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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거친호흡 몰아쉬며 ^^ 굽이치는 산맥넘어 손의 자유, 발의 자유, 정신의 자유를 찾는다. 기억은 희미해지기에 이곳에 기록을 남긴다
문화문학음악

다시 볼수없는 숭례문과 수문장 교대식

by 한국의산천 2008. 2. 11.

다시 볼 수 없는 숭례문과 수문장 교대식  [답사·촬영.   한국의산천 ] 

화재가 발생한 2008년 2월 10일은 문화 국치일(國恥日)

 

화재상황

불은 2월10일 오후 8시 40~50분 사이에 발생 10일 자정쯤 건물 천장에서 화염이 치솟았고, 11일 오전 1시경 2층 누각이 붕괴되기 시작했다. 불이 난지 5시간 뒤인 오전 1시50분부터 석반을 제외한 2층 누각 전체와 1층 누각 대부분이 무너졌다.  

 

서민들이 기차를 타고 서울로 상경했을 때 광화문보다 더 먼저 친숙하게 다가온 서민들의 서울 입성 통로 숭례문(남대문)

어찌 이런일이...안타까운 일입니다 조상이 물려준, 610년의 역사와 온갖 풍파를 견디어 낸 고귀한 문화재가 한 순간에 잿더미로 변했습니다. 너무 많이 소실되어 원래의 자재가 원형대로 남아있지 않아 복원은 어려울것 입니다 단지 재현을 한다면 모를까...

 

아래 숭례문(남대문) 수문장 교대식은 '하이서울 페스티벌'이 열리던 2006년 5월 7일 일요일 10시 촬영한 이미지입니다.  

 

국보1호 숭례문(崇禮門·南大門) 

숭례: 예(禮)를 받든다.

조선 전기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는 숭례문은 지어진 연대를 정확히 알 수 있는 서울 성곽 중에서 제일 오래된 목조 건축물로서 태조 4년(1395)에 짓기 시작하여 태조 7년(1398)에 완성하였다.

 

▲ 국보1호 숭례문의 수문장 교대식 ⓒ  2008 한국의산천 
 

서울 숭례문은 조선시대 서울 도성(都城)을 둘러싸고 있던 성곽의 정문이며, 남쪽에 있다고 해서 남대문(南大門)이라고도 부른다. 현재 서울에 남아 있는 목조 건물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태조 4년(1395)에 짓기 시작하여 태조 7년(1398)에 완성하였다.

'숭례문'이란 이름은 조선의 개국 공신 정도전(鄭道傳)이 지었다. 인의예지(仁義禮智)를 따서 동대문은 흥인문(興仁門), 서대문은 돈의문(敦義門), 남대문은 숭례문(崇禮門)이라고 지은 것이다.(북문 숙정문) '태조실록' 5년 9월조는 '속칭 남대문'이라고 적어 남대문이 일제의 비칭(卑稱)이 아님을 말해준다. 

▲ 서울역사 (2006년 12월 17일 일요일 9시 촬영) ⓒ 2008 한국의산천 

승용차와 고속버스가 발달하지 않았던 3~40년전만해도 대망의 꿈을 안고 기차를 타고 오면 제일 먼저 서울역사에 대해 놀라움을 금치못한다. 무사의 투구처럼 생긴 웅장한 르네쌍스 양식의 돔형 지붕, 수많은 사람과 차량, 빌딩이 시선을 앞도한다.  

서울에 도착하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오는 서울역사와 남산 그리고 숭례문(남대문),광화문이 아니었던가? 

 

서울역사 서울驛舍 사적 제284호(지정연월일 : 1981년 9월 25일)

소재지 : 서울특별시 중구 봉래동 2가 122 

역사: 1922년 6월 착공, 1925년 9월 준공 설계자:쯔카모토 야스시(塚本靖) 
규모·양식:지하 1층 지상 2층,르네상스양식 

서울역사의 원래 명칭은 경성역(京城驛)이다. 한국의 철도 역사는 경인선(京仁線)에서 시작된다. 경인선은 일본인 회사인 경인철도합자회사에 의해 1899년 4월 착공되어 같은 해 9월 18일에 인천~노량진 33.2km 구간을 개통하였다. 이어 1900년 8월 8일 한강철교(漢江鐵橋)가 개통되면서, 같은 해 서울 남대문역까지 기차가 들어오게 되었다. 1900년 겨우 10평짜리 목조 바라크 건물을 염천교 아래 논 가운데에 대충 짓고 '남대문정거장(南大門停車場)'이라 불렀다. 이것이 경성역의 시초이며, 이 역사는 1910년 경성역으로 개명되었다. 

 

경성역은 "한반도의 현관이며, 식민지 경영의 관문" 역할이 부여되었다. 
준공 당시 서울역사는 초대형 건축물이었으며, "동양 제1역은 도쿄역, 동양 제2역은 경성역"으로 간주할 정도로 경성역은 일본 도쿄역과 비견되는 규모였다.
이 건물 1층은 대합실, 2층은 귀빈실과 식당(그릴), 그리고 지하는 역무실로 사용되었다. 승강장은 지하에서 연결되었다. 1층 대합실 중앙에는 큰 홀이 있고, 그 상부 지붕에는 비잔틴풍의 돔(dome)을 올렸다. 그 돔의 측면 반원형 아치 창으로부터 중앙홀 내부로 자연 광선을 끌어들여 밝은 홀 공간을 조성하였다. 
이 건물은 거대한 규모, 풍부한 장식과 정교한 상세(details)로, 조선총독부 청사와 함께 일제가 조선을 착취하기 위해 건립한 대표적인 건축이다. 그리고 역사 그릴은 문화 예술인들이 모여 작품을 논하고, 많은 작품을 창작한 장소로도 유명하였다.

경성역은 1946년 서울역으로 개명되었다. 1950년 한국 전쟁으로, 많은 부분이 파괴되었으며, 수리 과정에서 중앙홀 천창(天窓)이 훼손되었다. 1958년 1월 기존 역사 남측에 새마을호 대합실이 증축되었다. 1988년 역사 현대화와 여객 편의 제공을 위하여 ‘서울역 선상대합실 공사’가 1988년 준공되어, 역사의 주 기능인 대합실 공간은 이 선상역사(船上驛舍)로 이관되었다.  

▲ 청운의 꿈을 품고 서울역에서 제일 먼저보이는 것은 바로 앞에 보이는 남산 그리고 남대문이 보인다. ⓒ 2008 한국의산천   

▲ 국보 제 1호 숭례문 (2006년 5월 7일 일요일 10시 촬영)  ⓒ 2008 한국의산천  

서울 숭례문(남대문) 서울崇禮門(南大門) 지정번호 : 국보 제1호(지정연월일 : 1962년 12월 20일)

소재지 : 서울특별시 중구 남대문로 4가 29
시대: 조선 태조 5년(1936) 
규모·양식: 1동 정면 5칸ㆍ측면 2칸, 건평 53.79평, 2층의 우진 각 지붕 다포집 (재료:석조 기단, 목조)

 
서울 숭례문은 조선시대 서울 도성(都城)을 둘러싸고 있던 성곽의 정문이며, 남쪽에 있다고 해서 남대문(南大門)이라고도 불렀다. 현재 서울에 남아 있는 목조 건물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태조 4년(1395)에 짓기 시작하여 태조 7년(1398)에 완성하였다.

지금 있는 건물은 세종 29년(1447)에 고쳐 지은 것인데 1961~1963년 해체ㆍ수리하는 과정에서 성종 10년(1479)에도 큰 공사가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조선시대에는 서울성곽이 동쪽의 남산에서 내려와 오늘날의 힐튼호텔 앞을 지나 숭례문에 연결되었고, 서쪽에서는 서소문으로부터 상공회의소 앞을 지난 성벽이 숭례문에 직접 연결 되어있었기 때문에, 사람과 가축은 이 성문을 통하지 않으면 도성을 출입할 수 없었다. 

▲ 하이 서울 페스티벌 당시 수문장 교대식 ⓒ 2008 한국의산천  

1962년 숭례문을 중수할 때 나온 숭례문 상량일자를 묵서(墨書)한 대들보가 세개 발견되었다. 첫째는 태조 때 창건 당시의 대들보요, 둘째는 세종 때 개수시의 대들보요, 셋째는 성종 때 개수시의 대들보이다. 창건 당시인 태조 때의 대들보에는 "홍무이십구년병자시월초지일상량(洪武二十九年丙子十月初之日上樑)"이라고 묵서되어 있으니, 홍무 29년은 태조 5년(1396)에 해당하므로 이 해 10월6일에 상량하고 2년 후인 태조 7년 2월 8일에 준공하였다. 따라서 숭례문은 태조5년에 창건하였고 2년 후에 다시 고쳐지었음을 알 수 있다.  

▲ 국보1호 숭례문(남대문)ⓒ 2008 한국의산천  

세종 4년(1422) 도성을 개축할 때에는 손을 대지 아니하고, 세종 30년(1448)에 개축하였다. 이때 개축한 이유는 숭례문이 기울거나 퇴락하여 개축하려고 한 것이 아니고, 지대가 낮아서 볼품이 없고 또 당시 유행하던 풍수지리설(風水地理說)에 구애되어 숭례문의 지대를 높여서 남산과 인왕산의 산맥에 연결시켜 경복궁이 포국을 아늑하게 형성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런 저런 사정으로 개축공사는 뒤로 미루어지다가 15년 후인 세종 29년(1447) 8월에 착공하였는데, 숭례문이 문루와 석문을 완전히 헐어내고 기지를 높게 돋우어 양쪽 산맥에 연결시킨 다음 그 위에 새로 석문을 쌓고 문루를 건축하였으므로, 보수나 중수가 아니라 완전한 개축이었다.1962년에 발견된 대들보 가운데 "정통십삼년무진삼월십칠일손시입주상량(正統十三年戊辰三月十七日巽時立柱上樑)"이라고 묵서한 것이 곧 이때의 대들보로서, 세종 30년 3월 17일에 상량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그 후 32년이 지난 성종10년(1479)에 이르러 숭례문이 기울어졌기 때문에 또다시 개축하였다. "성화십오년기해사월초이일묘시입주상량成化十五年己亥四月初二日卯時立柱上樑)"이라고 묵서한 대들보에 의하여 성종 10년 4월 2일에 기둥을 세우고 상량한 것을 알 수 있다.   

▲ 홍예문 천장에는 청룡과 황룡이 역동적이며 화려한 자태를 뽐내고 있다. ⓒ 2008 한국의산천

숭례문이란 이름은 조선의 개국 공신 정도전(鄭道傳)이 지었다. 인의예지(仁義禮智)를 따서 동대문은 흥인문(興仁門), 서대문은 돈의문(敦義門), 남대문은 숭례문(崇禮門)이라고 지은 것이다.(북문 숙정문) '태조실록' 5년 9월조는 '속칭 남대문'이라고 적어 남대문이 일제의 비칭(卑稱)이 아님을 말해준다. 세종 29년(1447)과 성종 10년(1479)에 중수했다는 기록이 있다.

▲ 홍예문에서 바라 본 城 바깥 세상. 멀리 서울역사가 보인다 ⓒ  2008 한국의산천 

▲ 숭례문 수문장 교대식 ⓒ  2008 한국의산천  

▲ 국보1호 숭례문 수문장 교대식 ⓒ  2008 한국의산천   

 

국보와 보물의 차이 

국보

국보지정과 보물지정의 차이점은 국보는 보물의 가치가 있는 것 중에서 역사적 ·학술적 ·예술적 ·기술적 가치가 가장 으뜸인 것으로, 제작연대가 오래되고 시대를 대표하거나 가장 우수하며 특이한 것으로 역사적 인물과 관련이 있는 문화재이다. 

국보란 역사적·학술적·예술적·기술적인 가치가 큰 문화재로서 문화재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지정한 문화재로서 보물로 지정될 가치가 있는 것 중에 제작연대가 오래 되고 시대를 대표하거나, 유례가 드물고 우수하며 특이하거나, 역사적 인물과 관련이 있는 것을 지정한다.

 

보물

목조건축·석조건축·전적(典籍)·서적·고문서·회화·조각·공예품·고고자료(考古資料)·무구(武具) 등 유형문화재(有形文化財) 중에서 역사적·학술적·예술적·기술적 가치가 큰 것을 문화재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정부가 지정한 문화재로서 보물은 관보(官報)에 고시(告示)된 날로부터 효력을 발생한다.  

한편 국보처럼 시대를 대표하거나 특이한 것이 아니더라도 또 역사적 인물과 관련이 없더라도, 일반적인 지정의 수준에 이르면 보물이 된다. 그래서 보물의 수는 국보보다 많고 동형의 것들이 많다.

보물로 지정되면 문화재보호법에 의하여 국가의 보호를 받는다. 보물 지정의 연혁을 보면 일제강점기에는 '조선 보물·고적·명승천연기념물 보존령'에 의해 지정되어 1955년 이전에는 유형문화재는 모두 보물로 지정되어 있었다. 이를 같은 국보(國寶)로 명칭을 바꾸었고 1962년 문화재보호법이 제정 공포되어 1963년 재지정하면서 728점의 지정문화재 중 386점을 보물로 지정하였다. 

2001년 11월 현재 지정된 보물은 1,315점(해제 문화재 제외)에 이르고 있다.

 

'崇禮門'이라는 현판은 '지봉유설'에 의하면 관악산의 火氣를 누르기 위하여 세로로 양녕대군이 썼다고 한다.ⓒ  2008 한국의산천   

서울 숭례문은 조선시대 서울 도성(都城)을 둘러싸고 있던 성곽의 정문이며, 남쪽에 있다고 해서 남대문(南大門)이라고도 부른다. 현재 서울에 남아 있는 목조 건물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태조 4년(1395)에 짓기 시작하여 태조 7년(1398)에 완성하였다

▲ 당분간 다시 볼수없는 국보1호 숭례문 ⓒ  2008 한국의산천   

숭례문은 돌을 높이 쌓아 만든 축대 가운데에 무지개 모양의 홍예문을 두고, 그 위에 정면 5칸ㆍ측면 2칸 크기로 지은 누각형 2층 건물이다. 
'崇禮門'이라는 현판은 '지봉유설(芝峯類說)'에 의하면 관악산의 화기(火氣)를 누르기 위하여 세로로 양녕대군(讓寧大君:세종대왕의 兄)이 썼다고 한다. 이 문은 임진왜란 때 성내의 대부분 건물이 소실된 가운데 불과 몇 채 안 남은 건물 중의 하나로 비교적 고려말 이래의 다포(多包)집 양식을 충실히 남기고 있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숭례문 주변의 성벽이 결정적으로 훼손된 것은 광무(光武) 3년(1899) 서울 시내 전차(電車) 노선 공사와 개통으로 인하여 동대문ㆍ서대문이 주변과 함께 헐리게 되면서부터이다. 더욱이 일제강점기 도시계획이라는 미명하에 파괴가 가속화되었고, 특히 숭례문 남쪽으로부터 남산이 정상에 이르는 성벽은 남산광장에 일제가 소위 조선신궁(朝鮮神宮)을 지으면서 전연 찾아볼 수 없다. 다만 현재는 남산광장에서 정상에 이르는 도보 길에 일부가 남아 있을 뿐이다. 

▲ 불타는 국보1호 숭례문(chosun.com 참고) ⓒ 2008 한국의산천  

▲ 폭격을 맞은 듯 누각 1·2층이 완전히 전소되어 처참하게 내려 앉은 국보1호 숭례문(chosun.com 참고) ⓒ 2008 한국의산천 

▲ '예를 받든다'는 뜻을 지닌 숭례문 편액. 철거과정에서 바닥으로 떨어지며 한쪽 귀퉁이가 떨어져 나간 숭례문 편액 ⓒ  2008 한국의산천   

'崇禮門'이라는 현판은 '지봉유설'에 의하면 관악산의 화기(火氣)를 누르기 위하여 세로로 양녕대군(讓寧大君)이 썼다고 한다.   

 

양녕대군(讓寧大君 .1394~1462) 
세종의 兄 양녕대군(讓寧大君)은 태종 방원의 장자로서 일찍이 세자로 책봉되어 당연히 왕위를 물려받았어야 하는데 궁중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하고 태종의 강압으로 폐위되어 임금 자리를 동생 충녕대군(세종)에게 양보하고 그뒤 전국을 누비며 풍류를 즐기며 일개 사인으로 여생을 마쳤다.

※ 태종의 둘째아들 효령대군: 태종께서 아우 충녕대군(세종대왕)에게 성덕이 있음을 알고 그의 학문과 재덕을 숨기면서 왕위를 사양하였다.


양녕(讓寧)이란 글자 그대로 '양보해서 편안하다'라는 뜻을 갖고 있는데 과연 양녕은 왕위계승을 스스로 포기한 것인지, 아니면 세종이 유덕하여 아버지 태종의 마음이 차츰 세종에게로 기울어지는 것을 알고 눈물을 머금고 미친척하며 방탕한 생활을 하여 왕위 문턱에서 쫓겨난 것인지 역사가들은 아직도 정답을 내지 못하고 있다.


양녕대군의 이름은 제(褆). 자 후백(厚伯). 시호 강정(剛靖). 태종의 장남. 세종의 형. 어머니는 원경왕후(元敬王后) 민씨(閔氏). 1404년(태종 4)에 세자로 책봉되고 1407년 김한로의 딸과 혼인하였다.그러나 유교적 교육과 엄격한 궁중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하고, 품행이 자유분방하여 잦은 문제를 일으켰다. 이에 유정현 등이 상소를 하여, 1418년 세자에서 폐위되고 양녕대군에 봉해졌으며, 태종의 셋째 아들인 충녕대군(세종·忠寧大君)이 세자로 책봉되었다. 그는 이때부터 전국을 누비며 풍류와 더불어 일생을 마쳤고, 세종대왕(충녕대군)은 항상 따뜻한 배려를 아끼지 않아 형제의 우의가 지극하였다.

 

태종이 양녕을 세자로 책봉한 뒤 양녕은 세자로 있을 때 성색(聲色, 노래와 여자)에 빠져 학업에 힘쓰지 않았다. 세자가 글읽는 공부방을 서연(書筵)이라 했는데, 양녕은 서연 마당에 새덫을 놓고 새가 날아오기만 기다렸다. 선생과 마주 앉아 공부할 때도 새가 덫에 걸리기만을 기다렸고 걸리면 책을 보다가도 급히 뛰어 내려 갔다고 한다.

양영의 사부(師傅)는 계림군 이래(李來)였는데 양녕에게 엄격했다. 그래서 양녕이 선생 이래를 마치 원수같이 여겨 '이래만 보면 머리가 아프고 마음이 산란하다. 꿈속에서라도 이래가 보이면 그 날은 반드시 감기가 든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양녕이 또한 활을 잘 쏘았던 것도 사실이다. 태종은 대궐 안에 감나무를 심어 놓고 가을에 감이 달리는 것을 구경하였는데 자주 까마귀가 날아와서 찍어 먹는지라 신하들에게 활 잘 쏘는 사람을 찾아 까마귀를 쫓으라고 시켰다. 좌우에서 임금을 모셨던 무사들이 많았으나 '마땅한 사람이 없습니다. 오직 세자라면 잡을 수 있을 것입니다'고 하였다. 태종은 세자가 미워 오랫동안 보지 않다가 세자가 활을 쏘아 까마귀를 맞히는 것을 보고 비로소 빙그레 웃었다고 전한다.

 

양녕대군(태종의 장자)이 물러난 뒤 세종(태종의 삼남)이 형을 미워하거나 의심했다면 아무리 세종이 현군이라 할지라도 영낙없이 약사발을 받아 목숨을 잃었을 것인데 세종의 치세 32년간을 무난하게 살아 남았다. 세종의 덕인지 아니면 양녕의 피나는 노력, 즉 미친 척한 행실 때문인지는 모르나 아슬아슬하게 세월을 넘기고 세종이 죽고 조카 세조가 등극하게 된 뒤에 왕자와 대신이 많이 죽임을 당하였으나 양녕대군은 능히 지혜로 스스로를 보존하였고 세조 또한 양녕을 의심하지 않고 높이 대우받으며 69세까지 살았다.

 

분명한 것은 3대의 군주를 거치며 마음에도 없는 행동을 하면서 살아야만 했던 그 세월은 분명 순탄치만은 않았던 수모와 인내와 집념의 한평생이었을것이다. 아버지 태종에게는 심지어 짐승 같은 놈이란 욕까지 먹었고 동생 세종 때는 그를 시기하는 신하들의 모함을 이겨내야만 했다. 또 조카인 세조에게는 마음에도 없는 아첨을 하면서 늙은 목숨을 보존하여야 했다. 양녕이 69세까지 장수하였다고는 하나 결코 편안한 일생이 아니었던 것이다.

 

양녕대군은 시(詩)에 능하고 글씨를 잘 써, 서울 남대문의 편액 숭례문(崇禮門)은 그의 필적이라고 한다. 세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가족으로는 김한로의 딸 사이에서 3남 4녀를 두었으며, 첩에게서 7남 11녀를 낳았다.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양녕대군의 후손이다. 

▲ 즐거운 설 명절 끝나자 참담한 월요일을 맞았습니다.ⓒ 2008 한국의산천

'든자리는 몰라도 난자리는 표난다'는 말이 있듯이 쉽게 볼 수 있었던 그 숭례문이 다시금 그립다.  

화재로 소실된 문화재가 다시 복원되더라도 보물지정이 해제되는 경우가 있었기에(쌍봉사 대웅전, 낙산사 동종은 복원 후 보물지정 해제) 일제 잔존 역사 청산-조선총독부에 의해 조선 고적(古蹟) 제1호로 지정- 이라는 명제하에 국보1호에 대한 논란이 끊이지 않았던 숭례문이 이번 화재로 소실돼어 바라 보는 이들의 시선은 안타깝고 착찹하기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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