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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거친호흡 몰아쉬며 ^^ 굽이치는 산맥넘어 손의 자유, 발의 자유, 정신의 자유를 찾는다. 기억은 희미해지기에 이곳에 기록을 남긴다
MTB등산여행

박광희님 사진 찾아가세요.

by 한국의산천 2007. 5. 6.

 

▲ ⓒ 2007 한국의산천 

 

목계나루   

 
여주에서 38번 자동차 전용도로를 타고 가다가 19번 도로로 접어들기 위해서 오른쪽으로 새로 길게 지어진 목계대교가 지나는 남한강 상류를 보며 목계교를 건너니 오른쪽으로 목계나루터라는 커다란 입석이 서있다. 그리고 이곳이 번성했던 그 예전의 <목계나루터>라는 표석과  그옆에는 이곳 가까운 노은면 출생이신 신경림 시인의 시 <목계장터 詩碑>와 ’ 판화가 이철수가 신경림의 시집 목록을 새긴 碑가 서있다. 
 
남한강 목계나루는 나라의 세금을 거둬들이는 수곡선이 들어갈 수 있는 남한강 수운의 종점이었다. 곡식 사백 가마니를 실은 배 20여 척이 서로 교차할 수 있었고, 나루 건너편에 세금으로 거둬들인 곡식을 보관하는 가흥창이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그 자리에 몇채의 민물매운탕집이 있을 뿐이다.
 

 

 

▲ 신경림 시비 (상세히 보시려면 이미지를 클릭하세요.) ⓒ 2007 한국의산천  

  

  

▲ 신경림 시비 ⓒ 2007 한국의산천 

 

다시쓰는 택리지 충청도 목계장터(1권, 344-345쪽)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목계는 동해의 생선과 영남 산간지방의 화물이 집산되며, 주민들은 모두 장사를 하여 부자가 된다”고 하였다. 서울에서 소금배나 짐배가 들어오면 아무 때나 장이 섰고, 장이 섰다 하면 사흘에서 이레씩이었다고 한다. 그처럼 번성했던 목계장터는 1920년 후반 서울에서 충주 간 충북선 열차 개통으로 남한강의 수송기능이 완전히 끊어지면서 규모가 크게 작아졌다. 1973년에 목계교가 놓이면서 목계나루의 나룻배도 사라져 목계장터는 쇠퇴의 길로 접어들었다.

신라와 고구려를 지난 남한강 물줄기는 장미산성을 크게 휘돌아 흐르며 목계나루로 이어진다. 목계나루는 강물이 말라붙은 갈수기에도 언제나 배가 드나들 수 있는 남한강 수운의 가항종점(可航終点)이었다. 조선 시대에 재정 확보를 위해 거둔 쌀과 베 따위를 보관하는 창고인 가흥창(可興倉)도 이 곳에 있었다.

 

일제 시대까지만 해도 목계나루엔 인천항에서 소금, 건어물, 젖갈류, 생활 필수품 등을 싣고 온 황포돛배가 수십 척씩 붐볐다. 이런 물건들은 내륙 지방인 충청도와 강원도, 그리고 백두대간 너머 경상도의 문경과 상주 각지로 팔려 나갔다. 당시 뱃일하는 인부만도 500여 명이나 되었다 하니, 나루와 이어진 목계장터는 언제나 시끌벅적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젠 모두 옛 일에 불과하다. 위용을 자랑하던 조창은 모두 허물어졌고, 주변엔 주춧돌 몇 개와 깨진 기왓장만이 뒹굴고 있을 뿐이다. 강나루의 흔적마저도 모래를 퍼내고 강 언덕에 축대를 쌓으면서 형편없이 변했다. 또 늘상 인파로 북적거렸을 목계장터는 지금은 골동품 가게와 수석 가게들만이 을씨년스러운 풍경화를 연출할 뿐이다.

 

목계나루에서 20리쯤 떨어진 노은면 연하리에 태를 묻은 신경림 시인에게 목계나루는 소중한 추억의 장소다. 시인은 광복 이듬해인 초등학교 4학년 때 목계나루 솔밭으로 소풍을 갔다가 목계장터를 보곤 강렬한 인상을 받게 된다. 당시까지만 해도 목계나루는 제법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는 시인의 기억 속에 오랫동안 이어지다가 마침내 ‘목계장터’라는 명시로 열매를 맺는다.

 

 

ⓒ 2007 한국의산천  

 

중원탑 평리 칠층석탑에서

 

 

▲ 중앙탑이라 불리는 중원 탑평리 7층 석탑 ⓒ 2007 한국의산천

 

국보 제 6호로 지정되었으며 탑 앞에 석등이 꽂혔을 법한 팔각연화대석이 있다. 

 

삼국시대의 중원(中原) 남한강 유역의 중원(中原) 지방은 본래 마한에 속한 지역이었다. 근초고왕 때 백제가 마한을 평정하고 이 지역은 백제에 복속되어 '낭자곡성(娘子谷城)'으로 불리웠다. 그런데 고구려의 광개토대왕(혹은 장수왕) 때에 고구려의 영토로 편입되었고, 장수왕 63년(A.D 475)에 고구려에 전속되어 '국원성(國原城)'이라고 불렸다. 이에 대하여 <삼국사기> 지리지에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 팔각연화대석 ⓒ 2007 한국의산천


“중원경(中原京)은 본시 고구려의 영토로 이름을 국원성이라 하였다. 이를 신라가 평정하여 진흥왕 때 소경(小京)을 설치하였다. 문무왕 때 성을 쌓았는데 주위가 2천5백92보이다. 경덕왕 때 이를 고치어 중원경이라 하였으니 곧 지금의 충주이다.” 즉, 그 후 신라의 북진 정책으로 진흥왕 14년(A.D 553) 신라에 편입되어 경주의 귀척 자제와 6부 호민을 옮겨 살게 하였고, 진흥왕 34년(A.D 573)에는 소경부(小京府) 또는 사천성(四川省)이라 칭하여 큰 번영을 이루었고, 신라 경덕왕 원년(A.D 742)에 '중원경(中原京)' 또는 '태원(太原)'이라 칭하여 신라의 중앙임을 표방하였다.

중원(충주)은 남북의 요충지로서 고구려, 백제, 신라가 서로 차지하려고 각축을 벌인 곳이며 예로부터 양질의 철이 생산된 우리나라 3대 철산지 중의 한 곳이었다. 정치, 경제적으로 중요한 고장이라는 이유로 삼국의 각축장이 되었던 충주는 아직도 그 주변에 많은 흔적을 간직하고 있다.

 

중원 탑평리칠층석탑 ( 국보 제6호 1934년 8월 27일 지정)

소재지 충주시 가금면 탑평리 11번지 
규 모 높이 14,5m
자 료 석조(화강암)
시 대 통일신라
 

신라가 삼국통일 후 옛 고구려의 세력을 진압한다는 목적으로 세웠다는 탑평리7층탑으로 중앙탑으로도 불린다. 


이 탑은 통일 신라 때 이곳이 나라의 중앙임을 나타내기 위해 탑을 세웠다는 유래담이 전해오는 이곳은 충주일대 중원문화권의 한 중심으로 자리잡고 있다.

 
충북 충주시 가금면 탑평리에 있는 이 석탑은 위치가 통일신라시대 중앙부에 세워졌으므로 이 지방에서는 중앙탑이라 부른다.
현존 신라 석탑 중에서 규모가 가장 크다.'탑평리 칠층석탑'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국보 제6호로서 신라 원성왕 1년에 건립된 석탑으로 높이 14.5m로, 현재 남아 있는 신라의 석탑으로 최고의 석탑이며 통일신라 때의 중앙에 건립하였다 하여 중앙탑이라고 부른다 한다.


석탑의 구조는 이층 기단 위에 7층의 탑신을 형성하고 그 정상에 상륜부를 구성한 방형 중층의 일반형 석탑이다. 기단부는 10여 매의 장대석으로 구축한 지대석 위에 놓였는데 상하층의 면석과 갑석은 모두 여러장의 판석으로 만들었는데 이는 석탑의 규모가 크기 때문이다. 상·하 기단부 면석에는 탱주와 우주가 여럿 새겨져 있고, 각 기단 갑석 위에는 호형과 각형의 받침이 2단 있다. 옥신석 모서리에는 각층 모두 우주가 정연하게 모각되어 있고 옥개받침은 각층이 모두 5단이다. 상륜부에는 노반, 복발, 앙화가 있는데 특히 노반이 2개 겹쳐 있는 것이 특이하다.

1917년 해체 복원 때에 6층과 기단 밑에서 신라와 고려시대의 사리구가 발견되어 과거 여러 번의 중수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탑은 중원지방을 대표하고 있으며, 주변에 충주조정지댐, 고구려비 등 여러 문화유적과 더불어 역사의 산 교육장이 되고 있다. 특히 1992년 중앙탑 주변을 문화사적 공원으로 조성하여 충주박물관을 건립하고 향토자료전시관, 수석전시관 등을 건립하여 이곳에서 출토되고 있는 유물들을 한눈에 볼 수 있도록 하고 있다. 또한 중앙탑 주변은 잔디가 넓은데다 남한강을 끼고 있어 고요한 운치 속에서 휴식하기에 알맞은 공원으로 가족동반이 많으며 연인들의 휴식 장소로도 인기가 좋다.

 

 

ⓒ 2007 한국의산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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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 한국의산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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