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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거친호흡 몰아쉬며 ^^ 굽이치는 산맥넘어 손의 자유, 발의 자유, 정신의 자유를 찾는다. 기억은 희미해지기에 이곳에 기록을 남긴다
문화문학음악

봉곡사와 정약용의 인연

by 한국의산천 2007. 4. 2.

답사 코스

아산 온주아문,동헌 - 외암마을 - 봉곡사 - 봉수산 

(서울 성산대교에서 아산 봉곡사까지 123km . 1시간 50분 소요/아침 5시 출발)

[2007. 4. 1일. 일요일 날씨 지독한 황사와 흐림    한국의산천 ]

 

봉곡사와 다산 정약용의 인연 

 

봄꽃이 아직 이른 초봄. 황사가 지독히 불어대는 날 배낭을 메고 봉곡사를 다시 찾게 된 이유는 얼마 전 구입한 이덕일 著 <정약용과 그의 형제들>이라는 책을 읽다가 그곳에 봉곡사가 언급되었다. 정약용 선생님이 이곳에 들르셨다는 글이 눈을 다시금 반짝 뜨이게 했습니다.  

 

파란 만장한 고초를 겪으며 그에 굴하지 않고, 방대한 저술과 인간 중심의 사상으로 현실에 맞는 실학과 선진 과학 문물을 받아들였던 실학자.

제가 평소 존경하는 분 정약용 선생님이기에...

 

다산 정약용과 봉곡사에 관한 인연에 대해 소개합니다.

 

내가 알고 있는것은 남도 알고있다.

그러나 남이 알고있는 것을 내가 모르는 경우가 많다. 그렇기에 오늘도 길을 떠난다. - 한국의산천-  

  

참고

봉곡사 송림  http://blog.daum.net/koreasan/11176794

성호 이익기념관  http://blog.daum.net/koreasan/7045721
정약용 생가 
http://blog.daum.net/koreasan/3000770
봉곡사의 봄 
http://blog.daum.net/koreasan/1728123 

 

  

 

▲ 봉곡사 입구의 아름다운 송림 길 ⓒ 2007. 한국의산천  

 

봉곡사와 다산
1795년 겨울, 정3품 당상관에서 종6품 금정찰방으로 좌천된 다산은 온양 서암(봉곡사)에서 목재 이삼환등 13명의 실학자들과 10일동안 봉곡사에서 강학회를 열었다.다산은 그때의 일을 서암강학기(西巖講學記)에 남겨두었다.  

 

※ 여기서 금정이란 충청도 홍주에 소속된 역원(驛院)을 말한다.
 

성호 이익 학술 추모대회 (지금으로부터 212년전의 일이다)

찬란하게 빛나는 성호선생님  

 

금정으로 좌천된 다산 정약용은 오랫만에 한가로운 시간을 가질수있었기에 오랫만에 얻은 시간을 성호이익의 문집을 정리하는 시간으로 삼았다. 마침 부근 예산의 감사(坎舍)에 이익의 증손자 목재(木齋) 이삼환(李森煥)이 살고 있었다. '찬란하게 빛나는 성호 선생님 (郁郁星湖子)이라고 성호의 호에다 '자(子)' 자를 붙일 정도로 사숙했던 정약용은 이삼환에게 편지를 보냈다.

 

 

 ▲ 작은 고찰 봉곡사 ⓒ 2007. 한국의산천  

 

 봉곡사 
충청남도 아산시 송악면 유곡리 봉수산 기슭에 있는 절로서 대한불교 조계종 제 6교구 본사 마곡사의 말사이다. 887년 (진성여왕)에 도선이 석가암이라는 이름으로 창건하였다. 조선시대 (1419년 세종 1)에 함허가 중창하였으며, 산 이름을 봉수산이라 하였다.   

 

1584년(선조 17) 3월 화암이 중수하여 봉서암으로 고쳐 불렀는데, 임진왜란 때 불에 타 폐사되었다. 그뒤 1646년(인조 24)에 중창하였으며, 1794년(정조 18) 경헌과 각준이 중수하고 지금의 이름인 봉곡사로 고쳤다.

1825년(순조 25)에는 요사를 중수하고 2층 누각을 신축하였으며, 1872년(고종 9) 서봉이 요사를 증축하였다. 1891년 다시 서봉이 법당을 중수하였으며, 1931년에도 한 차례 중수하였다.

 

 

" 연전에 선생님이 서울로 오셨을 때 너무 바뻐서 가슴속에 쌓여 있는 의심을 토로해서 대군자의 넓고 깊은 지식을 이끌어 내지 못한것이 늘 한스러웠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부임하여 머무른 곳이 마침 이곳이어서 선생님이 계신곳과 거리가 몇십리에 지나지 않아서 댁에 찾아가서 가르침을 배울 수 있게 되었으니, 평소에 품었던 아름다운 회포를 풀 수 있을지 위로 됩니다. -목재 이삼환 선생님께 올림니다-  "

 

 

 

 

그리고 성호를 기리는 강학회를 열자고 제안도 했다.

" 아아, 우리 성호 선생님 (星湖夫子)은 하늘이 내신 영걸스러운 인재로서 도(道)가 망하고 교화가 해이해진 뒤에 나셔서 회재(晦齋 : 이언적) 와 퇴계(이황)를 사숙하여 심성의 학문과 경제의 사업을 경위로 삼아 수백여편의 저서를 써서 후학들에게 아름다운 은혜를 베풀었습니다. .....어떻습니까? 성호의 문집을 간행하는 일에대해 이가환형과 상의 하시는지요?

 

정약용의 편지는 '가까운 절간에서 화합해' 성호의 사상과 문집을 정리하는 강학회를 열자는 것이었다.  

 

 

 

▲ 아담한 작은 절 봉곡사 좌로부터 향각전, 대웅전, 요사체  ⓒ 2007. 한국의산천 

 

정서하기 위한 종이를 비롯한 모든 경비 또한 자신이 대겠다는 것이었다.

종조부의 문집을 정리한다는데에 이삼환이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그래서 정해진 가까운 절간이 온양의 석암사(石岩寺: 봉곡사) 였다.

 

석암산에 있어서 석암사라고 부르지만 원래 봉곡사(鳳谷寺)였다.

 

정약용은 <서암강학기(西巖講學記)>에서 봉곡사는 온양의 서쪽에 있는데 남쪽은 광덕산이요 서쪽은 천방산이다. 산이 높은데다 첩첩이 쌓인 봉우리에 우거진 숲, 깊은 골짜기가 그윽하고 오묘해서 구경할만했다"라고 적고 있다  

 

 

 

정약용이 눈 덮힌 봉곡사에 도착한 것은 1795년 (정조19년) 음력 10월 26일 이었다

이튿날 예순살에 접어든 이삼환이 도착하고 내포지역의 남인학자들이 차례차례 모여들었다. 이명환(이삼환의 아우),이재위(이삼환의 조카), 이광교, 권기, 강이오, 강이인, 강이중(강이인의 재종 동생),이유석, 심로, 오국진, 등으로 모두 열세명이 모였다.  

 

 

▲ 봉곡사 만공탑 ⓒ 2007. 한국의산천  

 

강학회는 11월 5일까지 열흘동안 계속되었는데, 참석자들은 새벽마다 개울로 나가서 얼음물로 씻고 양치질을 했다. 저녁이 되면 산등성이를 산보하며 주변경치를 감상했다.

 

정약용은 윤진사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 때마침 첫눈이 내려서 서남쪽 봉우리들이 우뚝 솟아 빼어나게 높고 엄숙해 석양을 우러러보니 마음이 황홀해서 북계(北溪)를 달려 올라갔습니다"라고 회고했다  <북계 윤취협 진사에게 보낸 편지>  

 

 

▲ 봉곡사 만공탑 ⓒ 2007. 한국의산천   

 

이 절에는 만공스님이 계셨다. 저 유명한 수덕사의 만공스님이 이곳에서 득도를 하셨다고 한다. 그 짐작을 할 수 있는 것이 만공탑이다.

주차장 위에 바로 서 있는 만공탑. 진리는 두루 원만하여 모든 것에 다 통하던가! 짐작이 가나 가늠할 수 없는 만공탑. 가득찬 것이면서도 빈 것이라 하던가! 또한 짐작이 가나 그 뜻의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만공. 절은 아담하다.  절입구의 송림길과 탱화와 만공탑이 유명한 곳이다.   

 

세계일화(世界一花)는 만공스님의 친필이라 전한다.  세상은 하나의 예쁜 꽃?
 

 

▲ 만공탑 안내문 ⓒ 2007.한국의산천

 

낮에는 성호의 유고를 정리하고 밤에는 학문에 대해 강론했는데, 이삼환이 좌장으로 질문하면 다른 선비들이 답하고 다른 선비가 모르는 것을 물으면 이삼환이 설명하는 형식이었다. 성호의 많은 저서중 <가례질서(家禮疾書)>를 표준으로 삼아 이삼환이 교정을 보고 디른 선비들이 이를 베꼈다. 정약용은 이때의 일에 대해 이렇게 기록했다.

 

오늘날 여기 모였던 선생의 문하가 이 절문을 나가 한번 흩어져 각자 집으로 돌아가서는 막연히 잊어버리는 지경에 이르고.....혹은 선가(禪家)나 도가(道家)의 교리를 가지고 참된 길이라고 가르침으로써 여기 동요되어 스스로 게을러지거나 현혹되어 성호의 학문을 돌아보지 않는다면, 식견과 취향이 거칠어 징뿐 아니라 도리어 진취에 방해가 될 것이다. 마침내는 본원(本源)이 혼탁하여 점차 밝음을 잃고 끝내는 유용한 학문이 성취되지 못하여 요순의 경지에 들어가게 어렵게 될것이니어찌 주자(朱子)의 무리가 될 수 있겠으며, 또한 성호의 후학이 될 수 있겠는가. 책을 베끼는 여가와 이와 같이 서로 경계하고, 마침내 그 뜻을 말하고 그 일을 읊어서 각기 아래와 같이 시를 짓는다. <봉곡사시서문>

     

 

 

▲ 봉곡사 삼성각 ⓒ 2007. 한국의산천  

 

정약용이 굳이 주자를 강조한것은 천주교 신자라는 혐의로 사실상 유배(좌천)온데 대한 자기 방어였다. 이때 모인 선비들이 시를 지었다.  

 

 

비 내리는 옛절에 밤은 깊은데 

 

산 구름 첩첩하고 땅 또한 궁벽하네 

 

술잔 기울이며 열흘동안 모여서 

 

기름 부어가며 새벽까지 불 밝혔네 -이삼환-

 

 

▲ 봉곡사 요사체 벽면 ⓒ 2007. 한국의산천  

 

선비들이 절에 모여서

 

성호의 남긴 글 교정했네

 

천질은 사람마다 있는 것

 

밤마다 지세워 유학을 담론했네

 

좋은 인연으로 금정에 와서 

 

좋은 가르침 목재(이삼환)께 들었네

 

절의 부처는 풍경 소리 남겨주고

 

산신은 흰구름 남겨왔네    -이광교 -  

 

 

 

▲ 봉곡사 대웅전 ⓒ 2007. 한국의산천  

 

도의 타락하니 세월의 흉흉함을 한탄하다가

 

저녁나절 벗을 맞아 노경에 기뻐하네

 

교서하는 보람은 벗과 잠 못자는 일이나

 

책궤를 지고 이 고생 달게 여기네

 

아직도 명적(冥謫)을 편안히 여겨

 

헛되이 몸단장 하려 드네

 

힘썼음이여! 여러 친구들

 

교정으로 조석을 보냈네.   -정약용 -

 

 

 

▲ 봉곡사 향각전 ⓒ 2007. 한국의산천  

 

천진암 주어사 강학회(1979) 이래 16년만의 성대한 학회였다. 마지막으로 이 삼환이 의의를 정리했다.

 

성호가 80년 동안 도학을 강론하신 저서가 집에 가득하다. 천인(天人), 성명)性命)의 분변과 정도(正道)를 붙들고 사교를 물리친 말씀과 극기복례하여 인을 행하는 가르침은 땅을 지고 바다를 담는 경지였다. 또 육경과 사서등의 서적에 모두 질서를 저술해서 고금의 성현들의 은미한 말씀과 심오한 뜻을 다시 찬란학 밝혀 털끝만큼도 유감이 없게 하였으니 더 할 수 없이 위대하다.

그러나 그 편질이 너무 많고 아직 탈고를 못했는데 그 당시 선생의 문하에서 수학한 분들은 모두 떠났고 , 후학들이 학문이 얕아서 끝내 그 책임을 감당 할 수 있는 자가 없었다. 그런데 나의 친구 다산이 마침 은대(銀臺:승정원의 별칭)로 부터 금정의 역승(驛丞) 직임을 맡아 개연이 이 서적의 수정을 자신의 임무로 삼고, 나에게 편지를 보내왔다....

이 모임은 금정에 있었던 다산의 발상으로 이루어졌고, 봉곡사로 모이게 된것도 다산의 뜻이었다. 유교 집회가 불교사원에서 이루어진것도 다산이 아니고는 할 수없는 일아었다. - 봉곡사교서기 -    

 

 

 

 

▲ 봉곡사 요사체 ⓒ 2007. 한국의산천  

 

강학회는 오랫동안 벼르던 보람있는 일이었고 성대하게 마쳤다.

 

 

▲ 봉곡사 현판 ⓒ 2007. 한국의산천  

 

212년전 봉곡사와 다산의 만남.

다산 정약용


엘리트에서 미관말직으로
28세에 과거에 합격하여 벼슬을 시작하고, 정조의 총애를 받으며 33세에는 예문관과 함께 관리들의 선망의 대상인 옥당(玉堂), 즉 홍문관의 교리 및 수찬벼슬에 올라 남들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는다. 뒤이어 경기도 암행어사와 홍문관 부교리에 올랐으며 화성 축조공사가 시작되는 시기에 맞춰 거중기를 발명했다.
이어 정조 19년(1795) 그는 34세의 나이로 벼슬의 꽃인 정3품 당상관 동부승지에 오르며 엘리트 관료로서 승승장구하였다.

하지만 그 해 4월 중국인 신부 주문모(周文謀)가 밀입국하여 북악산 아래에서 천주교를 선교하다가 발각되는 사건이 발생하자 천주교신자들을 공격하는 서용보 · 이기경 · 홍낙안 등 공서파(攻西派)의 모함을 받아 7월에는 종6품의 충청도 홍주목 소재 금정도찰방(金井道察訪)으로 좌천당했다. 품계가 한꺼번에 6등급이나 강등되는 수모를 겪고서 잘 나가는 중앙의 고위관료에서 한미한 지방의 한직으로 �겨간 것이다.

금정에 이른 다산은 참으로 정성스럽게 그 조그만 지역의 역무(驛務)에 충실히 근무하면서 그 지방에 번성하던 천주교 신자들을 설득하여 제사를 지내고 시집가고 장가드는 일에도 열중하도록 타일러 많은 효과를 보기도 했다.
한편으로는 세력을 잃고 선비의 도(道)나 지키며 학문에나 일삼던 그곳 내포(內浦) 일대의 남인고가(南人古家) 후예들과 접촉하면서 시를 짓고 글을 읽으며 세상을 보냈다.

단지 한 때 천주교에 관심을 두었다는 것 때문에 반대파로부터 모함을 받아 관직 품계가 여섯 계단이나 떨어져 지방의 한직으로 좌천되고서도 슬퍼하거나 남을 원망하지 않고 오히려 학문에 전념하여 거대한 다산학의 시원이라 할 수 있는 성호 이익의 유고를 정리하였다.

 

열틴 토론으로 학문 연구를 하던 선현들이 떠난 봉곡사는 다시 조용한 조그만 사찰로 돌아와 봄을 맞으려 봄단장을 하고 있었다.- 2007. 4. 1일 한국의산천 -

 

 

▲ 봉곡사 요사체 ⓒ 2007. 한국의산천  

 

 

▲ 봉곡사 대웅전 ⓒ 2007. 한국의산천  

 

당대의 남인 학자들이 모여 성호학을 강론했던 봉곡사, 이제는 다산의 흔적은 찾아 볼 수도 없고 화사한 목련이 막 피기시작하고 있었다.

 

천주교 때문에 다산이 겪어야 했던 순탄치 않았던 벼슬생활(결국은 천주교를 접었지만), 일가,친척, 친구들의 죽음 그리고 18년의 유배생활과 17년의 미복권의 굴곡의 삶이 역설적이게도 그를 오늘의 위대한 학자로 추앙받게 하고 있다는 사실 앞에서 역경 속에서도 정도를 포기하지 않는 한 인간에게 역사는 결코 배신하지 않는다는 교훈을 새삼 반추하게 된다. 

 

그 당시 주 학문이던 성리학, 주자학, 유학등 관념적이고 이론적인 학설에 정면 대응하고 나서서 정치, 경제등 실제 생활에 필요한 학설을 주장하신 실학의 대가.

이 당시 실학을 주장한다는 것은 목숨을 포기하는 행위와 다름 없었지만 극진한 정조의 사랑으로 잠시 자리보전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얼마지 않아 끝없는 귀향살이로 이어지게 된다.  

강진으로의 유배지 풍경

형 약전과 함께 유배길에 올라 1801년 음력 11월 하순의 추운 겨울 날, 유배지 강진읍에 도착하자 먼 길을 걸어온 유배객을 기다리는 것은 매서운 겨울바람과 백성들의 차가운 시선이었다. 큰 독소로 여기고 가는 곳마다 문을 부수고 담장을 무너뜨리며 상대조차 해주지 않았다. 


강진읍 동문 밖 주막의 노파가 내준 허름한 방 하나에 겨우 거처를 정한 다산은 억울한 유배의 억눌린 심정을 잊고 이제야 학문에 전념할 시간을 갖게 되었다고 기뻐하였다. 이에 다산은 누추한 주막의 뒷방을 '사의재'라 이름하고 방대한 육경사서에 대한 저서의 시작으로 <예기> 연구에 열중한다.

사의재(四宜齋)

생각은 마땅히 맑아야 하며, 용모는 마땅히 엄숙해야하며, 언어는 마땅히 과묵해야 하며 동작은 마땅히 후중하게 해야 하니 이런 때문에 그 발의 이름을 ‘ 네가지를 마땅하게 해야 할 방 ’이라고 하였다


생각은 마땅히 맑아야 하니 맑지 못함이 있다면 곧바로 맑게 해야 한다.
용모는 마땅히 엄숙해야 하니 엄숙하지 못함이 있으면 곧바로 엄숙하게 해야 한다.
언어는 마땅히 과묵해야 하니 말이 많다면 곧바로 그치도록 해야 한다.
동작은 마땅히 厚重하게 해야 하니 후중하지 못하면 곧바로 더디게 해야 한다.


위의 전체 내용중 일부는 이덕일 著 <정약용과 그의 형제들(김영사 간행 )> 중의 내용을 참고 하였습니다.

 

우리나라 위인중 존경하는 분 정약용(, 1762~1836)님.  방대한 저술 한가지만으로도 존경스러운 분이다. 

 

 

 

 

▲ 말없는 스승. 책.ⓒ 한국의산천

 

 

▲ 돌아오는 길 봉곡사에서 가까운 외암리 마을에 가득 핀 봄꽃 ⓒ 2007. 한국의산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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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곡사 가는 길

서해안 고속도로 - 아산 - 온양 온천역 - 공주방향 39번 국도 - 유구방면 - 데이콤 기지국,송악 외암마을 앞을 지나 - 송악 저수지 - 송악 저수지 휴계소를 지나 약 300m 가면 봉곡사로 들어가는 이정표(우회전) - 500m 더 가서 좌회전 - 마을을 지나 봉곡사 주차장. 주차장에서 봉곡사 까지 300m

 

경부고속도로 천안나들목→21번 국도 아산(온양) 방면→삼성전자 신도리코를 끼고 좌회전→구온양 사거리에서 39번 국도→외암리 민속마을→강당골.

서해안고속도로 서평택나들목→아산호→ 39번 국도→외암리 민속마을→강당골.

서울역→온양온천역(1시간 30분). 서울강남터미널→아산.

 

온천의 고장으로 잘 알려진 아산시는 서울에서 기차, 고속버스 등 대중교통이나 자동차로 2시간 안에 쉽게 접근할 수 있다. 이순신 장군의 영정을 모신 현충사(544-2161)를 비롯해 맹사성고택(546-3027), 100여년의 역사가 깊은 공세리성당(533-8181), 우리나라에서 가장 규모가 큰 민속자료관인 온양민속박물관(542-6001), 봉곡사, 연꽃이 아름다운 전통사찰 인취사와 세심사, 보문사 등 전통문화의 향기를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지역번호 (041).

 

쉴 곳

온양온천·아산온천·도고온천 등 온천지역에 호텔과 여관들이 몰려 있다. 특히 동양 4대 유황온천 중의 하나로 꼽히는 도고온천의 파라다이스호텔(542-6031)에서는 7월15일부터 8월15일까지 국내 유일하게 3천평 규모의 온천수영장을 개장해 일반인들도 온천수 수영을 즐길 수 있다. 또 외암리 민속마을에서는 팜스테이(544-8290, 543-3967)를 할 수 있다.

 

먹거리

강당골에는 강당골휴게소(543-4407)가 소문난 닭백숙 전문식당이다. 외암리 민속마을 입구에 도토리묵과 잔치국수 등을 파는 식당들과 민속마을 내에 청국장과 된장찌개, 김치전 등을 파는 집들이 더러 있다. 염치읍 방현리의 방수마을(544-3501~4)은 재래식으로 직접 담근 된장·간장과 각종 장아찌 등 토속 밑반찬을 내는 한정식집이다. 송악면 강장리 오형제고개에 향토길 추어탕(544-2118)은 일반 미꾸라지보다 더 크고 살이 많은 동굴이라는 미꾸라지로 추어탕을 끓여낸다.

 

특산물

외암리 민속마을에서 연꽃잎으로 담은 지방무형문화재 민속주인 연엽주(543-3967), 탕정포도로 담은 포도주(산골농원 54-8944) 등을 살 수 있다.

 

주변 관광지

세계 유명 꽃과 식물 1천여 종을 모은 실내 식물원인 세계꽃식물원(www.asangarden.com. 544-0746~8)에서는 요즘 연꽃과 백합, 타이꽃인 쿠르크마 등이 활짝 핀 모습을 볼 수 있다. 영인산 자연휴양림(540-2479)에서는 삼림욕과 수영, 등산은 물론 통나무집에서 숙박도 할 수 있다.

 

문의

아산시청 문화관광과(www.asan.go.kr. 540-2468), 외암민속마을(www.oeam maul.co.kr. 544-82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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