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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거친호흡 몰아쉬며 ^^ 굽이치는 산맥넘어 손의 자유, 발의 자유, 정신의 자유를 찾는다. 기억은 희미해지기에 이곳에 기록을 남긴다
MTB등산여행

남한산성

by 한국의산천 2008. 1. 13.

남한산성 [답사 2008년 1월 13일 일요일(흐림·영하 6도) 집에서 05:00 출발 한국의산천 ]    

(겨울에는 아이젠 필수입니다 제~발. 많은 분들이 절절매고 미끄러지는것을 보았습니다) 

 

지금으로 부터 372년전 병자년(1636년·인조14년) 그해 겨울 이곳 남한산성에는 갈 수 없는 길과 가야 하는 길이 하나로 포개져 있었다.

죽어서 살것인가, 살아서 죽을 것인가.  

 

남한산성

병자호란 당시 조선 16대 왕인 인조가 45일간을 머물면서 국사를 의논하고 군사를 격려하다가 삼전도에 나아가서 치욕의 삼배구고두례(三拜九叩頭禮 : 세번 절하고 한번 절 할때마다 머리를 세번 조아리는 禮) 를 했던 잊을 수 없는, 아니 잊지못할 굴욕의 역사가 남아있는 현장.   

 

답사코스

城은 밟아줘야 단단해진다. 동문에서 성벽을 따라 ~ 남문~ 수어장대~ 서문 ~ 북문~ 동문 ( 성벽일주: 4명 약 3시간 30분)   

 

 

ⓒ글·사진 한국의산천(글의 일부는 김훈의 '남한산성'에서 인용했습니다) 

山行과 답사는 渴望되고 이어 준비된다.  

 

▲ 김훈著 남한산성 ⓒ 한국의산천 

가끔 오르던 곳이지만 남한산성을 읽고 유월 그리고 또 한 여름에 다시 남한산성을 한바퀴 돌았다. 그리고 그때 말했다. 그 당시처럼 추운 한 겨울 다시 이길을 찾으리라고... 그러나 오늘 역시 그때보다는 비교할수없을 만큼 따듯한 겨울이었을 것이다.   

 

얼음이 간간이 얼은 한강을 건너기 위해 뱃사공이 길 안내자가 되어 왕을 인도하고, 적에게 이로운 자가 될까 두려워 뱃사공의 목을 베어버린다. 그리고 그의 딸을 다시 산성안에서 만나 보살피는 비극. 그것이 바로 전쟁이다.  

 

소설 남한산성. 

병자호란으로 인하여 성안에 갇힌 임금과 신하, 신하끼리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기 위한 인간적인 미묘한 갈등, 그리고 백성들간에 일어나는 사건을 그린 소설로 김훈 특유의 글솜씨가 독자의 가슴을 죄게하고 실전을 보는듯한 현장감을 느끼게 한다. -한국의산천-     

 

1636년 청나라는 정묘약조에서 설정한 형제관계를 폐지하고 새로운 군신관계를 맺으며 공물과 군사 지원을 요청하였으나 조정에서는 이를 거부하고 명나라와 의리를 지키기 위해 청과 화친을 끊자, 1636년 12월 1일 청태종은 12만명의 대군을 이끌고 질풍노도처럼 밀고 내려왔다.
이에 다급한 조정에서는 별 준비없이 종묘 사직의 신주만 챙켜들고 강화도로 피신을 하려 하였으나 날이 추워서 눈길에 말(馬)이 미끄러지고, 적이 파주에 당도하자 하는 수 없이 방향을 틀어 얼음이 얼어있는 송파나루를 건너 남한산성으로 피신하게 된다. 
  

 

이오면 성은 밟혀죽고, 칸이 오지 않으면 성은 말라 죽는다. 성이 열리는 날이 곧 끝나는 날이고, 열려서 끝나나 밟혀서 끝나나 깨져서 끝나나, 말라서 열리나 깨져서 열리나 다름이 없다.  ※  칸(Khan) : 중앙아시아 제국 통치자의 존칭. 

 

병자호란의 약사 

1636년 4월 후금의 태종은 황제를 칭하고 국호를 청(淸)이라고 고쳤으며, 조선이 강경한 자세를 보이자 왕자·대신·척화론자(斥和論者)를 인질로 보내 사죄하지 않으면 공격하겠다고 위협하였다. 이에 조선은 청나라의 요구를 계속 묵살하였다.

12월 2일 이런 조선의 도전적 태도에 분개한 청나라 태종은, 청·몽골·한인(漢人)으로 편성한 10만 대군을 스스로 거느리고 수도 선양(瀋陽)을 떠나, 9일 압록강을 건너 쳐들어왔다.
14일 개성(開城) 통과. 

14일 밤 인조도 강화로 피난하려 하였으나 이미 청나라 군에 의해 길이 막혀, 소현세자(昭顯世子)와 백관을 거느리고 남한산성으로 피신

16일 청나라 선봉군이 남한산성을 포위

그 다음해

1637년 1월 1일 태종이 도착하여 남한산성 아래 탄천(炭川)에 20만 청나라 군을 집결시켜, 성은 완전히 고립.
성내에는 군사 1만 3000명이 절약해야 겨우 50일 정도 지탱할 수 있는 식량이 있었고, 의병과 명나라 원병은 기대할 수 없었으므로 청나라 군과의 결전은 불가능하였다. 또한 성 밖에는 청나라 군이 무고한 백성들을 죽이고 노략질하기를 일삼으며, 어미는 진중(陣中)에 잡아놓고 그 아이들은 추운 길바닥에 버려 거의 모두 굶어죽고 얼어죽었다.

특히 병자년은 혹독한 추위가 오래 계속되어, 노숙(露宿)한 장수·군사들은 추위와 굶주림에 기진하여 병들고 얼어죽는 자가 늘어났다. 이러한 상황에서 성내에서는 최명길(崔鳴吉) 등 주화파(主和派)와 김상헌(金相憲) 등 주전파(主戰派) 사이에 논쟁이 거듭되다가, 강화론이 우세하여 마침내 성문을 열고 항복하기로 하였다. 

1월 30일 인조는 세자 등 호행(扈行) 500명을 거느리고 성문을 나와, 삼전도(三田渡)에 설치된 수항단(受降壇)에서 태종에게 굴욕적인 항례(降禮)를 한 뒤, 한강을 건너 환도하였다. 청나라는 맹약(盟約)에 따라 소현세자·빈궁(嬪宮)·봉림대군 등을 인질로 하고, 척화의 주모자 홍익한·윤집(尹集)·오달제(吳達濟) 등 삼학사를 잡아, 2월 15일 철군하기 시작하였다. 이로써 조선은 완전히 명나라와는 관계를 끊고 청나라에 복속하게 되었다.  

 ▲ 동문에서 출발전 아이젠 착용하기 ⓒ 한국의산천

동문에서 시계바늘 방향으로 성곽 따라 돌아서 다시 동문으로 돌아오기 출발! 

 ▲ 산성일주답사 등산로는 온통 눈길, 얼음길입니다.ⓒ 한국의산천

남한산성

경기도 광주시 중부면 산성리 남한산에 있는 조선시대의 산성으로, 1963년 1월 21일 사적 제57호로 지정되었다. 북한산성(北漢山城)과 더불어 서울을 남북으로 지키는 산성 중의 하나로, 신라 문무왕 때 쌓은 주장성(晝長城)의 옛터를 활용하여 1624년(인조 2)에 축성(築城)하였다.

<남한지(南漢志)>에 따르면, 원래 심기원(沈器遠)이 축성을 맡았으나 그의 부친상으로 인하여 이서(李曙)가 총융사(摠戎使)가 되어 공사를 시작하여, 1626년 7월에 끝마쳤다. 공사의 부역(賦役)은 주로 승려가 맡아 하였다. 4문(門)과 8암문(暗門)이 있으며 성안에는 관아(官衙)와 창고 등, 국가의 유사시에 대비하여 모든 시설을 갖추었고, 7개의 절까지 세웠다   

 

택리지를 보면 여주다음으로 광주가 소개되고 있다.  

여주 서쪽은 광주(廣州)로 석성산에서 나온 한 가지가 북쭉으로 한강 남쪽에 가서 고을이 형성되었으며 읍은 만 길 산꼭대기에 있다. 옛 백제 시조였던 온조왕이 도읍하였던 곳으로, 안쪽은 낮고 얕으나 바깥쪽은 높고 험하다. 성안은 험하지 않지만, 성 바깥 산 밑은 살기를 띠었다. 또 중요한 진(鎭)이므로 만약 사변이라도 있으면 반드시 전투가 벌어질 지형이다.


청나라 군사들이 처음 왔을 때 병기라고는 날(刀)도 대보지 못하였고, 병자호란때도 성을 끝내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인조가 성에서 내려온 것은 양식이 부족하고 강화가 함락 되었기 때문이다. - 택리지에서-  

 ▲ 추억의 연가ⓒ 한국의산천

▲ 추억의연가ⓒ 한국의산천 

제 집사람 뒤에는 풀러진 아이젠을 다시 묶어주는 평행선. 참 자상한 신랑이다. 내가 배워야할 부분이다 .

 ▲ 산성길은 미끄럽게 단단히 얼은 얼음과 눈길이다.ⓒ 한국의산천

▲ 추억의연가ⓒ 한국의산천 

 ▲ 비트(은거지)에서 나온 지리산 빨치산 같은 모습이라며 한참을 웃었다.ⓒ 한국의산천 

택리지의 기록처럼 남한산성은 광주,성남이요 성남하면 남한 산성이 떠오르는 곳이다. 남한 산성(사적 제 57호) 은 북쪽의 개성, 남쪽의 수원, 서쪽의 강화, 동쪽의 광주 등을 지키는 4대 외곽 가운데 동쪽에 자리한 성으로 북한산성과 함게 도성을 지키는 남부의 산성이다. 

 ▲ 동쪽으로 보이는 산릉ⓒ 한국의산천 

능선 아래로 이어져 있는 길도 겹친 산줄기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길은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것이며, 마음의 길을 마음 밖으로 밀어내어 세상의 길과 맞닿게 해서 마음과 세상이 한줄로 이어지는 자리에서 삶의 길은 열린다.

▲ 평행선· 추억의연가· 백여사 ⓒ 한국의산천  

▲ 한국의산천 · 추억의연가· 백여사 ⓒ 한국의산천  

▲ 눈길과 성벽은 나란히 이어지고...ⓒ 한국의산천  

▲ 동문을 출발하여 남문이라고 부르는 至和門에 도착했다.남한산성의 정문역할을 한다 ⓒ 한국의산천 

해 겨울,

갈 수 없는 길과 가야 하는 길은 둘이 아닌 하나로 포개져 있었다.

죽어서 살것인가, 살아서 죽을 것인가.  

1636년, 병자호란이 발발하자 예조판서 김상헌은 선전후화론(先戰後和論)를 강력히 주장하였고, 이조판서 최명길은 선화후전론(先和後戰論)을 내세우면서 서로의 대립각을 세웠다. 

 

김상헌의 목소리에 울음기가 섞여 들었다.
- 전하, 죽음이 가볍지 어찌 삶이 가볍겠습니까? 명길이 말하는 생이란 곧 죽음입니다. 명길은 삶과 죽음을 구분하지 못하고, 삶을 죽음과 뒤섞어 삶을 욕되게 하는 자입니다. 신은 가벼운 죽음으로 무거운 삶을 지탱하려 하옵니다.

최명길의 목소리에도 울음기가 섞여 들었다.
- 전하, 죽음은 가볍지 않사옵니다.만백성과 더불어 죽음을 각오하지 마소서. 죽음으로서 삶을 지탱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 을지언정, 굴복은 있을수 없다" 청음 김상헌과 " 복을 할지라도, 살아야만 한다" 지천 최명길. 두분의 개인적인 안위를 위해 그렇게 행동하지는 않았다. 나라와 백성을 위해 충신 두분 말의 표현은 달랐어도 마음에 담은 애국심 그뜻은 같지 않았을까 ?
  


마침내 최명길의 화청정책이 받아 들여져서 1937년 1월 30일 인조임금은 삼전도에서 청나라 칸앞에 무릅을 꿇게된다. 항복 문서를 작성하고 이후로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이기는 약 200여년간 청의 완전한 속국이 되었다. 한반도 안에서 성을 쌓거나 성을 보수 할 수 없었으며 군사시설을 만들수도 없었으며 수많은 공물과 여자와 포로를 바치고 살아야만 했다.

 

▲ 눈보라가 마룻바닥까지 들이치는 곳에 계신 인조임금 그리고 청음 김상헌과 지천 최명길 선조를 떠올리며. ⓒ 한국의산천 

남한산성의 남문에서 가까운 수어장대는 높은 위치에 목조건물로 우뚝 세워져 있으며 병자호란 당시 조선 16대 왕인 인조가 45일간을 머물면서 국사를 의논하고 군사를 격려하다가 삼전도에 나아가서 치욕의 삼배구고두례(三拜九叩頭禮) 를 했던 잊을 수 없는, 아니 잊지못할 치욕적인 역사의 흔적이 남아있는 현장이기도 하다.   

▲ 송파구에 있는 삼전도비와 동판(2007.5.20 촬영) ⓒ 한국의산천

몽고의 칸 앞에 엎드려 삼배구고두례(三拜九叩頭禮: 세번 절하고 한번 절 할때마다 머리를 세번 조아리는 禮)를 하는 인조의 모습.

▲ 깨트릴 수 없도록 단단하게 지어진 남한산성 ⓒ 한국의산천 

나라 군사들이 처음 왔을 때 병기라고는 날(刀)도 대보지 못하였고, 병자호란때도 성을 끝내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인조가 성에서 내려온 것은 양식이 부족하고 강화가 함락 되었기 때문이다. - 택리지에서- 

▲ 해발 465m의 연주봉 옹성ⓒ 2008 한국의산천

연주봉까지 이어지는 멋진 옹성, 북쪽으로는 송파.동쪽으로는 검단산과 남한산 벌봉이 한눈에 들어오는곳이다. 

▲ 해발 465m의 연주봉 옹성ⓒ 2008 한국의산천

만리장성 아닙니다. 연주봉까지 이어지는 멋진 옹성, 북쪽으로는 송파.동쪽으로는 검단산과 남한산 벌봉이 한눈에 들어오는곳이다.   

▲ 이정표는 곳곳에 잘 되어있다.ⓒ 한국의산천  

▲ 밴치에 있는 눈사람과 애완견 눈사람ⓒ 한국의산천 

을 에는듯한 북풍한설 몰아치는 정월. 城안의 말 먹이는 동이난지 오래며, 한마리 두마리 허연 콧바람을 내뿜으며 허덕이다 쓰러지고, 성을 지키는 병졸은 가마때기 한장 없이 눈보라를 맞으며 통나무 쓰러지듯 하나 둘 스러져갔다.

지금으로부터 372년전 이곳 남한산성에서 벌어진 광경이다. 

▲ 추운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찾아 산성을 돌고 있다.ⓒ 한국의산천 

아이젠을 착용한 사람은 자연스럽게 걷고, 아이젠이 없는 사람은 엉금 엉금 기다시피 답사를 하는것을 보았습니다.  

▲ 평행선 · 백여사ⓒ 한국의산천  

▲ 한국의산천 · 추억의연가 ⓒ 한국의산천  

▲ 벌봉으로 가는 암문 ⓒ 한국의산천  

▲ 여장 설명문 앞에서ⓒ 한국의산천  

▲ 동장대지의 휴식장소ⓒ 한국의산천  

▲ 장경사ⓒ 한국의산천 

▲ 굽이 굽이진 성벽을 따라 오르고 내려가는 사람들ⓒ 한국의산천  

▲ 왼쪽부터 평행선· 추억의연가 · 백여사 · 한국의산천 ⓒ 한국의산천  

▲ 동문 ⓒ 한국의산천

동문에서 출발하여 시계방향으로 남문~ 서문~ 북문~ 동문으로 되돌아왔다. 돌았지 돌았어 ㅎ  

▲ 동문 ⓒ 한국의산천  

소설 남한산성의 작가 '김훈'은 남한산성에서의 독자들과 만남에서 이렇게 말했다.소설의 마지막에 '남한산성에는 아무일도 없었다'고 �다가 지웠다고...-김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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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추운 날씨지만 즐겁게 남한산성을 한바퀴 돌면서 남한산성에 얽힌 많은 이야기를 주고 받으며 걸었다.

그래. 남한산성에서는 아무일도 없었다. 수치와 굴욕의 역사 또한 잊어서는 안될 역사지만, 남한산성에서는 아무일도 없었다. 

체력은 국력이고, 국력이 있어야만 당하지 않는다. 아무리 좋은 낱말과 좋은 책이 많아도 아직도 세상은 이성의 세계가 아니라 힘을 전제로하는 동물의 세계이다.-한국의산천-

 

남한산성 관련 글 더보기 http://blog.daum.net/koreasan/1155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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