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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TB등산여행

반차도 청계천 벽화

by 한국의산천 2007. 5. 5.

청계천에 그려진 능행 반차도  

[ 답사 2007. 5. 5. 한국의산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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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최대규모의 도자기 벽화 정조대왕 능행 반차도(正祖大王 陵行 班次圖) 

 

 

▲ 5월 5일 어린이 날을 맞아 행사준비중인 청계천 ⓒ 2007. 한국의산천 우관동

 

  

▲ 반차도 소개 벽화 ⓒ 2007. 한국의산천 

 

행 반차도는 조선 22대 왕인 정조가 1795년 윤2월 아버지 선친인 사도세자의 회갑을 맞아 어머니 혜경궁 홍씨를 모시고 아버지 묘소인 현륭원(顯隆園)에  다녀와 만든 8일간의 행차보고로 왕의 행차가 창덕궁을 떠나 광통교를 건너 화성으로 가는 모습을 판각화로 그린 의전행렬을 의전행렬을 상세하게 기록한 그림이다

 

원본은 왕의 행차가 창덕궁을 떠나 광통교를 건너 화성으로 가는 모습을 당대의 궁중화원 김홍도와 김득신, 이인문,장한종,이명규 등이 정조의 어명에 의하여 2년여에 걸쳐 완성한 가로 15m 세로 18m 로 낙천적이고 자유분방한 묘사로 1779명의 사람과 779필의 말이 표현돼 있다.  당시 행차 격식과 복식.의상.악대 구성 등 궁중문화를 살필 수 있는 소중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반차도 (班次圖)란 

궁중의 각종 행사 장면을 그린 그림으로 반열도(班列圖) 또는 노부도(鹵簿圖)라고도 한다. 반차는 의식에서 문무백관이 늘어서는 차례를 말한다. 의궤도(儀軌圖)의 일종으로 연을 중심으로 늘어선 관원들의 정확한 배치상이 풍속적인 성격을 띤 기록화이다  

  

  

▲ 벽화 반차도에 그려진 서울의 옛지도  ⓒ 2007. 한국의산천

 

 

 

▲ 도자기 벽화 반차도 (벽화 길이 186m) ⓒ 2007. 한국의산천

 

조선시대 '정조대왕 능행 반차도'를 세계 최대규모의 도자벽화로 만들어 청계천 광교와 삼일교 사이 (조흥은행 본점∼삼일빌딩) 좌측 석벽에 원본 그림의 세부 부분을 확대해 그린 백자 도판 5천여장을 이어 붙여 만들었으며, 벽화는 작은 백자도판(30㎝×30㎝) 4960장을 이어 붙였으며 길이 186m,높이 2.4m 크기다.

 

작품의 구성은 1.프롤로그 2.서울의 옛 지도인 수선전도 3.반차도 4. 에필로그의 4개 부분으로 되어있으며 관람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한글과 영문으로된 해설판을 작품에 맞추어 10개소를 설치했다.

   

반차도는 조선 정조 임금이 1795년 윤2월 아버지 사도세자의 회갑을 기념하기 위해 모친 혜경궁 홍씨를 모시고 수원 화성에 다녀올 때의 의전행렬을 상세하게 기록한 그림이다. 

벽화 제작 기간은 5개월, 비용은 15억원이 든 것으로 전해졌다. 

 

원본은 왕의 행차가 창덕궁을 떠나 광통교를 건너 화성으로 가는 모습을 당대의 궁중화원 김홍도와 김득신, 이인문,장한종,이명규 등이 정조의 어명에 의하여 2년여에 걸쳐 완성한 가로 15m 세로 18m 로 낙천적이고 자유분방한 묘사로 1779명의 사람과 779필의 말이 표현돼 있다.

 

 

▲ 반차도 벽화 앞부분  ⓒ 2007. 한국의산천 

 

정조의 능행 
단순히 능행의 의미를 넘어서 백성들앞에서 군주의 위엄을 보이고, 백성들의 생활상을 보며 말을 직접 듣는데 의의가 있다. 백성들이 징을 치거나 소리를 질러 왕에게 억울한 사연을 말할수 있었고, 정조의 경우는 처리한 횟수만도 5000천건에 이를 정도라고 전한다. 
특히 화성으로 사도세자의 묘를 옮기면서 능행거리가 늘어나고 배다리와 화성을 건설하는 등의 선진과학의 시험대가 되기도 했다. 

 

  

▲ 벽화 반차도 중간 부분 ⓒ 2007. 한국의산천  

 

수원 화성으로 가는 길에 비가 내렸다. 정조임금은 시중과 신하들을 돌아보며 이렇게 말했다. 

 

" 오늘 온 비에 군병들의 옷이 젖은것은 민망한 일이지만 이번의 행차야 말로 지극히 성대한 거조이고 이 예야 말로 크나큰 의절(儀節)이니 모든일이 다 원만하게 되기를 구할 필요는 없다.

잠깐 비가 왔다가 개면서 앞길을 깨끗이 청소해 주었으니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더구나 농삿일이 시작될 즈음에 토지를 적셔 주었으니 어찌 농부에게 기쁜일이 아니겠는가" 라고 말씀하셨다.   

 

 

▲ 벽화 중간부의 혜경궁 홍씨 가마 (자궁가교) ⓒ 2007. 한국의산천 

 

 

▲  단원 김홍도의 낙천적인 모습 화풍이 보이는 반차도 대신들. ⓒ 2007. 한국의산천 

 

단원 김홍도  (1745 - ?)

단원 김홍도는 조선시대의 화가 중 가장 훌륭한 화가의 한 사람으로 꼽힌다. 산수화, 인물화, 등에 두루 뛰어났던 그는 중국의 화풍을 모방하는 화법에서 벗어나 우리 민족의 정서에 맞는 독특한 화법을 이룩하였다. 특히 서민들의 생활 속에 파고들어 그들의 삶의 모습을 그려 낸 작품들은 당시의 생활상을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단원 김홍도는 7~8세부터 20세까지 안산에서 표암 강세황으로부터 그림과 글 수업을 받았으며 뛰어난 그림실력을 인정받아 정조대왕의 부름을 받고 조정에 들어가 어상(왕의 용안)은 물론 궁내의 주요 행사를 그리는 작업과 정조의 명을 받아 금강산을 그림을 그리고 사도세자의 넋을 위로하기 위하여 세운 용주사에 후불탱화를 그리는데 지도하기도 하였다. 40대에는 안동지역의 현감으로 임명돼 안기철방(교통요충지 관할업무)직을 수행 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계속되는 가뭄으로 농민의 생활이 어려워지자 벼슬에서 물러난 후 어려운 생활을 하였다고 전한다. 

말년에는 병과 가난으로 많은 고생을 하며 그 후의 행적은 알려지지 않은 채 세상을 떠났다.

 
김홍도는 당대의 천재적 소질을 인정받아 '어진화가' 로 대성, 명성을 떨쳤으며 주요 작품은 정승자리하고도 바꾸지 않는다는 '삼공불환도'와 한국의 해학과 정취가 가득찬 25명의 구성된 '풍속화첩', 말을 타고 가다 꾀꾀리 소리에 멈췄다는 "마상청앵도' 등이 있다. 
 

  

▲ 정조대왕의 가마인 정가교 ⓒ 2007. 한국의산천  

 

  

▲ 맑은 물이 흐르는 청계천 ⓒ 2007. 한국의산천

 

 

▲ 반차도 원본 이미지  ⓒ 2007. 한국의산천 

 

정조 반차도 조선 22대 왕 정조가 정조 19년 1795년 윤 2월 9일 ~16일 까지 8일간 어머니 경의왕후(敬懿王后: 혜경궁 홍씨)의 환갑을 기념하여 아버지 장헌세자(莊獻世子 : 사도세자) 가 묻힌 화성 현룽원으로 행차하는 모습을 그린 그림으로 '화성행차도라고 불리며, 당대의 궁중화원 김홍도와 김득신, 이인문,장한종,이명규 등이 정조의 어명에 의하여 2년여에 걸쳐 완성한 가로 15m 세로 18m 에 이르는 귀중한 문화유산이다. 

 

반차도에서 어머니의 가마를 앞세우고 뒤따라 가는 모습에서 어머니 혜경궁 홍씨를 극진히 모신는 정조대왕의 효심이 엿보인다.



 

▲ 혜경궁 홍씨의 가마 (자궁가교) ⓒ 2007. 한국의산천  

혜경궁 홍씨의 가마인 자궁가교의 뒤에 정조대왕이 타는 말이 따르고 있다. 

  

 

▲ 반차도의 혜경궁 홍씨 가마 부분 확대 ⓒ 2007. 한국의산천  ⓒ 2007. 한국의산천

 


 

▲ 혜경궁 홍씨 가마 뒤로 정조임금의 좌마(座馬)가 뒤를 따른다.  ⓒ 2007. 한국의산천 

 

좌마에 정조대왕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덩그러니 말 한필(座馬: 좌마)과 옆에서 햇빛을 가려주는 사람만 보인다  왕의 모습은 함부로 그리지 못했다고 한다.황금색 좌마 옆에는 우산같은 그늘막을 든 신하가 뒤에는 부채를 든 신하가 따르고 있다. 말고삐를 쥐고 가는 배를 내민 마부의 모습도 흥미롭다. 행렬의 앞부분에는 경기감사가 길 안내를 하고 있다. 

화성으로 가는 길
화성으로 가는 도중 비가 내렸다. 조금이라도 험한 길이 나오면 정조는 매번 말에서 내려 혜경궁의 가마 앞으로 나가 안부를 물었다. 어의가 비에 젖는 것은 상관하지 않았다고 전한다. 

 

화성에 도착하여 여러 예식을 차례로 치루면서 정조가 의식에 따라 절을 마치자 정조가 지은 어제 장락장(長樂章)을 부르고 어머니에게 머리를 세번 조아리고 천천세를 불렀다.

 

"긴긴 봄날 장락궁에서 술잔을 올리며, 세차례의 축원을 올리옵니다. 자손에게 끼쳐주신 어머님 은혜, 그 무엇이 이보다 높으리까. 복록이 풍성하게 넘쳐흐르며 찬란하게 빛나옵니다.함지(咸池)의 북소리에 운문(雲門)의 거문고,신선주 따라 올리며 해마다 축원하오리다. 

 

정조가 머리를 세번 조아리자 다시 여집사가 외쳤다.

"천세(千歲)를 불러야 합니다".

 

정조가 손을 마주잡고 이마위에 올리며 '천세'를 축원했다.

 

여집사가 또 '천세를 불러야 합니다'라고 외치자, 다시 천세를 축원했고, 또 '거듭 천세를 불러야 합니다'라고 외치자 정조가 '천천세'를 외쳤다.

 

정조가 천세를 부를 때마다 내,외명부와 여관들이 모두 선자리에서 일제히 소리쳐 호응하고 악대가 낙양춘곡을 연주했다.

여민락의 환환곡과 청평악,오운개서조곡등이 연주되는 가운데 음식상과 술상이 차려졌다.계속이어지는 가무속에 정조가 연회의 마지막 노래를 불렀다.

 

"자궁의 덕 순일함이여. 대지와 같아 표현하기 어려워라 ... 아 어머니의 덕 아름다워라, 이번에 회갑을 맞으셨도다. 화창한 이 시절의 완상(玩賞)함이여, 만물이 어울려 화락하도다. 새로지은 고을에서 기쁨을 누림이여, 집집마다 노랫소리 울려 퍼지도다. 떠오르는 저 해와 달처럼 천년토록 오래 사소서".[이덕일 역사서 참고]

  

그날 혜경궁 홍씨는 감격했다고 전한다. 

 

정조대왕의 지극한 효심과 효행길 풍경

본래의 목적은 사갑(死甲)을 맞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현륭원 참배였지만 어머니 혜경궁 홍씨 환갑을 맞아 어머니에 대한 효심을 한것 표현하였다. 

 

부모에 대한 효도를 몸소 실천하는 정조대왕의 지극한 효심이 그림처럼 떠오른다.
내 부모님이 다시 살아 오신다면 불효만 했던 내가 다시 저렇게 효도를 할 수 있을지...

 

5월 가정의 달에 다시 한번 부모를 공경하고 자식을 사랑해야한다는 도리를 되새겨 보았습니다.[한국의산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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