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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거친호흡 몰아쉬며 ^^ 굽이치는 산맥넘어 손의 자유, 발의 자유, 정신의 자유를 찾는다. 기억은 희미해지기에 이곳에 기록을 남긴다
MTB등산여행

거돈사지

by 한국의산천 2007. 10. 16.

비어있기에 채울것이 더 많아 충만한 곳 폐사지

 

거돈사지(居頓寺址) 답사 2007년 10월 16일.날씨 아침 안개 자욱 흐림, 맑음 

천년의 숨결이 느껴지는 거돈사지 

 

법천사지를 나와 부론면을 지나서 쪽으로 달리다 보면 오른쪽으로 사적 168호로 지정(1968.12.19)되어 보호받고 있는 거돈사지라는 표지판을 볼 수 있다.

이 마을이 바로 정산리이고 이 마을로 들어서 한참 가다보면 작은 개울을 앞에 두고 깨끗하게 다듬어진 절터를 볼 수 있다. 길은 이곳에서 끝나며 길 끝에 높은 저수지 뚝이 보인다.

 

폐사지의 석축가에서 홀로 오랜 세월의 풍상을 참아내며 이절의 성쇠를 지켜보았을 느티나무가 아득한 시간의 이편과 저쪽을 이어준다거돈사지는 잔디와 풀로 잘 정비되어있는 너른벌판위에 간간히 탑과 석축만이 흔적을 남기고 있다.

그 옛날 깊은 산골에 이렇게 큰 절이 있었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규모가 엄청나게 크다. 지금은 페사지가 되어 너른 터에 풀이 널리 깔려있지만 번성했던 그 예전의 영화가 한눈에 느껴지는 곳이다.   

 

비어있기에 채울 것이 더 많아 충만한 곳이라면 너무 언어의 비약일까?

 

 

 ▲ 거돈사지 입구 축대 ⓒ 2007 한국의산천

거돈사지를 지키고 있는 노거수 느티나무와 단아하게 정비된 분위기. 무너진 절터의 무상함보다는 옛 향취를 느낄 수 있다

 

 

▲ 사적 제168호 거돈사지 전경 ⓒ 2007 한국의산천

 

사적 제168호 거돈사지(居頓寺址)소재지  강원 원주시 부론면 정산리 189 
시대 신라 

한계산 기슭의 작은 골짜기를 끼고 펼쳐진 곳에 있는 절터이다.
발굴조사 결과 신라 후기인 9세기경에 처음 지어져 고려 초기에 확장, 보수되어 조선 전기까지 유지된 것으로 밝혀졌다.

 

절터에는 중문터, 탑, 금당터, 강당터, 승방터, 회랑 등이 확인되었는데, 금당의 규모는 앞면 5칸, 옆면 3칸으로 2층 건물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중문지 북쪽의 3층석탑(보물 제750호)은 처음 세워질 때 만들어진 것으로 생각되는데 신라 석탑의 전형적인 양식을 따르고 있다.

 

탑의 동쪽에는 원공국사 지조(930∼1018)를 위한 원공국사승묘탑비(보물 제78호)가 있는데, 1025년 최충이 문장을 짓고 김거웅이 글씨를 썼다.

탑비와 함께 원공국사승묘탑(보물 제190호)이라 불리는 부도가 있었는데 현재는 경복궁 뜰 안에 옮겨 놓았다.

 

거돈사는 고려 초기 불교계의 중심이었던 법안종의 주요 사찰이었지만, 고려 중기 천태종이 유행하면서 천태종 사찰로 흡수되었다. 거돈사는 신라말 고려초의 절터로서 보기 드문 일탑식 가람으로 주목할 만한 곳이다. 

 

 ▲ 거돈사지 삼층석탑 ⓒ 2007 한국의산천 

축대를 올라서면 제일 먼저 드넓은 절터가 펼쳐지며 삼층석탑이 나타납니다.

 

  ▲ 원공국사승묘탑비(보물78호)에서 바라 본 거돈사지 전경 ⓒ 2007 한국의산천

 

거돈사(居頓寺)는 신라 후기에 창건되었고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고 전하나 그것을 뒷받침할 만한 문헌자료는 없다.

현계산(賢溪山) 기슭의 작은 골짜기를 끼고 펼쳐진 약 7,500평 넓이의 절터는 유존(遺存)상태가 양호한데, 1984년의 정비 보수공사와 1989∼1992년의 본격적인 발굴조사로 대체적인 모습이 알려지게 되었다.

그 결과 거돈사는 신라 후기인 9세기경에 창건되고 고려초기에 확장·중창되어 대찰의 면모를 갖추었으며, 조선 전기까지 존속하였다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산지(山地) 가람인 거돈사의 가람배치는 당시의 사찰로는 보기 드문 신라의 전형적인 일탑식(一塔式) 형식으로서, 남북을 중심축으로 하여, 가운데 중문지(中門地)가 있고, 중문지 앞에는 축대가 있다.

중문지 좌우에 회랑지(回廊址)가 동서로 나아가다가 북으로 꺾여 강당지 기단(講堂址 基壇)과 연결된다. 중문지 북쪽에는 신라 석탑의 전형적 양식을 따른 삼층석탑(三層石塔)(보물 제750호)이 있는데, 창건 당시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탑 북쪽에 있는 금당지(金堂地)는 고려 초에 중창된 것으로서 현재 전면(前面) 6줄,측면(側面) 4줄의 주초석이 남아 있어 금당의 규모가 전면 5칸·측면 3칸인 건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금당지 중앙에는 높이 약 2미터의 화강석 원형 불대좌(圓形 佛臺座)가 놓여 있다. 이러한 구조와 크기로 미루어볼 때 금당은 외관(外觀) 2층이며 내부가 통층(通層)으로 된 건물이었으며, 본존상은 대좌석 상면에 철이나 청동록의 흔적이 없는 것으로 미루어 등신불보다 큰 석조좌상이었을 것으로 믿어진다.

금당지 뒤에는 강당지가 있으며, 또 그뒤에는 승방지(僧房地)가 있다. 

 

 ▲ 삼층석탑과 오른쪽으로 보이는 금당지 ⓒ 2007 한국의산천

금당지에는 석조좌상이었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좌대가 가운데 있다.

 

 ▲ 보물 제750호 거돈사지삼층석탑(居頓寺址三層石塔) ⓒ 2007 한국의산천 

 

▲ 보물 제750호 거돈사지삼층석탑(居頓寺址三層石塔) ⓒ 2007 한국의산천

 

거돈사지삼층석탑(居頓寺址三層石塔 보물 제750호)
소재지 강원 원주시 부론면 정산리 188 
시대 신라 
 
거돈사 옛 절터의 금당터 앞에 세워져 있는 탑으로, 2단의 기단(基壇)위로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이다.

아래층 기단은 네 면의 모서리와 가운데에 기둥 모양을 새긴 형태로, 기단을 이루는 밑돌·가운데돌·맨윗돌이 각각 4매로 이루어진 특징이 보인다.

위층 기단은 남·북쪽에 무늬없는 긴 돌만 세우고 동·서면에는 가운데에 기둥 모양을 새긴 돌을 끼워 맞춘 방식이다. 즉, 남·북쪽에서 보았을 때 동·서면에 세운 석재의 두께가 자연스럽게 기둥 모양으로 보이도록 한 것이다.

탑신은 각 층의 몸돌과 지붕돌을 각각 하나의 돌로 구성하였다. 5단의 밑받침을 둔 지붕돌은 두꺼우면서 경사면의 네 모서리가 곡선을 이루고 있다. 처마는 직선을 이루는데 끝부분에서의 들림이 경쾌하여 통일신라 양식임을 알 수 있다.

 

탑의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을 받치는 네모난 받침돌만 남아 있고, 그 위에 놓여진 연꽃 모양의 보주(寶珠)는 최근에 얹어 놓은 것이다.   

탑의 조성연대는 2단을 이루는 기단구조와 기둥 모양의 새김, 5단의 지붕돌 받침 등의 수법으로 보아 9세기 작품으로 추정된다.

 

절 터에 있는 민가 우물가에는 탑 옆에서 옮겨왔다는 배례석(拜禮石:탑 앞에 놓여 예불을 드릴 때 향을 피우던 곳)이 놓여 있다.

  

 

 

 ▲ 금당지 ⓒ 2007 한국의산천

금당지에는 석조좌상이었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좌대가 가운데 있다.

 

 

 ▲금당지안에 있는 주줏돌 ⓒ 2007 한국의산천

 

 ▲ 원공국사승묘탑으로 올라가는 석축 ⓒ 2007 한국의산천

 

 

 ▲보물 제190호 원공국사승묘탑이 있던 자리 ⓒ 2007 한국의산천

 

보물  제190호  거돈사원공국사승묘탑(居頓寺圓空國師勝妙塔) 
현재 소재지 서울 용산구  용산동 6가 국립중앙박물관  
시대 고려시대 

거돈사터에 남아 있던 고려 전기의 승려 원공국사의 사리탑으로, 일제시대에 일본사람의 집에 소장되고 있던 것을 1948년 경복궁으로 옮겨 왔으며, 현재는 국립중앙박물관 경내에 있다.

 

 

  ▲보물 제190호 원공국사승묘탑 안내문 ⓒ 2007 한국의산천

 

보물 제190호  거돈사원공국사승묘탑(居頓寺圓空國師勝妙塔)은 현재 서울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겨지고 그 자리에는 안내문이 지키고 있다.

 ▲ 삼층석탑 왼쪽 공터에 모아놓은 석물 ⓒ 2007 한국의산천

 

  ▲ 삼층석탑 왼쪽 공터에 모아놓은 석물 ⓒ 2007 한국의산천

석물의 문양이 마치 보이스카우트 휘장처럼 생겼다.

 

 

 ▲ 거돈사지 전경과 삼층석탑  ⓒ 2007 한국의산천 

거돈사지의 너른 터는 다른곳과 달리 황량함보다는 빈 자리가 주는 충만함이 느껴지는 곳이다. 잘 정비된 탓만은 아닐것이다.

 

 

▲ 원공국사승묘탑비(圓空國師勝妙塔碑)(보물 제78호) ⓒ 2007 한국의산천 (사람의 키(160~180cm)는 모든 길이와 축척의 기본이 아닐까요? 풍경이나 전경, 탑을 촬영 할때 사람을 포함시켜 촬영하면 전체 규모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됩니다 -산천생각-)

 

3층석탑으로부터 동쪽(오른쪽) 약 100미터 되는 지점에 원공국사승묘탑비(圓空國師勝妙塔碑)(보물 제78호)가 있다. 현종(顯宗) 6년(1025)에 건립된 이 비는 최충(崔충)이 문장을 짓고, 김거웅(金巨雄)이 글씨를 썼다.

원공국사 지종(圓空國師 智宗)(930∼1018)은 17세에 계를 받고 고려 광종(光宗) 초기의 승과(僧科)에 급제한 뒤, 중국에 유학하여 법안종(法眼宗)을 배웠다.

당시 남중국에서 크게 유행하던 법안종은 선종(禪宗) 계통이면서도 교선일치(敎禪一致)를 표방하였다. 이러한 교리는 당시 전제왕권 수립을 위해 적극적으로 개혁정치를 펴던 광종의 관심을 끌게 되었으며, 지종은 광종의 비호를 받으면서 법안종 세력을 고려 불교계에 크게 떨치게 되었다.

그러나 광종이 사망하자 그의 급진적인 개혁정치가 좌절되면서 법안종 세력은 급속도로 약화되었고, 지종도 89세인 1018년 거돈사에서 사망하였다.

 

거돈사는 고려 초기의 불교계를 주도해 나가던 법안종의 중심사찰 역할을 하였으며, 이러한 시대적 분위기 아래 이 절이 크게 중창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고려 중기에 대각국사 의천(大覺國師 義天)이 개창한 천태종(天台宗)이 널리 유행하면서 거돈사는 천태종 사찰로 흡수되었다. 현종 때 왕사(王師)로 책봉되었던 지종은 사후 원공국사(圓空國師)로 추증되었으며, 탑비와 함께 비의 서쪽 기슭에 부도가 건립되었다.

 

원공국사승묘탑(圓空國師勝妙塔)(보물 제190호)이라고 불리는 이 부도는 일본인들이 옮겨간 것을 해방 후 다시 찾아 현재 서울 경복궁 뜰에 서 있으며, 원래 부도가 있던 자리에는 지대석(地臺石)과 함께 간단한 표지석만 남아 있다.

 

 ▲ 간결하게 잘 생긴 삼층석탑 ⓒ 2007 한국의산천

 

 

노거수 느티나무에서 바라 본 거돈사지 입구 석축 ⓒ 2007 한국의산천

폐사지는 기록은 전하지만 현재 터만 남은채 사찰이 황폐해져 버린 곳을 말한다. 폐사지는 사찰이 조성됐을 당시의 건축문화와 이후 중건을 거친 이후의 변화된 유구, 그리고 사찰 생활문화의 흔적이 남아 있는 소중한 곳이다.

 

지족불욕(知足不辱) 만족할 줄 알면 욕됨이 없고,

지지불태(知止不殆) 그칠 줄 알면 위태롭지 않으니 

가이장구(可以長久) 오래도록 편안할 것이다.  - 노자 도덕경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