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주 간현 흥법사지 (興法寺址) [답사 촬영 2006. 5. 22. 한국의산천]
[폐사지를 찾아서]원주 지정면 흥법사 터
원주의 3대 폐사지로는 흥법사지와 법천사지, 거돈사지를 꼽는다.
유구한 역사를 담고 남한강은 흐른다. 유유히 흐르는 강줄기를 따라 흥법사, 법흥사, 거돈사, 청룡사가 그 터만 남은 채 역사를 말하고 있다.
▲ 여름이면 섬강 간현유원지로 몰려드는 인파로 한철만 붐비는 소박하고 아담한 간현역 ⓒ 2007 한국의산천
너의 그 한마디 말도 그 웃음도 나에겐 커다란 의미
너의 그 작은 눈빛도 쓸쓸한 뒷모습도 나에겐 힘겨운 약속
너의 모든 것은 내게로와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가 되네
슬픔은 간이역의 코스모스로 피고 스쳐 불어 온 넌 향긋한 바람 -너의 의미-
그리움은 간이역의 코스모스로 피어난다고 했는데, 이 가을에 작고 예쁜역 간현역에도 그리움의 코스모스가 피어나리라
흥법사지
강원도 원주시 지정면 안창리에 있는 신라시대의 절터로서 강원 문화재자료 제45호이다.
위치: 강원 원주시 지정면 안창1리 517-2
▲ 섬강위 간현 철교위를 지나는 기차(중앙선) ⓒ2006 한국의산천
평구역(양주)에서 말을 갈아 타고 흑수(여주)로 돌아드니, 섬강(원주)는 어디인가? -송강 정철-
▲ 소금산에서 내려본, 간현 섬강으로 합류하는 삼산천 ⓒ 2007 한국의산천
소금산 정상에서 내려 본 섬강 지류 간현 유원지. 강물이 나의 허리 곡선(?)처럼 완벽한 S라인을 그리고 있다.
강을 중심으로 왼쪽산릉은 소금산(343m)으로 오르는 능선이며 오른쪽 능선은 간현봉(386m) 에서 이어지는 능선이다.
소금강산의 약칭으로 불리는 소금산
소금산은 소금강산의 줄인말이라고 한다. 코스는 약 3.5km. 등산시간은 약 2시간으로 완만하며 가족동반에도 좋은 코스다. 계곡 상류 내려오는 쪽의 가파른 철계단 지역이 4군데 정도 있으나 그리 어렵지는 않다.
▲ 원주 지정면 간현 섬강 지류 ⓒ 2007 한국의산천
평구역(양주)에서 말을 갈아 타고 흑수(여주)로 돌아드니, 섬강(원주)는 어디인가? 치악산(원주)이 여기로구나. 송강 정철 -관동별곡中에서-
▲ 소금산을 내려오며 ⓒ 2007 한국의산천
자연을 사랑하는 마음이 고치질 못할 고질병(泉石膏황: 천석고황)이 되어, 창평에서 한가로이 지내고 있었는데, (임금님께서) 8백 리나 되는 강원도 관찰사의 직분을 맡겨 주시니, 아아, 임금님의 은혜야말로 갈수록 그지없다.
경북궁 서문인 연추문으로 달려 들어가 경회루 남쪽 문을 바라보며 임금님께 하직을 하고 물러나니, 이미 임금님의 신표인 옥절이 앞에 서 있다.
당시 강원도 감찰사 감영은 원주에 있었고 이곳 섬강 나루에 이르자 강주변 경치에 반하여 �은 글이다. 간현이라는 지명은 조선 선조 때 이조판서를 지낸 이희가 낙향하던길에 주변 산세의 아름다움에 반해 가기를 멈추고 머물렀다고 해서 간현(艮峴)이라는 이름을 얻었다고 한다.
▲ 간현 유원지 안에 위치한 간현암 ⓒ 2007 한국의산천
간현 가는길
- 문막 IC에서 간현역(유원지)까지 약 6km. 간현에서 양동방향으로 흥법사지까지 약 2km.
- 수도권에서 승용차 편으로 갈때에는 영동고속도로 문막 IC를 빠져나가 원주 방향쪽으로 우회전하여 42번 국도를 타고 5분정도 가면 좌측으로 '간현국민관광지' 표지판이 서있는 삼거리에 닿는다. 이 삼거리에서 5분정도 가면 간현에 닿는다.
- 철도를 이용할 경우 중앙선 원주역 못미쳐 간현역에서 내려서 간현 유원지까지는 10여분 걸린다.
- 주차장에서 암장까지는 10여분 소요되며 다리를 건너 계속해서 들어가게 되며 승용차가 다닐 수 있는 넓은 도로다. 암장 앞에는 가게가 몇 개 있으며 야영장이 있어 취사가 가능하다.
간현역, 간현유원지에서 지정대교를 넘어 약 2km 가면 흥법사 터가 나온다.
▲ 흥법사지 입구의 마을. 느티나무ⓒ2007 한국의산천
도로에서 흥법사지 표지를 보고 좁은 1차선 포장 농로를 따라 약 1km 들어가면 흥법사지가 나온다.
원주 흥법사 터 가는 길
문막 IC를 나와 사거리에서 우회전 문막오크벨리, 간현국민관광단지 이정표를 따라가다가 간현역 , 간현국민관광단지, 지정대교를 지나 약 2km 지정면 안창리를 접어들다 보면 우측으로 의민공사우(懿愍公祠宇 : 조선 제14대 선조대왕의 장인인 김제남의 위패를 모신 곳)가 있고, 그 좌측으로 작은 이정표 '흥법사지'를 따라 좁은 길로 접어들어 올라가다 보면 만여 평의 들녘으로 외롭게 서 있는 3층 석탑을 볼 수 있습니다. 바로 이곳이 흥법사지입니다.
▲ 흥법사 터. ⓒ 2007 한국의산천
아직 발굴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가운데 사지 대부분이 민간인의 소유로 되어 있으며 주변에는 밭이 들어서 있다 . 석탑(보물 제464호)이 쓸쓸히 주인없는 폐사지를 지키고 있다.
현재 절터 주변은 모두 경작지로 변했다. 흥법사지는 절은 흔적조차 없이 사라지고 삼층석탑과 진공대사 탑비만이 남아있다. 자리를 잘 잡은 지형에 절터만 봐도 옛날 거대사찰이 있었던 곳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흥법사지 앞쪽으로는 남한강의 지류인 섬강이 흐르고 뒤쪽으로는 영봉산 자락이 펼쳐져 있다. 이곳에는 진공대사부도비의 귀부와 이수가 있으며 진공대사는 신라 말기 구산선문 중의 봉림산파에 소속된 스님이었다.
진공대사가 당나라에서 유학하고 돌아오자, 새로 나라를 연 태조 왕건이 대사를 왕사로 임명하고 극진히 예유하고 이곳 흥법사를 중건해주었다고 한다. 이때부터 흥법사는 흥법선원이 되고 선수행을 닦기 위해 찾아오는 스님들이 수백명에 이르렀다 전한다.
그러나 이 절이 언제 없어졌는지는 모르나 조선시대 전기까지 절과 진공대사탑에 관한 언급이 있는것으로 보아 임진왜란때 폐사가 된것으로 보이며 약 만여평에 달하는 흥법사지 옛터는 모두 밭으로 변했다. 현재는 삼층석탑과 진공대사 부도비의 귀부와 석물들이 있다.
- 진공대사탑비 귀부 및 이수(보물 제463호)
- 흥법사지 3층 석탑(보물 제463호)
- 흥법사지(문화재자료 제45호)
▲ 흥법사지 삼층석탑(보물 464) ⓒ2007 한국의산천
흥법사지
1984년 6월 2일 강원도문화재자료 제45호로 지정되었다. '고려사'에는 937년(태조 20) 당시 왕사(王師)였던 진공대사 충담(忠湛)이 입적하자 940년 진공대사(869~940)의 부도탑이 있는 원주 영봉산(靈鳳山) 흥법사에 태조가 직접 비문(碑文)을 지어 진공대사탑비를 세웠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 흥법사가 신라 때부터 있던 사찰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흥법사의 폐사에 대해서는 기록이 없어 알 수 없지만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절터 주변은 모두 경작지로 변했다. 이곳에는 삼층석탑(보물 464), 진공대사탑(보물 365), 진공대사탑비, 전흥법사염거화상탑(국보 104) 등이 있었으나 현재는 삼층석탑과 진공대사탑비의 귀부 및 이수(보물 463)만 남아 있다. 일제강점기인 1931년 염거화상탑은 서울의 탑골공원으로 옮겨지고 진공대사탑과 진공대사탑비의 비신(碑身)은 일본으로 반출된 것을 되찾아 지금은 3점 모두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 진공대사탑비의 귀부 및 이수(보물 463) ⓒ2007 한국의산천
떡을 주물러 이렇게 만들기도 힘들것 같은 조각을, 단단하고 커다란 바위에 조각을 했다는것이 믿겨지지 않을 정도로 부드럽고 꿈틀거리듯 살아있는 느낌을 준다.
진공대사탑과 진공대사탑비의 비신(碑身)은 일본으로 반출된 것을 되찾아 지금은 3점 모두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여주 고달사지에 있는 귀부와 비슷하나 규모는 좀 작다.
※ 진공대사 부도(보물 제365호)는 현재 서울 국립중앙박물관에 세워져 있다.
▲ 진공대사탑비의 귀부 및 이수(보물 463) 전면 ⓒ2007 한국의산천
여기서 잠시
금강안金剛眼 http://blog.daum.net/thson68 님께서 현장 안내문 오류에 대한 보완 말씀을 주셨습니다. 대단히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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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천님 좋은 글과 사진 잘보았습니다..관련기사 글 중에 보완하고 싶은게 있어 몇자 적습니다..
말씀하신 진공대사에 관한 자료의 오류에 대한 부분인데 진공대사가 다른 두분이 계셨기에 그런 혼란이 자주 발생하는것 같습니다.
흥법사지의 진공대사는 충담(忠湛)으로 생존시기는 869~940년입니다. 흥법사지에는 진공대사 부도와 돌합, 그리고 부도비가 있었으나 부도비는 일부가 결실된채 4조각만 국립중앙박물관에 남아있고 귀부와 이수만 흥법사지에 있습니다. 구법(求法)을 위하여 당나라에 유학후 918 년 귀국하여 고려태조에 의하여 왕사가 되어 흥법사에 안주하게 됩니다.
또 다른 진공대사의 흔적은 영주 비로암에 있는 진공대사 보탑비의 주인으로서 855~937에 활동하였던 스님으로 당나라 유학을 가지는 않았으나 구법승인 삼장(三藏)을 연구하므로써 불법을 익혔고 소백산사에 있을 때 부근을 지나던 왕건을 친견하고자 달려 갔었으며 고려가 건국되자 개성에 가서 태조를 알현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두 스님의 사망시기가 3년의 차이를 보이고 있으나 두 스님 모두에게 진공대사라는 시호를 주었는데 흥법사지의 진공스님은 태조가 직접 내렸으나 비로암의 진공스님 시호는 누가 지었는지 알 수 없습니다.
저도 최근에야 이러한 사실을 알았는데 현장 안내문에는 그 주인공이 다르게 기술되었나봅니다. 저도 올 봄에 가본적이 있으나 저도 발견하지 못했던 사실이네요..
날이 점점 차가워지네요.. 다니시는 걸음 항상 평안하시길 바랍니다... 금강안金剛眼
▲ 진공대사탑비의 귀부 및 이수(보물 463) 측면 ⓒ2007 한국의산천
眞空대사는 고려 태조 왕건이 스승으로 모셨고 열반 후에는 태조가 직접 비문을 짓고 唐 태종 이세민의 글씨를 集字해서 비석을 새긴 흥법사 진공대사탑비(興法寺眞空大師塔碑)는 서예의 백미로 손꼽히고 있다.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 아래참고 비교
여주 고달사지 원종대사 혜진탑비 보물 제6호(2005. 7. 19 촬영) ⓒ2007 한국의산천
▲ 여주 고달사지 원종대사 혜진탑비 보물 제6호(2005. 7. 19 촬영) ⓒ2007 한국의산천
▲ 흥법사지 삼층석탑(보물 464) ⓒ2007 한국의산천
이 탑은 기단(基壇)을 2단으로 두고, 그 위로 기와집 모습을 본뜬 듯한 탑신을 3층으로 쌓아올린 모습이다. 아래층 기단의 각 면에는 안상(眼象)이 3개씩 새겨져 있는데, 꽃모양처럼 솟아올라 있어 고려시대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위층 기단의 윗면은 경사져 있고, 보기 드물게 중앙에는 1층 몸돌을 괴기 위한 받침을 3단으로 조각하였다. 부처의 사리나 불경 등을 모시고 있는 탑신은 기단에 비해 너무 작은 모습이다. 각 층의 몸돌에는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의 조각을 새겨놓았으며, 1층 몸돌에는 네모난 문비가 새겨져 있고 문비 안에는 마멸이 심한 문고리 장식이 남아있다.
지붕돌은 두꺼워 보이고 경사가 가파르며, 아래받침은 얇게 4단으로 되어 있는데 전체적으로 파손된 부분이 많다. 지붕돌의 처마는 수평을 이루다가 양쪽 가에서 살짝 위로 들려있어 고려시대 석탑임을 잘 드러낸다. 탑의 머리부분에는 머리장식을 받치기 위한 노반(露盤)만 남아 있으나 그 마저도 많이 손상되어 있는 상태이다.
기단과 탑신의 불균형이 눈에 띄며, 돌의 구성이나 조각수법이 소박한 점 등으로 보아 고려 전기에 세워졌을 것으로 보인다.(문화재청 참고)
▲ 흥법사지 삼층석탑(보물 464) ⓒ2007 한국의산천
탑의 층수는 어떻게 세나?
처마 모양의 지붕돌만 세어보면 된다. 지붕돌이 3개면 3층탑, 5개면 5층탑이다. 아랫부분은 받침돌, 기단이다. 탑은 부처의 사리를 넣기 위한 무덤이었으나 후에 불법의 상징물로 변했다. 탑 안에는 사리함 같은 보물을 넣었다. 목판인쇄물인 ‘무구정광대다라니경’도 불국사 석가탑 안에서 발견된 보물이다.
또 한분의 진공대사가 계셨다.
비로사 진공대사보법탑비
이 비는 경상북도 영주군 풍기면 소백산 국립공원 내 비로사에 세워진 진공대사의 비이다.
진공대사는 통일신라말과 고려초에 활약한 승려로 경주출신이며 속성은 김씨이다. 가야산의 선융화상을 은사로 출가하여 신라 경문왕 14년(874)에 구족계를 받았다. 소백산에 절을 짓고 삼장을 두루 공부하다가 선융화상이 은둔에 들어가자 행각의 길을 떠났다. 스님은 한동안 설악산 진전사에 머물면서 도의국사의 유허를 답사하며 영탑에 예배하고, 그 뜻을 따라 선수행에 힘을 쏟기도 하였다.
진공대사는 왕건의 후삼국 통일을 직접 찾아가 축하했을 정도로 태조와 긴밀한 관계가 있었다. 통일 후 말년을 소백산에서 보내던 중 937년에 이르러 열반하니 태조는 대사에게 진공眞空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탑호塔號는 보법普法으로 하여 비를 세우도록 명을 내렸다. 비 앞면의 마지막 부분에 새겨진 “歲次己亥八月十五日立 刻者崔煥規”라는 기록에 근거하면 이 비는 스님의 입적 2년 뒤인 939년에 세워졌음을 알 수 있다.
현재 이 비는 귀부와 이수를 온전히 갖추고 있으며, 이수 한가운데에는 “故眞空大師碑”라는 제액을 전서로 새겼다. 과거 크게 파손되어 없어진 비신 부분은 다른 돌로 끼워 맞춘 뒤 시멘트로 접착하여 보수하였는데, 화강석의 색깔과 재질이 서로 다르고 맞닿는 부분을 정교하게 처리하지 않았기 때문에 보기가 그리 좋지는 않다. 보통 비 뒷면에는 비를 세운 시주자의 명단이나 관여한 사찰 등을 새겨 넣는 예가 많으나 이 비의 뒷면에는 특이하게 진공대사가 남긴 유언을 기록하였다.
비문은 최치원의 사촌동생인 최언위崔彦?가 지었으며, 글씨는 이환추李桓樞가 절도있고 단정한 구양순체歐陽詢體 해서로 썼는데 이는 신라말과 고려초에 우리나라에서 크게 유행했던 서체이다. 이환추는 구양순의 서체를 구사한 당시의 대표적인 서예가로서 그의 글씨는 구양순체보다 오히려 더 굳세고 엄정한 필력을 보여준다. 비문은 입자가 곱고 견고한 암석에 정교하게 각자刻字하였는데, 남아있는 부분은 천 년이 넘게 지난 지금도 글씨가 생생하다. 글씨 자체도 뛰어나지만 그 획 하나하나를 단단한 돌 위에 섬세하게 살려 새긴 최환규의 솜씨도 예사롭지 않다.
소백산 진공대사가 열반에 임하여 유언으로 남긴 훈계
모든 대중에게 당부하노니 나는 지금 이미 해가 서산에 드리운 것과 같이 죽음 직전에 있으므로 살아 있을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새벽 서리가 봄꽃을 해치는 것도 아쉬워하지 않거늘 어찌 가을의 노란잎이 맑은 계곡에 떨어지는 것을 근심하랴. 이는 마음속에 간직할 일이며 예를 따르는 이들이 으뜸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윗사람 공경하기를 부모와 같이 하고, 아랫사람 사랑하길 적자와 같이 여길 것이니라. 위아래가 화합하여 항상 삼가고 예의와 질서가 없이 狼藉하게 하지 말라. 내가 생존시에도 말과 행동이 과격하고 거칠었던 사실이 있는데, 하물며 내가 죽은 후에도 이같은 일이 있을까하고 염려하지 않을 수 없다. 작은 일로 권속간의 인정에 얽혀 동분서주하여 부질없이 세월을 보내지 말고, 각기 스스로 잘 계율을 지키고 승복과 꿰맨 바리때를 갖추면 이르는 곳마다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예로부터 문풍에 누를 끼치지 않는 것을 제일로 삼았다고 했는데 바로 이를 두고 한 말이다. (이 나라의)남쪽과 북쪽을 두루 다니면서 이 소백산에 주석한 7-8년 동안 十方의 승려가 本光을 찾고 本色을 탐구하면서 어언 여러 해를 지나게 되었다. 분수를 따라 정진하여 때와 세상을 좇되 특별한 軌則은 두지 말고, 평범한 진리를 따르도록 하라. 또 방탕하거나 안일하지 말 것이며, 중임을 맡길 큰 인물이 되려는 원력 또한 잊지 마라. 옳지 않은 일은 불구덩이를 피하듯 처음부터 행하지 말라. 작은 일이든 큰 일이든간에 항상 조심하여 법에 따라 수행토록 하라. 내 이제 곧 이 세상을 떠나려 하니, 세상의 형편대로 속되게 애통해 하거나 허둥지둥하지 마라. 금생이 이미 다하였으니, 내세에는 다 같이 부처님 법석에서 만나게 되기를 바라는 바이다.
* 비문 번역은 李智冠, 『校勘譯註 歷代高僧碑文』고려편1, 伽山文庫, 1994, pp. 128-130을 주로 참고하였고 부분적인 수정에는 흥선스님께서 도움을 주셨다. (글 한재원 직지성보박물관 학예연구원)
▲ 흥법사지 삼층석탑(보물 464) ⓒ2007 한국의산천
▲ 흥법사지 삼층석탑(보물 464) ⓒ2007 한국의산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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