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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거친호흡 몰아쉬며 ^^ 굽이치는 산맥넘어 손의 자유, 발의 자유, 정신의 자유를 찾는다. 기억은 희미해지기에 이곳에 기록을 남긴다
문화문학음악

조의제문 무오사화 계유정난 단종

by 한국의산천 2008. 2. 12.

단종관련 자료준비....  

 

▲ 영월 청령포(2005. 8. 15일 일요일 촬영) ⓒ 2008 한국의산천 

단종이 청령포에서 유배생활을 하던 중 그해에 큰 홍수가 나는 바람에 영월 시내의 관풍헌으로 거처를 옮겼다. 

▲ 관풍헌 자규루 ⓒ 2008 한국의산천 

단종이 청령포에서 유배생활을 하던 중 그해에 큰 홍수가 나는 바람에 이곳으로 거쳐를 옮겼다. 이곳에서 단종은 1457년 10월 24일 세조가 내린 사약을 받고 한 많은 짧은 생을 마감하게 되었다. 이곳에서 사약을 받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오나 한편으로는 (강요에 의해)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이야기와 금부도사가 약사발을 드밀지 못하자 본읍에서 달려온 무지한 통인 하나가 큰 상이라도 탈줄알고 활시위를 구하여 올가미를 만들어 문틈으로 잡아당겼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그때 단종을 옭아죽인 통인은 돌아서서 몇발자욱 못가서 입과 코에 피를 토하고 쓰러져 죽었다고 한다.

단종.그의 나이 열일곱, 열두살에 왕위에 올라 3년 있다가 영월로 내몰려 다시 3년 뒤 쓸쓸한 최후를 마치었다.

 

또한 김삿갓이 20세 되던해에 조부의 행적을 모르고 조부를 신랄하게 탄핵하는 글을 지어 장원을 한곳도 바로 이곳 관풍헌이다.  

관풍헌은 본래 고을의 객사로 쓰던 건물로 영월읍의 중심에 있다.  고색창연한 큰 건물 세 채가 나란히 잇닿아 있는데 해방 전에는 영월군청이 썼고, 해방 후에는 영월중학교가 들어 서기도 했으나 지금은 단종 복위 후 단종의 원찰(願刹) 이었던 보덕사(保德寺)의 포교당으로 쓰고 있다.
동헌 동쪽에 있는 누각을 자규루(子規樓)라 하는데 이 누각은 세종 때 영월군수였던 신근권이 세워서 매죽루(梅竹樓)라고 했던 것을 단종이 이에 올라 '피를 토하듯 운다' 는 두견새(杜鵑: 一名 子規)의 한을 담은 시를 읊었다고 하여 그 시를 자규시라 하고 이 누을 자규루라고 부른다.

 

子規詞(자규사)단종(1441-1457)

月白夜蜀魄 (월백야촉백추)달밝은 밤에 두견새 울음소리 더욱 구슬퍼
含愁情依樓頭(함수정의루두) 수심많은 이내 목 누 머리에 의지하노라
爾주悲我聞苦(아주비아문고) 슬피우는 네 목소리 내 듣기 괴로우니
無爾聲無我愁(무이성무아수) 네 울음 그쳐야 내 수심도 그치리라
寄語世上苦勞人(기어세상고로인) 세상에 괴로움 많은 자에게 한마디 부치니
愼莫登春三月子規樓(신막등춘삼월자규루)   아예 춘삼월에는 자규루에 오르지 말아다오


자규시 

一自寃禽出帝宮; 한 마리 원한 맺힌 새가 궁중에서 나와

孤身雙影碧山中; 외로운 몸과 외로운 한 그림자로 푸른 숲에 깃들었다.

假眠夜夜眠無假; 밤마다 억지로 잠들려 하지만 잠 이루지 못하고

窮恨年年恨不窮; 해마다 한스러움 끝나기를 기다렸지만 원한은 끝나지 않네
聲斷曉岑殘月白; 두견이 울음 끊어진 뫼부리에 조각달만 밝은데

血漏春谷落化紅; 피를 뿌린 것 같은 골짜기에는 붉은 꽃이 지네
天聾尙來聞哀訴; 하늘은 귀머거린가 아직 애끓는 호소를 듣지 못하고
何奈愁人耳獨德  어찌하여 수심 많은 이 사람에게 귀만 밝게 하였는가.

 

▲ 청령포 나루 앞에 서있는 비 ⓒ 2008 한국의산천 

 

▲ 조선 6대 왕 단종릉 장릉. ⓒ 2008 한국의산천

영월의 호장 엄흥도가 지게에 단종의 시신을 지고와서 산길을 오르다 보니 노루가 한마리 튀어 도망가기에 그곳을 보니 눈이 녹아있어 이곳에 암매장하고 도망을 쳤다고 한다.

 역대의 왕릉을보라

그들의 묘는 산으로 둘러싸인 아늑한 자리에 자리하고 있지만 단종의 묘는 좁은 산릉의 그 끝에 오롯이 비좁게 서 있음을...
 

 

영월의 호장 엄흥도

爲善被禍 吾所甘心(위선피화 오소감심 )  좋은 일 하고도 화를 당한다면 달게 받겠다[ 엄문(嚴門)의 家憲)]

 

조선 제6대 단종대왕이 노산군으로 강봉되어 강원도 영월에 유배되었을 때 충의공은 이 고장 호장직(戶長職)에 있었다.
밤낮으로 대왕의 거소(居所) 청령포를 바라보고 대왕이 무사하기를 기원하던 중 어느날 달 밝은 고요한 밤에 청령포 대왕의 거소에서 슬프고 애끊는 비명의 곡성이 들려오므로 황급히 강을 건너가 진배하니 대왕은 울음을 멈추고 "이 심야엔 웬 사람이 나를 찾는가?" 하고 물으니, "소신은 이 고장 영월호장 엄흥도이옵니다"라고 대답하고 옥안을 바라보니 대왕은 "육지고도(陸地孤島)인 이곳 청령포에 유배된 이후 밤마다 꿈속에서 신하들을 보고 추억을 회상하며 탄식하고 지내던 중 비조불입인 이곳에서 너를 보니 육신을 상봉한 것 같구나. 그대는 실로 초야에 묻힌 선인이로구나!" 하고 반갑게 맞이 하였다. 

 

그후 호장 엄홍도는 매일 밤 풍우를 가리지 않고 문안을 드렸으며 그해 여름 큰 장마로 인하여 대왕은 청령포 어소에서 영월읍 영흥리 관풍헌에 침소를 옮기게 되어 밤마다 객사 동편에 있는 자규루(子規樓)에 올라 자규시를 읊으면서 지내던 중 금부도사 왕방연(王邦衍)이 가지고 온 사약을 받고 승하하니, 그 옥체는 동강물에 던져지고 시녀는 동강절벽(후일에 낙화암이라고 함)에서 투신절사(投身節死)하였는데 이 때가 매우 추운 겨울이었다.
 

엄흥도는 단종이 관풍헌에서 사약을 받고 승하하자 단종의 시신을 거둔 이로 유명하다. 단종이 서거하자 세조의 명에 의해 단종의 시신은 동강에 버려졌다. 세조는 단종의 시신을 거두는 이는 삼족을 멸한다고 엄명했기 때문에 아무도 단종의 시신을 거두지 못했다.

 

호장 엄흥도는 군수에게 성장(聖裝)을 청하였으나 세조를 두려워하므로 성사치 못하자 즉시 서강과 동강이 합류하는 곳으로 달려가 죽음을 무릎 쓰고 아들 삼형제와 함께 밤에 단종의 시신을 몰래 거두어 달려가 그곳에서 대기하였다가 옥체를 인양하여 미리 준비한 관에 봉안하고 운구하여 영월군 서북쪽 동을지산(冬乙支山)지금의 장릉에 암장하고 자취를 감추었다.

1759년 (영조 34년) 그 벼슬을 공조판서로 추봉하여 사육신 정렬에 배향하고 육신사(六臣祠)에 봉안·치제케 했다.

그후 1516년 (중종 11년)에 어명으로 노산묘를 찾아 수축하고 능전사청을 후인
1791년 (정조 15년)에 어명으로 노산료를 찾아 수축하고 능전사청을 건립
1791년 (정조 15년)에 어명으로 장릉배식단(莊陵配食壇 )에 배합향배(配合享배)케 하고 정려치제(旌閭致祭)케 하였으며, 1833년(순조 33년) 공조판서에 추증되고 고종 13년(1876)에 충의공 시호를 내렸다. 묘소는 영월읍 팔괴리 창평산 186번지에 있다.

 

조의제문은 단종과 세조를 초나라 의제와 항우에 비유했다. 문장이 워낙 난해해 당대의 식자층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조의제문을 접한 연산군이 "어찌 이 글이 세조를 능멸하고 노산군을 위한 제문이란 것인가?"하고 되물을 정도였다고 한다.

항우는 스스로 보위에 오른 뒤 의제를 강에 던져 죽인다. 김종직은 단종의 시신이 강에 떠내려갔다는 풍설을 듣고 중국의 고사에 빗댄 것이다. 이 글은 이미 죽어 땅에 묻힌 김종직을 부관참시(죽은이를 다시 관에서 꺼내어 시신을 다시 한번 더 죽임)시키고 숱한 선비를 죽음으로 내몰았다.

 

김종직이 弔義宰文(조의제문)을 짓게된 연유를 그 서두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정축년丁丑年(세조3년) 10월 밀양에서 경산(오늘의 성주)으로 가다가 답계역에서 잤다. 그날 밤 꿈에 신인神人이 칠장복七章服을 입고 키가 크고 인품이 있는 모습으로 와서, "나는 초회왕楚懷王의 손자 심心인데 서초패왕西楚覇王(항우)에게 죽음을 당하여 빈강彬江에 빠져 잠겨 있다."하고는 갑자기 보이지 않았다. 깜짝 놀라 잠을 깨어 생각하니, 회왕은 남방 초나라 사람이고 나는 동이東夷(조선)의 사람이다. 땅이 서로 만 리나 떨어져 있고 시대가 또한 천여 년이나 떨어져 있는데 내 꿈에 나타나는 것은 무슨 징조일까. 또 역사를 상고해 보아도 강물에 던졌다는 말은 없는데 아마 항우가 사람을 시켜 몰래 쳐죽여 시체를 물에 던졌던 것인지 알 수 없는 일이다.

하늘이 사물과 법칙을 마련하여 사람에게 주었으니, 누가 그 사대四大와 오상五常을 높일 줄 모르리오. 중화中華 사람에게만 넉넉하게 주고 동이 사람에게는 부족하게 준 것이 아니니, 어찌 옛적에만 있고 지금은 없으리오. 나는 동이 사람이고 천 년이나 뒤에 났는데도 삼가 초의 회왕을 슬퍼하노라.

 

옛날에 진시황이 어금니와 뿔을 휘두르니 사해四海의 물결이 모두 피가 되었다. 비록 전어, 상어, 미꾸라지, 고래인들 어찌 보전하리오. 그 물에서 빠져나오고자 하여 바쁘게 날뛰었다. 이때 육국六國의 후손들은 세력이 없어지고 딴 곳으로 피난하여 겨우 평민과 같이 지냈다. 항량項梁은 초楚의 무장 집안의 자손으로서 진승陳勝의 뒤이어 일을 일으켰다. 회왕을 찾아내어 백성의 여망에 따랐으므로 멸망했던 초나라를 다시 보존하게 되었다. 건부乾符를 쥐고 천자가 되었으니 세상에서 미씨氏 보다 높은 이가 없었다. 유방을 함곡관函谷關에 들어가게 하니, 또한 그 인의를 볼 수 있겠다. 양羊처럼 성내고 이리처럼 탐욕 하여 관군을 함부로 죽였는데도 어찌 그 항우를 잡아 처형시키지 않았는가. 아아, 형세가 그렇지 못하였으니 나는 회왕을 더욱 두렵게 여긴다. 길러놓은 자에게 도리어 해침을 당하였으니 과연 천운이 어긋났도다. 빈彬의 산이 험하여 하늘에 닿으니 햇빛이 어둑어둑 저물려한다. 빈彬의 물이 밤낮으로 흐리니 물결이 넘쳐서 돌아오지 않는다. 영원한 천지간에 한이 어찌 다하리오. 혼령이 지금도 정처 없이 헤매고 있구나.

나의 마음이 쇠와 돌을 뚫을 만하니 회왕이 갑자기 꿈에 나타났도다. 주자朱子의 필법을 따르자니 생각이 불안하고 조심 된다. 술잔을 들어 땅에 부으면서, "영령英靈이시여 와서 흠향歆饗하시기 바랍니다." -김종직- 

 

조의제문(弔義宰文)은 다음과 같다

"하늘이 법칙을 마련하여 사람에게 주었으니 누가 그 사대(四大: 道天地王) 오상(五常)(인의예지신)을 높힐줄 모르리오. 중화 사람에게만 넉넉하게 주고 동이 사람에게는 부족하게 준 것이 아니니, 어찌 옛적만 있고 지금은 없으리오. 나는 동이 사람이요. 또 천 년 이나 뒤에 났건만, 삼가초 회왕을 슬퍼하노라. 옛날 조룡(진시황)이 어금니와 뿔을 휘두르니, 사해의 물결이 붉어 피가 되었네. 비록 전어, 상어, 미꾸라지, 고래라도 어찌 보존하겠는가. 물을 벗어나기에 급급했느니, 당시 육군(진에게 망한 전국시대 여섯 나라)의 후손들은 숨고 도망가서 겨우 평민같이 지냈다네. 항량은 남쪽 초나라 무장 집안으로, 진승을 이어 일을 일으켰네, 왕을 찾아내어 백성이 바라는 바에 따랐으니 멸망했던 초나라를 다시 보존했네. 건부를 쥐고 천자가 되었으니, 천하엔 진실로 미씨(초의 성)보다 큰 것이 없도다. 장자를 보내어 관중에 들어가게 함이여! 또한 족히 그 인의 를 보냈도다. 양처럼 성내고 이리처럼 탐욕하여 관군을 마음대로 죽였는데도 어찌 항우를 잡아다 처형하지 아니했는고. 아아. 형세가 너무도 그렇지 못했으니, 나는 희왕을 위해 더욱 두렵게 여겼네. 길러놓은 자에게도리아 해침을 당했으니, 과연 하늘의 운수가 어긋났구나. 빈의 산은 우뚝하여 하늘에 닿으니, 그림자가 해를 가리어 저물려고한다. 빈의 물이 밤낮으로 흐름이여! 물결이 넘실거려 돌아올 줄 모르도다.

천지가 장구한들 한이 어찌 다하리. 넋은 지금도 정처없이 헤매고 있구나. 나의 마음은 돌과 쇠도 뚫을 만하니 회왕이 문득 꿈속에 나타났구나. 주자의 필법을 따르자니, 불안하고 조심된다. 술잔을 들어 땅에 부으면서 '바라건데 혼령은 와서 흠향하소서."

 

조의제문은 조선 전기의 학자 김종직(金宗直)이 세조(世祖)의 찬탈(纂奪)을 비난한 글로서 운문체로 씌어졌다. 김종직이 1457년(세조 3) 10월 밀양에서 경산(京山 : 星州)으로 가다가 답계역(踏溪驛)에서 숙박했는데, 그날 밤 꿈에 신인(神人)이 칠장복(七章服)을 입고 나타나 전한 말을 듣고 슬퍼하며 지은 글이다. 


   김종직은 항우(項羽)에게 죽은 초나라 회왕(懷王), 즉 의제(義帝)를 조상하는 글을 지었는데, 이것은 세조에게 죽음을 당한 단종(端宗)을 의제에 비유한 것으로 세조의 찬탈을 은근히 비난한 글이다. 이 글을 김종직의 제자인 김일손(金馹孫)이 사관(史官)으로 있을 때 사초(史草)에 적어 넣었다. 연산군이 즉위한 뒤 《성종실록(成宗實錄)》을 편찬하게 되었는데, 그 때의 편찬책임자는 이극돈(李克墩)으로 이른바 훈구파(勳舊派)에 속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김일손의 사초 중에 이극돈의 비행(非行)이 기록되어 있어 김일손에 대한 앙심을 품고 있던 중, 김종직의 ‘조의제문’을 사초 중에서 발견한 이극돈은 김일손이 김종직의 제자임을 기화(奇貨)로 하여 김종직과 그 제자들이 주류(主流)를 이루고 있는 사림파(士林派)를 숙청할 목적으로, ‘조의제문’을 쓴 김종직 일파를 세조에 대한 불충(不忠)의 무리로 몰아 선비를 싫어하는 연산군을 움직여, 큰 옥사(獄事)를 일으켰다. 

 

  이것이 무오사화(戊午史禍)인데, 그 결과로 김종직은 부관참시(剖棺斬屍:이미 죽은자를 무덤에서 다시 관을 꺼내어 시신을 다시 한번 죽임)를 당하였고, 사림파 김일손 ·권오복(權五福) ·이목(李穆) ·허반(許盤) ·권경유(權景裕) 등은 선왕(先王)을 무록(誣錄)한 죄를 씌워 죽이고, 정여창(鄭汝昌) ·강겸(姜謙) ·이수공(李守恭) ·정승조(鄭承祖) ·홍한(洪澣) ·정희랑(鄭希良) 등은 난을 고하지 않은 죄로, 김굉필(金宏弼) ·이종준(李宗準) ·이주(李胄) ·박한주(朴漢柱) ·임희재(林熙載) ·강백진(姜伯珍) 등은 김종직의 제자로서 붕당을 이루어 조의제문의 삽입을 방조한 죄로 귀양보냈다.

  

김종직(金宗直)  
 1431(세종 13)∼1492(성종 23). 조선 초기의 문신,성리학자. 본관은 선산(善山). 자는 계온(季昷). 호는 점필재(佔畢齋). 시호 문충(文忠). 밀양출신.

영남학파의 종조이며, 그가 생전에 지은 조의제문이 그가 죽은 후인 1498년(연산군4) 무오사화가 일어나는 원인이 되었다. 그는 부관참시를 당하였으며, 많은 제자가 죽음을 당하였다.

아버지는 사예 숙자(叔滋)이고, 어머니는 밀양박씨로 사재감정(司宰監正) 홍신(弘信)의 딸이다.
1453년(단종 1)에 진사가 되고, 1459년(세조 5) 식년문과에 정과로 급제, 사가독서(賜暇讀書)하고 1462년 승문원박사로 예문관봉교를 겸하였다.
이듬해 감찰이 된 뒤 경상도병마평사·이조좌랑·수찬·함양군수 등을 거쳐 1476년 선산부사가 되었다.
1483년 우부승지에 올랐으며, 이어서 좌부승지·이조참판·예문관제학·병조참판·홍문관제학·공조참판 등을 역임하였다.
고려말 정몽주(鄭夢周)·길재(吉再)의 학통을 이은 아버지로부터 수학, 후일 사림의 조종이 된 그는 문장·사학(史學)에도 두루 능하였으며, 절의를 중요시하여 조선시대 도학(道學)의 정맥을 이어가는 중추적 구실을 하였다.
어려서부터 문장에 뛰어나 많은 시문과 일기를 남겼으며, 특히 1486년에는 신종호(申從濩) 등과 함께 《동국여지승람》을 편차(編次)한 사실만 보더라도 문장가로서의 면모를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무오사화 때 많은 저술들이 소실되었으므로 그의 진정한 학문적 모습을 이해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후일 제자 김일손(金馹孫)이 사관으로서 사초에 수록, 무오사화의 단서가 된 그의 〈조의제문 弔義帝文〉은 중국의 고사를 인용, 의제와 단종을 비유하면서 세조의 왕위찬탈을 비난한 것으로, 깊은 역사적 식견과 절의를 중요시하는 도학자로서의 참모습을 보여주었다고 하겠다.
정몽주·길재 및 아버지로부터 전수받은 도학사상은 그의 제자인 김굉필(金宏弼)·정여창(鄭汝昌)·김일손·유호인(兪好仁)·남효온(南孝溫)·조위(曺偉)·이맹전(李孟專)·이종준(李宗準) 등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특히, 그의 도학을 정통으로 이어받은 김굉필이 조광조(趙光祖)와 같은 걸출한 인물을 배출시켜 그 학통을 그대로 계승시켰다.
이처럼 그의 도학이 조선조 도통(道統)의 정맥으로 이어진 것은 〈조의제문〉에서도 나타나듯이 그가 추구하는 바가 화려한 시문이나 부·송 등의 문장보다는 궁극적으로 정의를 숭상하고, 시비를 분명히 밝히려는 의리적 성격을 지닌 것이기 때문에 이를 높이 평가하였던 때문이다.
세조·성종대에 걸쳐 벼슬을 하면서 항상 정의와 의리를 숭상, 실천하였는데, 이와같은 정신이 제자들에게 전해졌고, 실제로 이들은 절의를 높이며 의리를 중히 여기는 데 힘썼다. 이러한 연유로 자연히 사림학자들로부터 존경받는 인물이 되었고, 당시 학자들의 정신적인 영수가 되었다.
이들 사림들이 당시 훈척계열(勳戚系列)에 의하여 빚어지는 비리와 비도를 비판하고 나서자, 이에 당황한 훈척계열인 유자광(柳子光)·정문형(鄭文炯)·한치례(韓致禮)·이극돈(李克墩) 등이 자신들의 방호를 위해 1498년(연산군 4)에 무오사화를 일으켰다. 그 결과 많은 사림들이 죽거나 귀양을 가게 되었고, 생전에 써둔 〈조의제문〉으로 빚어진 일이라 그도 부관참시(剖棺斬屍)를 당하였다.
그뒤 중종반정으로 신원되었으며, 밀양의 예림서원(藝林書院), 선산의 금오서원(金烏書院), 함양의 백연서원(柏淵書院), 김천의 경렴서원(景濂書院), 개령의 덕림서원(德林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점필재집》·《유두류록 遊頭流錄》·《청구풍아 靑丘風雅》·《당후일기 堂後日記》 등이 있으며, 편저로 《일선지 一善誌》·《이존록 #이23尊錄》·《동국여지승람》 등이 전해지고 있으나, 많은 저술들이 무오사화 때 소실된 관계로 지금 전하는 것은 그렇게 많지 않다. 시호는 문충(文忠)으로, 한때 문간(文簡)으로 바뀌었다가 숙종 때에 다시 환원되었다.  
참고문헌 : 世宗實錄, 成宗實錄, 燕山君日記

 

사초(史草) : 공식적 역사편찬의 자료가 되는 기록. 

주로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 실록 편찬의 자료를 가리키는 말로서, 사관이 직무상 개별적으로 비밀히 작성한 국정 기록을 가리키는 말이지만 때로는 그때그때의 국가 정사[時政]에 대한 기록을 모은 시정기를 뜻하였으며, 넓게는 실록 편찬의 모든 자료를 의미하기도 하였다.

삼국시대에도 국가 역사가 편찬되었으므로 그 자료가 되는 넓은 의미의 사초가 있었겠지만 제도화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고려시대에는 초기에 사관(史館:春秋館)이 설치되어 실무자인 직사관(直史館) 4명이 시정기를 작성하게 되어 있었으나 자세한 사정은 전해지지 않는다. 조선시대에도 춘추관의 사관이 작성한 기록을 바탕으로 실록을 편찬한다는 점은 고려시대와 마찬가지였으나, 고려 귀족제 사회가 극복되고 관료체제가 정비됨에 따라 역사편찬과 사초의 의미가 더욱 중요해졌다. 춘추관 관원은 모두 겸직이었으며, 실질적으로 예문관 봉교(奉敎)·대교(待敎)·검열(檢閱) 등 평상시의 사관이 역사 자료를 기록하였다.

 

좁은 의미의 사초는 봉교 이하 8명의 사관이 교대로 궁중에 숙직하면서 조정의 모든 행사와 회의에 참여하여 정사의 잘잘못과 국왕의 언동, 인물의 선악 등을 일정한 형식을 따라 기록한 것이다. 2부를 작성하여 1부는 임금이 죽은 후 정해진 시간 내에 춘추관에 제출하고, 1부는 개별적으로 보관하였다. 시정기는 정부 각 기관의 공문서를 사관이 종합정리한 것으로서, 매달 1책 또는 그 이상으로 묶어 춘추관에 보관하였다. 사초는 철저히 비밀에 붙여져 국왕을 포함한 누구도 볼 수 없게 되어 있었다. 새 국왕이 즉위하여 선왕대의 실록을 편찬할 때 춘추관에 모아 자료로 이용하였으며 작업이 끝나면 실록 초고본들과 함께 물에 풀어 기록을 없애고 종이를 재생하였다(洗草).

 

국왕을 정점으로 하는 국정의 모든 일이 기록되어 역사편찬의 자료가 된다는 점은 기록과 평가의 집중적인 대상이 되던 국왕에게 현실적으로 큰 제약을 가했을 것이다. 특히 조선 중기 이후 사족들의 권한 강화는 강력한 언론권과 더불어 이 제도에 힘입은 바 크다고 판단된다. 예를 들어 조선 중기에 국왕의 정사는 승정원 가주서와 예문관 검열이라는 복수기관, 복수인물에 의해 기록되고 있었을 뿐 아니라, 사초를 작성하기 위해 사관은 국왕에게 올라오는 모든 소차와 장계를 먼저 볼 수 있었으며 왕의 비답이 내려진 정부 행정의 모든 문서를 열람할 수 있었다.

 

현종이 언관과 벌인 극단적인 대립 상황을 기록하지 말 것을 명령하였을 때 예문관 검열은 즉석에서 왕명의 부당함을 밝히고 그 명령을 둘러싼 논란까지 모두 기록하였다. 그러한 기록들이 모두 사초가 되었다. 정치적 의미가 지대하였으므로 연산군대에 무오사화(戊午士禍)가 일어날 때는 김종직(金宗直)이 작성한 사초가 결정적인 빌미가 되기도 하였는데 이때의 연산군마저도 다만 문제되는 부분만을 뽑아 볼 수 있었을 뿐이다. 

 

계유정난 (癸酉靖難) : 1453년에 수양대군이 단종의 보좌세력인 원로대신 황보인·김종서 등 수십명을 살해·제거하고 정권을 잡은 사건.

 

1453년(단종 1)에 수양대군(首陽大君)이 단종의 보좌세력인 원로대신 황보인(皇甫仁)·김종서(金宗瑞) 등 수십명을 살해·제거하고 정권을 잡은 사건. 1452년 5월에 문종이 재위 2년 만에 죽자 단종이 13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였다. 어린 임금이 즉위하게 되면 궁중에서는 가장 서열이 높은 후비(后妃)가 수렴청정을 하는 것이 일반적인 예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당시 궁중 사정이 그렇지 못하여 모든 정치적 권력을 문종의 유명을 받은 이른바 고명대신(顧命大臣)인 황보인·김종서 등이 잡고 국왕보필의 임무를 수행하였다.

 

 한편 세종과 소현왕후 사이에 출생한 적자는 문종 외에 수양·안평(安平)·임영(臨瀛)·광평(廣平)·금성(錦城)·평원(平原)·영용(永庸)의 일곱 대군이 있었다. 그 중 둘째인 수양대군과 셋째인 안평대군이 서로 세력경쟁을 벌였다. 수양대군은 처음부터 김종서 등이 안평대군과 정치적으로 연결하는 것을 경계하였다.

수양대군이 거사를 계획한 때는 단종이 즉위하고 2개월이 지난 그 해 7월 무렵으로, 이 때부터 수양대군은 실제로 대권에 야심을 품고서 권람(權擥)·홍윤성(洪允成)·한명회(韓明澮) 등을 심복으로 만들고 있었다. 수양대군의 거사계획은 그가 1453년 4월 명나라에서 돌아오자 급진전되었다. 신숙주를 막하에 끌어들이고, 심복무사들을 양성하여 마침내 10월 10일 거사를 단행하여 김종서 등 정적들을 제거하였다. 이로써 수양대군은 2년 뒤에 단종의 선위(禪位)를 받아 즉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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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노래] 태평무

                                      -주현미-

 

월악산 깊은골에 밤새가 울어 갯창에 비친달이 너무 �구나

꽃그림자 내려밟고 님 떠날 때 울 밑에 귀뚜리도 슬피 울었지

아 나그네 나그네 사연 사무친 옛 생각에 눈물 삼키며

재너머 강건너 흘러가는 나그네

 

월악산 영마루에 달이 떠오르면 들려오는 피리소리 애달프고나    

떠난님 그리워 잠못 이룰 때 추풍에 지는 낙엽 함께 울었지

아 나그네 나그네 사연 한서린 옛 생각에 가슴 적시며 

강너머 전송길로 사라지는 나그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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