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명이요 흔적을 남기시요 [2008. 2. 22 금요일 한국의산천 ]
선조들은 도성을 쌓거나 개축시에 그 내용을 돌에 새겨 그 흔적을 남겼다.
돌에 새긴 조상들의 그 꼼꼼하고 확실한 각자(刻字)를 보며 나는 또 다른 생각을 떠올렸다. 용서(容恕)는 모래에 새기고, 은혜(恩惠)는 돌에 새겨라.
기억을 떠올려 기록을 남긴다. 기억은 희미해지고 그 기록이 다시 기억을 지배하게 된다.
블로그 역시 개인의 흔적이며 기록이다. 그 기록이 모여 네티즌끼리 정보교류가 되고 개개인의 추억과 역사가 된다.
아래 답사지를 찾아가시면 보물찾기 하듯이 시면석, 축조석이나 증개축 수리 내용을 적은 각자(刻字)를 찾아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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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천읍성 시면석
조선시대 서해안권 내포지역의 대표적인 정치, 군사 요충지로 자리매김했던 600여년 역사의 면천읍
▲ 면천읍 읍성 옆에 있는 군자정 ⓒ 2008 한국의산천
▲ 면천읍성의 시면석. ⓒ 2008 한국의산천
기미년에 4치 크기의 돌로 길이 6천자의 성을 쌓기 시작한 면이라는 뜻으로 마을별로 쌓아야되는 성의 길이가 있어서 어느 구간에 어느 마을 사람들이 쌓았는지 알 수 있었다 전한다.
면천읍성
조선시대 서해안권 내포지역의 대표적인 정치, 군사 요충지로 자리매김했던 600여년 역사의 면천읍성(城) 면천은 일제시대까지만 해도 당진에 맞먹는 중요한 지방행정의 중심지였다. 예당(예산과 당진)평야의 중심에 있어 당진, 신창, 덕산, 예산을 잇는 교통의 요지였다.
당진군은 서산, 태안 등과 더불어 옛부터 중국으로 통하는 중요한 바닷길이 있었던 곳이다. 이처럼 중국과의 통상에 중요한 통로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국방상의 중요한 거점이기도 했다.
면천읍성은 고려시대 충렬왕 16년(1290)에 세워졌다고 하나 실은 백제 초기부터 외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면천읍성은 동, 서, 남, 북의 사대문까지 갖춘 성이었다. 조선 태종13년에 다시 쌓았으며 경종 때 중수되었다. 면천에 읍성이 있었던 것은 이곳이 1914년까지 당진에 버금가는 주요 군소재지였기 때문이다.
▲ 면천 읍성과 면천군(郡)지 입석 ⓒ 2008 한국의산천
큰돌로 지어진 면천읍성
조선실록 등의 문헌을 면밀히 살펴보면 조선 세종21년(기미년)조에 쌓은 성이다. 지금은 버스정류장 앞에서 면천시장 남쪽입구 부근까지만 돌성으로 약간 남아있고 나머지 부분은 토성 형태로 남아있다.
성둘레는 900m에서 1㎞정도가 된다. 면천읍성은 조선초에 많이 쌓은 평지성의 전형적인 형태라는 점에서 귀중한 유적이라 할 수 있다.
재미있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옛날에 안면도에 한 노인이 살았다.30년 넘게 머슴살이를 하다가 처음으로 서산읍내에 나가게 되었다.난생 처음보는 으리으리한 건물인 군청을 보고는 " 그것 참 잘 지었다"하고 감탄하고 있자니 어떤 사람이 " 그까짓 것 보고 뭘 놀라세요. 해미읍에 가서 성문 구경을 해 보쇼"했다. 노인은 기왕 나선 길이니 하룻밤을 자고 해미로 갔다.과연 멋이 있기에 " 이 정도면 사람이 지은 것 같지 않으니 구경할 만하다"하고 감탄하고 있는데 또 한 사람이 " 면천읍내 성 쌓은 것을 보면 정말 사람이 쌓은 것 같지 않지요"했다. 그 길로 면천읍내에 갔더니 성은 크지 않으나 돌이 정말 컸다.이 얘기는 당진군 사람들 사이에 전해 내려오는 것이다"
▲ 면천읍성 ⓒ 2008 한국의산천
위치 충청남도 당진군 면천면 성상리에 있는 조선시대의 성.충남기념물 제91호
소재지 충남 당진군 면천면 성상리 821-6 외 9필.
1993년 12월 31일 충청남도기념물 제91호로 지정되었다. 조선시대 초기에 쌓은 전형적인 평지 읍성으로, 기록에 따르면 성의 둘레는 3,235자(약 986m), 높이는 15자(약 4.5m)이고 적대(敵臺 :망루)가 7곳, 문이 3곳, 옹성(甕城)이 1곳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현재는 서쪽 성벽 일부의 성돌만이 남아 있으며, 성돌에 기미년(己未年)이라 새겨져 있는 것과 1439년(세종 21)에 이 성을 쌓았다는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으로 미루어, 성돌에 새겨진 기미년은 이 성을 쌓은 연대임을 알 수 있다.현재 면천사무소, 보건지소, 노인정, 면천초등학교 등을 둘러싸고 있다. 조선시대 관방 시설 연구의 귀중한 자료이다.
▲ 면천읍성 ⓒ 2008 한국의산천
당진군에서는 점차로 객사와 동헌, 내아, 외책실, 사령청 등 관아건물은 물론 읍성에 위치해 있던 남문과 북문, 동문을 복원하고 군자정 및 건곤일초정 등 정자와 사업 구역내 민가를 정비하게 된다.
성문 복원도 실시돼 옹기 형태의 옹성 25,4m에 2층 문루와 석성, 여장(성벽 화살쏘는 구멍)으로 홍예문을 건립하고 관아 건물인 내책실과 급창방, 군기고 등을 조선시대 건축양식으로 철저한 고증에 근거 원형 복원키로 했다. 면천읍성 주변에는 풍악루와 아름다운 군자정, 면천향교가 있다.
▲ 면천읍성 ⓒ 2008 한국의산천
해미읍성 축조석
해미(海美) 바다海(해)字와 아름다울 美(미)字 이 얼마나 아름다운 고을 이름인가? 아름다운 바다와 가야산을 중심으로 하여 서쪽은 큰 바다요, 북쪽은 큰 만이고, 동쪽은 큰 평야, 남쪽을 그 지맥이 이어지는 바, 가야산 둘레 열 개 고을을 총칭하여 '내포'라 하면서 내포의 비옥한 평야 중심에 가야산이 놓여있다고 적고 있다. 오랜시간에 걸쳐 자란 담장이 덩굴이 돌 성벽을 기어오르고 성 안은 지금도 보수 작업이 한창이다.
▲ 정문 진남루(鎭南樓) 진남문 ⓒ 2008 한국의산천
해미읍성의 한 가운데에 위치하고 있다. 화강암으로 만든 홍예문 위에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팔작 지붕의 단층 문루이다. 해미읍성에 있는 세 개의 문들 중 유일하게 조선시대 모습 그대로 남아 있다.
해미읍성 본래의 정식명칭은 해미내상성(內廂城)으로 조선조 4번째 임금인 태종께서 태종 16년(1416년)2월 5일부터 2월22일까지 긴 여행을 하시며 이곳을 돌아보고 왜구에 대한 방비책으로 축조를 명하여 성을 쌓기 시작했다.
해미읍성은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읍성으로는 원형이 가장 잘 남아 있어 대표적인 표본이 되며, 우리나라 천주교의 성지로서 역사적 의의가 있는 유적이다. 해미읍성은 해미면 읍내리에 위치해 있으며 성곽길이 1,800m, 높이 5m. 조선조 초기의 대표적인 석성으로 1963년에 사적지로 지정되었다. 성의 둘레에 탱자나무를 돌려 심었기 때문에 탱자성이라고도 했다.
읍성은 지방 행정 관청이 있는 마을에 들어서며, 행정적인 기능과 군사적인 기능을 함께 갖는 형태로서, 평시에는 행정중심지가 되고 비상시에는 방어기지가 되었다.
기름진 땅이 넓게 펼쳐져 있는 내포 땅, 바다가 두루 넓은 서산은 서해로 삐죽이 튀어나와 밖으로는 서해와 맞닿아 있고 안으로는 좁고 긴 천수만을 안고 있다. 때문에 이 곳에는 수산 자원도 풍부하고 천수만을 막아 만든 간척지에서 생산되는 쌀 등 농산물도 풍부하여 흔히 이 곳을 가리켜 "한 해 농사를 지어 세 해 먹고 사는 곳"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다. 이런 서산의 남동쪽에 자리잡고 있는 해미는 풍부한 물자들을 노략질하러 오는 왜구들을 막기 위해 전략적 요충지로 영(營)을 두고 성을 쌓았던 곳이다.
▲ 해미읍성 축조석 ⓒ 2008 한국의산천
정문인 진남루 문루의 안쪽 상단 대석에는 皇明 弘舍 四年 辛亥 造 (황명홍사사년신해 조) 라고 음각되어있는데 이는 명나라 연호로 우리 나라 조선 성종 22년 (1491)에 해당한다.
이 성은 충청병마절도사영으로 조선조 태종 18년부터 세종 2년(1420)까지 3년간에 걸쳐 전국각지의 인력을 차출하여 쌓았으며 성종 22년(1491)에 중수된 것으로 보인다. 당시 이 성 안에 근무인원은 850여명이나 되는 대부대였으며 충청도의 병권의 지휘소로써 국방은 물론 내란 방지 포호(捕虎)등의 임무도 맡고 있었다.따라서 이후부터 왜구의 서해안 침입이 현격하게 줄어서 큰 효과를 보았으나 효종 2년(1651)에 절도사영이 청주로 옮겨가서 230여년 만에 절도사영으로서의 역할을 끝나고 읍성의 역할이 시작된다. 그 후 이성에는 호서좌영(湖西左營)을 설치하고 무장이 현감인 겸영장(兼營將)이 배치되어 현감의 임무와 내포지방 12개 군현의 병권을 겸하여 관장하였으며 이순신 장군도 이 성에서 선조 12년(1578)에 훈련원봉사(訓練院奉事)로 10개월간 근무한 적이 있다.
▲ 잘 보존된 성벽 ⓒ 2008. 한국의산천
현재 해미읍성내에는 정문인 진남루(鎭南樓)와 동문잠양루(岑陽縷), 서문지성루(枳城樓), 2개의 포문(砲門)이 있고 성안에는 동헌(東軒)과 아문(衙門)이 남아 있다.
문종실록의 기록에 의하면 둘레가 3,352척이고 높이가 12척에 4개의 문과여장 688개 및 성벽의 둘레에 3,626척의 해자가 파여지고 적대(敵臺) 18개가 계획되어 2개가 완성되어 있다고 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당시 절도사영은 해미현의 동쪽 3리에 있었으며, 석성으로 둘레 3,172척, 높이 15척, 우물 세군데, 군창이 설비되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 옛 감옥터와 호야나무 .감옥터 뒤로 멀리 오른쪽 능선위로 가야산 능선이 흐른다. ⓒ 2008 한국의산천
해미읍성의 옛 감옥터 앞에 자리잡고 있는 커다란 호야나무는 천주교 신자들을 매달아 죽이던 곳이기에 이같은 연유로 해서 현재 순교목으로 지정되어 있기도 하다. 그때에 천주교인들을 잡아들며 열 명에서 열 다섯 명씩을 밧줄로 묶어 큰 구덩이 세 개를 파고 생매장을 시켰는데 차례를 기다리는 동안에 마음이 변할 것을 걱정한 많은 교인들이 남보다 먼저 스스로 구덩이 속으로 뛰어들기도 했다고 한다.
1935년에 베드로 신부가 유해를 발굴했는데 뼈들이 몇 가마니에 이르렸다고 한다. 이 유골은 줄곧 음암면 상홍리에 안치되어 있었으나 l975 년에 신부 이 규남 씨가 해미 읍성에서 1 킬로 미터쯤 떨어진 곳에 순교 기념탑을 세우면서 그리로 옮겼다.
해미읍성에서는 개심사와 백제의 미소로 알려진 삼존마애불,보원사지,남연군 묘,덕산온천이 가깝다.
수표교의 보수 각자
다리 보수의 기록을 일일이 다리의 돌에 새긴 조상의 지혜가 깃든 아름다운 다리 수표교
현재까지도 선조들이 하신 수표교처럼 보수의 기록을 남기며 관리했다면 성수대교 붕괴같은 대형 사고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 장춘단공원에 있는 수표교 ⓒ 2008 한국의산천
서울특별시 중구 장충동 장충단공원 입구에 있는 조선 전기의 다리. 길이 27m, 너비 7m.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18호. 원래는 현재의 청계천 2가에 있었으나 1959년에 청계천 복개공사를 하면서 지금의 자리로 옮겨놓았다.
▲ 다리 귀틀돌에 새겨진 수표교의 보수 기록을 보여주는 각자(刻字) ⓒ 2008 한국의산천
조선 시대에는 돌다리를 고치거나 하천 바닥을 파고 나면 다리 일부에 그것을 기록으로 남겼다. 다리 곳곳에는 '丁亥改築(정해개축)','(戊子禁)營改造(무자금영개조)' 등의 글씨가 남아 있어서 500여년 동안 여러 차례에 걸쳐 수축되었음을 알 수 있다.
다리기둥에 새긴 '경진지평'은 '경진년에 준천한 바닥의 기준'을 나타내며, 수표교의 귀틀돌에는 '무자금영개조'(무자년에 금위영에서 다리를 고쳤다)는 '정해개축(丁亥改築 정해년에 다리를 고쳐 지었다)'이라는 두 문장이 새겨져 있다.
이 두 문장이 영조의 준천 뒤 새겨진 것으로 보고 있다. '무자'는 영조 이후 첫 무자년인 순조 28년(1827년)이며, '정해'는 두번째 정해년인 고종 24년(1886년)이라고 추정한다. 현재 남아있는 수표교에는 '무자금영개조' 가운데 '영개조(營改造)'만 남아있는데, 1959년 청계천 덮기 공사 때 장충단 공원으로 옮겨지면서 사라진 것으로 추정된다. '정해개축'은 그대로 남아있다.
▲수표교 다리 중간쯤에 있는 기둥에 새겨진 경진지평 (경진년에 준천한 바닥의 기준) 각자(刻字) ⓒ 2008 한국의산천
영조 36년(1760) 다리를 수리 ·준천하면서 돌기둥에 '경(庚) ·진(辰) ·지(地) ·평(平)'이라는 글씨를 새겨두어 하천 준설 사업을 하는 기준점으로 삼으며 4단계의 물높이를 측정하도록 하였다. 이 때부터 수중주석표(水中柱石標)라는 말이 생겨나 '수표교 '라 부르게 되었다.
영조 때는 수표교 북쪽 냇가에 준천사(濬川司)라는 관청을 두어 토사를 걷어 둑을 쌓게 하고 양쪽 언덕에 버들을 심어 무너지는 것을 방지하였다. 이 때 쌓아놓은 모래가 긴 뱀처럼 쌓여 있어서 현재 장사동(長沙洞)이 유래하였으며, 쌓아놓은 모래가 산을 이루었는데 그곳에 꽃을 심으니 향기로운 산이 되었다는 데서 방산동(芳山洞)이 유래하였다.
▲ 세피아 톤으로 촬영한 수표교 ⓒ 2008 한국의산천
수표교는 대광통교인데 종루길에 잇대어 있는 서울 도성안에서 가장 큰 다리였다. 청계천 위에 놓인 많은 다리 중에서 임금행차가 자주 있던 다리였다. 지금 중구 저동의 중부경찰서 자리 일원에 세조의 딸 의숙공주의 사사집인 영희전이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머니인 공빈 김씨 조사로 봉자전이라 부르더니 이후로 태조 세조의 영정을 모시고 영희전이라 하였다.
영조는 이 전을 크게 늘리고서 숙종, 영조, 순조의 영정도 모셔 남별전이라 했다. 이 곳에서 오속절(설날, 한식, 단오, 추석, 동짓날)과 납일마다 제례가 거행되니 임금의 거동이 자주일 수 밖에 없었다. 이때마다 임금의 행차가 이 수표교를 건너게 마련이었다. 구경꾼이 인산인해를 이루어 수표교 거동 행렬은 일대 장관을 이루었던 것이다.
다리 전체의 짜임새와 형태가 조화있게 면밀히 짜여 있을 뿐 아니라 다리 양쪽가에는 돌난간이 세워 있어 한층 섬세하여 아름다움을 돋보이게 했다.
▲ 시골의 한옥 마룻장처럼 깔린 청판석이 닳아 장판처럼 매끄럽다.ⓒ 2008 한국의산천
9개씩 5줄로 세워진 교각은 네모와 육모 기둥 의 큰 석재를 2단으로 받치고 흐르는 물의 저항을 줄이기위해 물이 흐르는 방향으로 마름모꼴로 교각을 배치하고, 그 위에 길이 4.5m나 되는 장대석을 걸쳐 놓았다. 좌우에는 돌난간을 설치하고 바닥은 청판석 을 4줄로 깔았다.
수표교의 청판석을 보니 어렸을 때 수표교와 꼭 같은 집의 두꺼운 송판 마룻장 한장을 빼내어 언덕에서 썰매를 타고 다시 갔다놓은 생각이 난다.
▲ 아름다운 다리 수표교 ⓒ 2008 한국의산천
9개씩 5줄로 세워진 교각은 네모와 육모 기둥 의 큰 석재를 2단으로 받치고 기둥의 아래는 거칠게 다듬질 된 네모난 돌로, 위는 고르게 다듬은 네모난 돌로 만들어 2단으로 포개어 쌓았다. 이 가운데 위 4각주(四角柱)는 흐르는 물의 저항을 줄이기위해 모서리를 물의 방향에 맞추어 배열하였다.
1441년(세종 23) 수표(水標)를 만들어 마전교(馬廛橋) 서쪽에 세워 청계천의 수위를 측정하여 홍수에 대비하였다. 수표가 세워지기 이전에 이곳에 우마시전(牛馬市廛)이 있어 마전교라 불리었는데, 그뒤 수표교라 바뀌었고 이 일대 동네를 수표동이라 하였다.
마전교는 1420년(세종 2)에 놓아졌는데 '동국여지승람' 교량조(橋梁條)에는 수표교로 되어 있다. 화강석을 깎아 만든 석재(石材)를 가구식(架構式)으로 짜맞추어 세운 돌다리이다.
▲ 국보와 헬기와 다리와 공공건물과 아파트에 수리한 흔적을 남기시오~! ⓒ 2008 한국의산천
[바람의 노래] 지오디의 '길'
내가 가는 이 길이 어디로 가는지 어디로 날 데려가는지 그곳은 어딘지
알수 없지만 알수 없지만 알수 없지만 오늘도 난 걸어가고 있네
사람들은 길이 다 정해져 있는지 아니면 자기가 자신의 길을 만들어 가는지
알수 없지만 알수 없지만 알수 없지만 이렇게 또 걸어가고 있네
나는 왜 이 길에 서있나 이게 정말 나의 길인가 이 길의 끝에서 내꿈은 이뤄질까
무엇이 네게 정말 기쁨을 주는지 돈인지 명예인지 아니면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인지
알고 싶지만 알고 싶지만 알고 싶지만 아직도 답을내릴수 없네
자신있게 나의 길이라고 말하고 싶고 그렇게 믿고 돌아보지 않고 후회도 하지 않고
걷고 싶지만 걷고 싶지만 걷고 싶지만 아직도 나는 자신이 없네
나는 왜 이 길에 서있나 이게 정말 나의 길인가 이 길의 끝에서 내꿈은 이뤄질까
나는 무엇을 꿈꾸는가 그건 누굴 위한 꿈일까 그 꿈을 이루면 난 웃을수 있을까
오 지금 내가 어디로 어디로 가는 걸까 나는 무엇을 위해 살아야 살아야만 하는가
나는 왜 이 길에 서있나 이게 정말 나의 길인가 이 길의 끝에서 내 꿈은 이뤄질까
나는 무엇을 꿈꾸는가 그건 누굴 위한 꿈일까 그 꿈을 이루면 난 웃을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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