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 산악계의 위대한 별 에드먼드 힐러리 별세
북극(北極)과 남극(南極) 다음으로 제3의 극지로 불리는 에베레스트(Everest 8848m)
1953년 세계 최초로 세계 최고봉 에베레스트(8848m) 산 정상을 밟은 에드먼드 힐러리 경이 어제(2008.1.11) 88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뉴질랜드태생 33세 청년 힐러리는 네팔의 셰르파족(族) 가이드인 텐징 노르게이(Norgay·당시 38세)와 함께 나중에 '힐러리 스텝'으로 이름 붙여진 험난한 수직 빙벽(높이 12m)을 지나 인류 최초로 에베레스트(Everest·8848m)산 꼭대기에 올랐다. 지금으로부터 55년전인 1953년 5월 29일의 일이다.
재산은 작은 2층집이 전부.
그는 1967년 ‘히말라야 트러스트’라는 재단을 만든 뒤 네팔을 120여 차례 방문하며 학교와 병원 등을 지어 주는 사업에 매진했다. 재산은 재혼한 부인과 함께 사는 오클랜드의 바닷가가 내려다보이는 작은 2층집이 전부였지만 매년 25만 달러 이상의 기부금을 모아 셰르파 족을 돕는 데 썼다. 그의 첫 부인과 딸은 1975년 히말라야에서 봉사활동을 하던 중 비행기 추락사고로 숨졌다.
▲ 1953년 세계 최초로 에베레스트 정상에 오른 에드먼드 힐러리(오른쪽)와 네팔의 셰르파족 가이드인 텐징 노르게이가 당시 등정 과정에서 캠프에 앉아 차를 마시고 있다. [AP연합뉴스]
알피니즘의 태동과 그 역사를 배울 때에 주요 알피니스트 이름중의 하나가 힐러리라는 이름이다. 등산학교 교육시 그리고 각종 등산대회에 출전하기위해서는 공부해야 하는 알피니즘에 대한 역사와 인물공부, 히말리야 최고봉 14좌에 대한 알피니즘의 역사공부는 필수과목이었다. -한국의산천-
참고 히말라야 14좌
1. 에베레스트 (8,848m)
2. K2 (8,611m)
3. 캉첸중가 (8,603m)
4. 로체 (8,516m)
5. 마칼루 (8,463m)
6. 초오유 (8,201m)
7. 다울라기리 (8,167m)
8. 마나슬루(8,163m)
9. 낭가파르낫(8,125m)
10. 안나푸르나(8,091m)
11. 가셔브룸1봉(8,068m)
12. 브로드피크(8,047m)
13. 가셔브룸2봉(8,035m)
14. 시샤팡마(8,012m)
영국은 1849년부터 식민지였던 인도 북부에 광활하게 펼쳐져 있는 히말라야산맥에 대한 광범위한 측량사업을 벌이면서 P15란 기호로 표시되어 있던 유난히 높은 봉우리에 관심을 갖고서 측량을 하게되었다.
P15봉우리가 정확하게 측량이 된 것은 그로부터 3년이 지난 1852년에 정확한 높이가 8.848m로 측량이 되었지만 그 후로도 계속 P15봉우리로 불리다가 1865년에 가서야 당시의 측량국 장관이었던 조지 에베레스트경의 이름을 따서 에베레스트란 이름으로 지금까지 불려지고 있다. (k2봉우리는 카라코럼에 있는 두번째 높은 봉우리라는 측량 표시기호이었으나 현재까지 K2봉으로 불린다.)
힐러리, 에드먼드 경 Sir Hillary Edmund Percival 1919~2008.1.11
뉴질랜드 출신의 등산가로 세계 최고봉 에베레스트를 초등정하여 인류사적인 업적을 남겼다.
그는 원래 양봉업자였지만 뉴질랜드의 남알프스에서 등반기술을 습득하고 로우(J.Lowe) 에게 빙벽등반 기술을 배우며 등산 활동을 시작했다.
1951년 로우와 함께 히말라야 무쿠트 파르바트(Mukut Parbat·7243m) 원정대를 조직했는데, 이는 뉴질랜드 최초의 히말라야 원정대였다. 그는 이 원정에서 로우와 함께 정상에 오른후 귀환 도중 영국 에베레스트 정찰대의 대장인 쉽튼(E.Shipton)의 요청으로 정찰대에 합류한다. 이 정찰에서 그는 쉽튼과 말로리가 등반 불가능이라고 판정을 내렸던 웨스턴 쿰(Western Cwm)돌파에 확신을 얻는다.
정찰을 마치고 돌아와 이듬해 쉽튼의 초오유(Cho Oyu·8153m) 원정에 참가했지만 실패로 끝난다. 1953년 에베레스트 원정 대장으로 지명된 쉽튼은 그와 로우를 대원으로 선발한다. 그러나 대장이 쉽튼에서 헌트(J. Hunt)로 바뀌자 힐러리는 원정대에서 탈퇴를 생각했으나 쉽튼과 헌트의 설득으로 이를 받아 들인다.
그는 원정대의 셰르파 사다(Sirda)인 텐징 노르게이와 최상의 컨디션으로 완벽한 팀워크를 형성하여 1953년 5월 29일 오전 11시 30분에 세계 최고봉의 정상에 섰다. 이 등정으로 그는 귀족 칭호를 받아 에드먼드 경(Sir Edmund)이 되었다. 그는 1954년 바룬(Barun) 빙하를 탐험하고 바룬체(Baruntse·7220m)를 등정한다. 이후 1956~58년 남극 탐험에 참가하여 남극점에 도달하고 1959~60년에는 마칼루(8481m) 국제학술탐험대를 조직한다.
이 탐험대의 목표는 우수한 장비를 사용하여 효과적인 고도순화와 전설속의 설인(雪人)인 예티(Yeti)의 수색이었다. 이 탐험대는 아마다블람(Ama Dablam·6856m) 등정에 성공하고 무산소로 마칼루 등정도 시도했으나 힐라리는 뇌혈관 이상으로 후퇴하고 나머지 공격대원도 폐수종에 걸려 결국 철수한다.
이 등반 이후 그는 셰르파들을 위한 사업을 벌여 매년 네팔에 가서 학교, 병원, 교량, 비행장 등을 세우며 그들을 도왔다.
그의 장남인 피터(Peter Hillary)도 아버지의 뒤를 이어 산악활동을 시작하여 1982년 로체(8511m)에 도전하였으나 실패한다. 하지만 1990년 5월 에베레스트 정상에 올랐으며, 힐러리와 함께 정상에 오른 텐징 노르게이의 아들인 잠링 노르게이 또한 1996년 5월에 정상에 올라 2대에 걸쳐 부자(父子)가 정상에 오른 기록을 세운다.
저서로는
이 책은 힐러리의 자서전 <도전 없이 승리 없다·Nothing Venture, Nothing Win>의 번역서다. 이외에 <하이 어드벤처·한 영환 옮김·수문출판사>( 1989)도 나와 있다. [월간 마운틴]
에베레스트(Everest 8.848m 북위 27도 59분 동경 86도 55분)
티베트 말로는 초모롱마(Chomoungma), 사가르마타 불린다.
1907년 영국산악회 창립 50주년 기념사업으로 그들이 명명한 최고봉 도전 제안이 나왔다. 그리하여 1919년 에베레스트위원회를 조직하여 원정을 주관하였다.
세계1차 대전이 끝난 뒤 1921년 5월 장도에 오르는데, 영국이 역사적인 거보를 내딛게 된 것은 당시 국력이 멀리 해외로 뻗으며 인도를 지배하고 있으면서 군인들이 중앙 아시아를 탐사할 수 있는 유리한 조건하에 있었기 때문이다.
에베레스트에 대한 최초의 도전은 1921년 하워드 버리가 이끈 4명의 대원과 3명의 과학자가 참가한 정찰 원정이었으며 최초의 원정대는 1922년 인도 고르카 연대의 준장이었던 부르스대장을 포함한 12명의 대원이 7.600m에 제 5캠프를 설치하면서 세 차례의 정상공격을 감행하여 북동릉 8.326m까지 전진하는 기록을 세웠다. 이후에도 일곱 번의 원정이 있었으나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하였다.
3차 원정대에서는 말로리와 어빈이 이 실종되는 사고가 일어나기도 했다. 1924년 3차 원정대원으로 참가하여 6월 27일 마지막 일기를 써놓고 조지 말로리와 앤드류 어빈은 정상을 향했고 그들은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그 후 1999년에 발견된 시신은 또 한번 세상을 놀라게 만들었다.
조지 말로리는 살아서 산에 오르는 이유를 묻는 기자의 질문에 그는 "산이 거기에 있기 때문에 오른다" 라는 말을 남겨서 유명했고 죽어서는 그는 과연 에베레스트 정상에 올랐는가 아니면 오르지 못하였는가에 대한 의문을 남겼다.
▲ 실종된 조지말로리와 앤드류 어빙
1953년 영국은 영국산악회 회원이며 프랑스 산악부대에 관계하고 있는 존 헌트가 원정대의 대장으로 꾸민 영국대가 에베레스트 봉에 오를 수 있었다. 물론 한번에 성공된것은 아니었다 대장으로 제 9차 에베레스트 원정대를 파견하여 5월29일 오전 11시 30분 드디어 에드먼드 힐라리와 셀파인 텐징 노르게이가 에베레스트 정상에 올라섰다.
에베레스트가 세계 최고봉으로 밝혀진 지 100년만의 일이다. 그리고 나흘 뒤 6월2일 엘리자베스(Elizabeth) 2세 영국 여왕의 대관식에서 정식 공표됐으며 전세계는 기쁨과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여왕은 힐러리에게 작위를 수여했다. 그후 힐러기 경(卿)으로 불리운다.
이후에도 그는 1957년 썰매와 도보로 남극을 탐험해 그곳에 뉴질랜드의 '스콧 기지'를 지었고, 이듬해는 개조한 트랙터를 이용해 최초로 남극을 차량 탐사하는 데 성공했다. 또 1956~1965년에 걸쳐 히말라야 봉우리 10개를 더 오르는 열정도 보였다.
또한 1962년엔 '히말라얀 트러스트'란 단체를 설립, 노르게이의 나라 네팔을 돕는 데 일생을 바쳤다. 그의 노력으로 네팔에 학교와 병원, 비행장들이 속속 들어섰다. 1975년 네팔로 향하던 비행기가 사고를 당해 함께 있던 처와 딸을 잃는 슬픔도 겪었지만, 그는 2007년까지 120번이 넘게 네팔을 오가며 '정신적 고향'을 위해 헌신했다.
생존 인물로서는 유일하게 뉴질랜드 지폐(5달러)에 얼굴이 그려진 그는 1982년에는 자신이 사인한 5달러 지폐 1000장을 판매해 모은 53만 달러(약 5억 원)를 네팔에 기부하기도 했다.
에드먼드 힐러리 (Edmund Percival Hillary, 1919.7.20~2008.1.11)
뉴질랜드의 등산가이자 탐험가. 뉴질랜드의 히말라야 원정대 대장을 하였고 뉴질랜드의 남극횡단 원정대에서도 활약하였다.
국적. 출생지 뉴질랜드 오클랜드
주요저서 :대모험 High Adventure(1955), 실수는 허용되지 않는다 No Lautitude for Error(1961)
에드먼드 힐러리
오클랜드 출생. 뉴질랜드 알프스에서 등산을 시작하여 1951년 뉴질랜드의 가르왈 원정대에 참가, 처음으로 히말라야산맥을 접한 이래로 1952년에 초오유산 원정에 참가하였다.
1953년에는 영국의 에베레스트산 원정대원으로 선발되어 5월 29일 셰르파 텐징 노르가이와 함께 에베레스트산을 첫 등정하였다. 그 공로로 엘리자베스 여왕으로부터 기사 작위를 받았다.
1954년에는 뉴질랜드의 히말라야 원정대 대장이 되었고, 1957∼1958년 뉴질랜드의 남극횡단 원정대에서도 활약하였다.
1960∼1966년 뉴질랜드 ·미국 ·영국의 합동 히말라야 원정대 및 1967년 남극 히셀봉 원정대를 지휘하였다.
주요저서에 《대모험 High Adventure》(1955) 《실수는 허용되지 않는다 No Lautitude for Error》(1961) 《High in the Thin Cold Air》(1962, D.도익과 공동저술) 등이 있다.
“영광 안겨준 산엔 어떤 흔적도 남기고 싶지 않아” [중앙일보]
겸손한 영웅 … 에베레스트보다 더 높은 곳에 잠들다
1953년 뉴질랜드 등반가 에드먼드 힐러리에게 처음으로 등정을 허락한 세계 최고봉 에베레스트(8848m·왼쪽 봉우리)의 위용. 오른쪽 봉우리가 로체(8516m)다. 점보 여객기 비행 고도 높이의 에베레스트 정상 부근은 강력한 상층기류의 영향을 받아 수평으로 눈보라를 날려보내는 장면이 상징처럼 각인돼 있다.
에드먼드 힐러리<左>와 셰르파 텐징 노르게이.
세계 최고봉 에베레스트에 인류 최초로 발을 디딘 두 영웅 에드먼드 힐러리 경(왼쪽)과
셰르파 텐징 노르가이 씨의 다정한 한때. 1953년 5월 29일 등정에 성공한 뒤 그해 6월 26일
네팔 카트만두의 영국대사관에서 찍은 사진이다.[AP=연합뉴스]
하늘 아래 가장 높은 곳에 맨 처음 오르고도 가장 낮고 겸손한 마음을 가진 사나이. 1953년 에베레스트산(해발 8848m)을 최초로 정복한 에드먼드 힐러리 경(卿)이 11일 뉴질랜드 오클랜드의 병원에서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88세.
힐러리의 사망은 헬렌 클라크 뉴질랜드 총리가 이날 직접 발표했다. 클라크 총리는 “스스로는 늘 평범한 한 사람일 뿐이라고 말했지만, 그는 전설과도 같은 탐험가였고 진정한 관용과 결단력을 가진 영웅이었다”고 추모했다.
총리가 직접 나서서 힐러리의 타계를 전 세계에 알리고 애도하는 것은 그가 유명한 뉴질랜드인이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는 비행기 사고로 아내와 딸을 잃는 역경을 겪고도 “모험은 나처럼 평범한 모든 이에게 가능하다”고 모두에게 용기를 줬으며, 조용히 자신을 빛내준 셰르파(등반 안내인)들을 돕기 위해 뛴 박애주의자였다.
1919년 오클랜드 인근 타우카우라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난 그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뉴질랜드 공군으로 참전했다. 그 뒤 등반 교육을 받고 전문 산악인의 길을 걸었으며, 53년 에베레스트 등반에 나선 영국 원정대의 일원이 됐다.
그해 5월 29일 오전 6시30분. 힐러리와 네팔인 셰르파 텐징 노르게이는 에베레스트 정상에 닿았다. 그들의 등정 소식은 나흘 뒤 전 세계에 알려졌다. 마침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의 대관식 날이었다. 여왕은 그에게 기사 작위를 내렸다.
▲ 뉴질랜드는 1982년 5달러 지폐에 힐러리 경의 초상화를 넣었다.
하지만 힐러리와 노르게이 가운데 누가 먼저 정상에 발을 디뎠는지를 놓고 많은 이가 의혹을 제기했다. 정상에서 찍은 사진에는 노르게이밖에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유일한 증인인 노르게이도 침묵으로 일관하다 86년 세상을 떠났다.
그렇다고 힐러리가 굳이 ‘내가 세계 최초’라고 주장한 것도 아니다. 힐러리는 “노르게이와 나는 한 팀으로 정상에 올랐다”고 강조해 왔다. 영광을 노르게이와 함께한 것이다. 이러한 그의 마음은 행동으로 이어졌다. 네팔의 셰르파들을 돕기 위한 ‘에드먼드 힐러리 히말라얀 트러스트 재단’을 설립하고 수백만 달러를 모금해 병원과 학교를 지었다. 평생 120차례나 네팔을 찾았다.
평소 “내가 가장 자랑스러워한 것은 탐험가로서의 명예가 아니라 네팔을 돕는 것”이라고 말했지만 에베레스트 등정 이후에도 그의 탐험은 계속됐다. 65년까지 히말라야의 열 봉우리 등정을 마쳤고, 58년엔 개조한 트랙터를 타고 남극 원정에 나서 남극점을 밟았다.
에드먼드 힐러리 경 - 1957년 남극의 임시 활주로.
85년에는 달에 첫발을 디딘 미국인 닐 암스트롱과 소형 비행기로 북극해를 가로질러 북극점에 닿기도 했다. 지난해 1월에는 아흔을 바라보는 나이에 손자와 함께 남극을 다시 방문하기도 했다.
“뛰어난 사람만 인생을 잘 살 수 있는 게 아니다. 중요한 것은 동기다. 진정 무언가를 원한다면 온 맘을 다해라.” 늘 이야기하던 자신의 철학을 삶의 끝자락에서도 몸소 보여준 것이었다. 그가 75년 펴낸 자서전의 제목인 『모험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Nothing Venture, Nothing Win)』는 이러한 그의 삶을 잘 요약하고 있다.
그가 세상을 뜨며 남긴 바람은 “내가 좋아하는, 내 삶의 출발점인 고향 바다에 닿고 싶다”였다. 그래서 자신의 유골을 오클랜드 앞바다에 뿌려 달라고 부탁했다. 영광을 안겨준 산에는 어떤 흔적도 남기고 싶지 않다고 했다.
인생 탐험을 마친 그가 남긴 가장 큰 흔적은 ‘에베레스트에 오른 첫 인간’이라는 기록이 아니라 ‘겸손과 관용’이라는 교훈이었다.
▲ 읽을수록 빠져드는 산관련 서적 ⓒ 2008 한국의산천
ⓒ 2008 한국의산천
山行은 渴望되고 이어 준비된다.
산이나 자연을 정복 할 수는 없다 단지 정상에 오를(등정)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