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창시절 시험준비중 많이 외었던 문제, 성호 이익선생의 '성호사설'
휴일을 맞아 처갓집(안산 상록수 감자골)에 가면서 잠시 들러본 성호 기념관
성호 기념관을 찾아서 [2006.2. 26. 일요일]
ⓒ2006 한국의산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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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학이란 무엇인가?
실학은 허학의 대립되는 말인가?
그럼 그 시대에 널리 퍼져있는 유교적인 성리학 퇴계학 공자 맹자 등등의 학문을 허학이라고 말하는것인가?
글쎄
아무튼 지극히 형이상학적이고 관념적인 학문에 반하여 정치 경제 교육등 사회 전반에 걸친 실제로 실생활에 적응시키며 이로운 학문이 실학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당시 주 학문이던 성리학, 주자학, 유학등 관념적이고 이론적인 학설에 정면 대응하고 나서서 정치, 경제등 실제 생활에 필요한 학설을 주장한다는것은 목숨을 포기하는 행위와 같다고 할 정도로 압박과 반대가 심했던 학문이지요.
실학의 대가 성호(星湖) 이익(李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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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호 기념관 내부에는 많은 유품들이 전시되어있다. ⓒ2006 한국의산천
실학의 대가 이익선생은 평안도 운산에서 1681년(숙종7년)부친 이하진(李夏鎭)이 유배길에 운산에 와 있을때 태어났다. 이익 선생은 그가 평생토록 떠나지 않고 거주하며 학문의 커다란 업적을이룰 수 있었던 경기도 안산군 첨성리(瞻星里:지금의안산시 상록구 일동)라는 지명에서 '星(성)'자를 따라 그의 호를 지었다.
이익선생은 1705년(숙종 31년) 증광문과(增光文科)를보았으나 낙방하고 이듬해 형 잠(潛)이 당쟁으로 희생되자 벼슬을 단념하고 안산 첨성촌(지금의 안산시 상록구 일동)에 머물며 일생을 학문에 전념하였다. 유형원의 학풍을 계승하여 실학자의 중조(中祖)가 되었으며 그의 학풍은 그후 안정복, 이가환, 이중환, 정약용 등에게 계승되었다.
이익선생은 학문을 깊이 연구하는 데에만 몰두하여 천문, 지리, 의학, 재정지방제도, 과거제도,학제, 병제, 관제 등 현실적인 문제에 비판과 이상 및 사상을 널리 써놓은 성호사설(星湖僿說)을 비롯한 곽우록(藿憂錄), 성호문집(星湖文集)을 남겼으며 조정에서는 선생이 돌아가신 후에학덕을 높이 평가하여 이조판서에 추서하였다. 이익선생은 1763년(영조 39년)에 83세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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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 후기 실학의 대가 성호(星湖) 이익(1681∼1763)의 묘소( 경기 안산시 일동 555 ) ⓒ2006 한국의산천
그의 묘소는 수원.인천간 산업도로가 바라보이는 구릉상에 위치하고 있는데 묘소의 석물로는묘비(墓碑)와 상석(床石), 향로석(香爐石), 망주석(望柱石)이 있다. 봉분의 규모는 600×550×220cm이다. 묘비의 재질은 오석(烏石)이며 전면에는 "星湖先生李公諱瀷之墓 贈 貞夫人 高靈申氏左 贈 貞夫人 酒川睦氏右"라 새겨져 있다.子坐午向 으로묘소로 오르는 길은 계단이 설치되어 있으며 무덤 앞에 안내판이 있다. 묘소 우측에는 사당이 있다.
부친의 귀양지에서 태어나 이듬해 부친을 여의고, 형 이잠에게 글을 배웠으나 형마저 당쟁으로 희생되었다. 이에 벼슬에 뜻을 버리고 오직 학문 연구와 후진 양성에만 몰두하여 실학의 대가가 되었다. 실학파의 시조 유형원의 학풍을 계승하여 현실적인 문제에 대해 비판적인 태도로 고찰하고 그에 대한 개혁안을 제시하였다. 그는 대표적 저서'성호사설'을 통해 정치·지방제도·재정·경제·과거제도·학제·병제·관제 등을 날카롭게 비판하고 대안을 피력하였다.
선생의 묘는 직계 후손이 없어 잘 돌봐지지 않았으나 1967년 5월 성호이익추모회에 의해 묘역이 정비되고 묘비와 향로석·망주석 등이 새로이 세워졌다.
성호사설 [星湖僿說]
성호사설이란 평소에 기록해 둔 글과 제자들의 질문에 답한 내용을 1740년경에 집안 조카들이 정리한 것으로, 30권 30책의 규장각 소장본 등 여러 필사본으로 전해오다가 수차례 영인본으로 간행되었고 민족문화추진회에 의해 한글 완역본도 간행되었다. 주제에 따라 다섯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다.
223항으로 구성된 <천지문(天地門)>은 천문과 자연과학, 자연지리 및 역사지리에 대한 내용이고, 368항의 <만물문(萬物門)>은 의식주의 생활 문제와 화초·화폐·도량형·기구 등을 수록하였다. <인사문(人事門)>은 인간의 사회생활과 학문에 대한 내용을 담았는데, 정치·경제·인물·사건·사상에 대한 990항목이 실려 있다. <경사문(經史門)>은 유교와 역사에 대한 1,048항목이, <시문문(詩文門)>에는 중국과 조선의 시와 문장에 대한 비평 378항목이 실려 있다. 형식적 특징은 백과전서적인 포괄적 구성에 있다.
학문의 방향을 넓게 잡아 세계와 사회를 총체적이고 구체적으로 인식하려는 문제의식을 반영하는 것으로서, 이수광(李晬 光)의 선구적 저술인 '지봉유설(芝峰類說)'을 이어받았다. 내용의 중심은 경학과 경세에 두었다. 저자는 공자·맹자 당시의 원시 유교의 학문으로 돌아가 요순의 도와 삼대(三代)의 정치를 현실에 되살려야 한다고 주장하였는데, 이것 자체가 점점 주희[朱子]의 저술에 속박되어 가던 당시 조선의 사상계에서 개혁성을 지니는 입장이었다.
내용상의 특징이자 저자 학문의 정수인 사회개혁에 대한 폭넓은 주장들은 대개 <인사문>에 담겨 있다. 거기서 저자는 왕도정치를 원론적으로 추구하는 데 그치지 않고 붕당(朋黨)간의 정쟁으로 특징지어지는 정치현실을 통렬히 비판하였다. 예를 들어 당시 붕당들이 절대적인 것으로 내세우는 정쟁의 명분에 대해서는 “스스로 국시라고 주창하는 것이 결국 나라를 망치는 논의이다”라고 지적하였다.
과거제의 문제점을 지적하여 개혁을 주장하고 천거제를 강조하였으며, 정부 조직 최상부에 있는 비변사를 폐지하자는 것으로부터 지방 군현의 재편에 이르는 광범위한 제도개혁을 주장하였다. 당시 소농민의 생활을 궁핍하게 하던 화폐제를 폐지하고 상평창을 부활할 것, 서얼차별의 폐지와 노비제도의 개선, 혼인이나 상례 관습에 대한 개혁안 등 저자의 주장은 일일이 열거할 수가 없다.
또한 서양의 과학기술이 매우 정교함을 인정하고 적극 수용하려고 한 입장도 당시로서는 큰 의미를 지니는 것이었다. 처음부터 계획된 저술이 아니므로 체계적이 못되고 화폐의 폐지와 같은 시대적 흐름을 잘못 읽은 주장도 포함되어 있지만, 앞 시기의 실학적 성과를 집대성하여 후배들에게 전파하는 호수의 구실을 하였다는 저자 학문의 중심이 되는 저술이다.
▲ 성호공원 ⓒ2006 한국의산천
○ 우리나라의 실학을 주장했던 대표적 실학자
1. 이수광
조선 중기의 문신, 실학의 선구자. 여러 차례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오면서 새로운 문화에 대한 관심을 가졌다. 그가 1614년에 완성한 '지봉유설'은 전 20권의 백과 사전이다. 이 책은 중국과 우리 나라의 역사와 문화를 비교하면서 우리 나라가 중국과 동등한 역사와 문화의 전통을 가지고 있음을 자세히 밝혔다. 그리고 다른 문화권을 소개하면서 천주교 교리를 설명한 마테오 리치의 '천주실의'를 우리 나라에 처음 소개하기도 했다.
2. 유형원
조선 후기의 실학자. 정치, 경제, 군사 등 다양한 분야에 관심을 기울여 국가 체제 전반에 대한 개혁안을 제시하고 사실을 중시하는 학문 태도를 주장하여 조선 후기 실학 발전의 토대를 쌓은 인물이다. 그가 지은 '반계수록'에는 토지 제도, 조세 제도, 교육 제도, 과거 제도, 관리 임용 제도, 군사 제도 등 다방면에 걸친 개혁안이 담겨 있었다. 특히 농민들에게 땅을 고루 나누어 주자는 균전제는 이후 실학자들의 토지 제도 개혁안의 출발점이 되었다.
3. 이익
조선 후기의 실학자. 유형원의 학풍을 이어 실학의 대가가 되었으며, 정약용을 비롯한 후대 실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이익은 경제, 제도, 군사, 천문, 지리, 역사, 풍속 등 광범한 분야에서 학문을 깊이 연구하여 많은 업적을 남겼다.
노비 제도, 과거 제도, 양반 문벌 제도, 미신, 승려, 게으름을 국가 발전을 해치는 6가지 원인이라고 말했으며, 농업을 향상시키고 농민을 보호하자고 주장하였다.
4. 박제가
조선 후기의 실학자. 네 차례에 걸쳐 청나라를 방문하여 그 곳 학자들과 학문을 교류하면서 청나라의 문물을 수입하는 데 앞장을 섰으며, 북학파(청나라에서 발달한 실용적인 학문을 북학이라 불렀는데 이를 따르자고 주장한 실학자들)의 사상을 집대성했다. 1778년에 청나라에 다녀온 후, 청나라에서 경험한 것을 '북학의'라는 책을 펴냈다.
이 책에는 정치, 사회 제도의 모순점과 개혁 방안뿐만 아니라 생활 도구의 개선 등을 다루었다. 1786년에는 당시 임금인 정조에게 신분 차별을 없애고 청나라의 선진 문물을 받아들여 상공업을 일으킴으로써 나라를 부강하게 하고 백성들의 생활을 향상시켜야 한다는 내용의 글을 올렸다.
5. 정약용
조선 후기의 실학자. 유형원과 이익의 학문과 사상을 이어 조선 후기의 실학을 집대성하였다. 정약용은 학문을 하는 데 이론과 실천을 함께 갖출 것을 항상 강조하였다. 그래서 우주와 인간 본성에 대한 탐구와 구체적인 사회 개혁의 추구가 동시에 이루어져야 한다고 보았다.
그는'경세유표'를 통해서 당시 사회의 전반적인 개혁을 위한 원칙을 내놓았고, '목민심서'와 '흠흠신서' 를 통해서는 백성들에게 해를 끼치는 지방 수령이나 향리들의 부정 부패를 비판하고 올바른 지방 관리의 행동 지침을 제시하였다. 1792년에는 수원 화성을 쌓는데 수레와 거중기를 직접 제작하여 성을 쌓는 비용을 크게 줄이기도 하였다.
▲ 성호공원안에는 안산식물원이 있으며 드넓은 자연녹지 공간이다. ⓒ2006 한국의산천
○ 찾아가는 길
수인산업도로 안산 IC에서 나가서 일동방향(안산시내방향 반대쪽)
기념관입장료:어른 500원, 청소년 300원, 어린이 200원. (단체 30인 이상은 할인, 100인 이상은 무료)
○ 인근 둘러볼 곳
노적봉 인공폭포, 심훈의 소설 상록수의 주인공 최용신의 묘, 시화호 갈대생태공원, 남이 장군묘, 시흥 관곡지, 대부도 ,제부도, 오이도, 월곳.
참고
실학의 대가를 찾아서
▲ 반계 유형원 선생 유허지에서 내려본 곰소만 ⓒ2006 한국의산천
실학의 선구자 유형원(효종,현종1622~1673)님. 성호 이익, 다산 정약용과 더불어 실학에 있어 빠뜨릴 수 없는 실학의 아버지
저서로는 토지, 군대 및 국정 전반에 관한 문제를 서술한 '반계수록'(전26권)이 있으며 이것은 훗날 실학사에 큰 영향을 주었다. 생가 터는 지리학상으로 명당으로 손꼽히는 명당터이다.
반계 유형원 유허지
▲ 능내리에 위치한 다산 정약용 생가 ⓒ2006 한국의산천
여행과 山行은 갈망되고 이어 준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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