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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거친호흡 몰아쉬며 ^^ 굽이치는 산맥넘어 손의 자유, 발의 자유, 정신의 자유를 찾는다. 기억은 희미해지기에 이곳에 기록을 남긴다
MTB등산여행

소래포구와 수인선

by 한국의산천 2011. 3. 17.

내 어린 학창 시절의 추억이 가득한 소래포구

[2011 · 3 · 17 · 황사 봄바람 부는 목요일 · 한국의산천]


중학교 시절부터 친구들과 대나무낚시대와 방울낚시대를 만들어서 가끔 가던 곳 소래포구

 

업무를 조금 일찍 끝내고 라이딩을 하려했으나 황사에 조금 찬 바람이 불기에 라이딩을 포기하고 해가 아직 떠있지만 진정한 술꾼답게 한잔하기 

사업상 업무도 아닌일에 일식집이나 횟집을 가자니 웬지 모르게 과한 느낌이 ...그래서 바람도 쐴겸 소래포구를 향하여 고고씽~ 

 

▲ 포구와 기찻길이 있기에 더욱 매력적인 소래포구 어시장 ⓒ 2011 한국의산천

  소래가 포구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것은 1935년 무렵 천일염전이 들어서고 수인선이 개통된 1937년 이후부터다. 그 이전 소래포구는 월곶동을 오가던 작은 도선장이며 군사기지였다. 수인선이 개통되고 나서는 소금산지이며 해산물 집산지로 호황을 누렸다. 1974년 인천내항이 들어선 뒤에는 갈곳없는 소형어선들이 몰려들면서 경기도 최대의 새우파시로 떠올랐으며, 각종 젓갈과 싱싱한 꽃게 등으로 인천시민과 서울,경기도민들의 부담 없는 당일여행지로, 생활의 쉼표로 꾸준한 사랑을 받고 있다.

 

소래(蘇萊)란 지명은 아직까지도 미스터리로 남아있다. 지형이 소라처럼 생겨 나온 말이라는 설, 솔내(松川)에서 유래됐다는 설, 지형이 좁다 즉 솔다-좁다에서 비롯됐다는 설, 그리고 소정방이 백제를 공략할 때 산둥성 라이저우를 출발하여 이곳으로 왔다는 설 등 분분하다.

      

▲ 소래포구에 전시되어있는 수인선을 이끌던 꼬마 증기기관차 ⓒ2011 한국의산천 

한국철도의 서막을 연 경인선, 그리고 경기 네트워크의 원조인 수인선과 수여선 (수원~여주)

협궤열차였던 수인선은 일제의 물자수탈 수단으로 탄생했지만 반세기 넘게 인천 ~ 수원간 해안가 서민들의 발노릇을 톡톡히 하며 이들의 애환을 싫어 날랐다. 열차 한량이 마주보고 앉은 승객의 무릎이 서로 닿을 정도로 작았던 기차 . 시내버스보다 작고 불품도 없었지만 교통수단이 부족햇던 수인지역 주민들에겐 더없이 소중했다. 그러다 산업화 도시화 물결에 밀려 운행 58년만인 지난 1995년 12월 31일 역사속으로 사라졌다.

▲ 카메라 삼각대와 수인선 협궤선 선로 (폭 76.2cm)ⓒ2011 한국의산천 

수인선

수인선은 인천광역시 송도(松島)와 수원을 잇는 협궤철도선으로 총연장 52㎞, 궤도폭 0.762m로 조선경동철도주식회사의 사설철도로 개통됐다.

일제강점기에 경기만의 소래·남동·군자 염전의 소금을 수송하기 위한 목적으로 1935년 9월 23일에 착공하여 37년 8월 6일 건설되었으며 미곡을 수송하던 수려선(수원∼여주, 총 연장 73.4㎞)을 인천항까지 연계수송하였다.

그러나 1970년대 이후 생산물량의 확대, 지역구조와 기능의 변화, 경제발전, 수원∼인천 간 국도의 개통을 비롯한 도로교통 발달 등으로 산업철도로서의 기능을 상실, 1972년 수려선 폐지에 이어 이듬해에는 남인천역이 폐쇄됐고, 1977년부터는 화물운송이 중단됐다.

또 수도권의 급속한 성장에서 제외된 달월·군자·원곡 등지에 사는 주민들이 주로 이용해온 경기 서해안 철도변 주민들의 중요한 교통수단이던 협궤열차도 도로교통의 발달로 경제성이 낮아 1995년 12월 철거됐다.

 

▲ 안산시 원곡동에 아직도 그 흔적을 남기고 있는 수인선 협궤 선로 (폭 76.2cm) ⓒ 2011 한국의산천

카메라 삼각대를 놓아보았다. 양쪽 발이 닿은 거리가 선로의 폭이다. 그렇다면 기차는 크기가 얼마만 했을까? 꼬마기차가 다시금 보고 싶다.

 

 

◀ 지금은 사라진 수인선 자료사진 ⓒ 2011 한국의산천

 

일제는 1937년 경기도 이천 여주 지역 쌀과(수려선) 소래 남동 등지의 소금을 인천항을 통해 반출하기 위해 수원역~남인천역(수인선 지금의 중구 신흥동)간 수인선 협궤열차를 운행했다.

 

당시 일본은 여주 이천 곡창지대에서 생산되는 최고품질의 쌀을 본국으로 보내기 위해 수원~여주간 수려선과 함께 수인선을 이용한 것이다.

 

해방후 60년대 까지만 해도 증기 기관차가 객차 6량과 홤루차 7량을 달고 수인선 15개역을 하루 평균 7차례 운행했다. 그러나 버스 등 대체교통수단이 속속 등장하면서 적자가 눈덩이처럼 늘다 철도청은 79년 송동~남인천간 5.9km의 운행을 중단했다. 이어 92년 7월엔 소래역~송도역 운행이 끊겼고 수인선 복선전철화 계획이 구체화된 지난 94년 9월에는 한양대 안산캠퍼스~ 송도역26.9km구간을 폐쇄, 수원~한양대역까지만 열차를 운행했다.

 

수인선 열차는 달릴때 심하게 흔들렸다. 객차내 폭도 2m 남짓해 덜컹더거릴 때면 맞은편 승객과 무릎이 닿기도 했다. 그래서 꼬마열차를 탄 승객들은 금세 말문을 트고 이야기 꽃을 피웠다. 수인선 역중 유명한 곳으로 단연 소래역이 꼽힌다.

수인선 협궤열차의 폭은 표준궤도의 절반인 76cm에 불과했다. 작고 힘이 달려 안산 원곡고개 등지에선 손민이 내려 걷거나 열차를 밀어야 하는 등 웃지 못할 일도 자주 일어났다고 한다. 건널목에서 일어난 협궤열차와 버스의 총돌사고로 협궤동차가 넘어졌다는 이야기도 그 당시 수인선을 이용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 소래역사에서 수인선 승하차 풍경 ⓒ 2011 한국의산천

 

여주의 농산물(수려선)을 수인선을 통해 인천항까지 연결하는 역할을 하였으나, 70년대 이후 염전지대의 물량확대와 교통의 편리성 요구가 증대되자 이용객과 화물이 줄어들어 경제성이 크게 낮아졌다.

73년 11월 종착역이던 남인천역이 폐쇄되고 77년 화물수송이 중단되었다. 95년에는 여객운송을 중단하고 철거하였다. 

 

수인선의 인천 종점(?)인 용현동, 과거 종합 버스 터미널 옆의 수인역에는 수원과 안산쪽에서 수확한 농작물 특히 잡곡을 가지고 모여들어 장을 이루었다. 지금도 그곳에는 잡곡 시장이 형성되어있다.  

1977년 인천병력이 군 입대 할때는 그곳에서 기차를 타고 논산으로 갔다. 나역시 인천 공설 운동장에서 집결 한 후 4열 종대로 어깨동무를 하고 헌병들의 호휘를 받으며 수인역으로 걸어간다음 그곳에서 기차를 타고 깜깜한 밤을 달려 논산 훈련소로 이동했다. 

 

 

 

 

 

수려선(수원 ~ 여주)

수원에서 출발하여 신갈,용인,양지,이천을 지나 여주까지 운행

 

일제시대에 만들어진 대부분의 철도가 그렇듯이 수려선 역시 경기도 여주-이천지역의 쌀을 수인선이나 경부선을 이용, 빠르게 수송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1930년 5월 1일에 개통된 수려선은 처음 개통할 당시는 수원~이천간 53.1km만 운행하였다.

양지역에는 승객외에 장작, 숯, 벼 등의 수화물을 취급하였는데, 하루 60t정도를 취급하였다.
 

 

 

 

 

◀  수려선(수원 ~여주) 마지막 폐선 신문기사 (1972년)

수려선(水驪線;수원∼여주간 철도)

 

수려선(水驪線)은 수원-여주 간을 잇던 협궤 철도 노선이다. 1972년 3월 31일 전 구간 폐선되었다.

1930년 12월에 사철인 조선경동철도주식회사가 여주 지역의 쌀을 수송하려는 목적으로 부설하였다. 광복 이후 사철 국유화 정책에 따라 교통부 철도국 소유로 변경되었다. 일제 강점기 이후 영동고속도로가 개통되고 여주와 수원 사이의 철도 교통 수요가 급감하여 1972년 3월 31일에 전 구간 폐선되었다.[1] 폐선 당시 노선 연장은 73.4 km였다. 

 

1972년까지 영업거리표 

수원시 팔달구-수원시 영통구-용인시 기흥구-용인시 처인구-이천시 마장면-이천시 호법면-이천시 창전동-이천시 부발읍-여주군 능서면-여주군 여주읍


수인선처럼 전 구간을 표준궤 복선전철로 다시 부활시키는 계획은 없으나 (박정희 대통령 때 수려선을 구둔역까지 연장하려는 계획은 있었다.), 이천~여주구간은 중부내륙선(성남여주선)의 일부로 착공되며 신갈~용인 구간에 노선을 조금 추가해서 용인 경전철을 신설하고 있다. 또 나머지 구간에 분당선의 연장선이 올 예정이다. 이 외에도 평택을 거쳐 이천-원주까지 가는 평택-원주선이 구상 중이다. 평택원주선은 안성선의 일부 구간을 지나간다.

 

 

 

▲ 소래에 전시되어있는 협궤철도(狹軌鐵道) 기관차 ⓒ 2011 한국의산천
협궤란 선로폭이 표준궤보다 좁은 선로를 지칭하며 정확한 수치는 1067밀리미터이다. 우리나라에서 쓰인 협궤는 76.2cm (762밀리미터)이다. 표준궤는 1435밀리미터, 광궤는 1524밀리미터나 1674밀리미터이다. 협궤선로는 수인선(수원~인천), 수려선(수원~여주)선에 사용되었으나 현재는 모두 폐선되었다.

 

▲ 폐허가 된 소금창고. 드넓은 이곳의 소금을 실어 나르기 위해 수인선 협궤열차가 생겨났다 ⓒ 2011 한국의산천

현재의 이곳 폐염전은 불과 70여년 전만 해도 갯벌이었다. 소래염전이 1930년대, 군자염전은 그보다 조금 이른 1920년대 초반에 생겼다. 군자·소래염전은 한반도 최대의 염전이었다. 우리나라의 천일염 역사는 1907년 일본인이 중국인 기술자를 고용, 주안에 1정보 규모의 시험용 염전을 만든 데서 비롯되었다. 그러나 규모면에서는 이곳 염전이 가히 압도적이다. 조용하던 이곳의 지역적 정체성과 단일성이 흔들리는 최초의 사건이 염전에서 시작됐다.

그때 중국인 노동자들이 대거 들어왔으며, 그 바람에 일본 대신 중국의 천일염 기술이 전파되었다.3·1운동이 났던 해, 중국 산둥성에서 중국노동자들이 몰려와 염전 공사를 도맡았고, 자본은 일본인이 댔다. 재미있는 것은 그 무렵 남한보다 일찍 염전 기술을 익힌 평안도 사람들이 집단으로 남하해 이곳에 '평안도촌'을 형성했다는 사실이다. 평안도촌은 군자역 주변 마을로,1922년 군자염전 축조사업 때 평안도 용강 등지의 사람들이 집단으로 이주해 오면서 취락으로 발전했으며, 당시 사람들은 이곳을 ‘피양촌’이라고 불렀다. 군자역 서북쪽 지역은 ‘웃피양촌’, 북쪽 지역은 ‘아래피양촌’으로 불렸다. 또 군자역 뒤는 군자염전 염부들이 이사와 사는 곳이라 하여 염전이민사나 염전사택으로 불리곤 했다. 오늘날 전철 4호선 군자역이 바로 이 지역으로, 평안아파트에 그 흔적이 아직도 남아 있다.

일제는 소금을 실어나르기 위해 이곳에 협궤열차를 부설했다. 민간이 부설한 철도로, 순전히 경제적 목적의 철도였다. 처음에는 경동철도라 불리다가 후대에 수인선으로 바뀌었으며, 소래포구의 철교도 경동철교에서 나중에 소래철교로 바뀌었다. - 서울신문 참고-

  

장도포대지

소래철교가 지나는 어시장 철교 너머에는 장도포대지가 있다

▲ 장도포대지 ⓒ 2011 한국의산천

이 포대는 조선고종 16년(1879) 일본측이 서해안을 측량하면서 개항지를 탐색하는 것을 보고 인천을 개항 후보지로 요구할 것을 대비하여 어영대장 신정희와 강화유수 이경하가 인천과 부평 연안에 화도진을 설치하고 포대를 만들 때 함께 만들어진 것으로서 1999년 "화도진도" 원본 확인을 통해 이곳에 3혈(穴)의 포대를 설치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 장도포대지 안내문 ⓒ 2011 한국의산천

▲ 수인선이 폐선된 후 소래철교는 잠시 인도교로 사용되었으나 현재는 인천시와 시흥시의 이권다툼으로 중간이 가로막혀 통행을 할수없는 상태이다 ⓒ 2011 한국의산천

 

어린 시절 정확히 말해서 중학교 시절 무더운 여름 친구들과 먼지나는 비포장 도로를 덜컹거리는 버스(당시 버스요금 13원)를 타고 소래에 도착하여 망둥어 낚시를 하고, 소래역에서 꼬마기차를 몰래 올라타(무임승차) 고잔역까지 와서 물이 빠져 단단해진 갯벌에서 축구를 하고  코펠에다가 고등어 통조림 찌개를 끊이고 밥을 해서 먹고 놀았다.

 

소래포구는 그나마 지금까지 수로가 연결되어 배가 드나드는곳이다. 그러나 몇년전까지만 해도 고깃배와 포구의 모습을 보여주던 사리포구도 시화방조제가 생기고 나서 매립이 되고 지금 그 자리에는 포구의 희미한 흔적을  되집을 수있는 호수공원이 생겼고 그 주변으로는 아파트 숲인 고잔 신도시가 들어서 있다. 뽕나무 밭이 변하여 바다가 된다고 하지만 이곳은 바다가 변하여 뽕나무 밭이 되었구나. 상전벽해의 고사성어의 놀라움을 다시 한번 느껴본다. 멀리서 들리는 기적소리와 덜컹거리는 기차의 느낌은 우리의 마음을 과거로 돌려주는 타임머신이다.

  

▲ 장도포대지에 설치되어있는 포 ⓒ 2011 한국의산천

▲ 많은 추억을 간직하고 있는 수인선 소래철교 ⓒ 2011한국의산천

협궤열차의 대명사 수인선은 서민열차와는 거리가 먼 경동철도주식회사(京東鐵道株式會社) 소유의 사설철도이며, 쌀과 소금을 인천항을 통해 일본으로 실어 나르기 위한 수탈의 노선이었다. 강원 내륙의 목재와 여주 및 이천의 쌀을 수송하기 위해 만든 수여선(水驪線)과 인천항을 연결하기 위해서 우여곡절 끝에 태어난 철도였던 것이다. 수인선은 1926년부터 인천상공회의소를 중심으로 논의는 무성했지만, 경제성과 실효성에 대한 논란으로 자꾸 미뤄지다가 1936년 5월 16일 인천 화정(花町) 매립지에서 기공식을 갖고 6월 1일부터 공사에 돌입하여 1년 2개월만인 1937년 8월 6일에 개통을 보게 되었다.

수인선은 총연장 52㎞에 궤간 762㎜의 단선 협궤열차로 개통 당시 수원·고색·오목·어천·야목·빈정·일리·성두·원곡·신길·군자·소래·논현·남동·문학·송도·인천항 등 열일곱 개의 역을 한 시간 사십분에 주파하였다. 수인선의 전성기는 1942년까지로 이 기간 동안 준수한 영업 실적을 올리자 일각에서 레일 광궤화같은 노선개량 논의가 제기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수인선은 1943년 총독부의 정책 기조의 변화로 조선철도주식회사로 흡수되었고, 일제의 패망, 해방공간기의 혼란, 한국전쟁 등을 거치며 점차 쇠퇴하여 여객노선으로서의 기능만 남게 되었다.  -경인일보 참고-

 

▲ 일명 댕구산으로 불리는 장도포대지 ⓒ 2011 한국의산천

▲ 댕구산 장도포대지에서 ⓒ 2011 한국의산천

일반사람들에게는 댕구산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장도포대지는 소래포구에서 시흥시로 이어지는 소래철교 서북쪽의 끝, 협궤철도 남쪽변에 위치하고 있다. 당시에는 해발 약40m 정도의 구릉지였으나 수인선 철도를 놓을 때 산의 상당부분이 깍여 현재는 반쯤 남아있는 상태이며, 현재는 새로만든 유적지 공원이 만들어져있다 

 

   본래 이 섬은 모양이 노루처럼 생겨서인지 "장도(獐島), 노루목 또는 노렴"이라 불렸는데 어느 때부터인지 정확히는 알 수 없으나 섬이름이 댕구산으로 바뀌어 불려지기 시작했다. 아마도 포대를 설치한뒤 자연스럽게 댕구산으로 부르기 시작했으리라 추정된다.

▲ 소래 장도포대지 ⓒ 2011 한국의산천

▲ 댕구산에서 내려본 소래철교 ⓒ 2011 한국의산천

연인들이 낭만을 즐기고 , 인천 또는 서울 근교에 살면서 사진촬영을 취미로 하는 사람이라면 꼭 한번 이상은 다녀가는 곳 소래포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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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래 철교의 노을 ⓒ 2011 한국의산천   

거의 10년전인 1992년 7월 송도역~소래역간 열차운행이 중단되기 전까지만 해도 송도역 주변엔 협궤열차를 타고 농수산문을 파는 아낙네들이 반짝시장이 유명했다. 소래에서 갓잡아 올린 싱싱한 수산물과 인근 농촌에서 가꾼 각종 채소들은 협궤열차에 싣고 올라 송도역 앞에서 장을 벌인 것이다.  

지금은 꼬마기차가 다니지 않는 소래 철교위로 연인들과 사진 촬영 애호가들이 찾고 있다. 그 옛날 수인선과 함께한 서민들의 애환을 아는지 모르는지 저녁하늘에는 빨란 노을이 아름답게 걸려있다 (2007년 촬영 한국의산천)

 

 

잊혀진 여인

                         - 임희숙 - 

 

긴 잠에서 깨어보니 세상이 온통 낯설고 아무도 내이름을 불러주는이 없어  나도 내가 아닌듯해라
그 아름답던 기억들이 다 꿈이었던가  한마당 타오른 그 불길이 정녕 꿈이었던가

누군가 말을해다오 내가 왜 여기 서있는지  그 화려한 사랑의 빛이 모두 어디로 갔는지
멀리 돌아보아도 내가 살아온 길은 없고  비틀거리는 걸음 앞에 길고 긴 내 그림자 

 

누군가 말을해다오 내가 왜 여기 서있는지  그 화려한 사랑의 빛이 모두 어디로 갔는지
멀리 돌아보아도 내가 살아온 길은 없고  비틀거리는 걸음 앞에 길고 긴 내 그림자  

 

▲ 그 이름도 귀여븐 소래 댕구산에서 ⓒ 2011 한국의산천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누군가 말을해다오 내가 왜 여기 서있는지 그 화려한 사랑의 빛이 모두 어디로 갔는지

멀리 돌아보아도 내가 살아온 길은 없고 비틀거리는 걸음 앞에 길고 긴 내 그림자  

그렇다. 살다보면 위의 노래 가사같은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요즘 퇴직하여 집에 있는 남자들은 그간의 화려한 빛은 온대간데 없고 찬밥덩어리가 되고 말듯이...

 

사람은 언젠가는 모두 과거라는시간에 파묻혀 버릴 현재를 살고있다. 모두가 오늘을 기억하고 살지만 망각의 강에서 흐름을 따라감을 부인 할 수 없는 것이다. 

내가 오늘은 기억하지만. 내일 역시도 오늘을 기억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잊혀짐을 스스로가 모른다는 사실이다. 

 

망각이란 좋은것일까?  "망각은 좋은것이다". 라고 말하고 싶다.

망각이란 사람이 살아감에 있어 가장 필요한 것 중 하나가 망각이 아닐까?  싫든 좋든 사람들과 함께 어울려 살면서 좋은 기억과 나쁜 기억들이 언제나 함께 공존한다.  좋은 기억은 좋은 기억대로 나쁜 기억은 또 나쁜 기억대로... 살아오면서 있었던 모든 일들을 기억하며 살아가야한다면 아마도 머리가 터져버릴지도 모른다. 특히나 아펐던 기억들을 ... 그러나 망각이라는 것이 있기에 힘든 삶도 살아 갈 수 가 있는것이다. 나쁜 기억조차도 망각의 강에 내버리고 잊고 살아갈 수 있기에..

 

망각을 통해서 지난 과거는 이미 나를 벗어났으므로 내 것이 아니라는 생각과, 아직 다가오지 않은 시간도 내 것이 아니므로 오직 지금에만 충실하며 살겠다는 생각에 위안을 삼으려는 것이아닌지. 

 

꿈많고 파릇 파릇하게 젊었던 젊음들이 이제는 어언 중년의 아저씨, 아줌마로 변해버린 세월앞에.  지금도 나는 누구에겐가 잊혀진 얼굴이 되며 지금도 그렇게 시간을 흘러가고 있다. 

 

나는 오늘도 누군가에게 잊혀진 얼굴이 되고있겠지... 

 

▲ 소래포구 ⓒ 2011 한국의산천

소래포구(蘇萊浦口)는 인천 남동구에 있는 포구로 어민들이 10톤 미만의 어선을 이용해 어업에 종사하는 작은 포구 마을로, 어종은 새우·꽃게·민어·농어·홍어·광어·낙지 등 다양하다. 이 지역의 생선은 매일 조업으로 그 선도가 높기로 이름이 났으며, 하루의 휴식을 즐길 수 있는 관광포구로 발전하여 서울·인천을 비롯한 주변 도시의 주민들이 많이 찾고 있다.

 

▲ 갈매기 조나단은 말한다 "누군가 말을해다오 내가 왜 여기 서있는지 그 화려한 사랑의 빛이 모두 어디로 갔는지 " ⓒ 2011 한국의산천

 

소래포구 
                           - 정세훈 -

휘몰아치던 서해 바닷바람은
어머니 품안에 찾아들 듯 고요히 안겨오고
새우젓배들 너울너울 바람 타고와
끝없는 그리움처럼 줄 이어 새벽을 열었겠지
이 삼복더위 한낮에
아나고 한 마리 회 쳐놓고
포구 저편 바라보니
반짝반짝 빛이 되어 오는 염전의 소금알은
견우 직녀 하얀 눈물 뿌리던 은하수 다리 아래
마당에 멍석 깔아놓고
무릎베개 부채질해주시던
그 옛날, 칠석날 여름밤의 어머니 사랑 되고.

 

 

▲ 소래포구 어시장 ⓒ 2011 한국의산천

 

 

 

 

 

▲ 정렬 ⓒ 2011 한국의산천

 

▲ 월곳포구에서 ⓒ 2011 한국의산천

누군가 말을해다오 내가 왜 여기 서있는지  그 화려한 사랑의 빛이 모두 어디로 갔는지
멀리 돌아보아도 내가 살아온 길은 없고  비틀거리는 걸음 앞에 길고 긴 내 그림자 ~ ♪

 

▲ 소래포구 어시장에서 남동~시흥월곳으로 이어지는 도로를 건너면 소래생태습지공원이 나온다 ⓒ 2011 한국의산천

소래포구 어시장에서 거리 약 500~1000m. 습지공원내 주차장 주차비 무료.  

▲ 봄을 맞아 등산화와 자전거 신발 손질 ⓒ 2011 한국의산천 

소래어시장에서 사가지고 온 맛있는 회와 술한잔을 하고 등산화(사진 위의 두켤레)와 자전거 신발(아래 3켤레)을 닦고 털고 봄맞이 준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