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과 단절된 나를 깨운 차가운 혹은 따뜻한 당신
산을 오르는 것만이 내 삶의 전부였던 시절이 있었소. 우울한 방랑자가 되어 매일매일 산을 떠올리며 그 넓은 터에 혼란스러운 내 영혼을 방목시켜 놓고 살았소.
병 속의 새를 꺼내는 것이 노승(老僧)이 갖는 유일한 화두였다면 나의 과제는 땅의 끝, 산의 꼭대기에서 하늘의 문을 여는 빗장을 벗겨내는 일이었소.
장편소설 '바람으로 남은 사람들'은 그 시절에 쓴 것이오. 나는 그 속에 강재희라는 바람 같은 당신을 창조해 놓았소. 당신은 정선 아라리를 듣던 날 밤에 홀연히 나타났소. 그날 들었던 아라리의 음률은 슬프고 목소리는 애절했으며 장고소리와 기묘한 조화를 이루었소.
아라리를 부르는 사람은 몸속 깊숙한 곳에 오랫동안 고여 있는 슬픔을 토해내듯 열창했는데 그 소리는 마치 스쳐가는 적막한 가을 빗소리를 연상시키는 듯했소. 오로지 산을 오르기 위해 강릉에 머물러 있던 의사 김명후는 그날 밤 당신이 경영하는 카페에 들러 취하도록 술을 마시지요.
▲ 삽화 = 채경혜
대학에서 미술을 전공했던 당신은 사람을 압도하듯 차갑게 보였지만 내심은 따뜻한 온천수 같은 물줄기가 흐르고 있었소. 선명하게 우뚝 선 콧날, 그 위로 그리스의 고전 조각품에서 보는 듯한 단아한 이마, 기다란 목에서 어깨로 이어지는 완만한 선이 표현하는 것은 연약하고 상처받기 쉬운, 그러면서도 자아가 매우 강한 느낌을 갖게 해 주었소. 숨은 진주였던 당신은 첫 사랑을 잃고 고향 대구를 떠나 지인이 없는 강릉에서 카페를 열어두고 있는 중이었소.
서울을 갔다 오는 길에 대관령에서 산길을 걷기 시작한 김명후는 눈 속에서 길을 잃고 헤매지요. 조난당해 죽을 뻔한 역경을 거친 후, 근무하던 병원에 들어와 보니 책상 위에 풍성한 안개꽃이 놓여 있었소. 당신이 보낸 꽃이었소. 두 사람은 어두운 겨울밤에 동해안 해안 길을 걸어 호텔 커피숍에 함께 앉지요. 치유될 수 없는 과거의 깊은 상처를 안고 만난 두 사람은 마치 병든 짐승처럼 서로의 상처를 어루만져주며 쓸쓸한 강릉의 겨울을 함께 보내게 되오.
▲ 한겨울 토왕성 폭포를 다녀오며 물치항에서 ⓒ 2008 한국의산천
봄이 오고 새싹이 돋아날 때 두 사람은 남대천 둑길을 걷지요. 둑길에는 가끔 누런 티끌 속에 태고 적 바람이 불었소. 그 길 위에 서서 적막하게 흘러가는 물줄기를 바라보면 유배(流配)의 한스런 운명이 서장처럼 느껴지기도 했소. 물길을 건너기 위해 김명후는 양말을 벗어 운동화 속에 넣은 후 그걸 당신에게 건네준 다음 등을 내밀었소. 당신의 부드러운 가슴이 그의 등에 수줍게 밀착되었지요. 물을 건너다 미끄러져 버린 바지를 말리기 위해 검불과 마른 삭정이를 주어모아 불을 지폈소. 불빛에 홍조를 띈 당신의 얼굴은 고혹적으로 아름다웠지만 병색이 완연했소. 동해안 포구에 도착한 후 모래사장에서 꽁치 잡는 사람들을 만나 막소주를 얻어 마시지요. 이른 봄 날 동해바닷가에서 으르렁거리는 파도소리를 들으며 푸르게 날선 비수 같은 소주를 생 꽁치를 안주해서 마신 두 사람은 황막한 바람소리를 듣지요. 그날 밤 두 사람은 슬픈 이별을 예감합니다.
카페를 정리하고 병든 몸을 추스르기 위해 당신은 고향으로 떠나지요. 낮술을 마시고 노란 배추꽃이 질펀하게 피어 있는 한낮의 밭두렁에 퍼질고 앉아 허무해서 그냥 목 놓아 울고 싶은 그런 날, 후배를 히말라야로 떠나보낸 김명후는 당신이 있는 곳을 향해 남행열차를 탑니다.
완벽하게 세상과 단절되어 있던 그 시절. 당신이 있어 고통스러웠던 내 강릉 생활을 견디게 해 줬던 강재희씨, 부디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전용문의 나의소설 주인공에게 [의사·소설가 : 전용문]
'바람으로 남은 사람들'의 강재희 씨
세상과 단절된 나를 깨운 차가운 혹은 따뜻한 당신
[소설가·의사 전용문 : 출처 부산일보]
▲ 한겨울 토왕성 폭포를 다녀오며 물치항에서 ⓒ 2008 한국의산천
관련글 "그날이 없었다면" 보기 >>> http://blog.daum.net/koreasan/15481313
이 세상 모든 빛은 꺼지고 멀리서 밀려드는 그리움 조그만 내 가슴에 퍼지면 아련히 떠오르는 그모습
아직도 내귀에는 들리네 언제나 헤어지지 말자던 그말이 그러나 헛된 꿈이 되었네 이제는 기다리며 살리라
오 그 모습 지워 버리려 눈을 감아도 감겨진 두눈엔 눈물만 흘러 내리네
아~
사랑 한다는 말도 못하고 그렇게 멀어져야 하나요 그러나 떠나버린 날부터 이별의 서러움은 많았죠
아직도 내귀에는 들리네 언제나 헤어지지 말자던 그말이 그러나 헛된 꿈이 되었네
이제는 기다리며 살리라 오 그모습 지워 버리려 눈을 감아도 감겨진 두눈엔 눈물만 흘러 내리네
아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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