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룡사지 보각국사 정혜원융탑,비, 석등 돌아보기
답사 2007년 10월 16일.날씨 아침 안개 자욱 흐림, 맑음
문막에서 시작해서 목계나루터까지.남한강변의 유명한 3대 폐사지 법천사지, 거돈사지, 청룡사지 답사
국보 제197호 청룡사 보각국사정혜원륭탑(靑龍寺普覺國師定慧圓融塔)
보물 제656호 청룡사 보각국사정혜원륭탑전사자석등(靑龍寺普覺國師定慧圓融塔前獅子石燈)
보물 제658호 청룡사 보각국사정혜원륭탑비(靑龍寺普覺國師定慧圓融塔碑)
▲ 거돈사지에서 나와서 남한강을 끼고 청룡사로 이동ⓒ 2007 한국의산천
▲ 충주 소태면 ⓒ 2007 한국의산천
충주 소태초교, 면사무소 파출소가 있는 번화가 面이다. 이곳에서 약 3km 북쪽으로 들어간다.
▲ 이정표가 있는 삼거리에서 왼쪽길을 따라 약 700m에 주차장이 있다.ⓒ 2007 한국의산천
▲ 주차장에서 왼쪽의 작은 계곡 옆으로 소로길을 따라 들어가면 바로 청룡사 위전비가 나옵니다.ⓒ 2007 한국의산천
입구에서 50m 정도 걸으면 답사를 할 수 있습니다.
청룡사가 언제, 누가 창건하였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다만 창건 설화는 전해져 내려오는데 어느 화창한 봄날 도승이 지나가다가 소나기를 만나 나무 밑에서 비를 피하고 있었는데 하늘에서 용 두 마리가 여의주를 갖고 놀다가 땅에 떨어뜨렸다고 합니다.
용 한 마리가 떨어진 여의주를 향해 내려오다가 청계산 위로 올라갔고 여의주와 용이 사라지면서 비가 멎었습니다.
도승은 산세를 자세히 살펴보니 이곳이 비룡상천형(飛龍上天形)의 명당이므로 용의 꼬리에 해당하는 곳에 암자를 짓고 청룡사라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 청룡사 위전비 ⓒ 2007 한국의산천
청룡사 위전비 (충주시 유형문화재 제242호) 크기 : 비신높이 140cm, 너비 69cm, 두께 23cm 시대 조선시대
귀부에 비신을 세우고 가첨석을 올려놓은 모습으로 가첨석의 일부가 파손된 것을 제외하면 보존상태는 양호한 편이다.
비문에는 사찰의 경영을 위하여 신도들이 출원한 내용을 기록하고 있는데 음기에 시주한 불자들의 이름과 출원품의 양이 명시되어 있고 이 비를 세운 대표자는 통정대부 崇徽로 되어 있다. 사원경제 분야의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비 지붕돌의 왼쪽이 떨어져 나갔고 귀부는 온통 이끼로 씌어져 있습니다.
귀부의 모습은 순한 개의 모습 같기도 하고 어수룩하고 귀여운 느낌듭니다.
위전비를 지나 더 위로 올라가면 적운당 이라 적힌 종형부도 1기와 지대석, 8각 지붕돌 등의 부도 부재가 나타납니다.
▲ 순하고 착하게 생긴 청룡사지 위전비 이수 ⓒ 2007 한국의산천
귀부의 모습은 순한 개의 모습 같기도 하고 어수룩하고 귀여운 느낌듭니다.
▲ 청룡사 종형부도 ⓒ 2007 한국의산천
▲ 청룡사 종형부도 ⓒ 2007 한국의산천
충주청룡사지석종형부도(忠州靑龍寺址石鐘形浮屠)
충주시문화재자료 제54호
소재지 충북 충주시 소태면 오량리 산32
시대 조선시대
정사각형의 지대석위에 각형 괴임대가 새겨진 하댓거을 놓고 호감암의 석종형탑신을 올렸다.
탑신 윗부분은 복발모양으로 조각하여 정상부에 3단의 돌출부부을 조식하였고 탑신부 가운데에 부도의 주인공을 새겨놓았는데 '寂雲堂舍利塔'으로 보여진다
▲ 팔각부도 부재석 ⓒ 2007 한국의산천
부도를 지나 조금 더 올라 가면 평지보다 조금 높은 터에 자리잡은 청룡사지의 보각국사 석등, 부도, 부도비가 일렬로 서있는 곳이 나옵니다.
▲보각국사 석등, 부도, 부도비 ⓒ 2007 한국의산천
보각국사(1320∼1392)는 고려 후기의 승려로 12세에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으며, 이후 불교의 경전을 두루 연구하여 높은 명성을 떨쳤다.
우왕 초에 송광사(松廣寺) 주지를 지내고 1383년(우왕 9) 국사(國師)가 되었다.
조선 태조 원년(1392)에 7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자, 태조가 왕명으로 탑을 짓게 하여 권근(權近)이 비문을 짓고 김천택(金天澤)이 글씨를 써서 1394년(태조 3)에 세우고 탑명을 정혜원융(定慧圓融)이라 하였다. 무너져 있던 것을 1968년 복원하였다.
▲ 보물 제656호 청룡사보각국사정혜원륭탑전사자석등(靑龍寺普覺國師定慧圓融塔前獅子石燈) ⓒ 2007 한국의산천
보물 제656호 청룡사보각국사정혜원륭탑전사자석등(靑龍寺普覺國師定慧圓融塔前獅子石燈) 소재지 충북 충주시 소태면 오량리 산32
시대 조선시대
청룡사는 언제 창건되었는지 뚜렷하게 알 수 없고, 현재 절의 옛모습을 짐작해 볼 방법이 없다.
옛터에는 석등과 함께 보각국사의 사리탑과 탑비만이 서 있을 뿐이며, 현재의 청룡사는 옛터의 북쪽에 자리잡아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석등은 보각국사의 명복을 빌어 주기 위해 그의 사리탑 앞에 세워진 것으로, 불을 밝혀두는 화사석(火舍石)을 중심으로 아래에는 이를 받쳐주는 3단의 받침을 두고, 위로는 지붕돌과 머리장식을 얹었다.
3단의 받침 가운데 아래받침돌은 앞을 향해 엎드려 있는 사자를 조각하였는데, 이 때문에 사자석등이라 부른다.
사자의 등에 얹어진 가운데받침은 기둥모양으로 4각의 낮은 돌을 두었다. 화사석은 4각으로, 네 모서리를 둥근기둥처럼 조각하였고, 앞뒤로 2개의 창을 내었다.
지붕돌은 네 귀퉁이마다 자그마한 꽃을 돌출되게 조각해 놓았으며, 낙수면의 경사가 급하고 네 모서리선이 두터워 고려시대의 지붕돌 양식을 잘 보여준다.
절터에서 석등을 사리탑, 탑비와 나란히 세운 것은 조선시대의 배치방식이다.
탑비에 새겨진 기록으로 미루어 이 석등은 조선 전기인 태조 1년(1392)부터 그 이듬해인 1393년에 걸쳐 세워진 것으로 추측된다.
조선왕조< 朝鮮王朝 > 태조< 太祖 > 3년(1394)에 왕명< 王命 >으로 세워진 보각국사비< 普覺國師碑 >와 보각국사정혜원륭탑< 普覺國師定慧圓融塔 >과 함께 있는 것으로 보아, 같은 시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측된다.
석등< 石燈 >의 하대석< 下臺石 >은 희귀한 예로서 경주< 慶州 > 남산< 南山 > 천룡사지귀부< 天龍寺址龜跌 >와 같은 형식으로 한 마리의 사자< 獅子 >가 앞을 향해 엎드려 있다.
간주석< 竿柱石 >을 비롯하여 화사석< 火舍石 > 옥개석< 屋蓋石 >은 방형< 方形 >으로 고려< 高麗 > 이후< 以後 >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다. 조형미< 造形美 >가 부도< 浮屠 >와는 수법의 차이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 국보 제197호 청룡사보각국사정혜원륭탑(靑龍寺普覺國師定慧圓融塔) ⓒ 2007 한국의산천
국보 제197호 청룡사보각국사정혜원륭탑(靑龍寺普覺國師定慧圓融塔)
소재지 충북 충주시 소태면 오량리 산32
시대 조선시대
청계산 중턱의 청룡사에 자리한 부도로, 보각국사의 사리를 모셔놓았다.
보각국사(1320∼1392)는 고려 후기의 승려로, 12세에 어머니의 권유로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으며, 이후 불교의 경전을 두루 연구하여 높은 명성을 떨치었다.
특히 계율을 굳게 지키고 도를 지킴에 조심하였으며, 문장과 글씨에도 능하였다. 조선 태조 원년(1392)에 73세의 나이로 목숨을 다하자, 왕은 '보각'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탑이름을 ‘정혜원륭’이라 내리어 탑을 세우도록 하였다.
탑은 전체가 8각으로 조성되었는데, 바닥돌 위에 아래·가운데·윗받침돌을 얹어 기단(基壇)을 마련하고 그 위로 탑몸돌과 지붕돌을 올려 탑신(塔身)을 완성하였다.
기단은 모서리를 둥글게 처리한 8각으로, 아래받침돌에는 엎어놓은 연꽃무늬를, 윗받침돌에는 솟은 연꽃무늬를 새겼다. 가운데돌에는 사자상과 구름에 휩싸인 용의 모습을 교대로 새겼다.
탑신의 몸돌은 각 면마다 무기를 들고 서 있는 신장상(神將像)을 정교하게 새겨 놓았으며, 그 사이마다 새겨진 기둥에는 위로 날아오르는 이무기의 모습을 역동적으로 표현하였다. 지붕돌은 여덟 귀퉁이에서 높이 들려있는데 마치 목조건축의 아름다운 지붕 곡선이 살아난 듯하다.
태조 3년(1394)에 완성을 보게 된 이 부도는 양식상 종모양이 주류를 이루던 시기에 8각의 평면을 이루는 형식으로 건립된 몇 안되는 부도 가운데 하나로, 조선시대 전기 조형미술의 표본이 되는 귀중한 유물이다.
또한 탑 가득히 새겨진 조각과 둥글게 부풀린 외형이 어우러져 화려함을 더해주고 있다. 탑신의 기둥과 지붕의 곡선, 그리고 지붕 귀퉁이의 용머리조각 등에서 목조건축의 양식을 엿볼 수 있어 당시의 건축과 비교하여 감상할 만하다.
이 부도(浮屠)는 고려말(高麗末)의 고승(高僧)인 보각국사(普覺國師)(1320∼1392)의 묘탑(墓塔)이다. 편평한 대지에 잘 다듬어진 장대석(長臺石)으로 1단의 축대를 쌓고 그 중앙에 팔각원당형(八角圓堂型)의 부도(浮屠)를 건립(建立)하였다. 기단부(基壇部)는 복련(覆蓮)을 새긴 하대석(下臺石)과 안상(眼象) 안에 사자상(獅子像)과 운룡문(雲龍紋)을 새긴 중대석(中臺石), 그리고 앙련(仰蓮)을 새긴 상대석(上臺石)으로 이루어졌다.
탑신부(塔身部)는 반룡(蟠龍)이 감긴 엔타시스의 우주(隅柱)를 조각하였고 그 위에는 창방(昌枋)을 표현하였다. 그리고 각면(各面)에는 무기를 든 신장상(神將像)이 1구(一軀)씩 양각되어 있다.
옥개석(屋蓋石)은 밑면 처마에 탑신(塔身) 우주(隅柱) 위의 창방(昌枋)머리와 접촉되는 부분이 보머리형을 이루고 있으며 추녀와 사래를 양각하였고 연화문(蓮華紋)을 조각하였다.
옥개석(屋蓋石)의 낙수면(落水面)은 상단부가 급경사이며 기왓골은 없으나 각 합각(合角)마루에 용두(龍頭)를 조각하였다. 옥개석(屋蓋石) 정상(頂上)에는 복련(覆蓮)을 조각하여 상륜부(相輪部)를 받치고 있다. 상륜부(相輪部)는 복발(覆鉢), 보륜(寶輪), 보주(寶珠)가 남아 있다.
탑신(塔身) 우주(隅柱)의 엔타시스와 창방(昌枋)의 조각, 옥개석(屋蓋石)의 보머리형 조각, 추녀와 사래의 표현, 지붕 합각부의 용두(龍頭)조각 등은 당시의 목조가구(木造架構)를 잘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부도(浮屠)의 앞에는 배례석(拜禮石)이 있고 주위에 탑비(塔碑)와 사자석등(獅子石燈)이 있다.
▲ 사자석등 사이로 본 정헤원융탑 ⓒ 2007 한국의산천
▲ 청룡사보각국사정혜원륭탑에 새겨진 무사의 모습 ⓒ 2007 한국의산천
▲ 청룡사보각국사정혜원륭탑에 새겨진 어린 동물과 어미의 모습 ⓒ 2007 한국의산천
▲ 보물 제658호 청룡사보각국사정혜원륭탑비(靑龍寺普覺國師定慧圓融塔碑) ⓒ 2007 한국의산천
보물 제658호 청룡사보각국사정혜원륭탑비(靑龍寺普覺國師定慧圓融塔碑)소재지 충북 충주시 소태면 오량리 산32
시대 조선시대
청룡사 옛터에 남아 있는 비로, 고려 말에서 조선 초에 활약한 승려인 보각국사를 기리기 위해 세웠다.
보각국사 혼수(1320∼1392)는 도를 지킴에 조심하고, 특히 계율을 따를 것을 강조하였으며, 문장과 글씨에도 능하였다.
12세에 출가하여 22세 때에는 승과에 급제하였으며, 29세 때에는 금강산으로 들어갔다가 이후 청룡사로 옮겨가 머물렀다. 여러 명산을 두루 돌아다니며 수도하다가 조선 태조 1년(1392) 청룡사로 돌아와 73세에 입적하니, 태조는 시호를 내려 ‘보각국사’라 하고, 탑이름을 ‘정혜원융’이라 하였으며, 청룡사에 대사찰을 조성하도록 하였다.
비는 1장의 돌로 된 네모난 받침돌 위에 비몸돌이 서 있는데, 위로 머릿돌을 따로 얹지 않고, 몸돌 양 귀퉁이를 접듯이 깎아 마무리해 놓았다.
조선 태조 3년(1394) 문인선사 희달(希達)이 왕의 명을 받아 세운 것으로, 권근이 비문을 짓고, 승려 천택이 글씨를 썼다. 글씨에서는 힘이 느껴지고, 예스러운 순박함과 신비스러움이 함께 어우러져 있어 중국의 어느 명품에도 뒤지지 않을 만큼 품격을 지니고 있다.
이는 이후 조선시대를 통하여 이에 대적할 만한 것이 없을 만큼 돋보이는 면이라 할 수 있다.
▲ 왼쪽으로 부터 국보 제197호 청룡사 보각국사정혜원륭탑, 보물 제658호 청룡사 보각국사정혜원륭탑비, 보물 제656호 청룡사 보각국사정혜원륭탑전사자석등 ⓒ 2007 한국의산천
법천사지 >>> https://koreasan.tistory.com/12777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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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룡사지 >>> https://koreasan.tistory.com/12777457
지족불욕(知足不辱) 만족할 줄 알면 욕됨이 없고,
지지불태(知止不殆) 그칠 줄 알면 위태롭지 않으니
가이장구(可以長久) 오래도록 편안할 것이다. - 노자 도덕경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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