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 여주 고달사지
아시나요? 사방 30리가 절터였다는
웅장하고 화려한 불교문화를 꽃 피웠던 여주 상교리에 위치한 고달사 터를?
답사 2005년 7월 19일 (화) 한국의산천 ]
고달사
고달원(高達院)이라고도 하였다. 764년(신라 경덕왕 23)에 창건되었다. 고려 제4대 광종 이후 역대 임금의 비호를 받으며 도봉원(道峰院),희양원(曦陽院)의 하나로 빠르게 발전했던 유명한 절이었으나, 어느 때 폐사되었는지 분명하지 않다.
(고려초기에는 국가에서 관리하는 3대 선원의 하나로 왕실의 각별한 비호를 받았다고 전한다.)
▲ 여주 대신면에 있는 이정표 ⓒ 2007 한국의산천
▲ 여주 신륵사에서 상교리로 가는 도중에 있는 이정표 ⓒ 2007 한국의산천
남한강이 흐르는 쌀과 도자기의 고장 여주. 여주에는 이 고장의 대명사인 영릉(英陵)과 신륵사가 자리하고 있지만, 실상 그 안쪽 깊숙한 곳에는 대표적 폐사지 가운데 하나인 고달사터가 옛 영화를 오롯이 간직하고 있다.
▲ 혜목산(국립지리원 지도에는 우두산, 오른쪽산은 고래산) 능선앞에 자리한 고달사 터 ⓒ2007 한국의산천
절터에는 우리 나라에서 가장 거대한 석불대좌(보물 제 8호), 화려하고 강렬한 힘을 간직하고 있는 보물 제7호인 원종대사혜진탑(元宗大師慧眞塔)과 보물 제6호인 원종대사혜진탑비 귀부(龜趺) 및 이수(螭首), 국보 제4호인 고달사지 부도(浮屠), 그리고 보물 제8호인 석불좌(石佛座) 등이 있다.
원감국사의 부도로 추정되는 고달사지 부도는 빼어난 균형미와 아름다움을 인정받아 국보 제 4호로 지정되었는데, 이들 석조유물의 규모로 보아 찬란했던 역사의 현장을 떠올리게 된다.
▲ 고달사 터 입구에 있는 커다란 느티나무 ⓒ 2007 한국의산천
90년도에 발굴 작업이 시작 되기 전. 이곳 상교리 현장에서 약 2년여 파견 근무를 했었다. 그 당시에는 이 느티나무 양쪽으로 민가가 약 2~30여호 있었다
위의 차량이 서있는 자리에는 조그만 가게가 있었고 이곳에서 현장 작업자들과 업무를 끝내고 막걸리 파티를 하곤 했었다. 가을 추수가 끝나면 이곳 동네사람들과 논에 구덩이를 파며 미꾸라지를 잡기도 했다. 돌이켜보면 참 열심히 일하고, 바뻤지만 즐거웠던 시절이었다.
창건 당시의 사찰은 실로 광대하여 지금의 상교리 일대가 전부 사역으로 추정되며 절부근에 큰마을이 형성되었음을 짐작케 한다. 지금 광활한 사역에는 유물만 남아 있다. 현재 절터는 복원을 위한 발굴 조사가 진행중이다.
현재 느티나무 뒤로 다리 옆에는 야트막한 산(구릉)이 하나 있는데 그 산은 그 옛날 스님과 불자들이 짚신의 흙을 털다보니 짚신에서 떨어진 흙이 모여서 만들어진 산이라고 그 당시 동내 사람이 말해주었다.
느티나무 위 샘터 쪽에는 이집 저집에 댓돌, 빨래돌로 쓰이던 그 많은 석주, 석판들을 한데 모아 놓았다.
고달사 석조물은 모두 고달이란 석공이 조성했다는 전설이 있다. 고달은 가족들이 굶어 죽는 줄도 모르고 불사에 혼을 바쳤다고 한다. 불사를 끝내고 스스로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되었으며, 훗날 도를 이루어 큰스님이 되었으니 고달사라 불렀다는 전설이 있다.
석공의 혼이 담긴 섬세하고 정교한 조각을 보면 그저 놀라울 다름이다.
▲ 발굴작업이 한창인 고달사지 전경 ⓒ 2007 한국의산천
지난 98년 경기도박물관의 발굴조사에 의해 ‘고달사’란 명문이 새겨진 기와 등 통일신라 말기부터 고려 초기 기록에 부합되는 각종 유구와 유물이 발굴되었다.
▲ 고달사지 석불좌 보물 제 8호 ⓒ2007 한국의산천
고달사터 가운데 자리잡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크고 잘생겼다는 평을 듣는 석불대좌(보물 제8호). 이렇게 큰 석불자리에 앉아있던 부처님은 어디로 가셨을까? 좌대가 크니 석불 또한 매우 웅장하고 컷으리라.
보물 제8호 고달사지석불좌(高達寺址石佛座)
소재지 경기 여주군 북내면 상교리 420-5
시대 고려시대
고달사는 신라 경덕왕 23년(764)에 창건되었으나, 누구에 의해 창건되었는지 확실히 알 수 없다. 이 석불좌는 불상은 없어진 채 대좌만 제 자리를 지키고 있는데, 보존상태가 거의 완벽하다.
받침돌은 위, 중간, 아래의 3단으로, 각기 다른 돌을 다듬어 구성하였는데, 윗면은 불상이 놓여져 있던 곳으로 잘 다듬어져 있다. 아래받침돌과 윗받침돌에는 연꽃잎을 서로 대칭되게 돌려 새겼다.
이 대좌가 사각형으로 거대한 규모이면서도 유연한 느낌을 주는 것은 율동적이면서 팽창감이 느껴지는 연꽃잎의 묘사 때문이다. 이와 같은 연꽃잎의 표현 수법은 고달사지부도(국보 제4호) 아래받침돌과 매우 비슷하며, 가운데 꽃잎을 중심으로 좌우로 퍼져나가는 모양으로 배열하는 방법은 고려시대의 양식상 공통된 특징이다.
조각솜씨가 훌륭한 사각형 대좌의 걸작으로, 절터에 있는 고달사지부도가 고려 전기의 일반적인 양식을 따르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 대좌도 10세기 후반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방형의 중첩과 연꽃과 안상무늬의 교체를 명쾌하고 산뜻한 조각솜씨로 조화시킨 고려 초기 역작의 석조대좌라 할 수 있다.
▲ 원종대사 혜진탑비 보물 제6호 ⓒ2005 한국의산천. 우관동
조각의 부드럽고 살아있는 듯한 섬세함이 느껴지는 원종대사 혜진탑비
사지 한가운데서 지금도 그 귀부가 용트림을 하는 원종대사 혜진탑비에 의하면 고달사는 구산선문 중 봉림산파의 선찰로 고달선원으로 불렸다. 경남 창원에서 봉림선문을 개창한 진경대사 심희(854~923)는 30여년 가까이 이 곳에 머물며 선풍을 떨치던 고승 원감국사 현욱(?~869)의 법통을 이어 받은 제자였다.
진경대사는 다시 원종대사 찬유에게 법통을 잇게 하였는데, 원종대사는 고달선원의 제3대 정신적 지주로 고려 역대 왕들의 돈독한 귀의를 받으며 고달사를 전국 제일의 사찰로 가꾼 명실상부한 고달사의 중건주이다.
원종대사의 비범한 흔적은 혜진탑비 말고도 오른편 양지바른 산 골짜기에 유려하고 아름다운 부도로 남아 있다. 혜진탑비와 부도는 대사가 입멸한지 20여년이 지난, 지금으로 부터 1030년 전인 975년 경에 세워졌는데 하나같이 원종대사의 법력과 덕망이 응축된 진신사리와도 같은 모습이다.
혜진탑비 비신은 1915년 봄에 넘어져 8조각으로 깨진 것을 국립중앙박물관에 옮겨 보존하였다고 한다. 원종대사 부도는 할아버지뻘 되는 스승 원감국사 부도를 빼닮은 것으로 고려시대의 불교는 부도의 시대였음을 말해주는 상징적인 조형물이다.
▲ 원종대사(869~958) 부도비(慧眞塔碑 보물제6호)의 귀부(龜趺)와 이수( 首)ⓒ 2007 한국의산천
사람의 손으로 저렇게 돌을 다듬을 수 있다는 사실에 믿기지가 않는 조각품이다.
이곳 고달사 폐사지에서 몇점 남지않은 부도와 유물만 보고 간다하더라도 그날의 여행을 충족시킬수있을 만큼 멋진 답사길이 될것입니다.
▲ 원종대사((慧眞塔碑 869~958) 부도비 (보물 제6호)의 귀부와 이수 ⓒ 2007 한국의산천
▲ 원종대사 부도비 귀부와 이수에서 약 10여m 떨어진 곳에 있는 작은 귀부 ⓒ 2007 한국의산천
▲ 원종대사혜진탑 보물제7호 ⓒ2005 한국의산천
▲ 절 터 오른 쪽 맨 위쪽 솔 능선에 자리 잡고있는 국보 4호인 고달사터 부도로 오르는 계단 ⓒ 2007 한국의산천
▲원감국사 부도탑 옥개석에는 있는 비천상(飛天像)이 새겨져 있다. ⓒ2007 한국의산천
절 터 맨 위쪽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솔 능선에 자리 잡고있는 국보 4호인 고달사터 부도
이 부도는 원감국사 현욱의 것으로 여겨지는데, 그 장중함과 완벽한 조형미는 전국의 부도 가운데 으뜸자리에 해당되는 것이다. 산 아래 원종대사 부도와 같은 전형적인 팔각원당형으로 몸돌 중앙에 거북을 두고 구름에 노니는 네 마리 용을 두른 것까지 같지만 세련미와 균형미에서 뜯어볼수록 차이가 느껴진다. 원감국사는 문성왕 2년(840)부터 혜목산에 주석, 당대 최고의 선법을 떨친 ‘혜목산 화상’으로 그가 입적하자 경문왕은 원감화상(圓鑑和尙)이란 시호를 내려 공적을 기렸다.
▲ 국보 4호 원감국사 부도탑 ⓒ2007 한국의산천
▲ 원감국사의 것으로 추정되는 고달사터 부도(국보 제4호) ⓒ 2007 한국의산천
원감국사 부도는 규모나 조형미에서 우리나라 최고의 부도로 손꼽힌다
▲ 국보 4호 원감국사 부도탑 ⓒ2007 한국의산천
고달사가 혜목산(慧目山) 일대 1만2천평에 걸친 '사방 30리 절터'의 웅대한 가람이었다는 기록에는 이의를 달 수 없는 절터였음을 부인 할 수 없다.
[관련기사] 한강을 걷다.글 이지누
현욱의 제자였던 심희(審希)화상을 스승으로 삼은 원종대사(元宗大師) 찬유(璨幽, 869~958)가 선풍을 드날리던 고려 광종대에 이르러 고달사는 그 찬란한 영화를 누렸으며 나라 안에서 제일가는 선원으로 손꼽히기도 했다. 절터에는 그의 부도가 남아 있으며 탑비를 세웠던 귀부와 이수는 남아 있지만 비의 몸돌은 1916년에 무너져 여덟 조각으로 부서지는 바람에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975년에 세운 그 비의 음기에 따르면 “국내의 사원 중에 오직 3처(三處)만은 전통을 지켜 문하(門下)의 제자들이 상속(相續)으로 주지하여 대대로 단절되지 않도록 할 것이니, 이 규정을 꼭 지키도록 하라고 하였다. 그 3처란 “이른바 고달원(高達院)·희양원(曦陽院)·도봉원(道峰院) 등이다”라고 되어 있으니 희양원은 경북 문경의 봉암사를 중심으로 한 희양산문(曦陽山門)을 일컬으며 도봉원은 도봉산의 영국사(寧國寺)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역사의 흐름을 그 누가 예측할 것인가. 왕실의 비호를 받으며 부동사원(不動寺院)으로의 영화를 누리던 이곳도 어느덧 이렇듯 황량하게 변해버렸으니 말이다.
목은(牧隱) 이색(1328~1396)과 절친한 사이였으며 신돈의 정책에 반대하여 관직에서 물러났던 유항(柳巷) 한수(1333~1384) 선생이 이곳을 찾았던 적이 있다. 그 참에 ‘고달사에 제하다(題高達寺)’라는 시를 남겼는데 그는 삼십년 전인 소년 시절에도 고달사를 찾았던 양, 삼십년 전 고달사에서 보낸 시간이 꿈결 같았다고 적고 있으며 푸른 하늘에 기댄 비석을 노래하고 있으니 원종대사 혜진탑비를 일컫는 것이리라. 너무도 당당하여 위엄이 흘러넘치는 탑비의 귀부와 이수를 지나쳐 부도가 놓인 절터 뒷산으로 오르며 치악산 기슭에 은거한 여말선초의 은사(隱士)인 운곡(耘谷) 원천석(1330~?)이 지은 시 한 수를 흥얼거렸다.
운곡은 유불선을 가리지 않고 공부한 유학자라기보다 철학자에 가까운 인물이며 그와 교유한 불가의 선사들 또한 부지기수이다. 그런 그가 어찌 당대의 큰 선원인 이곳 고달사에 머문 선사들과 교유가 없었겠는가. 그는 이곳에 머문 선사인 의징(義澄)에게 시 한 수를 보냈다. ‘고달사의 이의징 대선사에게 부침(奉寄高達寺李大禪師 義澄)’이라는 제목의 시는 “머리를 돌려 멀리 혜목산(慧目山)을 바라보니 / 흰 구름 사이에 한 덩이 푸른빛이 있네. / 그 가운데 천태(天台)의 늙은이가 있으니 / 백세의 한가로움을 굳건히 차지하셨네.” 라고 되어 있다. 이로 미루어 보면 당시 고달사는 천태종(天台宗)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선종사찰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아쉬운 것은 목은을 비롯하여 그의 아버지인 가정(稼亭) 이곡(1298~1351) 선생 또한 이곳에서 멀지 않은 북내면 가정리에서 유배생활을 했건만 그들은 모두 강가인 신륵사로 나갔을 뿐 이곳에 대한 글을 남기지 않은 것이다.
▲ 고달사지를 나와서 이천 남한강가 이포대교 가까이에 있는 파사성에 올랐다. ⓒ 2007 한국의산천
▲ 이포에서 양평쪽으로 나오며 들려 본 두물머리(양수리) 은행나무 길 ⓒ 2007 한국의산천
고달사지 가는 길
여주읍에서 42번 국도 이용 여주대교를 건너 우측길 신륵사앞을 지나서 - 331번 지방도 양동(북내)방향으로(7km) - 상교리부락 진입로(좌회전)에서 3km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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