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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거친호흡 몰아쉬며 ^^ 굽이치는 산맥넘어 손의 자유, 발의 자유, 정신의 자유를 찾는다. 기억은 희미해지기에 이곳에 기록을 남긴다
MTB등산여행

영월여행 김삿갓 묘역 라이딩 출발

by 한국의산천 2011. 5. 13.

김삿갓 묘역 돌아보고 라이딩 출발하기 [2011 · 5 · 12 · 목요일 · 날씨 영월지방 오전에는 비 오후에는 조금씩 개임 · 멤버 : 맑은샘, 한국의산천 2명] 

 

충과 효를 모두 버릴 수 밖에 없었던 김삿갓 유적지 돌아보기

 

영월시내의 주요문화유적지를 돌아보고 김삿갓 유적지로 왔습니다.

단종의 한많은 눈물인가 김삿갓이 세상에 뿌리는 눈물인가. 비는 계속해서 하염없이 내립니다 그래서 저는 산울림의 그대 떠나는 날에 비가 오는가.. 노래를 흥얼거리며 단종과 김삿갓의 생애를 떠올렸습니다

22세에 방랑의 길을 떠난 김삿갓은 천하를 주유하다가 57세로 전라도 화순군 동복면 구암리에서 한 많고 파란 많은 떠돌이 35년간의 이승살이 막을 내렸다

 

▲ 김삿갓 기념관과 묘역으로 들어가는 와석리 계곡 입구에서 ⓒ 2011 한국의산천

 

▲ 비오는 날에 자유로운 바람처럼 굽이치는 물결처럼 떠나기 ⓒ 2011 한국의산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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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 떠나는 날에 비가 오는가  -산울림 

 

그대 떠나는 날에 비가 오는가 하늘도 이별을 우는데 눈물이 흐르지 않네

슬픔은 오늘 이야기 아니오 두고 두고긴 눈물이 내리리니 잡은 손이 젖어가면 헤어지나

그대 떠나는 날에 비가 오는가 저무도록 긴비가 오는가

그대 떠나는 날에 잎이 지는가 과거는 내게로 돌아서 향기를 뿌리고 있네
추억은 지난 이야기 아니오 두고두고 그 모습이 새로우니 그때 부른 사랑노랜 이별이었나
그대 떠나는 날에 잎이 지는가 처음부터 긴 이별이었네 

 

 

 

김삿갓이 오랜 방랑을 멈추고 묻혀 있는 영월은 단종(端宗)의 비극이 서린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김삿갓이 이곳에서 영원히 잠들기 400년 전에 단종이 숙부 수양대군(首陽大君)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유배당했다가 짧지만 한많은 한삶을 마친 곳이다.

단종이 노산군으로 강등당해 피눈물로 얼룩진 귀양살이를 하던 청령포도 영월 서강변에 있고, 그가 원통하게 죽어 묻힌 장릉도 이곳에 있다. 평창에서 흘러온 서강과 정선에서 흘러온 동강이 영월읍 서쪽 합수머리에서 어우러져 고씨동굴과 단양 온달산성 앞을 거쳐 충주호로 흘러들어가며 남한강 상류를 이룬다. 이 강의 본줄기가 단양 쪽으로 머리를 틀기 전에 왼쪽에서 흘러드는 작은 물줄기를 받아들이니 곧 옥동천이다. 영월읍에서 고씨동굴 앞을 지나 각동삼거리에서 좌회전하여 옥동천을 끼고 태백·삼척 가는 길을 따라 들어가면 대야리·옥동리에 이어 와석리 김삿갓계곡 들머리에 이른다.

 

 

풍자와 해악의 詩仙(시선)

일생 풍류 기행(奇行)으로 주유천하

 
  김삿갓이 누군지 모르는 사람은 없다. ‘죽장에 삿갓 쓰고 방랑 삼천리…’하는 유행가가 나온 지도 이미 50년이 넘었다. 이처럼 김삿갓이 숱한 전설과 일화를 남기며 방랑하던 풍류시인이라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지만, 아직도 그의 본명을 모르는 사람이 많고, 더군다나 그가 언제 어디에서 태어나 무슨 까닭에 한평생 방랑을 했으며, 언제 어디에서 세상을 떠나 어디에 묻혔는지 모르는 사람은 더욱 많다.

삿갓으로 하늘을 가리고 죽장 짚고 미투리 신고 한평생을 떠돌아다닌 천재시인 김삿갓, 풍자와 해학과 기지로 어우러진 파격적 시풍(詩風), 보통 사람들의 예상을 뛰어넘는 기행(奇行)으로 가는 곳마다 전설을 남기고 사라진 방랑시인 김삿갓, 그는 바람처럼 구름처럼 물결처럼 이 땅의 산수와 저자간을 마음대로 넘나든 영원한 자유인이요 풍류가객이었다. -글 황원갑(黃源甲 : 황원갑 소설가· 한국풍류사연구회장)

  

▲ 와석리 김삿갓 묘역 입구에서 ⓒ 2011 한국의산천

 

  

강원도 영월 노루목 깊은 산속에는 김삿갓(김병연 1807~1863)의 옛집이 있다. 이집은 1972년까지 무너진 안채가 남아있었고 바깥채는 온전해서 사람이 살고 있었다. 그는 20세 무렵에 방랑길에 올랐다. 산천의 아름다움이 그를 떠돌게 한것이 아니라 인간사의 더러움이 그를 떠돌게 했다. 그의 조부 김익순은 선천부사였는데 홍경래에게 투항했다. 그는 '역적 김익순의 죄를 하늘에 사무치게 통탄하는 글'로 장원급제했다. 어렸을 때 멸족을 피해서 노루목에 피해서 자란 그는 조부가 누구인지 몰랐다. 그의 운명은 충과 효를 모두 버릴 수 밖에 없었다. 

 
  김삿갓은 충도 아니고 효도 아닌 길을 찾아서 이미 돌이킬 수 없이 무너져버린 시대의 벌판을 떠돌았다. 그리고 그는 그 길을 찾지 못한다. 입금강(入金剛)은 그가 금강산으로 들어 가면서 쓴 시다. 이 시는 무섭고도 단호한 세상 버림의 노래다.    

 

입금강(入金剛 : 금강산에 들며 · 김병연(金炳淵)

書爲白髮劍斜陽(서위백발검사양) : 글 읽어 백발이요, 칼 갈아야 해 지는 신세인데
天地無窮一恨長(천지무궁일한장) : 천지는 무궁하고, 평생 한은 길기도 하여라
痛飮長安紅十斗(통음장안홍십두) : 장안 붉은 술 열 말을 흠뻑 마시고
秋風簑笠入金剛(추풍사립입금강) : 가을바람에 삿갓 쓰고 금강산을 드노라.

 

소백산 너머 부석사 안양루에도 그의 시 한편이 걸려있다. 그는 백발이 다되어서 고향 가까운 부석사까지 왔지만 마구령 너머 고향 집에는 가지 않았다. 그는 전라도 동복(同福) 땅에서 한 행려병자의 모습으로 죽었다. 한평생 길로 떠돌던 그는 길바닥에서 죽음으로서 길 없는 세상에서의 생애를 완성했다. 그의 시신은 아들의 등에 업혀 마구령을 넘어서 살던 터로 돌아와 묻혔다. 여기도 그의 고향은 아니다. 노루목에 이르는 자전거 길은 한없이 멀어 보였다.  

 

 

조선팔도 김삿갓 병연은 세상을 돌고 돌았다. 양반 세도가들을 곯려주고, 인색한 부자들을 조롱하고 무식한 서당훈장들을 놀려주면서 그 특유의 기지와 풍자로써 세상을 비웃고 인생을 비웃고, 바람과 구름을 벗 삼아 자유롭게 떠돌던 방랑시인 김삿갓. 많은 이들이 부와 명예를 갖기 위해 악착스레 수단과 방법을 강구할 때 그는 그 어느 것에도 자기의 가치를 새기려 하지 않았다. 다만 동가식(東家食) 서가숙(西家宿), 이 고장 저 고장을 바람처럼 떠돌며 주옥같은 시편들을 남겨갈 뿐이었다.

 

 

김삿갓으로 알려진 그는 조선 팔도강산을 돌고 돌며 평생을 방랑한 걸객 방랑시인. 그의 이름은 김병연(金炳淵), 호는 난고(蘭皐). 1807년(순조 7) 경기도 양주에서 태어났다.

동헌(東軒) 앞뜰에는 백일장에 모여든 시골 선비들이 여기저기 자리를 잡고 저마다 깊은 시상에 잠겨 있었다. 시제가 주어진 지 불과 한 시간도 채 안 되었을 때, 스물 남짓한 한 젊은이가 답안지를 말아 쥐고 시관 앞으로 나가 그것을 내밀고는, 말없이 사라졌다.

 

 첫 구절도 떠올리지 못해 끙끙거리던 선비들은 초라한 젊은이의 행색을 보고서야 비로소 안심이 된 듯 다시 시상에 잠겼다. 동헌 뜰을 빠져나온 젊은이는 잔디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는 하늘을 우러르며 자기가 써낸 시를 다시 한번 외워 보았다. 저도 모르게 자기 시에 도취되어 크게 소리 내어 또다시 읊어 내려갔다. 역신에 대한 증오와 충신에 대한 존경이 가슴에 휘몰아쳐온다. 그는 그 시를 단숨에 써 내려갔던 것이다.

 
김병연 '장원이요'

 

   순조 11년, 서북인에는 벼슬자리를 주지 않는 편파정치를 혁파하겠다는 웅지를 품고 홍경래(洪景來)는 난을 일으켰다. 오랜 세월 불만으로 살았던 민초들은 이에 가세, 물밀 듯이 몰려들었다.

맨 처음 평안도 다복동에서 거사를 일으킨 그들은 가산, 곽산, 정주, 선천을 삽시간에 점령했다. 이때 가산의 정군수(鄭郡守)는 문관의 몸으로 마지막까지 싸우다 장렬히 전사했다. 이에 반해 선천부사로서 방어사를 겸했던 김익순(金益淳)은 홍경래가 관서지방을 손아귀에 넣자 맥없이 항복하고 그 휘하에 들어갔다. 그러나 얼마 뒤 홍경래가 관군에 잡히는 몸이 되었으니 사세는 하루아침에 역전되었다. 김익순은 살길을 찾아 한 수단을 꾀했으나 이 음모도 들통 나는 바람에 대역죄로 참형에 처해졌다.

이런 충 절과 배신을 시로 쓰자니 젊은 병연의 피가 끓어오르지 않을 수 없었다. 역적 김익순이 살아 있다면 자기 주먹으로 때려눕히고 싶을 정도로 그에 대한 경멸감이 치솟는 것이었다. 해가 기울기 시작하자 그는 동헌 쪽으로 발길을 옮겼다.

 

“장원 김병연! 장원 김병연!”

집사가 연거푸 자기 이름을 부르는데도 병연은 실감이 나지 않았다. 몇 차례 더 '김병연!' 외침을 듣고서야 병연은 정신을 차린 듯 앞으로 나갔다. 시관들은 병연에게 가계(家系)를 물었다. 병연은 자랑할 만한 선조도 벼슬도 없으니 사실 그대로 말했다. 시관들은 의아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병연의 생김과 문재로 보아 명문 자손이리라 짐작하였던 것이다.

이윽고 동헌에서 나온 병연은 그 기쁜 소식을 어머니와 가족들에게 빨리 알리고 싶어 밤새워 집으로 돌아왔다. 이제 병연은 어엿한 벼슬자리도 갖게 될 것이며, 또 글공부도 본격적으로 하여 재주를 온 세상에 떨치게 될 것이 아닌가.

병연은 사립문으로 들어서자마자 외쳤다.

“장원입니다, 장원입니다.” 그 소리에 어머니와 가족들이 모두 밖으로 뛰어나왔다.

“제가 장원급제를 했습니다.” 병연은 이렇게 말한 뒤, 어린 아이처럼 뜰에 털썩 주저앉아 ‘엉엉’ 소리 내어 울었다. 가족들은 모두 얼싸안고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동네에서도 ‘마을 최초 장원급제자’를 위해 잔치를 벌이기로 했다.

 
산산히 부서진 이름이여

 
기쁨의 순간도 잠깐이었다. 어머니는 참으로 믿기지 않는 놀라운 사연을 병연에게 들려주었다. 병연이 지은 장원시에서 만대에 저주 받을 역적으로 읊은 인물이 다름 아닌 그의 조부라는 사실이었다. 그는 소스라치며 망연자실, 고개만 저을 뿐이었다. 김익순을 향한 증오로 뒤범벅이 된, 그 오래도록 남을 과시(科詩)는 결국 제 조부를 욕하는 기념물이 되어 버린 게 아닌가.

 

홍경래의 난이 시작되고, 선천 방어사로 있던 김익순은 연일 계속되는 작전 지휘에 지쳐 있었다. 그 피로를 이기지 못해 김익순은 술을 마시고 깜빡 잠이 들었다. 그 사이 홍경래군이 기습하여 그를 결박하고 항복을 받아낸 것이었다. 다음해 2월 김익순은 처형되고 그 일가는 멸족(滅族)을 당했다.

그때 종복이었던 황해도 곡산의 김성수(金聖洙)가 병하, 병연 형제를 겨우 피신시켜 은밀히 길렀다. 뒤에 조정에서 멸족은 사면하고 폐족(廢族)에 그치게 하여 다시 형제는 어머니에게로 돌아갈 수 있었다. 아버지 김안근(金安根)은 이미 화병으로 세상을 떠난 뒤였다. 어머니는 두 아들이 폐족 자식으로 받을 설움을 생각해, 강원도 깊숙한 영월로 들어가 집안 내력을 숨기고 살았던 것이다.

어머니의 말을 다 듣고 난 뒤, 병연은 자신의 얄궂은 운명을 한탄했다. 그리고 삿갓을 쓴채 방랑의 길을 떠난다. 

김삿갓의 이름은 오늘도 산촌 곳곳에 피어 있다. 세상과 운명의 박복함에 한을 남길 게 그 무엇이 있겠는가?  출처 : 고정일(高正一:소설가·동서문화 발행인)

 

 

 

 

천생의 풍류가객 김삿갓이 고달픈 방랑길, 때로는 즐거웠던 방랑의 발길을 멈추고 영원히 잠든 묘는 노루목에 있다. 노루목 김삿갓 묘역으로 오르는 길가에 수많은 김삿갓시비와 기념비가 서 있고, 서낭당 한 채도 있다. 서낭당 앞에서 갈라진 오른쪽 길로 오르면 김삿갓묘가 나오고, 왼쪽 산길로 계속 오르면 어둔리 선락골을 지나 선래골이 나온다. 김삿갓 일가가 삼옥리를 떠나 들어와 살던 집터가 있는 곳이다. 

 

▲ 김삿갓 묘 ⓒ 2011 한국의산천

철종 14년(1863년) 3월 29일 천하를 주유하다가 57세로 전라도 화순군 동복면 구암리에서 한 많고 파란 많은 이승살이의 막을 내린 김삿갓은 제2의 고향인 영월군 하동면 와석1리 노루목에서 외롭고 괴로웠던 유랑의 발길을 멈춘 채 영원한 휴식에 들어갔다. 22세에 방랑길을 떠난 지 35년 만이었다.

 

 

 

 

 

 대시(竹詩)  -김삿갓

 
此竹彼竹化去竹 이대로 저대로 되어가는대로

風打之竹浪打竹 바람치는대로 물결치는대로

飯飯粥粥生此竹 밥이면 밥 죽이면 죽 생기는 이대로

是是非非付彼竹  옳으면 옳고 그르면 그르고 붙이는 저대로

賓客接待家勢竹 손님 접대는 가세대로

市井賣買歲月竹 시정 매매는 세월대로

萬事不如吾心竹 만사가 안되네 내 마음대로

然然然世過然竹 그렇고그렇고그런 세상 지나가는대로

 

 

삿갓쓰고 죽장짚고 유랑 삼천리

울분 삭히다가 22세때 가출

 
지금까지 알려진 김삿갓에 관한 옛 기록은 같은 시대 사람 신석우(申錫愚 ; 1805〜1865)의 ‘해장집(海藏集)’, 황오(黃五 ; 1816~ ?)의 ‘녹차집(綠此集)’, 그리고 일제강점기인 1926년에 나온 강학석(姜學錫)의 ‘대동기문(大東奇聞)’, 장지연(張志淵)이 편찬한 ‘대동시선(大東詩選)’ 및 1939년 이응수(李應洙)가 수집하여 펴낸 최초의 김삿갓 시집인 ‘김립시집’ 등이 있다. 이 가운데서 강학석의 ‘대동기문’의 한 대목.

 

‘김병연은 안동 김씨다. 그의 조부 익순이 선천부사로 있을 때 홍경래에게 항복한 죄로 사형을 당하고 그 집안이 폐족이 되어버렸다. 병연이 스스로 천지간의 죄인이라면서 삿갓을 쓰고 하늘의 해를 보지 않았으므로 사람들이 그를 김삿갓이라고 불렀다. 김삿갓은 공령시(功令詩 : 科詩體)를 잘 지어서 세상에 널리 알려져 있었다. 일찍이 관서지방에 갔을 때의 일이다. 그곳에 노진이란 사람이 공령시를 잘 지었는데 김삿갓보다는 못했다. 그래서 노진은 김삿갓을 관서지방에서 쫓아내려고 김익순을 조롱하는 시를 지었는데 다음과 같았다.

-대대로 이어온다는 나라의 신하 김익순아 / 가산군수 정시는 하찮은 벼슬에 불과했지만 / 너의 가문은 이름난 안동 김씨 / 훌륭한 집안에 이름도 장안을 울리는 순(淳)자 항렬이로다….

김삿갓이 이 시를 보고 한번 크게 읊은 뒤에 “참 잘 지었다!”하더니 피를 토하고 다시는 관서 땅을 밟지 않았다.

이러한 여러 기록을 살펴보건대 김삿갓의 가출과 방랑은 빼어난 재주를 타고났건만 출신성분 때문에 구만리같은 앞길이 막혀버린 좌절감과 울분이 직접적인 원인이 된 것으로 보인다. 그런저런 이유로 자신의 인생과 장래를 두고 수년간 고민하던 김병연은 가출을 단행했다. 그것이 맏아들 학균( 均)이 태어난 직후인 22세 때라고 전한다. 대삿갓 쓰고 대지팡이 짚고 미투리 신고 방랑길에 나선 김삿갓은 어제는 저 고을 오늘은 이 마을 정처없이 떠돌아다니기 시작했다.

 

 

 

 

 

 

 

 

 

 

 

 

 

 

 

 

 

▲ 백두대간을 넘어가는 고개 마구령 ~ 고치령을 향하여 출발 ! ⓒ 2011 한국의산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