리 내 듣기 괴로우니
無爾聲無我愁(무이성무아수) 네 울음 그쳐야 내 수심도 그치리라
寄語世上苦勞人(기어세상고로인) 세상에 괴로움 많은 자에게 한마디 부치니
愼莫登春三月子規樓(신막등춘삼월자규루)   아예 춘삼월에는 자규루에 오르지 말아다오


자규시 

一自寃禽出帝宮; 한 마리 원한 맺힌 새가 궁중에서 나와

孤身雙影碧山中; 외로운 몸과 외로운 한 그림자로 푸른 숲에 깃들었다.

假眠夜夜眠無假; 밤마다 억지로 잠들려 하지만 잠 이루지 못하고

窮恨年年恨不窮; 해마다 한스러움 끝나기를 기다렸지만 원한은 끝나지 않네
聲斷曉岑殘月白; 두견이 울음 끊어진 뫼부리에 조각달만 밝은데

血漏春谷落化紅; 피를 뿌린 것 같은 골짜기에는 붉은 꽃이 지네
天聾尙來聞哀訴; 하늘은 귀머거린가 아직 애끓는 호소를 듣지 못하고
何奈愁人耳獨德  어찌하여 수심 많은 이 사람에게 귀만 밝게 하였는가.

 

 

▲ 창절사 (라이딩을 끝내고 돌아오는 길에 촬영)  ⓒ 2011 한국의산천

창절사는 단종 복위운동을 벌이다 세조에게 죽은 사육신 박팽년, 성삼문, 이개, 유성원, 하위지, 유응부 6위(位)와 생육신 가운데 김시습, 남효온 2위, 박심문, 엄흥도 충신 2위를 합쳐 10위의 위패를 봉안한 곳이다.
 

단종이 승하한 이후, 영월의 사림(士林)은 노산군의 묘 앞에 육신사를 세우려고 했지만 당시 사정에 의해 사당을 지을 수 없었다. 그 이후 숙종 11년(1698)에 단종이 복위되면서 노산군의 묘는 장릉이란 능호를 받았다. 따라서 그 격식에 맞게 능을 새로 단장하면서 영월 유림의 오랜 숙원인 육신사를 장릉 아래쪽에 세운 뒤, 충신들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올렸다.
숙종 31년(1705), 장릉 안에 있던 육신사를 장릉 밖으로 옮기면서 창절사(彰節詞)란 이름으로 바뀌게 되었다. 창절이란 모든 불의에 항거하며 대의를 따른 사육신과 생육신 등의 절개를 표창한다는 뜻에서 숙종이 사액했던 것. 창절사 앞에 있는 창절서원 원장이 이들 충신들에게 봄과 가을 제사를 올리고 있다.

 

사육신과 생육신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가 사전에 발각되어 악형에도 굴하지 않고 순사(殉死)한 조선 전기의 6충신. 성삼문(成三問:承旨)·박팽년(朴彭年:刑曹參判)·하위지(河緯地:禮曹參判)·이개(李塏:直提學)·김문기(金文起:工曹判書)·유성원(柳誠源:司藝) 을 말한다.
사육신의 가족으로 남자인 경우는 모두 살해당하였고, 여자의 경우는 남의 노비로 끌려갔으며, 사육신 외에도 유응부,권자신, 등 70여 명이 모반 혐의로 화를 입었다. 사육신은 1691년(숙종 17) 숙종에 의해 관직이 복구되고, 민절이라는 사액(賜額)이 내려짐에 따라 노량진 동산의 묘소 아래 민절서원(愍節書院)을 세워 신위(神位)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생육신
조선 세조가 단종으로부터 왕위를 탈취하자 세상에 뜻이 없어 벼슬을 버리고 절개를 지킨 여섯 사람으로 생육신이라 하는데, 김시습(金時習)·원호(元昊)·이맹전(李孟專)·조려(趙旅)·성담수(成聘壽)·남효온(南孝溫)이다. 사육신이 절개로 생명을 바친 데 대하여 이들은 살아 있으면서 귀머거리나 소경인 체, 또는 방성통곡하거나 두문불출하며, 단종을 추모하였다.

 

▲ 아직도 비는 내리고 고수동굴 앞을 흐르는 강물이 많이 불어 있었다 ⓒ 2011 한국의산천

 

영월의 명소 

강원도 영월 주천으로 가는 길에서 낙엽송이 금빛으로 빛났다. 그 찬란한 광채 뒤로 적멸보궁의 적요함이 숨어 있었고, 요선정 마애불이 웃었다.

금빛 낙엽송 찬연한 酒泉, 그리고 깊게 가라앉은 고요
 

강원 영월 주천 여행
 마을에는 술이 솟는 바위가 있었다. 신분제 사회에 익숙한 바위인지라 양반이 잔을 대면 청주가, 천민이 대면 탁주가 솟았다. 한 천민이 양반 옷을 입고서 잔을 갖다댔는데, 이를 알아본 바위가 탁주를 퍼부었다. 차별에 울화가 치민 천민이 바위를 부숴버리매, 그 순간 이후로 바위에서는 맑은 물이 흘러나왔다. 그 물이 불어나 강이 되었으니, 강 이름이 술 酒(주)에 샘 泉(천), 주천강이다. 강이 흐르는 마을은 지금도 주천이라 불린다. 가을과 겨울이 뒤섞이는 아름다운 혼돈의 계절, 주천(酒泉) 여행.

주천면은 강원도 영월군에 있다. 영월, 하면 웬만한 지역에서 하루 나들이로 막막하기 짝이 없는 지명이다. 신림면·수주면과 함께 주천은 영월의 서쪽 끝이다. 부지런한 사람은 수도권·충청권에서 당일치기가 가능한 거리다. 수도권에서 출발할 경우 코스는 이렇게 잡아본다. 고판화박물관→다하누한우촌→요선정→법흥사 적멸보궁→판운리 메타세쿼이아의 가을

 

◆명주사 고판화박물관

주천에는 유난히 낙엽송이 많았다. 치악산은 채도 낮은 갈색으로 물든 낙엽송들로 눈이 부시다. 가을 단풍은 원색이었다. 겨울의 재촉에 질린 이 무렵 가을은 품격 높은 낙엽송 파스텔톤 단풍으로 화장을 바꿨다.

신림터널을 나와서 1.5km 왼쪽에 고판화박물관이 있다. 태고종 명주사에 붙은 박물관이다. 귀틀집 혹은 너와집을 흉내낸 절집에서 복순이랑 방울이, 구슬이 세 강아지들이 쏜살같이 달려온다. 사람 드문 이곳에서 외롭게 뙤약볕 쬐다가 반가워서 달려오는데, 주지 한선학 스님은 "뒷걸음치던 사람들이 꼬리 흔드는 개들을 보곤 마음을 푼다"고 했다. 박물관은 그 오른쪽이다. 스님이 말했다. "돈을 벌고 싶다고? 그러면 문화를 공부해야지. 옛 문화와 전통에 명품의 기초가 있으니까." 주말이면 찾아오는 어린이들에게 문화를 설명하고 판화 실습도 하지만, 정작 스님네는 가난하여 솜옷 입고 불 땔 기름 아끼며 살고 있다.

 

◆요선정

자, 시간을 보자. 점심 무렵이라면 이맘때에는 주천의 다하누한우촌에서 식사를 한다. 정육점에서 고기를 사서 식당에 가져가면 상차림을 내는 식당촌이다. 한우촌 오른편으로 사거리가 있다. 평창·영월로 가는 길이 갈린다. 평창쪽으로 가면 요선정과 적멸보궁이, 영월 쪽으로 가면 판운리 섶다리와 메타세쿼이아 길이 나온다. 눈 딱 감고 평창 쪽으로 간다. 이유는 나중에.

3km 정도 가면 '요선정' 이정표가 나온다. 행정구역은 주천에서 수주면으로 바뀐다. 길을 벗어나 400m 정도 들어가면 다리가 나오는데, 다리 왼편으로 꺾어 '미륵암'으로 들어간다. 길은 작은 사찰 미륵암에서 끝난다. 요선정은 미륵암 입구 산길 끝에 있다.

요선정(邀仙亭)은 신선을 맞이하는 정자라는 뜻이다. 조선 말기 숙종이 내린 시(詩) 현판을 보관하기 위해 세운 정자다. 원래 다른 누각에 있다가 누각이 무너지면서 일본인이 보관하고 있던 현판을 이 마을 원(元)씨, 이(李)씨, 곽(郭)씨 계모임이 큰돈을 주고 돌려받아 이 정자에 봉안했다.

절벽에는 석불 좌상이 큰 바위에서 솟아나온다. 몸은 바위에 새겼고, 불두(佛頭)는 입체적으로 부감이 있게 조각을 했다. 부처가 알 같은 바위에서 잠을 깨고 해탈을 준비하는 것이다. 그러다 절벽 아래를 보니, 오호, 저 바위들은 무엇인고!

희디흰 바위들이 맑은 강물 위를 뒤덮고 있는 것이다. 잘생긴 바위들이 하나 가득이다. 요선정의 이름도 이 바위들에서 유래했다. 이곳 사람들은 이 바위 중 하나에 요선암(邀仙岩)이라 새겨놓고 물(水)과 바위(石)를 즐겼다. 요선정 가는 길목에 바위를 감상할 수 있는 포인트가 있다. 하지만 난간이 없으니 조심하실 것.


◆적멸보궁

드디어 적멸보궁(寂滅寶宮)으로 간다. 아무도 말을 하지 않는, 침잠과 고요가 있는 귀한 공간이다. 석가모니가 열반하매 사리가 두 말 나오니, 불교를 진흥하기 위해 그 사리를 천지사방이 나눴다. 신라 때 자장대사가 당나라로부터 사리를 가져와 한반도 다섯 군데에 모시니, 그 진신사리를 모신 곳이 적멸보궁이다. 통도사·상원사·봉정암·정암사와 함께 이곳 사자산 법흥사 적멸보궁이 그 다섯 곳이다. 중창불사를 하는 통에 절은 산만하지만 적멸보궁 오르는 길은 여전히 아름답다. 낙락장송이 양옆, 하늘을 가렸다. 시멘트 포장길을 가면 그 끝에 약수터가 있다. 물 한 모금. 그리고 오른쪽 산길로 오른다. 이제는 말을 아끼도록 한다. 종교 여부와 상관없이, 이곳은 성지(聖地)이니까.

적멸보궁에는 불상이 없다. 본디 대웅전에 불상을 모시는 이유는 석가모니를 비롯해 그 절의 주불(主佛)을 상징하고자 함이니, 석가모니의 진신사리가 있는데 굳이 또 인위적인 상징이 필요하랴. 다른 적멸보궁에는 보궁 내 불상이 있을 자리에 사리함을 모셨지만 법흥사 적멸보궁은 다르다. 전하기로는 자장대사가 절 뒤편 사자산에 진신사리를 흩뿌렸다고 한다. 자신은 토굴을 짓고 용맹정진을 했고. 그리하여 법흥사 적멸보궁은 사리함도 없이, 뒤편 사자산이 보이도록 통유리를 만들어 놓았다. 보궁 뒤편으로 가면 그 산과 토굴이 보인다. 저 산 어디메에 필시 진신사리가 숨어 있을 터. 그 위로 구름이 무심히 흘러갔지만, 꼭 사리가 있어야 보궁인가. 진리는 내 마음속에 있다고 하지 않는가. 보궁에서 내려올 때에는 반드시 오른편 송림 속으로 하산하도록 한다. 폭신폭신한 낙엽을 밟으며 즐기는 명상과 사색의 길이다.

 

◆눈부신 메타세쿼이아

필시 지금쯤이면 오후 해거름이 시작될 무렵이다. 이때에 바로 주천 판운리 메타세쿼이아 길을 걸어야 한다. 해가 숲 뒤편 산마루로 지고, 그 역광(逆光)에 찬란하게 빛나는 메타세쿼이아를 만나게 되는 것이다.

요선정을 지나 2㎞ 전방 삼거리에서 판운리 방면으로 좌회전해 7㎞ 정도 가면 판운리다. 겨울이면 나뭇가지를 이어붙여 섶다리를 만드는 마을이다. 장마철이면 다리는 떠내려가고, 해마다 겨울이 되면 사람들은 다리를 다시 만든다. 회자정리(會者定離), 어차피 만물은 이별할지니, 붙잡지 않기에 영원히 다리는 부활한다. 12월이면 다시 섶다리가 살아나게 된다.

섶다리터를 지나 조금만 가면 오른쪽에 다리가 나온다. 이 다리를 지나 오른쪽 길로 계속 가면 보보스캇팬션이 나온다. 메타세쿼이아는 이 팬션 안에 있다. 즉 사유지라는 말씀. 주차장 팻말에 적힌 관리인 연락처에 전화해 허락을 구한다. 대개 허락해준다.

팬션에서 강으로 가는 길이 메타세쿼이아길이다. 원래 세 줄로 심은 나무들인데 한 줄은 일찌감치 팔았고, 남은 두 줄이 드문드문 놓인 벤치와 함께 낭만 가득한 풍경을 만들었다. 팬션 사장 박인규씨가 말했다. "인기가 좋아서 기분은 좋은데, 사진 찍는다는 사람들이 전세버스로 와서는 쓰레기를 몇 상자씩 버리고 가서 마음이 아프다." 사진 좋게 만든다고 벤치를 이리저리 끌고 다니며 망가뜨리기도 한다니, 이 무슨 망동인가. 꽃 다 벌어진 강변 갈대밭도 보기 좋다. 거기에서 늦가을은 겨울에 자리를 내준다. 이 계절, 주천 여행 끝. 

 

 

 

여ㆍ행ㆍ수ㆍ첩

(수도권 기준): 중앙고속도로 신림IC→주천 방면 우회전. 신림터널을 지나 1.5㎞ 정도 가면 왼편에 고판화박물관 가는 길→주천에 닿으면 '다하누한우촌' 간판 보인다→주천 읍내에서 사거리가 나오면 평창 방면으로 직진→ '요선정' 이정표 나오면 호야지리박물관과 모텔이 있는 삼거리에서 좌회전→법흥사 적멸보궁은 요선정에서 나와 가던 방향으로 직진 14㎞. 보보스캇 메타세쿼이아는 요선정에서 나와 법흥사 반대방향으로 7㎞ 간 뒤 판운초등학교 지나 오른편 다리를 건널 것.

 

대중교통: 영월보다는 원주에서 출발하는 게 낫다. 서울에서는 기차(청량리역)나 버스(강남고속터미널, 동서울터미널)로 원주. 주천행 시외버스로 주천까지 간 뒤 시내버스로 요선정, 법흥사, 판운리행. 고판화박물관은 '신림'에서 정차하는 버스를 탈 것.

주천면 다하누한우촌. 현지에서 직접 도축한 한우를 판다. 정육점에서 고기를 사서 옆에 있는 식당에 가져가면 상차림 삯으로 3000원을 받는다.

 

법흥사 템플스테이 '몽당연필(夢堂緣必)':꿈(夢)과 당당(堂堂)한 자신감을 이야기하고 인연(緣)을 이야기하고 필연(必)을 이야기하는 프로그램이다. 1박2일 5만원(학생 1만원, 유아 무료). www.bubheungsa.or.kr, (033)374-9177

고판화박물관: www.gopanhwa.or.kr, (033)761-7885, 월요일 휴관.

보보스캇팬션 www.boboscot.com 8평에서 20평까지 객실이 다양하다. 캠프파이어, 바비큐, 각종 운동시설. 8만원부터.

 

 

▲ 비는 계속 내리지만 일단 라이딩 출발지인 김삿갓 묘역으로 가기로 했다 ⓒ 2011 한국의산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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