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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거친호흡 몰아쉬며 ^^ 굽이치는 산맥넘어 손의 자유, 발의 자유, 정신의 자유를 찾는다. 기억은 희미해지기에 이곳에 기록을 남긴다
MTB등산여행

강재희씨에게

by 한국의산천 2008. 9. 9.

세상과 단절된 나를 깨운 차가운 혹은 따뜻한 당신

 

 산을 오르는 것만이 내 삶의 전부였던 시절이 있었소. 우울한 방랑자가 되어 매일매일 산을 떠올리며 그 넓은 터에 혼란스러운 내 영혼을 방목시켜 놓고 살았소.

 

병 속의 새를 꺼내는 것이 노승(老僧)이 갖는 유일한 화두였다면 나의 과제는 땅의 끝, 산의 꼭대기에서 하늘의 문을 여는 빗장을 벗겨내는 일이었소.

 

장편소설 '바람으로 남은 사람들'은 그 시절에 쓴 것이오. 나는 그 속에 강재희라는 바람 같은 당신을 창조해 놓았소. 당신은 정선 아라리를 듣던 날 밤에 홀연히 나타났소. 그날 들었던 아라리의 음률은 슬프고 목소리는 애절했으며 장고소리와 기묘한 조화를 이루었소.

아라리를 부르는 사람은 몸속 깊숙한 곳에 오랫동안 고여 있는 슬픔을 토해내듯 열창했는데 그 소리는 마치 스쳐가는 적막한 가을 빗소리를 연상시키는 듯했소. 오로지 산을 오르기 위해 강릉에 머물러 있던 의사 김명후는 그날 밤 당신이 경영하는 카페에 들러 취하도록 술을 마시지요.

▲  삽화 = 채경혜 
 

대학에서 미술을 전공했던 당신은 사람을 압도하듯 차갑게 보였지만 내심은 따뜻한 온천수 같은 물줄기가 흐르고 있었소. 선명하게 우뚝 선 콧날, 그 위로 그리스의 고전 조각품에서 보는 듯한 단아한 이마, 기다란 목에서 어깨로 이어지는 완만한 선이 표현하는 것은 연약하고 상처받기 쉬운, 그러면서도 자아가 매우 강한 느낌을 갖게 해 주었소. 숨은 진주였던 당신은 첫 사랑을 잃고 고향 대구를 떠나 지인이 없는 강릉에서 카페를 열어두고 있는 중이었소.

 

서울을 갔다 오는 길에 대관령에서 산길을 걷기 시작한 김명후는 눈 속에서 길을 잃고 헤매지요. 조난당해 죽을 뻔한 역경을 거친 후, 근무하던 병원에 들어와 보니 책상 위에 풍성한 안개꽃이 놓여 있었소. 당신이 보낸 꽃이었소. 두 사람은 어두운 겨울밤에 동해안 해안 길을 걸어 호텔 커피숍에 함께 앉지요. 치유될 수 없는 과거의 깊은 상처를 안고 만난 두 사람은 마치 병든 짐승처럼 서로의 상처를 어루만져주며 쓸쓸한 강릉의 겨울을 함께 보내게 되오.

 

 ▲ 한겨울 토왕성 폭포를 다녀오며 물치항에서 ⓒ 2008 한국의산천

 

봄이 오고 새싹이 돋아날 때 두 사람은 남대천 둑길을 걷지요. 둑길에는 가끔 누런 티끌 속에 태고 적 바람이 불었소. 그 길 위에 서서 적막하게 흘러가는 물줄기를 바라보면 유배(流配)의 한스런 운명이 서장처럼 느껴지기도 했소. 물길을 건너기 위해 김명후는 양말을 벗어 운동화 속에 넣은 후 그걸 당신에게 건네준 다음 등을 내밀었소. 당신의 부드러운 가슴이 그의 등에 수줍게 밀착되었지요. 물을 건너다 미끄러져 버린 바지를 말리기 위해 검불과 마른 삭정이를 주어모아 불을 지폈소. 불빛에 홍조를 띈 당신의 얼굴은 고혹적으로 아름다웠지만 병색이 완연했소. 동해안 포구에 도착한 후 모래사장에서 꽁치 잡는 사람들을 만나 막소주를 얻어 마시지요. 이른 봄 날 동해바닷가에서 으르렁거리는 파도소리를 들으며 푸르게 날선 비수 같은 소주를 생 꽁치를 안주해서 마신 두 사람은 황막한 바람소리를 듣지요. 그날 밤 두 사람은 슬픈 이별을 예감합니다.

 

카페를 정리하고 병든 몸을 추스르기 위해 당신은 고향으로 떠나지요. 낮술을 마시고 노란 배추꽃이 질펀하게 피어 있는 한낮의 밭두렁에 퍼질고 앉아 허무해서 그냥 목 놓아 울고 싶은 그런 날, 후배를 히말라야로 떠나보낸 김명후는 당신이 있는 곳을 향해 남행열차를 탑니다.

완벽하게 세상과 단절되어 있던 그 시절. 당신이 있어 고통스러웠던 내 강릉 생활을 견디게 해 줬던 강재희씨, 부디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전용문의 나의소설 주인공에게 [의사·소설가 : 전용문] 

'바람으로 남은 사람들'의 강재희 씨
세상과 단절된 나를 깨운 차가운 혹은 따뜻한 당신

[소설가·의사 전용문 : 출처 부산일보]

 

▲ 한겨울 토왕성 폭포를 다녀오며 물치항에서 ⓒ 2008 한국의산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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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글 "그날이 없었다면" 보기 >>> http://blog.daum.net/koreasan/15481313 

 

이 세상 모든 빛은 꺼지고 멀리서 밀려드는 그리움 조그만 내 가슴에 퍼지면 아련히 떠오르는 그모습
아직도 내귀에는 들리네 언제나 헤어지지 말자던 그말이 그러나 헛된 꿈이 되었네 이제는 기다리며 살리라
오 그 모습 지워 버리려 눈을 감아도 감겨진 두눈엔 눈물만 흘러 내리네
아~
 
사랑 한다는 말도 못하고 그렇게 멀어져야 하나요 그러나 떠나버린 날부터 이별의 서러움은 많았죠
아직도 내귀에는 들리네 언제나 헤어지지 말자던 그말이 그러나 헛된 꿈이 되었네
이제는 기다리며 살리라 오 그모습 지워 버리려 눈을 감아도 감겨진 두눈엔 눈물만 흘러 내리네
아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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